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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헛된 맹세와 헛된 순종
삼상 14:36-46
36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14:36-46 / [처형될 뻔한 요나단] 군인들이 블레셋의 짐승을 약탈해서 배불리 먹자 사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오늘 밤에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여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밤새도록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쳐죽이기로 하자!'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좋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명령만 하십시오!' 그러나 제사장은 하나님의 동의를 받자고 제안하였다. `우리가 이제 제단도 쌓았으니 먼저 그 앞에서 하나님께 여쭈어 봅시다!' 37) 그러자 사울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제가 이 밤에 블레셋 족속을 추격하여 해안의 평야에까지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께서 그들을 우리들의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셨다. 38) 그러자 사울이 지휘관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단언하였다. `누군가가 여호와께 죄를 범한 것이 틀림없소. 그런 자가 누구인지 당장 찾아내시오. 39) 죄인으로 밝혀지는 사람은 처형될 것이오! 살아 계신 여호와 앞에 맹세하지만 내 아들 요나단이 죄인으로 드러나더라도 처형될 것이오' 그러나 온 군인들 가운데서 그 말에 찬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40)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제안하였다. `나는 내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저편에 가서 서 있겠으니, 여러분은 모두 이편에 서 있으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말에 응해 주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41) 그러자 사울이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여, 왜 주께서 오늘 제게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는 제비로 확실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오늘 우리의 허물이 저나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을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 허물이 백성에게 있다면 둠밈을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사울과 요나단에게 제비가 뽑히고 백성은 그 허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42) 사울이 또 명령하였다. `너희는 이제 제비를 뽑아 나와 요나단 중에서 죄인을 찾아라!' 또 다시 제비를 뽑으니 죄는 요나단에게 떨어졌다. 43) [죽음 직전에서 구출된 요나단]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나에게 숨김없이 말하여라!'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제가 막대기 끝으로 꿀을 조금 찍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그의 처형을 단언하였다. `내가 너를 살려둔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45)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나단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그는 오늘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런 그가 죽어야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살아 계신 여호와 앞에 맹세하지만, 그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가 오늘 이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입을 모아 요나단을 죽음 직전에서 구출하였다. 46) 그러자 사울은 더 이상 블레셋 족속을 뒤쫓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 기브아 산지로 올라가고, 블레셋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초심과 첫 믿음을 잃은 사울 왕은 정말이지 한심한 왕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36-42)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는 사울 왕의 헛된 맹세가 퇴색되어 갑니다. 사울은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신앙적인 고백도 없는 맹세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상황파악마저도 헛짚고 맙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37). 하나님의 대답이 없는 것은 맹세를 지키지 않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의 헛된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자기의 맹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추궁하며, 또 다른 헛된 맹세를 합니다. 맹세를 지키지 않은 자가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39). 이로 인해서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사랑하는 아들 요나단을 죽일 위기에 어리석게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하는 일은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백성들은 답답하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사울의 두 번째 맹세에 백성들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나단이 제비를 뽑혔고, 사울의 맹세대로 요나단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42).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43-46) 요나단은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을 사울에게 말합니다. 본문에서 요나단을 보면 변명하거나 핑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순종하려 합니다. 다만 사무엘서의 기자가 요나단이 아버지가 백성들에게 하는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맹세대로 백성들 앞에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44). 사울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계속해서 어기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의 헛된 맹세를 어긴 것을 죄로 인정하고 아버지의 죽으라는 명령에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 요나단과 사울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헛된 맹세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사울의 헛된 순종 때문에 유능한 인재요 나라의 기둥 같은 인물이 사라질 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 이렇게 허무한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을 죽이려는 일에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구원합니다(45). 이후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지 않고 돌아갑니다(46). 사울의 후퇴는 블레셋이 다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이은 실패가 결국 블레셋에게 자신과 요나단의 죽게 되는 결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적 용 : 우리가 하는 기도 속에 헛된 맹세는 없습니까? 헛된 맹세는 헛된 순종을 부르고 결국 우리를 망하는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바른 맹세(서원)를 통해 바른 순종의 길을 갑시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각자의 타고난 개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린 점으로 취급하는 순간 상처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최일도 목사)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상대방의 의견이 내 의견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서로의 의견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나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것이지 틀린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 설 교 >
요나단에게 내린 사형 선고와 구명
1.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사울의 오만함(36,37)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을 밤새도록 추격해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했다(36절). 이때 사울에게는 열심은 많았으나 재량은 별로 없었다. 군사들은 극도로 피곤해서 먹을 것에 굶주렸던 만큼 잠도 부족했다. 다만 제사장만이 갑자기 중단되었던 의식을(19절)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36절). 왕이나 높은 사람들 주위에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따르도록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제사장이 이를 제안하자 사울은 부끄러움 때문에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묻는다`(37절).
2. 사울과 요나단의 충돌(38-46)
사울이 요나단을 기소하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쳤다.
(1) 하나님은 불쾌함을 표시함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저주받은 사건을 찾게 하셨다. 사울은 금지된 식물을 먹음으로써 이스라엘 진영을 괴롭힌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비록 요나단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다(39절).
