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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처음 단을 쌓다
삼상 14:31-35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4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삼상 14:31-35 /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날 블레셋 군인들을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추격하였는데, 25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허기져 있었다. 32) 이제 해가 저물어 저주의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되자 군인들은 모두 약탈해 나섰다. 그들은 양이나 소나 송아지를 닥치는 대로 끌어다가 아무 곳에서나 잡고, 짐승의 피를 그냥 땅바닥에 흘린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기를 먹었다. 33) 이러한 사실이 즉각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피를 아무 데나 쏟아 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고기를 먹는 허물을 범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선언하였다. `그것은 아주 크나큰 허물이구나! 즉각 큰돌을 하나 이곳으로 굴려 오너라! 34) 그리고 너희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모든 짐승을 이곳으로 끌고 와서 이 돌 위에서 잡아먹게 하여라!' 그래서 군인들은 모두 약탈한 짐승을 사울 앞으로 끌어다가 그 돌 위에서 잡았다. 35) 사울은 이로써 여호와께 제단을 하나 쌓아 바친 셈이 되었고, 이것이 그가 여호와께 바친 첫 제단이었다.
사울 왕의 헛된 맹세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 고단한 전투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31-34)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군대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전쟁 후 블레셋에게 탈취해온 음식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먹습니다.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를 잡아다가 피째 먹었다”고 말합니다(32). 하나님께서 피는 생명이니 피는 고기와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2:23). 군사들이 소를 잡아먹으려면 피를 완전히 빼고서 구워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기에 있는 피가 빠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배고픔에 지쳐 있는 백성들은 피가 덜 빠진 채 고기를 구워서 먹은 것입니다. 배고픔에 이성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율법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판단력을 상실한 어리석은 사울 왕 때문에 백성들까지 판단력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울은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라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헛된 맹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실수는 생각하지 않은 채 율법을 어긴 백성들만 꾸짖고 있습니다. 마치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사울은 “큰 돌을 가져오라” 명령합니다(33). 그리고 “백성들 중에 다니며 소와 양을 이리고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먹고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합니다(34). 사울 왕은 율법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35) 아마도 사울이 왕으로써 단을 처음 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그동안 여러 번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사울이 단을 쌓은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규례에 맞추어서 단을 쌓은 것이 처음이었다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사울은 그동안 나름대로 의식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행한 모든 종교의식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허울뿐인 외식이었지 진정한 마음을 담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니 그의 앞길이 얼마나 좋고 형통한 일이 계획되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울 왕은 좋은 기회들을 스스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적 용 : 인생을 살다보면 아무리 배고파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받지 말아야 할 돈이 있습니다. 굶주림과 배고픔에 고기를 피째 먹은 백성들처럼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된 간증을 생각해 봅시다.
정저지와[井底之蛙] <장자>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 남의 말을 멀리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말만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인 이들입니다. 식견이 좁은 사람 또한 짧은 식견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더 나은 학문을 쌓을 수 없습니다. 사울처럼 백성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단을 쌓는 외면적인 형식과 남의 죄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입니다.
< 설 교 >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삼상 14:31-35, 마 16:23-24, 롬 14:5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사람입니다. 그래놓고 그는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빌라도의 아내가 그 전날 밤에 꿈을 꾸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 꿈이 바로 예수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빌라도로 하여금 이 일에 상관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으나 빌라도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도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 할 적마다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빌라도는 나중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가 남긴 몇 마디 말은 매우 중요한 말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예수께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는데 빌라도는 대뜸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이 질문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는 진리를 찾아 헤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빌라도는 그 예수님을 눈앞에 세워두고 오히려 자신이 심문을 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빌라도의 이 말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진리가 무슨 진리냐? 진리가 밥 먹여 주느냐?”고 비웃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 현실입니다. 현대인은 “진리”에 대하여 흥미가 없습니다. 진리를 찾기는커녕 빌라도처럼 오히려 진리 그 자체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빌라도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많은 무리들에게 소개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고 하는 이 말도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거쳐 간 사람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 사람은 단 한분뿐이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빌라도는 온 역사를 향하여 단 한 분 참 사람이신 이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역사를 향하여 예수를 소개한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경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상 유명한 신조들은 예외 없이 이 고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사명은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빌라도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전도의 사명입니다.
