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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불곡(死後不哭)
내가 죽거든 울지 말라는 유언으로 조선 중기의 시인 임제(林悌)의 말이다.
死 : 죽을 사(歹/2)
後 : 뒤 후(彳/6)
不 : 아닐 불(一/3)
哭 : 울 곡(口/7)
'사후(死後)'란 죽은 뒤라는 의미고, '불곡(不哭)'은 곡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내가 죽거든 울지 말라는 유언으로 '백호집(白湖集)'에 전한다.
임제(林悌)는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호는 백호(白湖)다.
백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백가(百家)의 시를 하루에 천 마디씩 외우고 문장도 탁월하여 독보(獨寶)라고 일컬었다. 시재(詩才)가 놀랄 정도로 뛰어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백호를 일러 기남아(奇男兒)라고 칭찬하였다.
백호는 명산대천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었다. 그는 말을 토하면 그대로 시가 되고, 그냥 하는 말 속에도 시문이 정연하여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가 날마다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던 중 23세에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다. 이때부터 놀고 즐기던 주사에서 벗어나 글공부에 매진하였다.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成運)에게 전해져 그의 사사(師事)를 받았다. 그 후 3년간 학업에 정진하여 중용을 800독이나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1576년 속리산에서 성운과 하직하고 이듬해 1577년(선조10) 알성시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동서(東西) 분당으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몰골이 호방한 그의 성격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자리에서 보니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이 멀어지고 환멸과 절망,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백호는 10년 관직생활 중에 인재 등용의 불합리성을 '우담(優談)' 시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 정신 잃은 사람도 있구나 / 소를 타고 말에 짐을 싣다니/ 능력에 맞춰 부리지 않으면서/ 모진 채찍질만 사정이 없구나!'
백호를 기인이라 하고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며 글은 취하되 멀리했던 때에 서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시조를 한 수 짓고 술을 따랐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었는 다/ 홍안은 어디가고 백골만 묻혔는 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슳어 하노라!'
임지에 도착해 보니 부임 전인데 이미 파직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흐르는 구름 따라 성운마저 세상을 등지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방황하다가 39세에 고향 회진리로 돌아왔다.
재능 있고 호탕했던 백호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예리하여 파당이 벌이는 시대를 끌어안을 수가 없었다.
백호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동녘 바다에는 큰 고래 날뛰고, 서쪽 변방에는 흉악한 멧돼지가 내닫는데'라는 한마디에 큰 고래는 왜구를, 흉악한 멧돼지는 서북쪽의 여진을 염려한 애국심의 토로였다.
10여년의 벼슬생활에서 당파의 무리들이 벌이는 쟁탈에 재능이 억압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는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처자를 불러 놓고 당부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 제각기 황제라 일컫는데, 유독(惟獨) 우리나라만 황제국이 못되었다. 이런 나라에 살다 가는 데 더 산들 무엇 하며, 죽은들 한 할 것이 무엇이냐!'
다시 입을 열어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死後不哭)'을 당부하고는 운명하였다.
길 위의 호남 선비, 백호 임제를 재평가한다
1️⃣
백호 임제(林悌)를 만나러 전남 나주시를 간다. 먼저 가는 곳은 다시면 회진리에 있는 백호문학관이다. 차 안에서 2006년에 쓴 졸저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의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풍류객, 백호 임제'를 다시 읽는다.
39세에 요절한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객 백호 임제(林悌), 그는 35세 때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러 평양으로 가는 길에 명기(名妓) 황진이를 만나러 송도(지금의 개성)을 들렀는데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제는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황진이 묘에 들러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을 올리고 추도시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과 이덕형의 '송도기이(松都記異)'에 수록되어 있다. 이덕형의 '송도기이'에 실린 글이다.
사문(斯文) 임제는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일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송도를 지나다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진이(眞伊)의 묘에 제사 지냈는데, 그 글이 호방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외워지고 있다.
임제는 일찍이 문재(文才)가 있고 협기(俠氣)가 있으며 남을 깔보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침내 예법을 아는 선비들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이 겨우 정랑(正郞)에 이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애석한 일이다.
양반 신분에 천민인 기생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었으니 얼마나 진보적인 로맨티스트인가?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으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일설에는 임제가 황진이 묘에 제를 올렸다고 하여 조정으로부터 파직 당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임제는 1583년부터 1584년까지 평안도 도사를 하였다.
'어우야담'에는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나면서 진이의 묘에 축문을 지어 제사 지냈다가 끝내 비방을 입었다'고 적혀 있다.
로맨티스트 임제의 인생살이는 기생과의 일화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평양기생 한우(寒雨)와의 사랑이다.
한우는 가야금 잘 타고 시에 능한 콧대 높은 평양기생이었다. 그런 한우를 백호는 다음 시를 지어 꼬신다. '북천(北天)이 맑다거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느니 얼어 잘까 하노라.'
여기에서 찬비는 한우(寒雨)의 한글 이름이다. 시에는 혼자 웅크리고 자야 하는 신세가 은근히 표현되고 있다.
백호의 시에 기생 한우도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는 백호에게 정담(情談)을 보낸다. 그리고 이들은 하룻밤을 잤다한다. 일설에 의하면 한우가 백호에게 푹 빠져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백호가 뿌리쳤다 한다.