(2) 요나단이 범죄했다는 사실이 제비로 밝혀졌다. 사울은 요나단과 한 편에서 제비를 뽑고 백성들은 다른 편에서 제비를 뽑게 했다. 아마 사울은 이 사건에서 요나단도 자기처럼 결백하리라고 확신하였던 모양이다(40절). 드디어 요나단이 뽑혔다(42절).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섭리 중에 합법적인 권위를 지지해 주시며 전혀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사람을 구출할 또 하나의 길을 마련하셨다.
(3) 요나단은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하였다. 사울은 화가 나서 요나단을 저주하며 사형을 선고하였다. 요나단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그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심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43절). 요나단은 그 법을 몰랐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관대한 마음으로 자기의 운명에 복종하였다. "하나님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항복하는 것이 싸우는 것만큼이나 용감할 때도 있다. 사울은 요나단이 효성스럽게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도 화를 풀지 않았으며 처벌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또 다른 저주를 내리면서 요나단을 심판하였다(44절).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내가 법대로 네게 실행치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1)사울은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서둘러 이 판결을 선포하였다. 요나단에게는 그 판결에 대해 항변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요나단이 행한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었다. 금지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단을 반역이나 불순종의 죄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2)사울은 진노한 가운데 그렇게 했다. 요나단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재판관은 온유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판결했을 것이다. 하물며 아버지야 어떠했겠는가. 진노하며 가혹하게 실행할 때 의의 값어치는 떨어진다.
3)그 저주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저주가 사울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그래서 그 저주가 자신의 머리로 돌아갔다. 요나단은 구출되었으나 하나님은 이를 사울에게 행하셨다. 또한 그 이상으로 행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와 같은 저주의 말에 동의하셔서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하지 않게 하자`( 64:8 시 64:8). 그러나 사울이 요나단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보였을 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처벌한 것이다. 이같이 곤란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무엘이 없는데도 제사를 드린 사울의 오만함을 시정하시려고 했던 것이다.
(4) 백성들은 요나단을 그 아버지의 손에서 구해냈다(45절). 지금까지 그들은 사울에게 매우 고분고분했다. 사울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묵묵히 따랐다(36,40절). 하지만 요나단의 생명이 위태한 지금은 사울의 말이 더 이상 그들을 구속하지 못했다. 그들은 요나단의 처형을 극구 반대했다. "나라의 보배, 나라의 귀공자인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그는 나라를 위해 용감히 목숨을 내어놓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승리를 얻었는데 법과 명예의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 그의 생명을 희생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광스럽게 하신 자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전체의 유익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열심을 내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 뿐 아니라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들은 폭력으로 요나단을 구출하지 않고 정당한 사리와 결단으로 그를 구하였다. 그들은 요나단이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그들은 요나단을 대신해서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다`고 변명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수고를 통해서 일을 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귀중하며 함부로 저버릴 수 없다."
(5) 이 사건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계획은 무산되었다(46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그래서 완전한 승리의 기회를 놓쳤다.
기도가 먼저인 자들이 받는 복들
이한배목사 / 삼상 14:36-42.
ㅇ 질 문 – 왜 벧엘기도를 해야할까요 ?
I. 서 론
기도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내일부터 21일까지 제19회 벧엘기도회를 합니다.
왜 우리 목사님은 일 년 중 가장 바쁘고, 가장 피곤할 때 기도하라고 하시는걸까요 ?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2020년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2020년은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준비하는 것 중에 가장 잘 하는 것은 그 미래를 준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가장 바쁘고, 가장 피곤한데, 기도하며 미래를 준비해야하는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그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항상 모든 좋은 것에는 위기도 함께 옴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① 그 위기를 극복하면 그 좋은 것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 좋은 것의 주인공이 됩니다.
② 그러나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좋은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2020년을 주십니다.
그러나 복된 2020년은 위기와 함께 우리에게 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한 자들에게는 2020년이 복된 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2020년이 아무런 의미 없는 해가 됩니다.
오히려 불행한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2) 왕이 된 사울에게 찾아온 위기는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입니다.(삼상 13:5-7)
블레셋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보병 3만 명에 병거 6,000승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철붙이 하나 없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이 무기를 만들까바 대장간을 완전히 폐쇄해서 철붙이 하나 없었습니다.
(3) 이제 왕이 된 사울은 이 블레셋을 물리쳐야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명실상부한 왕이 됩니다.
이 블레셋을 물리치느냐 못 물리치느냐에 사울 왕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4)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서 모두들 도망을 갑니다.
3,000명의 군사들이 600명만 남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큰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3,000명이 다 싸워도 6,000승의 병거를 몰고 온 블레셋의 3만 명의 군대를 대적을 할 수 없는데, 3,000명 중에 1/5만 남은 것입니다.
사울 왕의 운명은 철체절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5) 이런 위기의 때에 아들 요나단이 나섰습니다.
아버지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안 요나단은 오직 자기의 병기를 든 자만 데리고,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블레셋의 수비대를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요나단이 20명가량을 죽였는데,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삼상 14:14-15)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6) 사울의 군대가 보니 블레셋 진영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블레셋 군인들로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진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7) 이때에 사울은 군사들에게 오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말고 금식하며 싸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무엇을 먹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맹세를 시켰습니다.
