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일재
1935년 2월11일 경북 안동 출생.
1955년 1월 안동사방관리서(임업공무원).
1965년 8월 경북도청 건설국 산림과.
1973년 영일지구 황폐지 복구계획의 실무 기안자.
1976년 6월 대통령근정포장.
1989년 7월 안동사방사업소장.
1992년 7월 경북 동부(포항)치산사업소장.
1992년 8월 임업기정(서기관)으로 명예퇴직.
“이곳이 국제항공 노선의 관문인데…”
임일재씨와 기자가 동승한 승용차는 영천시내를 거쳐 고경면 제3육군사관학교(忠誠臺) 앞을 지나 영천시와 안강읍의 경계 지점인 강교리 휴게소에 들렀다. 시티재 아래로 안강(安康)들이 펼쳐져 있다.
“아! 저 안강 못가에서 국군과 인민군들 한없이 많이 죽었어요.”
휴게소에서 차 한잔을 마신 다음에 다시 28번 국도를 계속 달렸다. 안강읍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68번 지방도로 길을 바꾸어 북상했다. 도로 서쪽으로 ‘무역의 군주’로 이름 높은 신라 흥덕왕의 능역이 보인다.
여기서 계속 20리쯤 달려 68번 지방도와 31번 국도가 교차되는 지점인 기계면 ‘전곡4거리’에 이르렀다. 임선생은 길가에 승용차를 세운 다음 기자에게 함께 내리자고 했다. 그는 멀리 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산기슭에 있는 동네가 기계면 문성동인데, 1971년 우수 새마을로 뽑혔습니다. 그해 9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저 마을을 시찰하면서 이 일대의 황폐지를 보고 경북지사에게 ‘이곳은 국제항공 노선의 관문인데, 영일지구 한수해의 근원이 되므로 근본대책을 세워 버려진 땅을 되찾도록 연구 노력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이 영일지구 사방사업을 하게 된 동기였군요. 당시의 영일지구에 왜 그렇게 유별스레 민둥산이 많았습니까.
“포항시를 비롯해서 영일군(지금은 포항시에 편입되어 있음)과 월성군(지금은 경주시에 편입되어 있음) 일부 지역의 집단황폐지는 이암(泥岩)지대로 녹화가 대단히 어려운 불모지였습니다. 일제시대 이후 50여 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어요. 특히 이곳 집단황폐지는 조국근대화의 상징인 포항종합제철공장과 주변 산업체의 발전을 막아서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산이 벌거벗은 민둥산이어서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대기오염을 막는 데도 속수무책이었거든요. 어디 그뿐입니까. 이곳은 국제항공 노선의 관문으로 우리나라를 오가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하고 있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면 일본도 푸르고 동해도 푸른데, 유독 우리 땅만 벌거숭이였으니까요.”
▲영일지구 사방사업 구역도. ⓒ 임일재
‘사방博士’라 불리게 된 까닭
이암지대는 도대체 어떤 땅일까. 임선생은 사방사업에 문외한인 기자를 교육시키려고 작심한 듯했다. 그는 10리만 더 가면 칠포해수욕장에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의 도로변에다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기자를 끌고 ‘금장리 솔고개’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민둥산이 사방사업에 의해 소나무가 우거진 산으로 둔갑한 곳이다.
자연적으로 성장한 나무들과는 달리 사방사업으로 심은 나무들은 규칙 바르게 서 있는 만큼 비전문가도 ‘금장리 솔고개’에만 가면 황무지를 녹화한 인간의 의지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는 오솔길 여기저기에 지천으로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들 중 하나를 주워서 기자에게 턱 쥐어주면서 “어때요?” 라고 물었다.
―다른 돌보다 훨씬 가벼운데요.
“그럼, 한번 깨뜨려 보세요.”
허여멀건한 돌을 양손으로 한번 쥐어 짜니까 대번에 부스러기가 되었다. 이렇게 실물을 보이고 난 뒤에야 그는 설명을 했다.
“이암지대는 비만 오면 콩죽 같은 상태로 변했다가 강한 직사광선을 받으면 표층이 붕괴되고 갈라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따라서 나무를 심더라도 뿌리가 땅 속으로 내리지 못하고 말라 죽는 사태가 반복되었던 겁니다. 건조한 표토(表土)가 바닷바람에 날려 유실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영일지구는 대면적의 황폐지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토사유출로 인해 형산강·청하천·곡강천·광천 등의 강바닥이 높아지고, 영일먼 역시 퇴적토사로 매몰되는 등 그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20만t급 철광선(鐵鑛船)이 입항·접안해야 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공업항 포항항으로선 위기였다. 세계적 신예 제철소 포철은 경쟁력을 잃을 뻔했다.
