[孫周恒씨의 글] "괘씸罪와 勇將 韓信"
제 아무리 밝은 눈으로 六法全書를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괘씸罪란 罪目은 없다. 따라서 이를 처벌하는 罪條文도 물론 없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權力者와 돈 가진 猝富의 괘씸罪에 휘감겨서 悲慘하고 冷酷하게 屠殺 당한 유능한 사람은 하늘에 별 만큼이나 많다. 東醫寶鑑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읽어보아도 돈毒이라는 病名도 없고 이를 처방하는 치유약은 없다 그러나 古今을 통하여 돈毒에 걸려서 더럽고 불쌍하게 죽어간 사람은 냇가에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을 아무도 否認 못하리라.
2천년전 史記에는 漢나라 劉邦과 韓信과의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하고도 一喜一悲의 분통어린 이야기는 지금 같은 春秋戰亂이 무색한 불확실 混迷時代에 사는 우리에게 매섭고 가슴 저리는 敎訓이 아닐 수 없다.漢帝國은 紀元前206년부터 紀元 220년까지 장장 400년 동안 廣闊한 中原땅을 통째로 支配하고, 萬古不朽의 漢文 漢字文化를 만들어 세우고 비치는 漢民族 金字塔을 세웠으며 文武를 같이 뿌리내리게 한 東洋史上 엄청나게 큰 업적을 남긴 강국이었다. 漢나라 개국 始祖인 劉邦은 자타공인하는 智略家이면서 眼目이 있어서 많은 良臣 勇將들을 휘하에 거닐고 統率한 大器로 알려져 있다.
그가 天下平定을 꾀하는 동안 인접한 列强과 전쟁을 계속하면서 宰相은 蕭何를, 參謀長은 張良, 野戰司令官에 韓信을, 遊擊軍團長에 彭越을, 謀事策略의 軍師에 陳平 등의 他의 追從不許인 綺羅星 같은 큰 재목들을 適材適所에 배치하니 列國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이게 하여 楚나라 力拔山 項羽를 멸망케하고 大漢帝國의 高祖로서 後世萬代에 찬란한 芳名을 남게 하였다.
史記에는 몇 번이고 漢의 開國功臣에서 으뜸으로 손끕히는 勇將은 韓信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韓信은 漢나라의 英雄으로 오랫동안 推仰 받고 功勳을 인정 받는 것이 事必歸正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정반대로 韓信은 그 출중한 재간과 능력, 秀麗한 容貌 智略이 뛰어났지만 그 돋보이는 색깔과 一等勇猛스러운 忠誠心에 주위에서는 猜忌와 질투가 컸다. 따라서 많은 奸臣들의 謀陷과 中傷으로 당시의 萬古忠臣 韓信은 大逆賊 罪人의 陋名을 쓰고 悲慘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비록 한신은 이렇게 짧은 생애를 종말지었지만 後世에 많은 敎訓과 생각을 남겨주었다.
韓信이 힘이 넘치는 아주 젊은 시절에는 一當百의 壯漢이었지만, 거리의 不良輩들로부터 터무니없는 是非를 받고 그들과 맏서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가진 受侮와 아픔을 참고 참으면서 破落戶들의 다리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風貌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2에도 이 사실을 美談으로 쓰고 있다. 또 韓信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背水陣法은 현대인에게도 龜鑑이되는 兵法임을 알고 있는 사실이다.
趙나라의 20만 大軍과 맞서 싸우게된 韓信將軍의 統率하는 한나라 병력은 불과 1만명 내외였다. 韓信은 이 전투에서 漢나라 병사들이 한발자국도 後退할 수 없는 막바지 背水陣地에 趙軍과 최후의 決戰을 하게 하였다. 후퇴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막다른 이 陣法이 요감하게 적과 사울 수밖에 없는 藥處方으로 병사를 최후 일순까지 死力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우게 한 결과로 趙軍은 大敗하였고 漢나라는 大勝을 거두었다.