(8) 그런데 그때에 요나단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맹세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다가 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수풀에 벌집이 있었는데, 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벌집에는 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지팡이 끝에 꿀을 찍어서 먹었습니다.
(9) 그러자 옆에 있던 군인이 요나단에게 그의 아버지 사울이 군인들로 하여금 맹세하게 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0) 그러나 사울 왕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11) 그런데 하나님이 블레셋 군사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게 하자, 블레셋은 혼란에 빠졌고, 이때에 사울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그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을 떠났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12) 이렇게 블레셋 군사들이 도망을 가는 것을 보자, 사울 왕은 밤이 되었는데도 내일 동틀 때까지 계속하여 블레셋을 추격하자고 합니다.
백성들은 왕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합니다.
(13) 그때에 제사장 아히야가 사울 왕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14)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야가 하자는 대로 하나님께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주의 종이 기도하자고 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데 왜 기도를 해야할까요 ?
이렇게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데, 먼저 기도하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
1. 큰 불행을 막아줍니다.(삼상 14:38-42)
밤에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려는 큰 모험을 하려던 사울 왕은, 기도해도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이 없자, 직감적으로 자기들 중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오늘 저녁까지 아무도 먹지 말라고 맹세하게 한 맹세를 어긴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우리가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도,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길에 있는 위기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중에 누가 이 맹세를 어겼는지 찾아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합니다.
비록 자기 아들 요나단이라도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기가 했다는 자가 없습니다.
요나단이 했다고 고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백성들과 가지 집안 중에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그랬더니 자기와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죄가 있다고 제비가 뽑혔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과 자기 아들 요나단 사이에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요나단이 저주의 맹세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큰 불행을 막아준 것일까요 ?
우리는 여기에서 아이성 전투를 떠올리게 됩니다.(수 6:15-21)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성에서 취한 모든 물건은 하나님의 고간에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성벽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여리고성의 물건들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고간에 드렸습니다.
이렇게 여리고성을 취한 후에 여호수아는 다음 성인 아이성을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수 7:5)
그래서 여호수아와 백성의 장로들이 함께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 머리에 티를 무릎 쓰고 저물도록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왜 이런 패배를 주셨느냐고 묻자, 하나님은 그들 중에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도적질 한 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제비를 뽑으니 유다지파 중에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을 추궁하자, 아간은 자기가 전리품 중에 탐이 나서 물건을 훔쳐서 자기 장막 가운데 땅 속에 숨겼다고 했습니다.
(1) 이렇게 아간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를 했습니다.
(2) 그리고 아들과 같은 아간은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를 만들었습니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 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1) 자기 아들 요나단이 자기가 맹세한 것을 어기고 꿀을 먹을 것을 모르고 그 밤에 위험한 야간전투를 했다면 큰 패배를 당할 뻔 했습니다.
(2) 아들 요나단이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다가 오히려 전세가 역전이 되는 큰 패배를 당할 뻔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울 왕의 입지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비록 기도의 응답은 받지 못했지만, 제사장 아히야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자고 할 때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대패의 불행을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2020년이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희망의 해라고, 복 주신 해라고 사울 왕과 같이 기도하지도 않고 달려 나가지 마시고, 비록 제19회 벧엘기도회에 참석을 해도 여러분이 바라는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히야 제사장의 말씀에 순종하여, 비록 기도의 응답이 없었더라도 기도했던 사울 왕과 같이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2020년에 당할 큰 불행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2. 죽어야만 할 자에게도 살 길이 열립니다.(삼상 14:43-46)
요나단이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사울 왕은,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했던 것과 같이, 이실직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전쟁을 하다가 숲속을 지나가는데 벌집에 벌들이 다 날아가고 꿀이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지팡이 끝에 꿀을 찍어서 먹은 것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버지 사울 왕이 그런 맹세를 하게 한 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그런 명령이 있었는지를 모르고 그랬기 때문에 이 일에 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에는 정상이 참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부(taboo)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부의 법은 알고 범하든 모르고 범하든 범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파리약 장사가 오면 사이다병에 파리약을 사서 담아놓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갔다가 온 딸이 그것이 사이다인줄 알고 마시면, 그것이 파리약인줄 모르고 먹었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먹었어도 죽습니다.
이렇게 타부는 알고 범하든 모르고 범하든 죽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왕이라고 자기 아들이 범했다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왕의 신뢰도가 완전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요나단도 자기는 모르고 그랬지만 자기는 죽어야만 한다고 하고, 사울 왕도 비록 자기 아들이지만, 그가 모르고 범했지만 요나단은 죽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 전쟁에 승리를 거둔 것은 바로 요나단이 오직 병기든 자만 데리고 죽음을 무릎 쓰고 블레셋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거둔 것인데, 오늘 이런 큰 승리를 이스라엘에 안겨준 요나단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오늘 자기들이 블레셋에 대승을 거둔 것은 바로 요나단 때문이며, 요나단이 이스라엘에 대승을 가져다준 것은 하나님이 블레셋을 큰 떨림에 빠뜨렸기 때문인데, 만약에 요나단이 죽을 죄인이라면 하나님이 그런 요나단을 도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의 논리가 이기어서 죽어야만 했던 요나단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사랑하는 아들 요나단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번 제19회 벧엘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기도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여러분이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비록 응답을 받지 못했지만 아히야 제사장의 말을 듣고 기도했던 사울 왕과 같이, 이한배 목사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살 길이 열립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 다시 사는 길이 열립니다.