평안도 도사 시절에 백호는 기생의 죽음을 애도 하는 시를 지었다.
기생의 죽음을 애도하며(妓挽)
其1首
艶艶箕都秀, 雙蛾遠岫微.
곱고 고운 자태가 평양성에서도 빼어나, 두 눈썹이 먼 산처럼 가느다랗지.
不緣花結子, 那有玉鎖圍.
열매 맺을 인연이 없었던 꽃, 옥 같은 허리가 어찌 여위어졌나.
其2首
世事餘粧鏡, 流塵暗舞衣.
세상 자취 화장하던 거울에 남고, 춤추던 옷엔 먼지만 날리네.
春魂托何處, 江柳燕初歸.
꽃다운 넋은 어디로 떠나갔나, 강 버들에 제비는 돌아오건만.
김소월의 시도 이만할까. 그 섬세함이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백호기념관 입구 한 곳에는 무어별 시와 적토마 부조가 있다. 먼저 무어별 시부터 살펴본다.
수줍어서 말 못하고(無語別)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수줍어서 말 못하고 이별이러니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임과 헤어지는 15살 소녀의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시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詩中有畵).
수줍은 15살 아가씨, 겹문이 있는 집 한 채, 배꽃, 달, 흐르는 눈물. 여인의 심리와 자태를 잘 묘사한 이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 규원시(閨怨詩)로 소개되었고, 최근에 연극 무어별에서도 나왔다.
2️⃣
백호문학관 입구의 '무어별' 시 부조 바로 옆에는 '적토마' 부조가 있다. 그 앞에는 설명문이 있다.
이 말의 조각은 백호의 부친인 절도사 진(晉)께서 성인이 된 기념으로 주신 적토마의 형상이다. 백호 선생은 평생 주유천하 할 때나 변새(邊塞) 관직에 있을 때도 애마(愛馬), 거문고, 장검, 옥통소와 함께 하였다.
상설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시물이 2015년에 본 것과 많이 다르다. 2017년 4월에 새로 단장하여 확 바뀐 것이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 백호 임제 '이 사람(有人)''라고 적힌 시이다.
이 시의 원문은 이렇다. '우주 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마음은 어리석어 육운(陸雲)의 병 면하기 어렵고/ 지모는 졸렬하여 원헌(原憲)의 가난도 사양치 않아./ 풍진 속 벼슬살이야 잠깐 동안 굽힘이니/ 강해(江海)의 갈매기와 누가 잘 어울릴까/ 나그네 빈 방에는 밤마다 고향 꿈/ 다호(茶戶)며 어촌으로 옛 이웃들 찾아간다오.'
임제의 내면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시이다. 이윽고 임제의 소설 '화사', '수성지', 원생몽유록'을 소개한 편액을 지나니 '성이현과 작별하며' 시판이 있다.
留別 成而顯
出言世謂狂, 緘口世云癡.
말 뱉으면 세상이 나더러 미치광이라 하고, 입 다물면 세상이 나를 바보라 하네.
所以掉頭去, 豈無知者知.
그래서 고개 저으며 떠나가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가 어찌 없으랴.
백호는 세상과 불화(不和)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임제를 미친 사람(狂人)이라 하고 바보 천치(天癡)라 했다.
임제가 1576년에 지은 '면앙정부(俛仰亭賦)'에도 '남의 비웃음을 사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광인이라 하네'란 글귀가 나온다.
이어서 '임제'라고 적힌 편액을 보았다. 여기에는 '백호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라 일컬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익, 이항복과 신흠의 평도 적혀있다.
허균도 '학산초담'에서 임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임제의 자는 자순(子順)이니 나주인이다. 정축년(1577, 선조 10)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질 않아서 세속과 맞지 않았으므로 불우했고 일찍 죽었다.'
한편, 백호의 외손자 미수 허목은 묘비명에 '당시는 동서분당의 의론이 일어나 선비들은 명예로 다투고 서로 추켜세우고 이끌어 주고 하였다. 그런데 임제는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 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랬다. 임제는 동인, 서인 어느 정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붕당에 비판적인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 낭환집서(蜋丸集序)에 일화가 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하인이 나서서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었다.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고 하였다.
이를 통해 논하건대,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3️⃣
백호문학관에는 백호 임제의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원생몽유록' 부터 살펴본다. 원생몽유록은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역사비극을 현실 – 꿈 – 현실의 형식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주인공 원자허(元子虛)가 꿈속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비분한 마음으로 흥망의 도를 토론하였다는 내용으로, 세조의 왕위찬탈을 소재로 정치권력의 모순을 폭로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백호 임제와 관원(灌園) 박계현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 1575년에 임제는 속리산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주에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나주로 내려와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을 만났다.
한편, 박계현은 1576년에 판서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는데, 6월에 경연에서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면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선조는 즉시 '육신전'을 읽어보고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육신전'을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1일)
이런 상황에서 임제는 1576년에 '몽유(夢遊)' 수법의 소설을 통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정치권력의 모순을 폭로했다.
