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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 : 이사 55,6-9
제2독서 : 필리 1,20ㄷ-24.27ㄱ
복 음 :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연중 25 주일입니다
인류가 남긴 문헌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 메스포타미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길가메시 서사시’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의 길가메시라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길가메시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 엔키두를 잃은 후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영원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삶의 비밀을 찾기 위해 머나 먼 여행의 길을 떠납니다.
그는 영원한 삶의 비밀을 얻기 위해 태초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는 드디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고 우트나피쉬팀를 만나 말합니다.
“제가 이 먼 여행을 한 것은 ‘머나 먼 곳’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만나려고 세상을 헤매었고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며 바다를 건넜고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 아버지, 당신께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서사시에서의 이 물음은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원한 삶의 비밀을 물었지만,
그는 “영원한 삶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다만 신들의 몫”이라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먼 길까지 헛걸음을 하고 실망하며 돌아가려는 길가메쉬를 가엽게 여깁니다.
우트나피쉬팀의 아내는 남편에게 길가메쉬가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으니 무슨 선물을 주라고 부탁합니다.
아내의 말을 들은 우트나피쉬팀은 신의 비밀 하나를 알려줍니다.
영원한 삶은 아니라도 불로초에 해당하는 비밀을 지닌 가시나무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고,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
길가메시는 그 가시나무를 움켜잡지만 그가 잠든 사이에 뱀이 와서 채갑니다.
한 순간 그의 꿈이 사라집니다.
구약성경은 이 길가메시라는 서사시보다 대략 1000년 이상 더 지난 후에 씌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 고대 근동의 체험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있고, 그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에 대한 성찰과 문화적 토대 위에
이스라엘이 지닌 야훼 하느님을 향한 독특한 믿음을 표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온 가시나무 때문에 혹시 묵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여 길가메시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판관기의 9장에 나오는 '요탐의 우화'는 어떤 사람이 진정 참된 임금인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도 그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 에 가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며 이 우화를 들려줍니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습니다.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말합니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내가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청하자, 무화과나무도
“이 달콤한 맛의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청합니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이렇게 나무들은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가서 임금이 돼달라고 청하지만 모두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자기들의 임금이 돼달라고 청하자 가시나무가 답합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탐이 그리짐산에서 외치는 우화입니다.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모두 자기의 일에 충실하여 자기 역할을 하는데
가시나무가 숲의 임금이 되어 그 가시로 다른 나무들을 괴롭힙니다.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운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그 일로 백성들이 얼마나 큰 괴로움을 당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백성만 고통을 당합니다.
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는데,
욕심이 많고 가시로 우리 마음을 찌르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길가메시 이야기에서의 ‘가시나무’, 오늘 독서의 ‘야탐의 비유’에서의 ‘가시나무’,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던 것을 생각하며 가시나무의 상징적인 의미가 오늘의 묵상거리를 던져줍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은 다음의 복음 말씀을 참고 하십시오: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며 조롱하였다. (마태. 27, 27-29))
오늘 복음에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이 비유는 언뜻 알아듣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산술적인 계산이 앞서는 사람들한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느냐고 따지는 일꾼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늘나라는 산술적인 계산으로 얻는 나라가 아닙니다.
저는 오래전 이집트 순례를 갔을 때, 우연히 인력시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나와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초조하게 자기를 채용하여 데려갈 사람을 기다리며 서 있는
인력시장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해되고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아야 상황을 이해하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아무도 자기를 데려가지 않을 때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일찍 뽑혀 일하러 간 사람보다 더 딱한 처지라는 사실을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바로 그것을 헤아리시고 그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는 이 포도밭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이나 아침부터 온종일 일한 일꾼이나
모두 당신의 자녀로 똑같이 대하시며 자비를 보이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한테 일용할 양식, 곧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 지도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마음을 보는 사람 말입니다.