3. 문제가 해결 됩니다.(삼상 14:46)
지금 사울이 당면한 문제는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왕이 된 사울은 그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만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것을 할 힘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2020년에, 우리에게도 꼭 해야만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힘도 방법도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본문 (v.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인데, 그들을 더 이상 추격하지도 않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발로 걸어서 돌아갔습니다.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히야 제사장의 말씀을 듣고 사울 왕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해결해야만 하나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이번 제19회 벧엘기도회에 기도할 때 사울 왕과 같이 여러분이 구하는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기도하는 자들은 그 기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줄 믿습니다.
III. 결 론
D. L. Moody의 친한 친구였던, 매우 영감 있는 좋은 신앙서적을 많이 쓴 유명한 침례교 목사인 F. B. Meyer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사들은 층계로 된 선반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을 했다. 더 높은 선반에 더 좋고 큰 은사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인격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쉽게 그 은사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은사들은 밑으로 내려가는 선반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 밑으로 내려갈수록 더 좋고 더 큰 은사들이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인의 인격이 얼마나 더 높아지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더 낮게 구부리느냐이다.
인생이 가장 큰 비극은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드리지 않은 것이다.
자기 중심의 신앙
전승문목사 / 삼상 14:43~46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흔히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50이 넘어가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가 된다고 합니다. 나이 6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 70이 넘어가면 돈이 많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비슷하게 살게 된다고 합니다. 돈 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인생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값지고 더욱 소중해집니다. 특히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는 오직 신앙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소용이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권력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죽음의 순간에 더욱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생활을 잘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 7:21~23)”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 해야 합니다. 제대로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신앙생활을 가장 잘못한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섭게 야단맞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정말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 23:13, 33)”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이토록 큰 책망을 받았을까요? 신앙생활을 자기중심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신앙생활을 자기중심으로 한 겁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대로 한 겁니다. 그러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안 하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울왕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병사들이 다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600명! 고작 600명만 남고 다 도망가 버린 겁니다. 게다가 사무엘마저 불같이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삼상 13:13~14)” 큰일 났습니다. 정말 큰일 났습니다. 사무엘은 돌아가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블레셋의 막강한 군대는 위협을 하고... 정말 큰일 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위기 상황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반드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울은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고민은 했을 겁니다. 심각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정말 열심히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위기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요나단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사울 곁에 있었다는 겁니다.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 요나단 덕분에 사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요나단이 홀로 적진을 뚫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지진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도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던 전쟁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해주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고 이렇게 해주신 것일까요? 당연히 요나단입니다. 요나단 그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이토록 놀라운 일을 일으켜 주신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는데 이스라엘은, 사울의 왕국은 의인 한 명 요나단이 있어서 다시 기회를 얻게 된 겁니다.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요나단처럼 믿음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이 은혜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말세지말 대환난의 시기입니다. 성경이 예고한 말세의 징조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일찍이 경험해본 적 없는 무서운 전염병도 일어났습니다. 터키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무시무시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해질 겁니다. 말세지말이기 때문입니다. 대환난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 한 사람의 믿음이 다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가정을 살리고 그래서 교회를 살리고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살려내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진정한 믿음을 가진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무튼 요나단 덕분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중과부적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지만 승리하게 된 겁니다. 그건 인간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요나단이 홀로 적진에 뛰어들 때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단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과 함께하실 때, 임금인 사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미 영광이 떠나버린 제사장 아히야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에게 대제사장의 에봇을 입게 하고 그와 함께 있었던 겁니다. 또한 법궤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법궤를 앞에 두고 예배를 드리겠다고 그런 겁니다. 정말 예배드려야 할 때는 드리지 않다가 엉뚱한 시간에 그런 겁니다. 진정한 제사장 사무엘은 돌려보내고 영광이 떠난 제사장 아히야만 곁에 두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끝내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유리하게 되자 법궤를 물리고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는 것일까요? 사울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겁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드리기 싫으면 드리지 않는 겁니다. 기도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일수록 남에게는 더 엄격하기 마련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군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겁니다. 자신들은 자기중심으로 자기 마음대로 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했는지 모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정말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24절)” 난데없이 금식을 선포한 겁니다. 전쟁하러 나가는 병사들에게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겁니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피곤해집니다. 자기중심으로 외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이 다 피곤해집니다. 바리새인들이 있으면 그 주변이 힘들어지는 겁니다.