본문에는 사울의 입을 통하여 참 훌륭한 말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1. 그 첫째가 33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울의 잘못된 명령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어처구니없게도 전쟁 수행중인 군인들에게 금식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군인들이 얼마나 시장하고 또 피곤했겠습니까? 그래서 31절에 “그들이 심히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단 끝냈을 때 시장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니라 고기를 잡아 피째 먹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짐승을 잡아먹되 절대로 피째는 먹지 말라는 금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인들이 워낙 배가 고픈지라 한가하게 율법의 조항을 들먹일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요리문답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 상황이 어떠하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죄는 죄입니다. 배가 고파도 죄는 죄로 성립됩니다.
사울이 이것을 보고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으니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롬14:23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울의 입을 통하여 이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란 말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믿음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믿음에서 떠나서 생각을 한다든지, 말을 한다든지,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믿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행위”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 그대로 살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가 하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의 승리자요 성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또 한가지 사울의 입을 통하여 한 유명한 말은 34절에 “여호와께 범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범죄 하지 말라”고 한 이 말은 하나님을 등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이번에는 “만일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자신이 부자이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가상하게도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던 이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등지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영생의 길을 버리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복음 성가에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옛날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결단을 촉구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살고 있는 본토냐 아니면 주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이냐 양자택일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복음 성가의 표현대로 하면 “세상 등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향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지는 일입니다. 바로 이 결단에 구원과 생명과 축복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십니까? 세상을 향하여 나간다면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돌이키라” 즉 방향을 전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기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3. 이번에는 사울의 말이 아니라 사울이 한 일 가운데 훌륭한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35절에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제 5공화국”을 보면 군대 내에 “하나회”라고 하는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군인의 길에”에서 지적했듯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그 회를 위하여 충성을 맹세합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역사상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 충성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고전10:31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기 우리의 목표가 있습니다.
❶ 롬14:에 보면 두 가지 아주 대조적인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주기철 목사님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사각오(一死覺悟)”입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비장한 결심이었습니다. 그 각오대로 주기철 목사님은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주를 위하여” 이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지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을 제단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기도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헌신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충성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옛날 갈멜산 꼭대기의 엘리야 제단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런 제단마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❷ 롬14:에 나오는 다른 한 가지는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즉 어떤 이들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 신앙이 있습니다. 단지 나 한사람 잘되기 위하여, 복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직분을 감당해도 자기 한 사람 위하여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맞으면 하고 싫으면 팽개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3년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으나 그 “자기”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주님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아니오”하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처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그럴 때 내 삶은 승리하는 삶, 축복받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처음 쌓은 제단
삼상 14:31-35 / 안효관 목사(전주남성교회)
예전에 말씀드렸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순교자’라 불리는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 1909-2001) 목사님이 쓴 초대교회의 교부 성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 전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소톰이 콘스탄티노플 주교였을 때 자기 교구 내의 외딴 시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그곳을 자주 방문하기도 힘든 곳이라, 그는 궁리 끝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한 농부를 선택해서, 짧은 기간 그를 교육시킨 다음 그 교회의 사제로 세우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 그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사제로 세운 것은 아닌가? 그가 예배를 제대로 인도하고나 있는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일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그곳에 가서 예배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자신이 임명한 농부 사제가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크리소스톰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짧았지만 설교하는 동안 농부 사제의 얼굴은 열정으로 빛이 났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적은 무리의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끝나자 크리스소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해 달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자신에게 기도를 청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제로 임명한 주교 신부인 크리소스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주교님,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크리소스톰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그러자 그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크리소스톰에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여러분, 예배를 드림에 있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이 주교로부터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농부 사제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기 6:5)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요한복음 4:23)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라는 말은 우리의 정성과 인격과 삶 모두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지금 드리는 이 예배에 얼마나 우리의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드리는 이 예배가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야기를 하면서 본문 35절에서 사울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을 ‘사울 왕이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처음 제단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사울 왕이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그것을 그렇게 강조한 