원자허(생육신 원호를 말함)는 어느 가을밤에 꿈을 꾸었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장사(長沙)의 언덕에서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이 단종을 모시고 모여 앉아 강개시(慷慨詩)를 화답하는데, 복건자(남효온을 말함)와 원자허도 비통한 어조로 시를 읊었다. 이때 무인 유응부가 뛰어들어, 썩은 선비들과는 대사(大事)를 도모할 수 없다고 탄식하며 검무(劍舞)와 함께 비가(悲歌)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다.
백호 임제는 금서(禁書)가 된 생육신(生六臣) 남효온이 쓴 '육신전' 대신 '원생몽유록' 소설로 단종애사를 알림으로써 역사 기억 운동을 펼친 것이다.
다음으로 '화사(花史)'를 살펴본다. 화사는 매화, 모란, 부용 나라의 흥망성쇠를 그린 풍자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역사 서술방식의 하나인 본기체에 의한 편년식으로 서술하고 사신(史臣)의 논평도 곁들였다. '화사'는 1578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에 동서붕당이 더욱 심해졌다.
'수성지(愁城誌)'는 마음을 의인화한 우화소설이다.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극찬했다.
천군(天君)이 다스리는 나라는 신하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시(視), 청(聽), 언(言), 동(動) 등이 제각기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고(前古)의 충신, 의사로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모여 '시름에 쌓인 성(愁城)'을 쌓게 된다.
이들은 충의문, 장렬문, 무고문(無辜門), 별리문(別離門) 등의 네 문을 설치하고 전횡을 일삼던 통치배들에게 울분을 토했는데, 그 세력이 천군에까지 미치자 천군은 위기에 빠진다. 이러자 국양(麴襄: 술의 의인화)이 나서서 수성을 쳐서 천군은 화기가 돌고, 수기(愁氣)는 일소되었다.
'수성지'는 당시의 혼탁한 사회를 배경으로 풍자의 수법으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토로한 소설이다. 천군이 원혼들의 호소를 풀어주지 못하고 무능하게 세월만 보내는 장면은 바로 당대의 정치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이식의 '택당집(澤堂集)'에는 '수성지'의 저작동기가 밝혀져 있다. 임제가 북평사(北評事)에서 서평사(西評事)로 옮겨갈 때에 어사의 앞길을 범한 이유로 탄핵을 받고 나서 지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수성지'는 창작욕이 가장 왕성한 때인 그의 나이 32세에 지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임제는 '원생몽유록'을 환상적인 수법, '화사'와 '수성지'를 의인화 수법으로 지어 조선 조정과 사회를 비판하였다. 따라서 백호 임제는 사회비평가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서옥설(鼠獄說; 재판받는 쥐 이야기)을 읽었다. 2014년에 나주 임씨 절도공파 백호문중에서 발행한 책이다. 이 소설은 쌀을 지키는 창고신(倉神)이 곡식을 다 털어먹은 쥐를 잡아 재판하는 사건을 다룬 우화소설이다.
서옥설은 몸집이 크고 간사한 늙은 쥐가 자기 족속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 벽을 뚫고 들어가 10년간 곡식을 훔쳐 먹다가 창고신에게 들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큰 쥐는 자기가 창고 벽을 뚫기 시작했을 때 복숭아꽃과 버드나무가 도왔다고 둘러댄다. 창고신은 복숭아꽃과 버드나무를 잡아다가 심문한다. 그러나 이들은 무고하다고 항변한다.
이어서 큰 쥐는 고양이와 개, 족제비와 두더지, 여우와 삵, 고슴도치와 수달이 자기를 도왔다고 차례로 진술한다. 창고신은 이들도 잡아다가 심문하였으나 이들 역시 무죄를 주장한다.
간사한 쥐는 이번에는 노루, 토끼, 사슴, 멧돼지, 염소, 원숭이, 코끼리, 곰, 노새, 소와 말, 기린과 사자, 호랑이와 용이 자기를 도왔다고 둘러댄다. 창고신은 이들 짐승들을 가두고 심문하였지만 이들도 무죄라고 항변한다.
화가 난 창고신이 다시 큰 쥐를 심문하니, 큰 쥐는 앞의 동물의 죄상을 일일이 늘어놓더니, 이번에는 반딧불과 수탉, 달팽이와 개미, 소쩍새와 앵무새, 꾀꼬리와 나비, 제비와 개구리, 박쥐와 참새, 까마귀와 까치, 솔개와 올빼미, 거위와 오리, 뱁새와 비둘기, 메추라기와 꿩, 매와 새, 기러기와 고니, 황새와 들오리 갈매기와 백로, 골새와 독수리, 비취와 원앙, 난새와 학, 봉황새와 공작새, 대붕새와 고래가 사주하였다고 차례차례 둘러댔다. 심지어 큰 쥐는 하루살이와 잠자리, 파리와 모기까지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교활한 쥐가 죄과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갖은 술책을 다해 남에게 책임전가를 하자, 창고신은 큰 쥐를 쇠줄로 결박하여 기둥에 거꾸로 매달은 다음 가혹한 형벌을 내리라고 명령한다.