늦게라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하고 끝낼 그 무엇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할 긴 여행길, 즉 여정(旅程)입니다.
여행하다보면 힘겨운 오르막길이나 만만치 않은 돌밭 길도 만나지만,
때로 평탄한 지름길이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도 만납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뜨거운 사막도 거치지만, 때로 가슴이 확 트이는 천국 같은 초원도 만납니다.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젊음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급격히 쇠락하는 노년의 순간도 맞이합니다.
주님 뜻에 맞갖은 정직하고 충실한 길만을 걸어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때로 그릇된 길로 접어들어 갖은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주 늦게야 주님을 만나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해하며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주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토록 늦게야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가?
이토록 늦은 나이에 이런 방향 전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하루 일당 10만원을 지불해주시지만,
오후 세시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일하러온 지각생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일당 10만원을 손에 쥐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늦게라도 주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그분의 포도밭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감지덕지하게도 똑같은 일당을 주시는 주님께 백번 천 번 감사드리며,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주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답게 계획하고 장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노화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수명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수도회·수녀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의 모든 수도회·수녀회들이 회원들의 노령화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노년기에 직면해야 하는 도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의 기쁨이나 희망은 급격히 감소되어가는 반면,
고통과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점점 커져 감을 실감합니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이런 저런 질병에 시달립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루하루 뭔가가 내 안에서 소멸되어간다는 느낌에 우울감도 커져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란 존재의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네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흔들어놓습니다.
생각할수록 헛되고 허무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을 파악하고 실망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승의 삶을 얼마나 불꽃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원 없이 달릴 곳을 다 달렸으면,
이런 고백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곧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피서 1장 20~23절)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고,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렀기에 그런 용감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지상의 것을 줄이고 천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용감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조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단의 압력에 따라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명확한 답을 알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사람들에게 틀린 답이 답인 것처럼 대답하겠습니다.
처음에 몇몇 사람들은 오답을 말하는 사람들을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역시 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해서 틀린 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 역시 그러한 체험을 하나 했습니다.
식당에 갔는데 소위 미식가라는 소리를 듣는 한 사람이 반찬 중의 하나를 가리키면서 약간 상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역시 살짝 맛을 보더니 “상한 것 맞네.”라고 동조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호기심 많은 또 다른 사람 역시 상했다고 말했고, 몇몇 사람은 아예 그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인에게 살짝 물어본 결과 반찬인 나물이 원래 쌉쌀한 맛이 날 뿐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조현상의 핵심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답을 할 때, 그 상황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이를 실험했는데,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 집단이 있는 경우 점점 감소해서 동조율이 75%까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지만,
무조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옳다면 사회적 압박을 뚫고서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선택을 통해 이제까지 불합리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압박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못하면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을 대하는 밭 임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부터 일한 사람, 그리고 계속해서 아홉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부터 일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일당을 계산하는데 이 밭 임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나눠줍니다. 이 모습을 그 누구도 정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한 양이 다른데 똑같은 임금을 준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밭 임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밭 임자는 당시 사람들이 하루를 먹고 살기에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줘야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에 기초로 생각하시고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소수 집단이라도 형성되어진다면, 점점 세상 사람들이 바뀌고 세상 전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순간순간입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희생을 딛고
우리가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지 않기에
직접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여전히 포도밭
바깥에 있는 우리를
포도밭 안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주님을 통해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가 합의한 한 데나리온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힘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른 아침과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모두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허송세월로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를 만나게 합니다.
모두에게 똑 같이 준
한 데나리온에서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힘들게 주어진
이 소중한 하루에
진정 감사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이 하루는
생명의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빌려주신
소중한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아주 어릴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4살 정도였을 때가 기억납니다.
고양이가 있었고, 할머니가 계셨고, 세상은 엄청 크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더 어릴 때의 기억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제로 살고 있고, 아기들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아기들이 자라는 과정을 잘 몰랐습니다.