것일까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제단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란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세겜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에 머물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쌓은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처음 쌓은 제단을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처음 쌓은 제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창세기 12:7)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을 때에도, 그리고 야곱이 벧엘에서 처음 제단을 쌓을 때에도 ‘처음 쌓은 제단’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제단을 쌓았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 왕이 쌓은 제단에 대해서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제단을 쌓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무엘상 13장에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동안 나라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는 등 나라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치룬 전쟁이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왕자 요나단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나라를 세우고, 군대라고 해 봐야 겨우 3천 명밖에 되지 않은 이스라엘이 그 블레셋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비록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는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블레셋 군대를 보자 두려워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사울 왕은 자신의 멘토인 사무엘 선지자를 급하게 불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제사를 드러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오기로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두려움에 도망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3천 명의 군인들 가운데 남은 사람은 불과 6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남아 있다가는 죽을 게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인들이 도망치고 만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급해진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사울이 왕이 된 지 처음 드린 번제, 처음 쌓은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오늘 본문의 제단을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적으로 처음 제사를 드린 후 시간은 그렇게 오래 흐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사무엘 선지자는 제사를 드릴 제사장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여 제사를 드린 사울 왕을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호전되는 듯했습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전쟁은 군사의 숫자나 군사력의 강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에 서시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됩니다. 왕자 요나단은 자신의 병기든 소년 하나만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서는 블레셋 군사 20여 명을 죽이게 됩니다. 요나단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진영에 침투하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으니라.”(사무엘상 14:6)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치를 그래도 보여준 요나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처럼 불과 2명이지만, 적군 블레셋 진영에 들어간 요나단과 소년은 20여 명의 블레셋 군인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면, 자기들의 숫자가 많을지라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를 때 자기들이 패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용기를 낸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향해 전투를 개시하자 블레셋 편에 있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울 왕의 편으로 돌아섰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돌아와 힘을 합쳐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군대가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쟁의 승기는 이스라엘 쪽으로 돌아왔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너무나도 피곤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느라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사울이 ‘전쟁을 마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던 이스라엘 병사들은 블레셋 군사들이 놓고 간 음식을 보자 눈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할 때는 적군을 뒤쫓아 가느라 몰랐는데, 적진에 도착하여 양과 소 등 짐승을 보자 허기짐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짐승들을 끌어다가 잡아 고기를 먹는데, 피째 먹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율법에서는 고기를 피째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명령을 지키려다가 율법을 어겨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안 사울이 율법을 어긴 백성을 책망하면서도, 허기진 군사들을 위해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게 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 31-3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그것이 사울이 쌓은 첫 번째 제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오늘 본문 35절에 기록된 제단을 사울 왕이 드린 두 번째 제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드린 제사를 첫 번째 제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두 번째 드린 오늘 본문의 제사가 첫 번째 제사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앞선 제사는 제사장이 아닌 사울 자신이 드린 제사이고, 이번에 드린 제사는 제사장이 드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도록 구별된 제사장이 드린 첫 번째 제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인 18절에 의하면 사울은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무엘 선지자는 아닐지라도, 사울은 제사장을 불렀고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드린 첫 번째 제사가 오늘 본문의 제사이고, 그 제사드림이 사울이 처음 드린 제단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명령으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었고, 범죄한 백성들을 데리고 전쟁을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돕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단과 소년, 단 두 명이서 블레셋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블레셋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요나단의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되었고, 블레셋은 도망치기에 급급한 반면 이스라엘의 군사는 숫자가 적을지라도 블레셋을 뒤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계속해서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범죄한 백성들의 죄에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마치 여리고 성을 점령한 이후 아간의 범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한 여호수아의 경험처럼, 범죄한 백성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한 절박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가장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땅한 사람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내 지혜가 부족하기에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한다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능력이 없기에 능력 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아도 내 지혜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아주지 않으셔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끄떡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결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과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처음 쌓은 제단이 신앙의 출발이었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단을 쌓음으로 믿음이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땠을까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 다음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전쟁에 승리하고도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본문 후에 나오는 47-48절의 기록에 의하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만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암과 암몬 등 여러 나라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분명 그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사울과 이스라엘을 도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하나님께 감사했다거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15장에 의하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사울 왕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챘다는 뜻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맙니다.