큰 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한 번 모든 새와 짐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어떻게 하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그리하여 큰 쥐는 이 모든 것이 상제의 명령을 받들고 한 것이며 자기는 전혀 죄가 없다고 진술한다.
이 말을 듣고 창고신은 노하여 '이 늙은 도둑놈이 몇 달을 두고 수많은 새와 짐승들을 끌어대며 온갖 악담을 토하다가 종말에는 외람되게 상제까지 사주자로 지목하였으니 이는 대역부도 죄인이라'면서 상제에게 상세히 보고 한다.
이에 상제는 '늙은 쥐의 시체를 네거리에다 내버려 부리가 있는 자, 발톱이 있는 자, 이빨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놈의 고깃살을 후비고 씹어서 그들의 울분을 풀게 할지어다. 가두었던 뭇 새와 뭇 짐승들을 모두 석방하고, 역적의 소굴과 족당은 남김없이 소탕하여 다시 이런 씨종자가 퍼지지 못하게 하라'고 창고신에게 지시했다.
이리하여 늙은 쥐는 처단되고, 억울하게 갇혔던 수많은 짐승들은 풀려났다. 백호 임제는 '태사씨'의 말을 빌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태사씨(太史氏)는 말한다. '불은 당장에 꺼버리지 아니하면 번지는 법이요, 옥사는 결단성이 없이 우유부단하면 번거로워지는 법이다. 만일 창고신이 늙은 쥐의 죄상을 밝게 조사하여 재빨리 처리하였더라면 그 화는 반드시 그렇게까지는 범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간사하고 흉악한 성질을 가진 자들이 어찌 창고를 뚫는 쥐뿐이랴? 아 참! 두려운 일이로다.'
임제는 의인화수법과 풍자적 수법을 훌륭하게 구사하여 사회의 부정부패를 날카롭게 질타했다. 나라의 재산을 챙기고도 창고신의 우유부단함과 무능을 이용하여 자신의 죄과를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간사한 늙은 쥐 같은 당대의 탐관오리들의 죄상을 드러내고 부패상을 까밝혔다.
또한 국방에 무능력한 무관의 상징으로 '호랑이'를, 청백리임을 표방하면서 서민들을 착취하는 문관의 상징으로 '봉황새'를 들어 조선 관료사회의 표리부동함과 부패상을 풍자했다.
이처럼 백호는 사회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5️⃣
나주의 백호문학관에서 '백호와 제주'란 전시물을 보았다. 1577년 9월 문과에 급제한 임제는 11월에 제주목사인 아버지 임진을 만나러 제주도로 갔다.
그는 3개월간 제주에 머물렀는데 '남명소승'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명소승'에는 제주도에 대한 지리, 풍속, 언어, 토산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1578년 3월에 임제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남원에 들렀다. 이때 남원부사 손여성이 임제를 위해 광한루에서 전별잔치를 해주었다. 이 자리에는 송암 양대박, 손곡 이달, 옥봉 백광훈도 참석했다.
광한루 전별연에서는 시회(詩會)도 열렸다. 양대박이 먼저 시를 짓고 이달, 백광훈, 임제가 차운하였다. 이 시집이 바로 '용성광한루주석창수집(龍城廣寒樓酒席唱酬集)'이다.
그러면 양대박의 원운 시부터 감상하자. 7언 율시이다. '신선누각 이 모임은 세상에서 드물 것이니/ 아름다운 시절 청담에다 좋은 시까지/ 은 촛불 환한 곳에 꽃 그림자 옮겨가고/ 옥난간 높은 곳에 달로 자리 바꾸누나./ 평소에 마음껏 마시고 미친 듯 노래 부르던 곳에서/ 오늘 밤 만났다가 작별을 아쉬워하네./ 아득히 먼 길 생각하면 아득한 한 만 생기나니/ 자리 옆의 버들을 꿈에서도 그리워해 보네.'
다음은 손곡 이달의 차운 시이다. 압운은 첫 수는 2,4구의 시(詩), 이(移)이고, 둘째 수는 시(時), 사(思) 이다. '몇 달 동안 집 떠나서 편지도 드물었고/ 가는 봄 애석하여 봄 보내는 시를 짓노라./ 서로 만났다가 동으로 서로 떠나가니/ 방초 우거진 시절 한없는 그리움일세./ 날리는 버들개지 떨어진 꽃 정처 없거늘/ 실컷 노니는 때와 좋은 모임 또한 같은 때라./ 서로 만났다가 동으로 서로 떠나가니/ 방초 우거진 시절 한없는 그리움일세.'
다음은 옥봉 백광훈의 시이다. '남북으로 소식이 끊긴 지 몇 년이런고?/ 술잔 잡고 춘성(春城)에서 다시 이 시를 쓰노라./ 베개머리 물소리에 바람도 은근히 도는데/ 주렴 걷으니 꽃 그림자 달은 갓 옮겼구나./ 취하니 경물은 아스라이 꿈과 같고/ 늙어가니 마음에 맺힌 것도 풀리는 가 싶소./ 이상히 보지 마오, 깊은 밤 다시 일어나 앉은 걸/ 이별에 당해서 어찌 생각하지 않으리오.'