<경북사방100史>에 따르면 1972년 2월, 산림청과 경북도청은 영일지구 산림복구계획을 1차 수립하는 한편 1972년부터 중앙임업시험장에서는 과거 일제시대부터 이 지역에 실시되었던 사방사업의 실패요인을 조사·분석하고 영일군 의창읍 대련동에서 이암지대의 식생피복(植生被覆)을 위해 각종 시험연구를 실시했다. 식생피복이란 우선 풀이라도 심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작업이다.
이어 1973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새로운 기구를 설치해서라도 영일지구 황폐지를 2∼3년내 완전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경북도지사에게 강력하게 지시했다.
“그해 6월, 나는 경북도청 산림과 사방계 기사로서 각종 자료를 들고 상경하여 산림청 관계관들과 함께 30여 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막과 같은 115개 리·동 집단황폐지 4538ha에 대한 연차별 복구계획을 세웠습니다. 나는 이 복구계획의 최초 기안자로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점을 생애 최대의 보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 산림청장 손수익씨, 조림국장 김갑성, 치산과장 윤주형, 사방계장 김용현씨 등 기라성 같은 테크노크라트들이 국토의 녹화사업에 신명을 걸고 있었다. 경북도청에선 ‘사방박사’ 임일재 기사를 파견하여 현장의 견해를 대변케 했다.
―후배 임업공무원들이 아직도 임선생을 ‘사방박사’라고 일컫던데, 언제 그런 학위를 받았습니까(웃음).
“농업학교 4학년 때 중퇴한 내가 박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경북도청에서 근무하다 보니 나의 학력이 낮아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을까 봐 부지런히 책을 좀 읽었더니 그런 별명이 붙긴 했어요.”
바위에도 나무 심을 수 있다는 신념
―아! 안동농업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까.
“1954년 만기제대를 한 후 귀향해 있다가 ‘학도병 출신자에게 졸업장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모교에 갔더니 5학년과 6학년 때 군에 갔던 사람만 해당되고 나처럼 4학년 때 군에 간 사람은 1년 더 다녀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참 후배들과 함께 학교 다니기는 좀 뭣하고… 그래서 안동사방관리서 임업공무원으로 취직해 버렸습니다. 모교에선 내가 공직에서 퇴직하고 난 지 2년 뒤에야 졸업장을 줍디다.”
―당시 취직하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을 터인데요.
“그때도 우리 같은 임학과 출신자에게는 여기저기서 오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동기생이 근무하는 안동사방관리서에 우연히 들렀는데, 그 친구가 나를 대뜸 자기 상관인 서장과 계장에게 인사시키는 겁니다. 서장과 계장도 ‘함께 일하자’고 막 붙들어요. 그래서 1955년 1월부터 출근하게 되었고, 취직을 하자마자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하라고 다그치십디다.”
임일재군은 곧 안동여중 출신으로 그보다 두 살 아래인 강삼란양을 신부로 맞았다. 그로부터 임일재씨는 10년간 안동사방관리서의 말단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65년, 그는 경북도청 산림과로 영전했다. 공직사회가 일 잘하는 사람을 알아주는 분위기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1966년 경북도청사를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서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했습니다. 1967년 3월, 도청사 뒤편 암반지대의 나무심기에 성공하여 박 대통령은 연두순시 때마다 우리들을 칭찬했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곳에 어떻게 나무를 심었습니까.
“정(돌에 구멍을 뚫는 쇠 연장)으로 암반에 구덩이를 파고 좋은 흙으로 객토를 한 다음 히말라야시다를 심었어요. 바위에도 정성을 다해 나무를 심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얻었습니다.”
“善山, 善山, 非善山”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민둥산이 많았습니다. 산림 황폐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8.15 광복 이후 무질서한 도벌·남벌과 6·25 전후의 공비토벌을 위한 치안채벌(治安採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솔나방·솔잎혹파리 등이 번지고, 산불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화전민의 개간, 채광업자 등의 불법훼손도 문제거리였습니다.”
―1960년 전후에 중·고교에 다닌 세대도 4월5일 식목일이면 으레 전교생이 산에 가서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활착률이 매우 낮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질보다 양 위주의 식목을 한데다 사후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산림녹화는 5·16 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로 성공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이 어른 아니었다면 산림녹화, 이뤄질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연료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시대에 나무를 심어 보아야 채 자라기도 전에 화목으로 베어 가는데 견딜 재간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녹화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연료인 연탄으로 난방·취사를 했던 우리 국민들의 희생 위에서 이룩된 성취가 아니겠습니까. 그 시대를 뚫고 살아온 사람들 중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한 번쯤 쓰러진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은 사람 또한 많았던 시절이었죠.