이 전쟁을 後世사람들은 韓信名將의 『背水戰法』으로 이름하고 鬼神이 놀라는 智謀와 이 精神에 높은 評價를 하고 있다. 당시 이 痛快無比한 漢의 大勝으로 主君 劉邦은 漢帝國의 基礎를 튼튼한 盤石위에 올려놓았으나, 百姓으로부터는 韓信將軍이 열열한 歡迎과 贊同을 받고 凱旋의 榮光을 한 몸에 안았다. 이 전쟁의 결과는 후일 韓信將軍이 劉邦으로부터 千秋의 恨이 서리는 죽음을 앞당겨 맞이하게 되었다.
韓信은 天下無敵의 將帥로 楚나라 項羽와의 龍虎相搏인 天下制覇의 마지막 전쟁에서 神出鬼沒한 兵法으로 項羽를 죽게한다. 그 은덕으로 劉邦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너무나 수월하게 中原天地를 얻게된다. 이러고 보니 漢나라 百姓들의 絶對的인 衝天되는 人氣는 劉邦이 아닌 韓信에게 쏠리고 脚光을 받게되며 追從勢力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 사실에 놀라움과 不安焦燥하게 생각하는 것은 漢高祖 劉邦이었다. 韓信을 감시하고 警戒의 고리를 늦추지 아니함은 물론 除去肅淸의 名分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이 때에 韓信이 奸計에 能하고 9段짜리 妙法 잔재주꾼으로 二重人格을 가지고, 3牌 娼妓처럼 劉邦의 비위를 마추고, 있는 힘을 아끼면서 戰功을 송두리째 主君 劉邦에게 넘겨주고, 어리석고 天痴인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면, 三族滅門의 禍도 입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悲慘한 屠殺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韓信은 바로 또 이어서 우직스럽게도 破竹之勢로 山東省에 있는 齊나라를 공격하여 平靜 征伐하고 자기 스스로를 帝王이라 브르게 하였다. 이 얼마나 韓信의 輕率하고도 짧은 생각이 였는가? 이 荒唐한 輕擧妄動으로 漢高祖는 大怒하였고 韓信을 무서워 하면서 虎視眈眈 그를 拔本塞源 完全除去를 臣下들과 熟議하게 된다. 이 때만해도 韓信이 先見之明의 慧眼이 있었다면 正正堂堂하게 漢高祖와 맞서 싸워서 決判을 얻었든지, 아니면 訣別하여 새나라를 세우자고 勸한 많은 韓信 麾下의 良臣들 말을 受諾하였으면 후일 劉邦으로 부터 죽음은 免하였을 것 이다.
韓信은 오히려 내 恩人인 劉邦을 어찌 背信 謀反할 수 있는가 하고 道德君子같은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數年後 漢高祖 劉邦은 漢王朝를 開國宣布하고 나라세운 忠臣들의 論功行賞의 國慶日 바로 그 날에 天下開國 一等功臣 韓信을 逆賊 首魁로 獄에 가두고 그의 妻子는 물론이고 三族을 송두리째 목을 처서 죽여버리고는 榜을 붙여 韓信의 목을 매달아 버렸 다.
끝으로, 괘씸罪에 씌워서 죽은 韓信將軍의 史話는 이것으로 매듭하면서 光復後 50餘年에 걸친 이 나라 政治版에서 陰謀와 奸計, 그리고 상식을 超越한 破廉恥스러운 變節을 恒飯事로 해온 사람이 天下를 號令하며 삼족이 편안해지고 好衣好食하지만, 一片丹心 志操를 생명으로 알고 人情과 原則만 따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韓信같은 類의 사람은 이 塵世에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또 하나의 原理를 史記에서 배웠다.
지금같이 亂世에는 權匪와 손잡고 잔재주에 能한 자만이 살아 남는 단 말인가? 비록 괘씸罪에 몰려 同耕不同食 (밭은 같이 갈았지만 같이 먹지는 못한다)의 처지에서 野骨로 입다물고 있을지언정 韓信將軍같은 사람이 별만큼 많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