마지막으로 백호 임제가 읊었다. '손님과 주인 즐기는 자리에 속물은 드물어라/ 온 누각에 나만 빼고 시(詩)를 다 잘 하시네./ 난간 앞의 저문 산은 구름이 갓 걷히고/ 맑은 햇빛 사람 밀어 자리 자주 옮기누나./ 반은 깨고 반은 취해 밤이 이슥한 뒤요/ 만나자 이별이라 꽃 지는 시절이네./ 다리 가의 능수버들 연기 엉겨 새파라니/ 한 가지 꺾어내어 임에게 주고지고.'
양대박은 남원 출신으로 우계 성혼의 문인인데 선조 초기에 천거로 제용감 주부를 지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종 간인 유팽로와 함께 제봉 고경명에게 거병을 권유하였고 5월29일의 담양 추성관 회맹을 주도했다.
양대박은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원을 중심으로 1천 여 명의 의병을 더 모았고, 6월25일 왜군과의 운암전투에서 승전을 이끌었다. 아깝게도 그는 1592년 7월에 병으로 죽었다.
손곡 이달과 옥봉 백광훈은 고죽 최경창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이달은 허균의 스승이다. 백광훈은 원래 장흥에서 태어났는데 맏형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의 저자인 기봉 백광홍이다.
백광훈은 1577년에 선릉참봉을 하였고 1582년에 소격서 참봉을 하다가 서울에서 별세했는데, 상여는 해남으로 내려왔다. 이 때 선조 임금이 영여(靈與)를 하사했는데 지금도 해남군 옥천면 옥봉 유물관에 비치되어 있다.
백광훈 별세 시 해남현감이었던 임제는 '백옥봉 만사' 2수를 지었다.
백옥봉 만사(白玉峯 輓詞)
제1수
근세의 재주있는 인물(才子)를 논하자면
그대가 우뚝 무리에서 빼어났었네.
누구 있어 고조(古調)를 추구하리.
다시는 그런 글 찾을 길이 없어라.
제2수
옥수(玉樹)는 종내 황토로 돌아가니
청산엔 단지 백운(白雲)뿐이로세
제(祭)지내고 오직 청주(淸酒)만 남았기에
외로운 무덤 앞에 쓸쓸히 뿌리오.
6️⃣
나주 백호문학관을 두루 살펴보다가, 한 곳에서 '부벽루 상영록(浮碧樓 觴詠錄)' 전시물을 보았다.
1584년 겨울에 임제는 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병을 얻어 상당기간 객사에 머물렀다. 이 때 임제는 황징 등 5명의 친구를 초청하여 평양 대동강 부벽루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서로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 '부벽루 상영록'이다.
부벽루 상영록에는 백호가 직접 쓴 서장과 원운 15수와 5명의 차운 시가 실려 있다. 그러면 임제가 직접 지은 서장을 읽어보자.
서장 (序章)
제(悌)는 서경의 막객으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 병을 안고 홀로 무료히 앉아서 공중에다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우연히 김이옥, 이응청, 황응시, 김운거, 노경달 등과 호사(湖寺)의 약조를 하여, 동짓달 초순 병이 뜸할 때 나가 놀기로 했다.
마침 속사(俗事)에 응하는 일이 생겨 어둠을 타고서 부벽루에 이르렀다. 산은 높고 달은 조그만데 물의 수량이 떨어져 돌이 드러났다. 바로 소동파의 '후적벽부'에서 놀던 강물이었다. 이에 함벽에서 술 마시고 영명사(永明寺)에서 묵었다.
때는 만력 12년 갑신(1584년)이다.
이를 보면 임제는 평양의 대동강 변 청류벽 위에 높직이 있는 부벽루에서 5명의 친구들과 수창했음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면 백호 임제의 원운 제1수를 음미해 보자.
風冷夜如水, 月斜人擬樓.
바람차고 물 같은 밤에, 비껴진 달 아래 난간에 기대어 있네.
疎林見漁火, 遠浦有歸舟.
갈대숲 사이로 어부의 불빛이 비칠 제, 먼 포구에는 돌아오는 배 한 척.
다음은 호서 김운거의 차운이다. 압운은 2,4구의 루(樓)와 주(舟)이다. '강가의 나무에 말을 매어 놓고/ 땅거미 깃든 강위의 누각에 오르네/ 아득히 저 멀리 한 점 불빛이 보이는데/ 이는 고기잡이 배인 듯하네.'
이어서 국헌 황응시의 차운을 보자. '계곡과 산이 더 없이 아름답고/ 긴긴 이 밤 높은 망루에 기대어 있네/ 명멸하는 어화와 인가의 불빛이/ 십리 밖 저 남쪽 호수에 떠 있는 돛배들인가 하노라'
세 번째로 남파 노경달이 읊었다. '술통에는 한 잔의 술이 들어 있고/ 강변의 천척이나 되는 누각 우뚝 솟아있네/ 손에 손을 잡은 우리의 우정 끝없이 깊어만 가거늘/ 말하지 마오, 돌아오는 돛배가 있다고.'
이어서 송오 이응청의 시이다. '고려 때부터 융성했던 절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고려 때 누각의 하늘은 높아라./ 강의 별빛이 깜박이는 곳이/ 저 멀리 고깃배의 불빛이 아니냐.'