“박정희 대통령은 5·16 직후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당시부터 산림사업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예컨대 1962년 10월22일 경주에서 시장·군수·산림관계관 등 500명이 참석하는 전국산림기술자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여 산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이어 월성군 외동면 냉천리 사방공사 현장의 구석구석까지 둘러보시더군요. 그때 우리들은 헌병 백차가 에스코트하는 가운데 군트럭을 타고 박 대통령을 수행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연두교서에서 ‘정부는 연료림 조성 3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농촌연료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산림녹화를 촉구할 것이며…’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62년 10월 22일 전국산림기술자대회 기록전시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의장. ⓒ 국가기록원
▲1962년 10월 22일 사방공사 모범지역인 경북 월성군 외동면 냉천리에서 현장 보고를 받는 박 의장 일행. ⓒ 국가기록원
―박 대통령도 군복무 시절에 후생사업을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산림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모양이죠(후생사업이란 전방의 지휘관들이 부족한 부대운영비 등을 조달하기 위해 벌목, 숯 등을 만들어 민간업자에게 차떼기로 팔아먹었던 불법행위를 말하는데, 일부 장성은 그런 후생사업으로 치부까지 하여 말썽을 빚기도 했다).
“중령 시절인가 고향 선산(善山)에 다니러 왔던 박 대통령이 ‘선산, 선산, 비선산(非善山)’이라고 한탄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주민들이 연료용으로 나무를 마구 베어 황폐해진 산을 보고 ‘이제 선산은 이름만 선산이지 선산이 아니다’라고 안타까워하신 겁니다. 나는 이때 이미 박 대통령이 산림녹화의 비원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박 대통령 집권 초기에는 ‘전시행정만 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죠.
“전시행정, 이거 국민계도에 매우 중요합니다. 박 대통령 당시 모든 산림사업은 고속도로·철도·국도변에 집중 실시되었습니다. 예컨대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옆으로 우선 급한 김에 코스모스 꽃길을 조성했는데, 그때 가수 김상희씨가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이라고 노래하여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아! 헐벗은 우리 국토도 가꾸기만 하면 좋아진다!’라는 인식,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겁니다. 최초의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직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북한사람(대표)이 넘어오면 깜짝 놀라게 해야 한다’면서 ‘통일로 절개지(切開地)를 복구하라’고 지시하셨어요. 산림청 주관으로 시행된 절개지 복구공사, 참으로 밤낮 없는 돌관공사(突貫工事)였습니다.”
―아무튼 개발연대에 우리 산림공무원들이 엄청난 순발력을 발휘했군요.
“하지만 지도자의 리더십이 없으면 공무원이 신명 나게 일 안 합니다. 요즘, 안타까운 일 많아요. 예컨대 우리 경북도청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추풍령휴게소 일대에 잣나무숲을 조성했는데, 지금은 무슨 개발을 한답시고 마구 베어 버렸어요. 그거 박 대통령께서 손수 지시한 것인데… 참 아까워요.”
‘인생성적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임일재씨와 기자가 탄 승용차는 영일만 북안(北岸) 칠포해수욕장 윗길(20번 지방도)로 들어섰다. 해변의 언덕 윗길은 몸뚱이가 흔들려서 카메라 촬영이 어려울 만큼 겨울바람이 드셌다. 그런데도 아래쪽 칠포해수욕장은 해송 숲으로 감싸여 아늑한 느낌이다.
도대체 이런 강풍이 부는 바닷가에 어떻게 나무를 심었을까. 그 자신의 ‘인생生성적표’를 기자에게 보여 주는 임일재씨는 신명이 난 표정이다.
“해안(海岸)사방의 성공사례예요. 한국에 연수하러 온 외국 산림기술자는 이곳을 꼭 보고 갑니다. 우린 이렇게 했어요. 먼저 방풍벽을 쌓아 바닷바람을 막고 그 뒤편에 구덩이를 파고 좋은 흙으로 객토를 하여 한 그루 한 그루씩 심은 겁니다. 나를 만난 중국 전문가들은 이걸 보고 ‘우린 큰일 났다’면서 가르쳐 달래요. 포철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경북에서 제일 좋은 경관은 포철 건너편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이제는 단연 칠포해수욕장이지요”
―영일지구 사방사업 입안과정에서 임선생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복구계획 수립과정에서 기존의 포항사방관리사무소를 해체하고 2개의 사업소(의창 및 영일사업소)를 증설하는 작업부터 했습니다. 산림청 조림국장실에 모여 5만분의1 지형도를 놓고 수십 번씩 사업량과 정원 등을 수정하면서 어렵게 결정했던 일. 그리고 12개 읍면별 사업책임자인 공구장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급을 기사보(7급)에서 기사(6급)로 동시에 승진토록 건의했던 일. 이런 일들에 최초 기안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저로선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때 서울 청진동 영남여관에 30여 일간 투숙하면서 하루에 두 끼 정도는 해장국으로 떼우면서도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그렇다면 황폐한 산들을 푸르게 녹화시키는 실행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경북사방100년사>의 관련 대목이다.