이게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이 서는 겁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내가 한다고 남들도 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자신은 제대로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똑바로 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한줌의 소금이 되어 녹아드는 겁니다. 한 자루의 초가 되어 자신을 태우는 겁니다.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히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믿음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서,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금식을 선포한 겁니다. 그러면 자신을 믿음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줄 줄 알고 그런 겁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백성들만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한 요나단이 전장에서 꿀을 발견하고 조금 찍어먹었습니다. 요나단이 지쳤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었습니다. 그 꿀을 맛보자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요나단은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그거라도 먹지 못했다면 아마 쓰러지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나마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의 무서운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요나단이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29절~30절)” 그 날 백성들이 음식만 제대로 먹었다면 더욱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너무 허기져서 도망치는 블레셋 군사들을 쫓아갈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녁 6시가 넘자마자 짐승들을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 6시에 끝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너무 허겁지겁 먹다보니 피도 빼지 않고 그대로 잡아먹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코셔(Kosher)라고 해서 절대로 피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파서 코셔 규례마저 어기고 마구잡이로 잡아먹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3절)”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게 사울이 할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요? 사울입니다. 사울 때문에 사무엘이 돌아간 겁니다. 사울이 예배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울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진 겁니다. 사울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 때문에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지 못한 겁니다. 이유 없이 금식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 남 탓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없고 다 남들이 잘못한 거라고 합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허겁지겁 허기를 면하자 그 밤에 블레셋을 추격하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데 추격을 하자는 겁니다. 블레셋은 이미 멀리 도망갔는데 그런데도 추격하자는 겁니다. 그러자 제사장 아히야가 말했습니다 :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6절)” 사실은 아히야 역시 뭐라도 해야 하겠으니까 나선 겁니다. 명색이 대제사장이라 우림과 둠밈이 있는 에봇을 입고 있으니 하나님께 물어보자는 겁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사울도 아히야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어떻게든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어떻게든 믿음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아무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블레셋을 추격할지 말지 우림과 둠밈으로 물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37절)” 당연한 겁니다. 사울도 믿음이 없고 아히야도 믿음이 없는데 어찌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울은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내겠다고 합니다 :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8절)” 누구 때문일까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요? 사울입니다. 사울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이러는 겁니다.
그 결과 제비에 뽑힌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 책임이 있다고, 요나단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뽑힌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요나단 때문이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끝내 요나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4절)” 정말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요나단에게 가장 큰 책임을 지게 해서 죽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어째서 요나단이 제비에 뽑혔을까요?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이 뽑혔다면 그는 필경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백성들이 막아줄 것입니다. 과연 백성들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입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입니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5절)” 그렇게 백성들이 요나단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하나님을 운운하던 사울이 말없이 따릅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4장 끝에 사울이 정복한 나라들이 나옵니다 :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7절~48절)” 사실상 엄청난 업적인데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다입니다. 딱 두 절만 언급하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한 일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중심으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 잘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절대로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요나단을 구원하다
삼상 14:36-46 / 우인택 목사(통단영락교회)
오늘 본문은 사울의 금식 명령을 위반해 죽음의 위기 앞에 선 요나단을 백성들이 구원한 것이 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36절에 사울은 백성들이 소와 양을 잡아먹고 기력을 회복하자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라고 말합니다. 군사들이 지쳐서 지체된 전쟁을 속히 끝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제의에 기력을 회복한 백성들은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제사장 아히야가 나서서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라고 말합니다. 아히야는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전쟁을 지휘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순서라고 작심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승패도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까?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데로 결정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울은 결국 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울을 반면교사 삼아,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7절에 사울은 아히야 제사장의 권고대로 하나님께 뜻을 물었으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물음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의 기도에 침묵하신 것은 사울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물음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물론, 외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사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은, 요나단이 금식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상사가 발생하게 된 근원적인 원인은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율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제사를 집례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외적인 요인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무조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렘 7: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응답을 지체하시는 때도 있습니다(눅 18:1-8). 그러나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실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는 반드시 요청됩니다(사 59:1-3).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과 행위에 어떤 잘못은 없는지, 두 마음을 품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솔직한 자세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약 1:6-7, 4:2-3). 그러할 때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또 지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를 살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은 이유를 알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40절에 사울은 요나단과 함께 한쪽에 서고 나머지 백성들은 반대편에 서도록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자기와 아들 요나단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죄가 아들 요나단에게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39절의 맹세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사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41절에 요나단과 사울이 뽑혔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는 32절의 백성들이 가축을 피째 먹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피곤한 전쟁을 한 후, 극심한 허기로 이성을 잃고 고기를 피째 먹었지만, 이내 사울의 명령에 따라 돌 위에서 가축을 잡은 것으로 보아 고의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실수로 저지른 그들의 죄를 간과해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행위만을 보시고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중심을 보시고 인간의 연약함까지 헤아리시며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고의로 범한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지만, 실수로 범한 죄는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제비뽑기에 자신이 뽑혔을 때 사울의 맹세가 억지스럽고 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처벌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얼마든지 항변할 말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자 아버지인 사울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순순히 복종한 요나단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대답은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백성이 요나단을 구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적진에 들어간 요나단을 도우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백성을 통해 요나단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끝까지 진리를 행한 요나단을 지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많은 경우 요나단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의 사명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순교를 통해 그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은 맹세를 남발함으로 자신의 지도력도 잃고,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기에 그는 죽음 앞에서도 구원받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데로 결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행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기도 응답이 지체될 때 외적인 요인보다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또 지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살피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서두르는 사울, 요나단의 위기
QT / 삼상 14:36-46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36 사울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 밤에 블레셋 군대를 쫓아 내려가서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약탈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도록 합시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37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뒤쫓아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38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군지휘관은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오늘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겠소.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허물이 나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40 사울은 온 이스라엘 군인에게 계속해서 말하였다. “귀관들은 모두 이쪽에 서시오.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은 저쪽에 서겠소.” 군인들이 모두 사울에게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41 사울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42 사울이 말하였다. “제비를 뽑아서,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 가운데서 누가 죄인인지를 가려 내시오.” 그러자 요나단이 걸렸다.43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나에게 말하여라!” 요나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꿀을 찍어서 조금 맛보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선언하였다. “요나단,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천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다.”45 이 때에 온 백성이 사울에게 호소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큰 승리를 안겨 준 요나단을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늘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요나단을 살려 내어, 그는 죽지 않았다.46 사울은 블레셋 사람을 더 이상 뒤쫓지 않고 돌아섰고, 블레셋 사람도 자기들의 본 고장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무모하고 무식한 인물 사울이 유독 거슬린다.