마지막으로 경호 김이옥이 차운하였다. '조각달 비치는 저 황패한 옛 성곽/ 강 가운데 서있는 저 누각 그림자만 드리우네./ 망대에서 보이는 저 모닥불은/ 남포(南浦)의 외로운 쪽배 아니냐.'
이런 시를 백호는 영명사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15수나 수창하였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회(詩會)를 통하여 여흥을 즐겼다.
한편, 백호 임제가 친한 사람들과 창수한 기록은 '용성창수록', '부벽루 상영록' 이외에 3번이나 더 있다.
1574년에 임제는 양대박, 정지승과 함께 서울 근교 삼각산 일대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이때 창수한 기록이 바로 '정악(鼎岳; 삼각산의 별칭) 창수록(唱酬錄)'이다.
백호는 1575년부터 관원(灌園) 박계현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이 시집이 '관백창수록'이다. 1575년에 임제는 속리산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주에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나주로 내려와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을 만났다.
1579년에 임제는 함경도 고산도(함경남도 안변) 찰방으로 부임했다. 이때 양사언, 허봉, 차천로와 함께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요컨대, 임제의 '창수록'들은 그와 교유한 사람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7️⃣
백호문학관에서 '망녀전사(亡女奠詞)'란 전시물을 보았다. 1586년 가을에 임제는 고향인 나주 회진에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백호는 김극녕에게 시집 간 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이 21세였다.
임제는 병으로 빈소에 갈 수가 없어 영산강변에서 제를 지내면서 만사(輓詞)를 읊었다. 이를 읽어보자
큰 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亡女奠詞)
너의 용모 남달리 빼어나고
너의 덕성 하늘에서 타고 났지.
부모슬하에서 열다섯 해
시집가서 이제 여섯 해 되었지.
어버이 섬긴 일이야 내 아는 바이고,
시부모도 잘 모셔 칭찬을 들었다지.
하늘이여, 귀신이여.
내 딸이 무슨 허물 있나요?
한번 병들자 옥이 깨졌으니
이런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아비는 병들어 가보지도 못하고
울부짖고 통곡하니 기가 막히네.
너 이제 저승으로 가버렸으니
너를 만날 인연 영영 없겠구나.
네 어미는 지금 서울 가서
너희 외조모 앞에 있단다.
너의 죽음 알게 되면
약한 몸 보전하기 어려우리라.
부음을 듣고 나흘 지나서
금수(錦水)가에 망전(望奠)을 차리노라.
술과 과일 조금 차려놓고
샘물을 떠다가 사발 가득 부었느니라.
어미는 멀리 있어도 네 아비 여기 있으니
혼이여! 이리로 오렴
샘물로 너의 신열을 씻어내고
술과 과일로 네 목이나 축이거라.
울음 그쳤다가 또 통곡하니
네 죽음 한스럽기 그지없어라.
가을 하늘이 구만리 아득해
이 한이 끝까지 이어지누나.
그런데 백호는 큰 딸을 극진히도 사랑했었나 보다. 죽은 딸을 슬퍼하는 만시가 두 개나 더 있다.
죽은 딸의 만사
(亡女輓)
네 아비 지난 해 흥양(興陽)으로 부임하느라
서울의 가을바람에 황망히 떠나왔구나.
네 목소리 네 모습 눈앞에서 아리땁거늘
인간 세상 한 번 이별, 이제 아주 망망하다.
달 밝은 빈산엔 잔나비 울음 애달픈데
한 골짝 찬 서리 혜초 잎은 시들었네.
시집가던 그 날에 돌아보며 못내 그리더니
저승가면 어디메서 에미를 불러보랴.
백호는 1584년 겨울에 평안도 도사를 마치고 나서 병이 나서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흥양(고흥의 옛 이름)현감으로 부임했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백호는 1585년 가을에 흥양현감으로 부임하면서 회진을 안 들렀던 것 같다.
두 번째 만시이다.
망녀 만사
(亡女挽)
너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길에 한 잔 술 따라 주지 못하는 구나
몸져누운 사립문 앞을 푸른 이끼가 막았으니
가을바람(秋風)에 쫓아오는 기러기 떼 아무리 헤어봐도
혼령은 돌아오질 않으니 통곡한 들 어찌하랴!
이 시를 보면 백호는 회진에서 몸이 많이 아파서 돌아다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시에 '가을바람', '기러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가을에 지어진 것이다.
한편 임제는 이 시기에 '병중에 마음을 달래다(病中自遺)'는 시를 지은 듯하다.
병중에 마음을 달래다
(病中自遺)
해묵은 고질병이 장부의 몸을 얽어매니
가을을 만나도 기력이 쾌하지 않는군.
서울이야 어찌 몸을 정양할 곳이리오.
산은 저 가야산(伽倻山) 물은 저 금호(錦湖)로세.
금호와 가야산은 백호의 고향을 가리킨다. 회진 앞으로 흐르는 영산강의 별칭이 금호이고, 그 건너에 앙암(仰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그 위 산을 가야산 혹은 ‘개산’이라 했다. 이 시에도 가을이 나온다.