이 지역의 특수지질을 감안, 특수 골파기와 다량의 비토(肥土 : 밭흙과 풀을 혼합한 기름진 흙)를 사용하는 개량공법을 적용하고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밀파식(密播植 : 촘촘하게 심음)하여 조기 녹화를 시도하였다.
1) 유속 감소와 (침식 방지를 위하여 물매를 조절하였고, 2) 구덩이는 견질토(堅質土 : 단단한 흙) 지대에서 깊이 30cm, 넓이 40cm, 연암(軟岩)지대엔 깊이 40cm, 넓이 40cm로 파서 종전보다 더 많은 객토를 넣어 다졌으며, 3) 사방지 주변 미립목지(未立木地) 및 산생지(散生地)에는 입지조건에 맞는 수종을 식재하였으며, 4) 산비탈의 비토를 생산하여 파종과 묘목식재에 부식질(腐植質)을 공급하고 묘목 활착과 보수력(保水力)을 증가시켰으며, 5) 사방지 부근 마을에는 양묘(養苗)를 권장하고 아카시아 나무 묘목을 심어 주민의 소득증대와 사업성과를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아카시아 멸시는 뭘 모르고 하는 말”
―경제수림(經濟樹林)을 조성하지 않고 아카시아 나무만 많이 심었다는 비난도 있었는데요.
“아카시아 나무를 멸시하는 것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연료림을 조성하려면 아카시아 나무, 산오리 나무, 리키다 소나무 등 속성수를 심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때 시골엔 아직 연탄이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특히 아카시아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균류 박테리아가 제일 많아 토양을 개량하는 나무입니다. 아카시아는 병충해도 붙지 않고, 잎은 사료로 쓰이고 꽃에는 꿀벌이 몰려듭니다. 이제, 아카시아꿀로 소득을 크게 올리는 경북 칠곡군 같은 지방엔 매년 ‘꿀벌축제’까지 개최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골 노인들은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가 조상의 묘자리로 파고 든다고 질색이던데요.
“화목으로 사용한다고 가지를 자꾸 치니까 뿌리가 땅 밑으로만 자꾸 번져 나갔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 농촌에서도 연료용으로 나무를 하지 않으니까 아카시아 나무가 쑥쑥 곧게 자라고 있잖아요. 요즘 인테리어에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무늬목의 인기가 좋아요. 워낙 결이 곱거든요. 아카시아 나무가 황폐했던 민둥산을 푸르게 덮는 데 크게 공헌했어요. 이제 토양이 크게 개량되었으니 경제림을 계속 조성해야 하겠지요.”
―험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강행한 영일 이암지대의 녹화, 참으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사업실행 현장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5년간 총사업비 38억2800만원과 연인원 355만6000명을 투입하여 기어이 복구사업에 성공했습니다. 최일선 현장에서 지도·감독한 의창사방사업소 조성완 소장과 영일사업소 정석교·김형규 소장, 그리고 산비탈을 지게 지고 오르내리면서 나무를 심었던 여러 분들, 참으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 시절, 38억원이라면 굉장히 큰돈 아닙니까.
“요즘 돈가치로는 영(0) 두 개를 더 붙인 3800억원쯤 될 겁니다. 이런 사업비는 대통령의 굳은 결심이 없었다면 우리 힘만으론 절대로 예산 당국을 설득해 받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억척스러운 일, 하기 어렵겠죠.
“우선, 요즘 농촌에는 나무 심을 사람이 없어요. 그때 서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민둥산, 녹화하지 못했을 거예요.”
―요즘 한반도의 온난화와 병충해로 소나무가 자꾸 죽어 가잖아요.
“사찰 주변 보호림에만 수간주사(樹幹注射)를 놓아 치료하고 있는데, 병충해가 설악산을 넘어 금강산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육림에 힘써야 하는데… 고민거리예요.”
▲1975년 4월 17일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 시찰 후 경북 영일군 의창면 오도리 사방사업장에 들러 현황보고를 받고 지시사항을 시달했다. ⓒ 국가기록원
임일재씨는 승용차를 칠포해수욕장 해변도로에서 조금 북상하여 언덕배기에 위치한 오도마을 앞에 세웠다. 한겨울의 세찬 북풍이 몸을 날려버릴 듯 거셌다. 그는 기자를 산 중턱으로 데려갔다.