사울은 전투에 나온 군인들에게 맹세를 시켰다.
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전까지 금식을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전투에 나가는 장병들에게 밥을 굶어가며 전쟁에 임하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가?
이제 보면 사울은 종교적 열성으로 상식을 압박하여 신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전투를 치르면 되는 것을 종교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전투 전에 자신이 제사를 드린 것도 그렇다(13:9).
13:9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승전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맹세로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이끈다(14:24)
14:24그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사울이 군인들에게 “내가 오늘 저녁에 적군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아무것이라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고 맹세시켰기 때문에, 군인들이 모두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사울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라 가면 될 일이었다.
나서서 맹세 같은 거 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요나단은 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그는 꿀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전투에 임했다.
병사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양과 소와 송아지를 피째 먹어치웠다.
이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사울은 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지 궁금했고, 그 원인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다.
결국 원인은 요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이 이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사울이다.
그가 전투병에게 금식을 맹세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둘째는 병영내에 전달된 금식 명령을 요나단이 듣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상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율법에서 금지한 피째 동물을 섭식하는 행동을 한 병사들이다.
실제적인 범죄는 이들이 지은 것이다.
그러니 우림과 둠밈이 어디 쪽에 나온다 한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보건대, 사울의 어리석음과 무모함과 섣부름이 문제였다.
사울은 그저 겸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 될 일이다.
스스로 무엇을 보태거나 빼거나 해서 자신이 주목받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왕이 되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왕!!
모든 사안에 중심에 서고 싶은 왕!!
피째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제 영화관에서 본 퇴마록이 떠오른다.
힘을 추구하는 자 결국 악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팔아야 한다.
해동밀교는 자비를 구현하는 종파였으나, 서교주는 자비가 아니라 힘을 추구했고, 그 힘을 주겠다는 수많은 신들을 모시고자 살인을 밥먹듯 했다.
결국 자신과 해동밀교 전체를 악마에게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오컬트 소설의 내용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현실의 윤석렬도 힘을 추구했다.
자신이 모든 권력의 정점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들을 다 이루려고 했다.
명태균 게이트가 보여 주듯이, 여론조사를 조작하여 대선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12.3 계엄과 노상원의 수첩이 보여 주듯이, 자신의 정적을 싸그리 죽여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국민을 계몽한다는 말도 안되는 궤변이나 늘어 놓는 윤석렬은 힘의 추구와 거짓이 어떻게 합력하는지 잘 보여준다.
사울처럼 윤석렬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했던 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의 가족과 지인과 추종자들 모두 죽음의 골짜기로 끌고 간다.
몰살은 힘을 추구하는 자가 가는 종착지다.
함부로 맹세하지 마라.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하지 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하라.
섣부른 종교적 열성으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아는 듯 나서지 마라.
전광훈과 손현보가 들어야 할 메시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개신교 목사들이 계속해서 들어야 할 메시지다.
자정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개신교는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교회의 대형화를 제어해야 한다.
스타 목사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목사되기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총회와 노회 정치가 더욱 합리적, 민주적이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분수령, 기로에 서있다.
급진적인 변화가 시급하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모든 교회는 망하게 된다.
개교회는 담임목사가 인격적으로 관계 맺고 목양 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인원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300명까지를 최대한으로 두고 그 이상이 되면 분립해야 한다.
대신 연합 모임을 강화하고 연합된 우주적 교회의 일원임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목사에 대한 감사, 치리 등이 더욱 강화되고, 심지어는 가톨릭처럼 임지를 순환시키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개신교회가 나오지 않고서는 더 이상은 안된다.
규모로 돈으로 힘을 과시하는 교회는 더는 교회가 아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면서 목사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목사들은 피정에 들어가게 하거나 일정 기간 목회 금지 조치(특히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에)를 취해야 한다.