임제는 네 아들들과 세 딸을 두었다. 큰 딸은 병조좌랑 김극령에게 시집가서 일찍 죽었다. 둘째 딸은 허교에게 시집갔는데,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을 낳았다. 허목이 임제의 외손자인 것이다. 셋째 딸은 후릉 참봉 양여백에게 시집갔다.
8️⃣
백호 임제는 1587년(선조 20년) 6월에 부친 임진의 상(喪)을 당하고, 2개월 뒤인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39세였다. 죽음을 예감하여서였을까. 백호는 스스로 만시(輓詩)를 쓴다.
스스로를 애도함
(自挽)
江漢風流四十春
강한(江漢)에서 보낸 40년 풍류생활
淸明嬴得動時人
맑은 이름 세상 사람들을 울리고도 남으리라
如今鶴駕超塵網
이제는 학을 타고 속세 그물을 벗어나니
海上蟠桃子又新
바다 위(海上) 반도 복숭아(蟠桃)는 새로 익었겠지
백호는 자만(自挽) 시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미련 없이 속세를 벗어나 학을 타고 신선 세상으로 떠난다'고 읊고 있다.
내친김에 백호문학관 근처에 있는 영모정(永慕亭)을 간다. 영모정은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뜻의 정자로, 임제의 둘째 큰 아버지(仲父) 임복이 부친 임진, 작은 아버지 임몽과 함께 할아버지 임붕을 위해 1556년에 지었다.
영모정 아래에 물곡비(勿哭碑)가 있다. 백호 임제는 죽으면서 슬퍼하는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중국 사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여덟 야만족들이 제각기 황제라고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四夷八蠻 皆呼稱帝), 유독 우리나라만이 중국을 주인이라 불렀으니(唯獨朝鮮入主中國), 이러한 나라에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곡(哭)하지 말라(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고 유언하였다 한다.
이 얼마나 촌철살인(寸鐵殺人)이고 자주 독립사상가의 면모인가.
백호가 세상을 떠난 지 90여년이 지난 1678년에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임제의 '물곡사'를 소개하면서 '이 이야기는 비록 순간적인 비유로 웃어넘기는 일일 수 있으나,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이것을 되살펴 보면 여러 가지 폐백 물건을 바치느라고 짐승보다 못한 노릇을 하는 일이 해마다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면이 아닐 수 없다'고 적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조공이 심해진 폐해를 지적하고 자주국가로서의 위상 정립이 절실함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 물곡비 왼편에는 '백호임제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이를 읽어보자. '조선 왕조 5백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백호 임제 선생으로써 대답할 것이요. 그보다도 언제나 초탈한 천성을 지켜 파벌 당쟁의 탁류 속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자주독립사상을 견지하여 사대부유(事大腐儒)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높은 인간성의 소유자를 찾는다면 그 또한 선생을 손꼽을 것이다.(중략) 향년 39세라. 일생은 이같이 짧았을 지라도 그 뜻과 문학은 천추에 전할 것이라. 여기 공의 이름 앞에 찬송을 바친다. 멋과 정한(情恨)의 시인 백호 선생이여, 깨끗한 그 모습 구름 가듯 물 흐르듯 하늘 복판에 달 가듯 하였도다. 자주 독립의 사상인 백호선생이여, 사나이 높은 절개 꺾을 수 없었기에 만인이 모두들 우러러 보았도다. 1979년 3월에 짓다.'
백호 임제를 다시 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를 조선 최고의 풍류객으로만 평가했다. 사회비평가, 자주독립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소홀히 한 점이 적지 않았다. 이제 백호는 재평가되어야 하리라.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백호 임제가 언급되어 있다.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 병으로 죽음을 당해서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자 그는 ‘사해의 여러 나라가 칭제(稱帝)를 하지 않은 자가 없거늘 유독 우리나라는 자고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이런 누방(陋邦)에서 살다가는 데 그 죽음을 어찌 슬퍼 할 것이 있겠느냐’ 라 말하고 곡을 하지 말라고 명했다. 또한 평소에 우스갯소리로 '만약 내가 오대(五代)나 육조(六朝)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돌려먹는 천자쯤은 한 번 해 보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을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을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 없어져도 그 명성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음을 이르는 말을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말을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으로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음 혹은 곤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을 사회부연(死灰復燃), 죽은 뒤에 약방문을 쓴다는 뜻으로 이미 때가 지난 후에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말을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後(뒤 후/임금 후)는 ❶회의문자로 后(후)는 간자(簡字)이다. 