며칠 전에 아기들이 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스스로 뒤집기 위해서는 4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누워만 있던 아기가 앉아 있으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무언가라도 잡고 서 있으려면 9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드디어 아이가 똑바로 서려면 11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엄마’라는 말을 하기까지는 1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하루도 넘기기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내가 그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초심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군사력으로 세계 최강인 미국도 불과 200년 전에는 유럽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신생국가였습니다.
유럽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이 원주민들과 경쟁하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힘을 키웠던 유럽의 국가들도 2,000년 전에는 로마 제국과는 맞설 수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문명을 자랑하는 인류도 20,000년 전에는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힘을 자랑하기 보다는, 약한 국가를 억누르기보다는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재를 이야기 하시고, 인간은 소유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경계가 없지만 소유는 경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존재는 욕망이 없지만, 소유는 끊임없는 욕망 때문에 채우고 또 채워도 늘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존재는 굳이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소유는 자꾸만 비교하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랑하기도 하고,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더 적게 가진 것을 가지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열등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유의 영역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지면 세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살 때의 일입니다. 제가 어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마 그때부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루는 동네 앞에서 그냥 버스를 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버스를 타고 나니 겁도 나고 무섭기도 하고 해서 내렸습니다.
버스 번호도 모르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냥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강인데 그때는 한강을 보고 바다인줄 알았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경찰 아저씨를 만났고 경찰 아저씨는 저를 파출소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주소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그때는 집에 전화도 없었지만) 어떻게 아버지 이름은 알았습니다.
저는 그날 파출소에서 하루를 지냈습니다.
5살 나이에 파출소를 갔으니 저도 상당히 일찍부터 그 쪽하고 친하게 지낸 셈입니다.
다음 날 아버지께서 파출소에 오셨고 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파출소의 위치도 저를 도와주신 경찰 아저씨도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날 저녁에 먹었던 밥은 기억이 납니다.
저 나름대로는 어릴 때 경험했던 아픈 추억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의 일이었고 자라면서 그때의 일은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입었던 옷, 신발 색깔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저도 고생을 했지만 그런 아들을 찾기 위해서
온 동네를 다니신 어머니의 고통은 훨씬 크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넘치게 주십니다.
초대교회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두가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 지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서민가정의 하루 식비였다고 합니다.
밭 임자가 품꾼을 구하러 아침 9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일꾼들이 있어서,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12시, 3시, 5시에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합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도대체가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계산이라고는 아예 모릅니다.
사실, 이는 주인이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인 것입니다.
주인은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늦게 온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까지 같은 일당을 쳐 줍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관념으로 보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굳이 늦게 온 이들부터 같은 품삯을 주는 이유는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꼴찌”가 먼저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곳에 먼저 부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셈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베푸심입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이든, 나중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가멸은 처지를 슬밉다 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에 있어 첫째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아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한 데나리온의 가치
전삼용 요셉 신부
25살 때부터 느끼기 시작했던 사제성소 때문에 시작된 일 년간의 갈등을 뒤로하고 26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계획했고 또 쌓아가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자신을 주님을 위해 봉헌해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그분께서 주실 보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님께서 돌멩이 하나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때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일꾼들에게 준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몰랐었습니다.
만약 포도밭 주인이 써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일당을 받지 못하는 일용직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규 직장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자신과 가족이 하루를 굶지 않을 생명과도 같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명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신들이 더 해 드렸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자비를 질투하는 죄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 자녀로 일하며 살도록 초대받았는데
감사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는 봉사에 대해 보상만 요구합니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 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형은 아버지 밑에 있지만 일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십자가의 삶으로 고생하도록 불러주신 주님께 무한 감사만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만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머리가 돌아버린 나이 많은 시골 지주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사라 믿습니다.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한다고 믿고 풍차를 보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기사는 한 명의 여인이 필요합니다. 그녀를 위해 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돈키호테는 한 여관 매춘부인 알돈자를 레이디 둘시네아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알돈자는 처음엔 그런 맛이 간 노인의 말을 재밌게 듣다가 나중엔 자신에게 희망을 주는 그 노인이 싫어집니다.