목사가 바뀌지 않으면 교회는 바뀔 수가 없다.
더 이상 욕먹지 않으려면 목사 양성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목사 안수는 가톨릭처럼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성품 훈련, 생활 훈련, 상담 훈련 등을 두루 거치도록 해야 한다.
최소 10년의 교육 후에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 좋겠다.
신학교 5년, 목회 실습 5년 그 이후 안수를 준다.
충분히 검증된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
바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왕이신 그 나라를 꿈꾸자.
사람이 신노릇 하는 교회를 철거하라.
진짜 그럴거면 교회 건물을 철거하라.
순전한 마음으로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모습으로 돌아가라.
[오늘의 기도]
너도 나도 사울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놓은 현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이단 교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광훈과 손현보가 그렇습니다.
혐오로 장사하는 개신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 정의와 공평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야 정책적으로 실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선동하는 것을 어떻게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과연 그것이 복음입니까?
주님, 당신의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게 하소서.
새로운 교회를 보여주소서.
복음주의가 왜곡되지 않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모든 것이 되어 복음대로 사는 삶을 무시했던 죄악을 용서하소서.
함부로 맹세하고, 함부로 규정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울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스스로가 신이 되어 영원한 권세를 누리려는 악한 귀신의 장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죄가 뉘게 있나
삼상 14:36-46 / 은석교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도 결코 잘못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선민의식을 가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기면서도 선민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즉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이 되게 하신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기를 철저히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실현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제사 드리기를 게을리 하고 제물 바치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악행을 그칠 것을 외치는데, 선지자가 외치는 악행은 고아와 과부 즉 약자를 학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이라는 법을 지키고 제사와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약자를 도와주고 위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가 곧 사랑을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는 규례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부지런히 갖다 바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 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항상 성경을 넘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선에서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십일조 하고 시시때때로 감사헌금 잘하고 열심히 성경 보며 기도하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1:23절을 보면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이 책망에 이스라엘이 제물을 안바친 것이 나옵니까? 제사를 안드린 것이 나옵니까? 아무리 열심히 십일조하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의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약자를 위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단순한 성경책이 아니라 참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절대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고 우리 멋대로 우리가 만든 몇가지 법칙을 실천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몇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가지 규례만 지키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게 한 것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신앙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제정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자기 멋대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자기 멋대로 상상하여 이런 저런 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령 예배를 경건하고 거룩히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시간에는 정장을 하고 와야 한다거나 깨끗한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규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늦는 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미리 와서 찬송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된다는 법을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절기에는 얼마 이상을 헌금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성경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법을 만들어서 교인으로 하여금 자기 법에 복종하게 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의 잘못됨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1절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배가 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를 가져다가 피 채 먹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미처 피를 빼지 못하고 급하게 요리를 한 것 같습니다. 레위기 19:26절의 규례를 보면 고기는 피 채 먹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레 17:11).
즉 하나님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누구든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법의 의미인데 사람들은 법의 의미를 보기보다는 법 자체를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알게 된 사울은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소를 끌어다가 정결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지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누구를 위해서 단을 쌓은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백성을 위해서입니까? 사울은 자신을 위해 단을 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피를 먹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사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여 단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라 단지 죄를 해결받기 위한 단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동안 단을 쌓지 않은 것은, 단을 쌓은 필요를 느끼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급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다가 급한 상황이 물러가면 도움을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을 쌓을 필요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승리에 대한 감사의 단을 먼저 쌓은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은, 결국 죄로 인해서 올 수 있는 징계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죄를 짓고 나면 헌금을 더하고 주일을 더 잘 지키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은 사울이 다시 블레셋을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때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유하고, 사울은 하나님께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칠 것인가를 묻습니다(37절). 그런데 사울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대답을 안하십니다. 이것을 사울은 이스라엘에 내에 죄가 있기 때문으로 단정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들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 요나단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39-40절을 보면 결국 죄인으로 요나단이 뽑히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사울에게 꿀을 먹은 사실을 고하게 됩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에 대해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절)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요나단의 행위가 죽어 마땅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선포한 금식에 대해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자신의 물음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분명히 하나님의 규례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울이 세운 법을 이행치 않았을 뿐입니다. 