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한 날, 행복한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을 돌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혹이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혹이 고하되’ 라는 말은 아마 당시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던 임무를 맡은 자가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다윗에게 보고했던 일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이미 압살롬의 반역과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진영에 가담한 사실(12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당시의 사정이 이전에도 모두 다윗에게 보고되었던 점으로 보아(13절) 본절에서 새삼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아히도벨은 일찍부터 다윗으로부터 모사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대상27:33), 그리고 모사란 국가의 중대사로부터 시작하여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는 깊은 비밀까지도 왕과 함께 논의하는 직책이었으므로 여간한 심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임명 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으로부터 신임과 총애를 받던 아히도벨마저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의 진영에 가담하고만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본서의 저자가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히도벨이 대세의 흐름으로 보아, 날로 노쇠해 가는 다윗은 꺼져가는 등불이요, 젊고 수려했던 압살롬은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판단하여 압살롬의 진영에 가담하였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하여 시바와 시므이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16:1-14) 와 더불어 아히도벨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언급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성품인 간사함과 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이해 관계에 따라 찬양을 하다가도.사정이 바뀌면 순식간에 돌변하여 같은 입으로 독설과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욥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욥은 자신이 형통하여 은혜를 베풀 때에는 노인들까지 일어서며 경의를 표하더니 (욥29:8-25), 이제 재앙을 맞아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아내 마저 자기의 숨을 싫어하여 얼굴을 돌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욥19:17),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간사한 인간에 비해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신 분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그 후손들에게까지 지켜 행하시며(사59:21), 우리가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동행하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천한 위치에 있는 자들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큰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는 분입니다(신 24:17-22) ?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너나할것없이 쭉쭉 뻗어 가는 나무만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 하시는 분입니다. 또 인간은 떠오르는 태양만을 좋으며 찬양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꺼진 등불조차 끄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돌보시는 분이십니다(사 42:3),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로 험악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이렇듯 정함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의지하려 하지 말고 언제나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천성길을 향해 달려갑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