자신은 부모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구르며 살아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알돈자는 지금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말라고 저항합니다.
자신을 짓밟고 가는 사람보다 돈키호테가 더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완전히 돌아버렸기 때문에 끝까지 알돈자를 둘시네아라 부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알돈자를 돈을 주고 이용해먹으려고만 했지만
돈키호테만은 그녀를 귀부인으로 끝까지 대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돈키호테가 무엇과 싸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냥 포기해!’ 라는 마음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사로 악과 싸우며 한 여인을 사랑해야 하는 부르심을 포기하라는 자신 내면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십자가의 싸움을 끝까지 버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알돈자도 자신을 위해 싸우는 돈키호테의 진심에 감동하여
돈키호테가 꿈꾸는 레이디 둘시네아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돈키호테는 신부님이 주는 책들을 읽고 갑자가 자신이 기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르심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자기 자신 내면에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라는 이기적인 목소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입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 싸움에서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부르심이 없었다면 그저 침대에 누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한 시골노인에 불과했겠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한 여인을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그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싸움일지라도 그 싸움 자체의 가치를 잘 알고 그 부르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을 부르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마치 주님께서 필요로 불러주시는 것처럼 다른 보상을 요구한다면 부르심의 뜻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 자체가 우리가 천국 시민이 되는 표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양 다른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보다는 세상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와 산초의 대화는 바로 불러주심 자체에 어떻게 만족해야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왜 같이 다녀요?”
“그거야 간단하죠. 그게... 그게...”
“뭔데요?”
“아 말씀드린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왜?”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내 손톱 하나씩 뽑혀도 난 좋아. 왜 좋은지 설명이 안 돼요.
주인님이 살짝 맛이 가신 건 알지만, 근데 어쩔 수 없어.
껍질을 벗겨내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거 말이 안 되잖아!”
“보좌관의 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어이구, 그래요. 난 보좌관은 아니죠. 허면 보좌관은 뭘 어떻게 보좌하는 건데요?”
“일단 그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요.
그분이 이렇게 챙챙챙챙 싸우다가 픽 쓰러지시면... 일으켜드리죠. ㅎㅎ”
“그래서 당신은 뭘 얻지?”
“뭘 얻느냐고요? ... 얻는 거야 많죠. 얻은 게... 얻은 게...”
“하나도 없지. 헌대 왜 같이 다녀?”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마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이런 산초의 마음이나 부르심을 받은 돈키호테의 마음이나 같을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내일 부양할 가족을 쫄쫄 굶길 생각을 하며
오후 다섯 시가 될 때까지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밭에서 아침부터 내일 걱정 없이 일했던 사람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좀 적게 달라고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해드렸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봉사를 해 드릴 처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죽여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분에게 더 해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한 감사 외에는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맡겨주신 일을 그냥 행복하게 수행하면 됩니다.
싸움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싸움을 하지 않고 어둠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이 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더 힘들어졌습니까?
부르심을 듣지 못한 이들이 겉으로는 세상에서 더 잘나가는 것 같아도 마음은 지옥 불에 닿은 듯 뜨거워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미사 시간의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주님께서 뽑아주셔서 기쁜 모습보다는 왠지 너무 많은 일을 했지만
일한 것보다 덜 받은 사람들처럼 불만에 찬 모습들이 있습니다.
구원으로 불러주셨으면 환희에 차 산초처럼 노래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복음전파의 삶이, 이웃 사랑의 삶이, 주님께 보답해드리는 삶이 그것 자체로 기쁘고 감사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달 잃어도 결국 목숨까지 잃는데도
그분을 따르는 것 자체로 좋다고 외치는 산초처럼 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아는 일꾼들, 구원에 다다른 이들의 자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