사울의 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자기 멋대로 부과한 규정이며 규칙일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짐이며 고통일 뿐인 법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사울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고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삶의 규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운 규정이나 규칙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법보다도 사람이 세운 규정과 규칙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절대 원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것이며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넘어서 사람이 또 다른 규칙과 규정을 만들어 요구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한 예배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배 참석자의 옷차림이나 시간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옷차림이나 시간 준수 같은 것이 예배의 경건성을 만들어 낸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것을 제멋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내세워 요구한다면 그것이 곧 성경을 넘는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시간준수와 같은 것은 강요할 규칙이 아니라 형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와질 수 있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히려 인간이 세운 법적인 문제들이 자신은 의롭게 여기고 타인에 대해서는 죄인 취급을 해버리는 오류를 가져올 수 있음에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사울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사울은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게 한 그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요나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단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요나단이 죄인으로 뽑히게 되고, 요나단이 사울의 금식 선포를 어겼음이 드러남으로써 사울은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백성들은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즉 요나단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죄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까? 사울과 요나단이 뽑혔는데 요나단이 죄가 없다면 남는 것은 사울이 아닙니까? 결국 사울이 죄 있는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 대해 화를 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요나단이 죄있는 자가 아니라 자의적인 명령을 내려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한 사울을 죄있는 자로 규정합니다. 백성들이 고기를 피 채 먹은 것을 금식으로 인해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 미처 하나님의 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고기를 먹은 것이라면 사울의 법이 오히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에게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뉘게 죄가 있는가 알아보자고 하였지만 정작 죄는 자신에게 있음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실천할 때 그것을 마치 신앙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세운 법을 준수함으로써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에서 예배 시간 몇 십분 전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결국 그 말대로 몇 십분 전에 온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되고 늦게 온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곧 사울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법을 요구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법에 매이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이것이야 말로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시간의 법을 제시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시간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에 화를 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짐이 되지도 않고 우리를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넘어서 인간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규정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이 짐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 규정한 법에는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불의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면서도 이상하게 신자들이 말씀을 듣기보다는 사람의 말을 더 즐겨 들으려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대해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점검하고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맞는 말 같으면 무작정 받아들이는 실수를 멈춰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백성들의 반대
삼상 14:36-52 / 더온누리교회(매일성경묵상)
사울 왕은 백성들이 피를 머금은 고기를 먹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율법의 형식따라 고기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부르게 먹였으니 쉴 틈을 주지 말고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일 것을 백성들에게 말한다. 백성들은 왕이 좋을 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제사장이 사울왕에게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다. 사울은 제사장의 권면을 따라 하나님께 뜻을 구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응답하지 않으셨다(36-37절).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거절이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왜 하나님께서 전쟁을 중단 시키셨는지 그 원인을 찾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천명한다. 심지어 “…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허물이 나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새번역_39절).”
이에 사울은 요나단과 함께 이쪽에, 백성들은 저쪽으로 나눈 후 하나님께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새번역_41절).”
결국 요나단이 하나님의 무응답의 원인으로 뽑히게 된다. 요나단은 막대기 끝으로 꿀을 찍어 먹은 것을 실토한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절)” 하지만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였다(45절). 사울은 블레셋을 추격하는 것을 그쳤다(46절). 이후 사울은 완전한 정복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패퇴시켰던 민족들과 가족을 소개한다(47-52절).
1. 무응답의 하나님(36-37절)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거짓 신앙에 반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울은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19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았다(13:9,13절). 하나님 백성의 상태보다 자기 목적, 자기 공로를 세우는데 더 관심이 있었서 중요하게 여겼다(24절). 그러다가 제사장이 제안하여 마지못해 하나님께 물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응답으로 사울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으며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기도에 속지 않으신다.
2. 보다 못한 백성들의 거절(38-46절)
껍데기 뿐인 신앙은 언젠가 벗겨진다. 들통이 난다. 사울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맹세를 어긴 죄인을 색출하여 처형하겠다고 하자, “모든 백성 중 한 사람”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왕이 좋을대로 하라는 것이다. 왕이 문제라는 것을 백성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맹세를 어긴 죄인이 요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볼 때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역하여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사울이 폭주하여 요나단을 죽이러 하지만, 보다 못한 백성들이 나서서 사울과는 정반대의 맹세를 하며 요나단을 살린다.
사울은 백성에게도 거절 당한 것이다. 형식적인 신앙의 껍데기로 사람들을 속이고 통제할 수 없다. 실체는 반드시 드러난다.
3. 사울의 업적과 가족(47-52절)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을 잠시라도 이기는 나라를 만들었다.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47-48절)” 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사울에 대한 이런 평가가 웬지 껄끄럽다. “이겼다(라샤)”의 의미는 “악을 행하다”라는 뜻으로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이길 때 매우 잔혹스럽게 주변 민족들을 대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이란 의미다. 인간적인 능력으로만 보자면 사울은 탁월한 전쟁 기술자 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불러 모아서” 만들어낸 인간적인 강한 군대였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분명하게 목적하였던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는” 역사는 끝내 이루지 못한다. 늘 싸움은 있었지만 완전한 진멸은 하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생을 덧칠 할 수 있다. 사울의 삶이 그랬다. 그는 하나님을 늘 찾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전장에서 굳센 의지로 서 있도록 하나님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런 그의 자세는 전쟁을 시작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문제부터, 전쟁 중 자신의 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백성들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 모습을 통해 쉽게 보고 느낄 수 있다.
– 사울은 늘 하나님을 이것 저것 다 해보고 찾는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는 장식품일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힘 센 사람, 용감한 자들의 힘”을 더 의지 한 듯 하다….
-하나님의 침묵에도 백성들의 반대에도 자기 고집 꺽지 않는 완고함이 서글프다…
*주님, 주님보다 내가 보기에 힘센 사람, 용감한 사람을 먼저 찾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의 싸움은 주님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빋습니다.
*주님, 주님의 침묵을 무겁게 받아들여 먼저 내 자신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