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오늘의 묵상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다음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운(運)일까요? 아닙니다. 아마 모든 이가 ‘노력’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적은 노력이 아닌 피나는 노력으로써만 한 단계 더 높은 것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은 즐거울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그 순간은 정말로 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며칠 전, 동창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수영장이 보였습니다. 이 수영장을 보면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저 수영장 기억나? 너랑 나랑 여기 수영장 다녔잖아.”
기억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나?” 하면서 의문을 표시했더니, 딱 한 번 이 수영장에 함께 갔었다고 말합니다. 이 수영장은 25m 길이가 아니라, 50m 풀이었습니다. 따라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특히 강사는 늘 ‘한 바퀴 더’를 외치면서 소위 ‘빡세게’라고 할 정도로 힘들게 수영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고 안 갔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운동하려면 토할 것 같아야지, 기분 좋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분 좋은 것은 운동이 끝난 뒤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통과 시련도 다음 단계,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가 아닐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그 뒤의 기쁨도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 고통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는데, 그런데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전교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늘 기쁨으로 가득 찰 것 같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부족했고 잠잘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본다는 것은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하느님 아버지를 본다고 해서 특별히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 느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특히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아버지 체험을 더 뜨겁게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하면 그 다음에는 상대를 인정하기도 쉬워진다(네모토 히로유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여백도 중요합니다.
갑곶성지의 봉안당 안치식을 직접 진행하면서 유가족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많은 유족이 고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가 조금만 잘했다면….’이라는 과거에 대한 후회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없어’라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끼며 슬퍼합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후회를 없애지 못합니다. 이때 “세상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많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지만, 이 역시 일어날 수 있었던 하나의 여백인 것입니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채우지 않아도 되는 여백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을 괴롭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지금 내가 해야 할 것과 앞으로 희망을 두어야 할 것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