“공사기간 중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오도마을을 순시하여 바로 저기 저 소나무 아래에서 경북도청 박상현 산림국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들으셨습니다. 감격한 오도마을 주민들은 뜻을 모아 대통령 순시를 기념하는 비를 건립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순시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1977년 4월17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 국토녹화현장을 순시하시니 외로운 갯마을에 새 기운이 넘쳤도다.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고 풀씨를 뿌려 아기 돌보는 정성으로 가꾸라시던 뜨거운 국토애를 땀 흘려 심었나니 숲은 우거져 산짐승 보금자리 치고, 굳센 의지 감도는 새마을 집집마다 복된 자립의 꿈이 활짝 피었네. 우리 모두 나라 사랑하는 슬기와 힘을 모아 보배 가득 찬 산과 저 바다를 지켜 자손만대 번영과 영광을 누리며, 드높고 푸르른 님의 뜻을 길이 이어 나가세. 1977년 12월3일 오도마을 주민 일동.
▲박정희 대통령 순시기념비. ⓒ 산림청
일본 기술자도 놀란 영일지구 녹화
―영일지구사방사업은 세계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본 외국인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떻습디까.
“이곳을 방문한 일본의 사방전문가가 깜짝 놀라고, 독일 전문가는 칭찬하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몽골의 임업인들은 부러워하고, 중국 관리들은 황사를 막는 사방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나로선 공교롭게도 이 사업이 완료되고 10여 년이 지난 1987년 7월 동부(포항)치산사업소 소장에 부임하여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때 나는 외국 임업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찾는 이곳 ‘사방센터’를 더욱 널리 소개해야 되겠다는 의욕으로 도청의 지원을 받아 ‘73∼77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란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했습니다. 이 테이프는 인도네시아 등에서 임업공무원의 교재로 활용한다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일본의 사방기술이라면 세계적 수준 아닙니까. 저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뒤편 옹벽을 볼 때마다 일본인들의 양심적인 시공에 감탄하고 있는데요. 가파른 지형의 부산엔 산사태가 유별나게 많은 편인데, 광복 이후에 시공된 옹벽은 무너져도 일제 때 쌓은 것은 끄떡없거든요. 이런 일본의 사방기술은 제가 최근 대마도에 가서도 다시 확인하고 부러워했어요. 그런 일본인이 깜짝 놀라다니….
“공무원 재직 때인 1972년 도쿄에 연수를 갔는데, 거기서 일제 때 경북 산림공무원들의 모임인 ‘경북임우회’ 회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영일지구 사방, 성공하기 어려울 거다’고 합디다. 그러던 그들이 20년 후 다시 만난 나에게 ‘깜짝 놀랐다’고 말하더군요.”
―열대다우림 지대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세계적 목재 수출국 아니었습니까. 1968년도만 해도 인도네시아의 원목을 수입하여 합판으로 가공 수출한 강석진 회장의 ‘동명목재’가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기업체였습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무작정 벌목만 했지, 그 자리에 나무를 심지 않아 황폐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영일지구를 둘러본 인도네시아의 산림국장은 ‘한국에서 인부로 일하며 나무 심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털어놓습디다.”
그렇다면 영일사방사업은 왜 세계적인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 순시 기념비’ 뒤편에 세워진 ‘영일사방 준공기념비’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영일지구사방사업은 우리나라 사방사업 사상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으며 5개년 연차계획으로 4538ha의 집단 황폐지를 성공적으로 복구한 것임. ○영일지구는 심히 건조한 기상조건과 극히 척악(瘠惡)한 지질 조건이 겹쳐 과거의 사방사업은 실패를 거듭하였으나 1971년 9월17일 국제항공로의 관문인 영일지구의 집단 황폐지를 조속히 복구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3년부터 1977년까지 5개년간에 사방사업 역사에 남을 위업을 달성했음.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영일사방준공비를 건립하였으며, 현재 우리나라 산림의 10%인 황폐지를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기난 복구 녹화한 산 증거로 남아 있음.
▲영일사방 준공비. ⓒ 산림청
영일지구 황폐지 복구는 국제연합 산하 FAO(식량농업가구)가 우리나라를 ‘녹화 성공국’으로 분류한 기틀을 마련했다. 사방사업에 관한 한 세계 제1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곳이 경북이고, 그 최대의 실적(전국의 26%)을 이룩한 현장이 영일지구이며, 영일지구에서도 가장 난공사 구간이 흥해읍 오도리 일대였다. 경북도청은 금년에 칠포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오도리 산기슭에 사업비 71억1500만원을 들여 14.5ha 규모의 사방기념공원을 조성한다.
