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안개가 대지를 깊이 품고 있다. 안개는 곧 시원하게 대지를 적시는 거친 빗줄기로 모습을 바꾼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내린다. 남태평양의 습기를 집어삼키고 올라온 거대한 구름 덩어리, 제주에 장마철이 찾아왔다. 뜨겁게 대지를 달굴 여름 햇살을 맞이하기 전,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제주의 장마는 우리나라의 여느 곳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장마 구름이 한라산에 가로막혀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주저앉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제주는 장마철마다 물 먹은 스펀지가 된다. 빨래는 몇날 며칠 마르지 않고, 제습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배를 채우고 비워달라 한다.
생활의 불편을 느끼게 되는 시즌이지만, 독특하고 환상적인 장마철의 제주 풍경은 또다시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만다. 싱그러운 봄이 지나간 숲은 울울창창해지고, 오름은 녹음에 푸른 살이 올라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장마철이어도 꼭 가봐야 하는 오름이 몇 군데 있다. 산정호수가 있고, 비와 안개로 신령스러운 풍경을 연출하는 남원읍의 물영아리오름과 교래의 물찻오름 그리고 한라산 성판악 코스에 있는 사라오름이 그곳이다.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다.
물영아리오름(표고 508m, 비고 128m)은 정상 분화구에 있는 습지 때문에 제주의 수백개 오름 가운데 가장 신령스럽고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으로 꼽힌다. 영화 <늑대소년> 촬영지로 유명하다. 물영아리가 있는 남원읍 중산간 지대는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순식간에 하늘의 색이 바뀌고 바람의 결이 달라지는 그 사이에 물영아리가 있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영아리오름에는 아마존 정글과 같은 독특한 자연림과 환상적인 습지가 어우러져 있어,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답다. 전설에 따르면 물영아리오름이 있는 수망리에 살던 한 청년이 방목하던 소를 잃어버렸는데, 그날 밤 청년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소 대신 연못이 있는 물영아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뒤 물영아리는 단 한번도 마르지 않았으며, 이 일대에 방목하는 소들은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르면 이곳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름을 오르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양옆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엄청 큰 삼나무들이 안개를 머금고 늘어서 있어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숲은 갈수록 깊어지고, 신비로운 분위기도 갈수록 더해져, 마법의 숲을 걷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오름에 누워 있는 880개의 계단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20여분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 키 큰 나무가 하나둘 줄어들고 작은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습지가 나온다. 빽빽한 숲이 꼭꼭 숨기고 있던 산 정상의 습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하다. 원형 화구호(둘레 300m, 깊이 40m)로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나무와 습지 식물이 둘러싸고 있는데다가 안개까지 흘러다니고 있어, 바로 눈앞의 풍경이건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산꼭대기에 어떻게 이런 습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물영아리 오름의 산정호수.
물영아리 습지는 하천이나 지하수 등 외부에서 물이 들어와 생기는 다른 습지와 달리, 온전히 비와 안개가 공급해준 물로 이뤄진 습지이다. 물영아리에는 멸종 위기종 2급인 물장군, 맹꽁이 등을 비롯해 양서류 8종, 습지 식물 210종, 곤충 47종, 파충류 15종 등 다양한 생물군이 살고 있다. 덕분에 국내외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람사르 습지(독특한 생물학적 지리적 특성을 지닌 곳)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다섯번째, 국제적으로는 1648번째였다.
관광객들이 사려니숲길을 걷고 있다.
사라오름 산정호수 탐방로.
물찻오름은 사려니숲길 품 안에 있다. 사려니숲길은 산소의 질이 가장 좋다는 해발 500m에 있는 중산간 지대의 원시림으로, 물찻오름 입구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 오름에 이르는 15km의 숲길과 물찻오름에서 붉은오름에 이르는 10km 숲길을 말한다. 길쭉하게 뻗어 오른 삼나무 숲이 울창하고, 졸참나무와 서어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도 무성해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물찻오름(표고 717.2m 비고 167m)에 가려면 아름다운 사려니숲길을 한 시간 반 정도 걸어야 한다. 물찻오름으로 가는 길은 습기가 높고 숲이 울창한 밀림이다. 적당한 경사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원시적이고 울창한 숲이 된 그런 곳을 골라 길을 내어놓았다. 물찻오름 들머리에서 25분쯤 걸으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지만, 산정호수(산꼭대기에 있는 호수)에 가려면 팔부 능선에서 호수 쪽으로 걸어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호수 앞에 다다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거짓말처럼 잔잔한 유리 같은 호수가 어떤 미동도 없이 산속에 누워 있다. 호수 둘레는 1㎞ 남짓이라는데, 수목이 무성해 물과 흙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보면 호수의 모양이 보이겠지만, 땅에서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물찻오름의 산정호수.
그러나 호수는 우수에 찬 푸른 눈망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산 정상에 있는 물은 바다나 계곡에서 본 물과 그 느낌이 다르다. 물 이상의 의미가 느껴지며, 따뜻한 숲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든다. 안타깝게도 수년 전부터 물찻오름의 아름다움이 입소문이 나서 너무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모여들여, 지금은 휴식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 생태계 복원 사업을 하고 있으며, 2018년까지 들어갈 수 없다. 다만 일년에 한번, 사려니숲에서 열리는 에코 힐링 체험 시기에 개방한다.
사라오름은 백록담 바로 아래에 있는 오름으로 물영아리, 물찻오름과는 다른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의 품에 있기에 제주의 오름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324m에 산정호수가 있으며, 그 둘레가 250m로 웬만한 축구장 정도의 크기이다. 산정호수를 보고 있으면 마치 하늘에 호수가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라오름의 산정호수를 ‘작은 백록담’이라 하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수심이 깊지 않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물이 말라 사시사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라오름은 장마철마다 한라산의 숨은 보석이 된다.
사라오름은 성판악 코스를 이용해 백록담 쪽으로 오르다 해발 1300m 부근에서 만나는 오름으로, 성판악 휴게소에서 왕복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 숲이 아름다운 솔밭대피소를 지나 한라산의 속살로 진격해 들어가면 사라오름 어귀에 도착한다. 이 오름은 조선 시대 제작된 <탐라순력도> <조선지형도> 등에 사라악이라 표기되어 있다. 기록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름의 뜻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성판악 코스에서 사라오름을 타고 20분 정도 오르면 햇살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물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산정호수다. 고혹스러운 자태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가까이서 보면 호수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크다. 이렇게 높은 곳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면 탐방로가 물에 잠기지만, 그래도 물이 깊지 않아 걸어갈 수 있다. 사라오름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한라산에서 시작한 제주의 대지가 바다를 향해 가슴이 저릴 만큼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천천히 풍경을 보고, 읽고, 가슴에 담는다.
산정호수가 있는 오름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호수에 비친 하늘의 빛깔도 시시때때로 달라지고, 나무들도 옷을 갈아입으며 수시로 표정을 바꾼다. 장마철의 산정호수는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이 느껴져 더욱 매력적이다. 울창한 숲속의 호수는 힘들게 찾아온 이들을 따스하게 안아준다. 물은 그 자체가 존재이고, 내면이고, 따뜻한 생명이다. 비 오는 장마철에 놓치지 말고 꼭 산정호수를 찾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