발걸음(彳; 걷다, 자축거리다)을 조금씩(문자의 오른쪽 윗부분) 내딛으며 뒤처져(夂; 머뭇거림, 뒤져 옴) 오니 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後자는 '뒤'나 '뒤떨어지다', '뒤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後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幺(작을 요)자, 夂(뒤져서 올 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後자는 족쇄를 찬 노예가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後자를 보면 족쇄에 묶인 발과 彳자가 그려져 있었다.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으니 걸음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後자는 '뒤떨어지다'나 '뒤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後(후)는 (1)무슨 뒤, 또는 그 다음. 나중 (2)추후(追後) 등의 뜻으로 ①뒤 ②곁 ③딸림 ④아랫사람 ⑤뒤떨어지다 ⑥능력 따위가 뒤떨어지다 ⑦뒤지다 ⑧뒤서다 ⑨늦다 ⑩뒤로 미루다 ⑪뒤로 돌리다 ⑫뒤로 하다 ⑬임금 ⑭왕후(王后), 후비(后妃) ⑮신령(神靈)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먼저 선(先), 앞 전(前), 맏 곤(昆)이다. 용례로는 뒤를 이어 계속 됨을 후속(後續), 이후에 태어나는 자손들을 후손(後孫), 뒤로 물러남을 후퇴(後退), 일이 지난 뒤에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을 후회(後悔), 같은 학교를 나중에 나온 사람을 후배(後輩), 반반씩 둘로 나눈 것의 뒷부분을 후반(後半), 핏줄을 이은 먼 후손을 후예(後裔), 뒷 세상이나 뒤의 자손을 후세(後世), 뒤에서 도와줌을 후원(後援), 뒤의 시기 또는 뒤의 기간을 후기(後期), 중심의 뒤쪽 또는 전선에서 뒤로 떨어져 있는 곳을 후방(後方), 뒤지거나 뒤떨어짐 또는 그런 사람을 후진(後進), 맨 마지막을 최후(最後), 일이 끝난 뒤를 사후(事後),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오후(午後), 바로 뒤나 그 후 곧 즉후를 직후(直後), 그 뒤에 곧 잇따라 오는 때나 자리를 향후(向後), 앞과 뒤나 먼저와 나중을 전후(前後), 후배 중의 뛰어난 인물을 이르는 말을 후기지수(後起之秀), 젊은 후학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후진들이 선배들보다 젊고 기력이 좋아 학문을 닦음에 따라 큰 인물이 될 수 있으므로 가히 두렵다는 말을 후생가외(後生可畏), 때 늦은 한탄을 이르는 말을 후시지탄(後時之嘆),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뛰어날 때 이르는 말을 후생각고(後生角高), 내세에서의 안락을 가장 소중히 여겨 믿는 마음으로 선행을 쌓음을 이르는 말을 후생대사(後生大事),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이나 일이 잘못된 뒤라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후회막급(後悔莫及)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 哭(울 곡)은 ❶회의문자로 외친다는 뜻을 가진 吅(훤)과 犬(견)으로 이루어졌다. 개가 울부짖는다는 뜻에 사람이 슬픔에 겨워 울다의 뜻으로 변화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哭자는 '울다'나 '곡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哭자는 두 개의 口(입 구)자와 犬(개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哭자의 갑골문을 보면 머리를 헝클어트린 사람 주위로 두 개의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哭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곡하다'를 뜻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금문에서부터는 사람 대신 犬자가 쓰이면서 지금의 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哭(곡)은 (1)소리를 내어 욺, 또는 그 울음 (2)상례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또는 제(祭)를 지낼 때나 영전에서 애고애고 혹은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욺 또는 그 울음 등의 뜻으로 ①울다, 곡하다 ②노래하다 ③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우는 예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옛날 장례 때 곡하며 따라가던 여자 종을 곡비(哭婢), 슬피 우는 소리를 곡성(哭聲), 소리내어 슬피 욺을 곡읍(哭泣), 국상 때 궁중에 모여 우는 관리의 반열을 곡반(哭班), 임금이 몸소 죽은 신하를 조문함을 곡림(哭臨), 조문함을 곡부(哭訃), 별자리 이름의 곡성(哭星), 상사가 났을 때 상제들이 모여 곡하는 곳을 곡청(哭廳), 소리를 높여 슬피 욺을 통곡(痛哭), 큰 소리로 섧게 욺을 통곡(慟哭), 하던 곡을 그침을 지곡(止哭), 밤에 곡함을 야곡(夜哭), 소리내어 슬피 울음을 읍곡(泣哭), 큰 소리로 곡함을 대곡(大哭),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정침에서 곡함을 반곡(反哭), 목을 놓아 욺을 방곡(放哭), 맞아들이며 곡함을 영곡(迎哭), 목놓아 슬피 욺 또는 그 울음을 호곡(號哭), 소리 내어 슬프게 욺을 애곡(哀哭), 근심하여 슬피 욺을 우곡(憂哭), 조상할 때에 한 차례 곡을 함을 일곡(一哭), 울어야 할 것을 마지못해 웃는다는 뜻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곡부득이소(哭不得已笑), 정신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슬피 통곡함을 일컫는 말을 실성통곡(失性痛哭), 가난으로 겪는 슬픔을 이르는 말을 궁도지곡(窮途之哭), 울려는 아이 뺨치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불평을 품고 있는 사람을 선동함을 비유한 말을 욕곡봉타(欲哭逢打),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슬피 욺을 일컫는 말을 대성통곡(大聲痛哭), 하늘을 쳐다보며 몹시 욺을 일컫는 말을 앙천통곡(仰天痛哭), 한바탕의 통곡을 일컫는 말을 일장통곡(一場痛哭), 하늘을 부르며 목놓아 욺을 일컫는 말을 호천통곡(呼天痛哭)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