처음 제단을 쌓을 때 가졌던 마음을 계속해서 간직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전쟁에 승리하면서 점점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사울이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낙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 그의 마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처음 제단을 쌓을 때에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그 때만은 정말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되어갈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지금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마음을 끝까지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체험했다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가 계속되도록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사울 왕처럼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린 오늘의 예배가 처음 쌓는 제단, 그 후에도 쌓아본 적이 없는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오늘 본문 이후에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단이 처음 쌓는 제단이자 마지막 제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처음 드리는 예배는 있을 수 있어도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는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광의 하나님, 영광을 주님을 찬송하며 예배할 때까지 우리의 예배에는 멈춤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늘 처음 드리는 예배처럼 감격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드리는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간절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마지막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쌓은 제단!’ 참 감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그 감격적인 표현은 슬픔의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을 거울삼아 우리의 삶은 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늘 처음이며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드려야 하고, 처음의 감격과 기쁨을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이 예배다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예배자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힘든 순간 앞에서든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예배자, 어떤 순간에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자 말입니다. 우리의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다른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공명심과 신앙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삼상 14:24-35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사울의 지혜롭지 못한 ‘금식 명령’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잡아 피째 먹은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24절에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피곤하였다’ 라는 말은 ‘괴로움을 당했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한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울은 전쟁을 속히 마무리함으로써 자기의 명예를 높이겠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백성들에게 무모한 금식 명령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시간 전쟁을 했기에 매우 배가 고팠을 텐데, 사울이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하고 무리한 명령을 내림으로 백성들이 큰 괴로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군량미 확보’인 것은 군사들이 잘 먹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싸우는 사람에게 먹지 말라니 그것이 어찌 지혜로운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오직 자신의 명예욕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 만으로 모든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백성들도 안중에 없고 오직 자기 이기심만 가득합니다.
결국, 사울의 금식 명령은 큰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군사들이 너무 지쳐서 블레셋을 섬멸하지 못했습니다(28, 31절). 24절의 피곤은 ‘나가쓰’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괴롭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28절과 31절의 피곤은 ‘우프’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녹초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먹지 못해 지친 사람들이 어떻게 적을 섬멸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군사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합니다. 잘 먹고 강건해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전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영적 전쟁에 임하는 영적 군사도 강건해야 세상의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에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탄과 영적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특히, 이 중에서 공격용 무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시되, 사울처럼 실수하지 않도록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5-28절에 사울의 금식 명령을 듣지 못한 요나단이 수풀 속의 꿀을 먹고 맙니다.
그러자 백성 중 한 사람이 “해지기 전에 무엇이든 먹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는 사울의 금식 명령과 저주를 요나단에게 말하며 “이 명령으로 인해 모든 백성들이 피곤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백성의 이 말은 꿀을 먹은 요나단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잘못된 맹세를 강요하는 사울 왕에 대한 비관이자 고통에 대한 호소입니다. 사울의 잘못된 신앙관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고통과 비극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요나단은 사울의 금식 명령을 듣고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하며 탄식합니다. 아버지 사울이 무모하고 어리석게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서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며 부관 한 사람만 데리고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6절). 그리고 사울 왕도 전쟁을 하면서 금식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찌 보면 이 두 명령이 비슷한 것 같고, 어찌 보면 둘 다 매우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단의 행동은 철저히 말씀과 신앙에 기초한 것인 반면 사울의 명령과 저주는 오직 자기 공명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겉모양은 비슷하나 전혀 다른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읽고 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처럼 자신의 공명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신령한 것 같고 신실한 것 같고 선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탐욕이 가득하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공부를 한 것처럼, 우리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오늘,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1절 이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탈취한 짐승들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피 있는 채 먹었다고 말씀합니다(레 17:10-14). 물론, 이는 사울의 금식 명령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백성들이 너무 급하게 짐승을 잡아먹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의 이러한 범죄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이때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큰 승리를 거둔 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블레셋에 의해 멸망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용기 있는 행동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지금 막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멸망의 위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중차대한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는커녕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므로 하나님을 영광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은 성도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때는 시련과 위험 가운데 있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난 후, 평안의 때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안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평안할 때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믿음의 소망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사울처럼 자신의 탐욕을 신앙으로 위장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더욱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