“황폐지 복구에 참여했던 사방기술공무원들의 정년퇴직과 경력근로자의 고령화로 사방사업 설계·시공 기술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당장엔 사방사업의 기술과 정통성 보존을 위한 국내외 임업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며, 영일지구 산림녹화의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영구히 전수하는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통일 이후엔 북한지역의 황폐지를 복구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사방기념공원’은 동해안의 칠포해수욕장과 연계되어 관광명소화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곳 한 군데가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최근의 산불로 야산 몇 개가 사방사업 이전의 처참한 모습으로 원위치하고 있었다. 기자가 그곳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임일재씨는 심각했다.
“그건 찍지 말아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기자가 보고 말았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사방사업으로 산림녹화에 성공한 산과 실화로 망가진 산이 서로 이웃에 있어 매우 교훈적인데요.
“아무튼 산불을 내는 사람은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산, 이제 겨우 ‘옷’을 입었는데…, 등산객들은 담뱃불 조심하고, 농민들은 논두렁 밭두렁 태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산은 한번 망가지면 복구하는 데 20년 걸려요”
“작은 일 못하는 사람, 큰 일도 못한다”
점심 때가 되어 기자는 임일재씨를 바닷가 횟집으로 모셨다. 잡어회 한 접시에 매운탕까지 곁들여 4만원이면 서울의 음식값에 비해 싸다. 그래도 그는 ‘비싸다’며 반 접시만 시키려고 했다. 음식점 주인이 ‘그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럼 ‘다른 음식점으로 가 보자’고 할 만큼 알뜰했다.
필자가 우겨서 겨우 출렁이는 동해의 겨울바다가 보이는 명당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임일재씨는 먹는둥 마는둥 했고 소주잔도 사양했다. 아차! 작년에 그가 “위암수술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림공무원들, 원래 술 잘합니다. 나도 소주잔께나 기울였는데, 수술로 위가 3분의 1밖에 남지 않아 요즘은 못 합니다.”
인생 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어서 미안했지만, 흥해 앞바다의 잡어와 소주 몇 잔은 필자의 입맛에 딱 맞았다.
점심 후 귀로에 올랐다. 흥해읍 용천리 곡강초등학교 교문 앞에 이를 무렵 임일재씨는 교정에 서 있는 플라타나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 나무 때문에 저 학교 교장선생이 박 대통령에게 된통 혼났어요”라며 웃었다.
―왜요?
“박 대통령이 이 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바로 저 나무의 가지를 ‘키워서 잘라야지 왜 일찍 잘랐느냐’고 나무란 거예요. 강전지(强剪枝)로 나무 모양을 흉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요, 가지치기 시기까지 일일이 챙겼던 분입니다.”
―그 시절의 우리나라는 그만큼 작았죠. 아무튼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도 ‘그때 저기다 심어 놓은 나무, 어디 갔어’라고 지적할 정도였죠.
“작은 일도 챙기지 못하면서 큰 담론만 좋아하는 국가지도자는 큰 일도 못합니다. 박 대통령은 사범학교 출신답게 국민들을 아동들처럼 가르친 겁니다.”
박 대통령의 편지와 그림
-박 대통령은 군출신답게 ‘확인행정’이 장기였죠.
“그때가 1967년 8월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울산공업단지를 시찰하고 경주를 경유하여 귀경하던 길에 월성군 외동면 입실역을 지나면서 산림황폐지를 보고 당시 양택식 경북지사에게 ‘저 형편 없던 산이 저처럼 훌륭하게 사방이 잘 되었구나 하는 소리가 나오게끔 …’이라는 내용의 친필 편지를 보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려면 그때의 친필편지를 한 번쯤 읽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드릴게요.”
다음은 박 대통령의 친필서한의 전문.
貴道 月城郡 入室驛에서 蔚山으로 가는 汽車로 約 1km쯤 가면 東側에 沙防狀態가 至極히 不良한 山이 보일 것입니다. 原來 山의 傾斜가 急하고 岩石地帶이므로 普通方法으로서는 沙防을 하더라도 降雨時에는 流失되고 草木의 活着이 잘 안 되는 地形이므로 여기의 沙防을 하자면 特殊工法으로 기술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저 형편없던 山이 저처럼 훌륭하게 沙防이 잘 되었구나” 하는 소리가 나오게끔 年內에라도 卽時 着手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을 希望합니다.
▲양택식 경북지사에게 사방사업을 지시한 친필서한. ⓒ 임일재
“박 대통령은 국토의 녹화를 위해 이미 큰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1967년 1월9일 농림부의 산림국을 산림청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그때 김현옥 내무장관과 김보현 농림부 장관은 산림청을 서로 자기 브의 외청으로 삼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어요. 1973년 3월7일 산림청은 결국 내무부로 이관되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도지사·시장·군수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내무부가 추진력이 강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김현옥 내무장관의 산림행정은 어떠했습니까.
“그분은 절대녹화를 부르짖었습니다. 전국 230개 시군에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구입한 도요타 픽업차를 한 대씩 나눠 주면서 산림공무원의 기동력을 높였는데, 차체에는 ‘절대녹화’라고 크게 써 놓았어요. 낙엽 채취 등을 하지 못하도록 입산통제도 강행했습니다. 일선 산림행정기구도 보강되었어요. 도청의 산림과가 산림국으로, 군청 산림계가 산림과로 승격했거든요. 치산녹화 제1차 10개년계획(1973∼1982)도 수립되었어요. 전국의 100만ha를 녹화 조림한다는 장쾌한 대사업이 4년 앞당긴 1978년에 달성되었습니다.”
3cm짜리 몽당연필
이날 임일재씨는 10여시간에 걸쳐 240km를 손수 운전하여 현장을 돌면서 사방사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자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大邱에서 제조업을 하는 옛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던 기자에게 전날 밤처럼 거의 ‘철야학습’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매우 섭섭해하는 표정이었다.
경력 30여년의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 그는 가장 꼼꼼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궁금해서 자꾸 질문을 해서 확인 또 확인하는 성격이었다.
사실, 전날 기자는 임일재씨 댁 서재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40여 평짜리 아파트는 먼지 하나 없을 만큼 정갈했다. 서재에는 ‘功成退身 天地道(공성퇴신 천지도)’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공업(功業)을 이루고 물러남은 하늘과 땅의 도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저건 뭡니까.
“명예퇴직 이후 12년간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이웃 절에 가는데, 그곳 주지께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내린 글입니다.”
―불교신자이시군요.
“신자는 아니고 그저 운동 삼아 가서 한시간씩 머물다가 옵니다.”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셨더군요.
“1953년 8월에 수상할 훈장이 명예퇴임을 했던 직후인 1992년 8월에야 전달되었습니다.”
―재직시에 받았다면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요.
“그랬을까요….”
―4년3개월 동안 온몸으로 지킨 6사단에 가보셨습니까.
“수년 전 사단장 초청으로 방문하여 장병들의 사열까지 받았는데, ‘선배 전우에 대한 받들어 총!’으로 예우해 줍디다. 그땐 대접만 받았는데, 선물용 TV 한 대라도 사 갖고 자식들도 데리고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습니다.”
―왜 명예퇴직을 하셨습니까.
“임업공무원은 승진 상한선이 5급입니다. 내가 물러나야 후배들이 승진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퇴직 후엔 어떻게 지냈습니까.
“도지사의 부탁으로 명퇴 후 한 2년간 경북도청 명예민원상담관으로 일했습니다. 요즘은 아침운동 끝나면 오전 중엔 신문·월간지와 씨름을 하고, 오후에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만나기도 합니다.”
임일재씨는 보통 알뜰한 분이 아니었다. 소장 중인 신문 스크랩북만 무려 20여 개인데, 사설·평론 등 분야별로 채곡채곡 분류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신문에 끼워 배달되는 광고지 등을 활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 나서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더군요. 첫째, 자식을 생산하고 둘째, 나무를 심어야 하고 셋째, 글을 써야 한다고 합디다. 난 두 가지는 했는데, 아직 글을 못 썼습니다.”
임일재·강삼란 부부는 2남3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장남과 차남은 일류회사의 이사·차장 등 간부로 일하고 있고, 딸들은 모두 주부이다.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5남매를 모두 대학 이상 공부시킨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제가 공직 재직시 집사람이 가내수공업을 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집사람을 너무 고생시켜 2002년 4월 퇴행성 관절염 수술을 받았어요. 요즘 청소 같은 건 제가 하죠.”
―산림공무원으로 37년간 근속하셨는데, 연금은 얼마나 받으십니까.
“일시불로 받아 아이들 집 사는 데 보태 주었습니다.”
길이 3cm짜리 몽당연필과 2cm짜리 몽당 색연필을 붓을 쥔 것처럼 꼿꼿이 세워 핵심 낱말 등을 일일이 적고 밑줄까지 치면서 ‘강의’하는 그의 모습에서 기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3년 동안 탔다는 그의 엘란트라 승용차는 그동안 얼마나 닦았는지 반질반질했다. 기자의 요청으로 그가 소개한 숙소는 1박에 2만원을 받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그의 공무원 재직 시절, 동료들과 야근을 하면서 자주 이용한 곳이라고 했다.
중국 황사 방지를 위한 기술지원
다음날 아침, 늦잠을 좀 자려는데 정각 7시에 임일재씨가 전화로 “15분 후에 그리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오전 7시15분 정각에 여관에 도착한 그는 기자를 데리고 나가 5000원 짜리 ‘따로국밥’ 한 그릇을 사 먹였다. 그 자신은 이미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밥값은 굳이 그가 지불했다.
그는 여관주인에게 밥상 하나를 빌려 객실 바닥에 놓더니만 그 위에다 자료를 수북이 쌓아두고 또다시 기자에게 ‘과외공부’를 지도했다.
“경북도는 2004년에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 사방센터를 설립하여 황사방지를 위한 방품림 조성 기술을 전수할 계획입니다. 경북도 관계관이 이미 1차 현지답사를 했고, KOICA(한국국제화협력단)의 자금을 요청 중입니다.”
KOICA는 외무부 산하의 개도국 원조기관이다. 경북도청 관계자에 따르면 경북도는 정주와 낙양 사이에 위치한 북망산에 100ha 규모의 시범사업장을 세워 사방기술을 전수할 예정으로 KOICA에 100만 달러(12억원)의 자금을 신청 중이다. 이에 앞서 우리 산림청은 500만 달러의 KOICA자금으로 중국의 신강자치구와 내몽골의 황사 방지를 위한 사방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북한에도 사방기술을 지원할 필요가 있겠습디다. 1990년대 초 김광일 의원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국회의원 회담에 참가하는 김에 승용차 편으로 금강산 관광을 가면서 평양-금강산 도로변을 일일이 비디오로 찍어 왔는데, 그 필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북한땅의 황폐화는 너무 참담했습니다.
“2003년 5월2일 미국해양대기청(NOAA)이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 모습을 보면 초록의 계절임에도 북한 전역의 산은 황폐화해 있었습니다. 연료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남벌과 병충해로 숲이 죽어 가고 있는 겁니다. 황폐지에서 비가 올 때마다 토사가 유출되는 바람에 하상(河床)이 자꾸 높아져 천정천(天井川)이 되니 홍수가 나고 홍수가 나니 농경지가 매몰되고, 그 결과 식량부족이란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황폐지를 복구하려면 대한민국의 우수한 사방기술의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지금 금강산 일대에 솔잎혹파리가 번지고 있는데, 그 방제도 시급한 일입니다.”
“육림 위해 아직도 할 일 많다”
▲경북산림연구소가 발표한 ‘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혜택’ 도해. ⓒ 임일재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직도 산림공무원이 할 일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도 기술공무원의 정원은 자꾸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산과 인사를 쥔 행정직들이 즈그들(자기들) TO는 안 줄이고…. 경북도 관내의 경우 1960년대에 380명이던 사방공무원이 이제는 40명뿐입니다. 사방후계자가 부족합니다.”
―황폐지 복구는 거의 끝나지 않았습니까.
“산사태와 산림훼손의 복구, 사방댐과 소하천 제방 건설, 해안사방, 임도 개설 등 해야 할 일이 아직 수두룩합니다. 임도의 경우 선진국 평균이 ha당 4m, 독일은 6m나 되는데, 경북은 1.6m에 불과합니다. 이거 손으로 해야 할 일인데, 농촌인력은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육림 안 됩니다. 그래서 사방공무원 증원 요구를 하면 ‘다른 부서는 줄이는데, 왜 늘려 달라느냐’는 핀잔만 받는답니다.”
12년 전에 공직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는 ‘현역 임업직 공무원’이었다. 그 수도 꿰고 있었다.
“나무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북산림환경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숲이 한 해 동안 베푸는 혜택은 국민총생산의 10%에 해당하는 35조원, 국민 한 사람당 78만원에 상당합니다. 이 자료, 꼭 좀 써 주십시오.”
이제 ‘오전수업’이 끝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오후 1시7분 동대구발 서울행 새마을기차를 타려면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판인데, 그가 생각하기에 기자의 공부가 아직 덜 됐다고 생각했든지 “점심은 열차 식당칸에서 해도 괜찮겠지요”라며 12시30분까지 연장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차시간에 맞춰 그의 승용차로 기자를 동대구까지 바래다 주었다.
황폐지가 푸른 녹지로 변한 영일지구의 기적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꼼꼼한 리더십과 임일재씨 같은 산림공무원들의 꼼꼼함이 어우러져 신명을 걸고 창출해 낸 세기적 작품이었다. ◎
첫댓글 벙거숭이 민둥산이 오늘의 푸르름을 간직하기까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토록 구석구석 우리 박대통령님의 숨결이 안닿은곳이 없읍니다.그 당시의 공무원님들의 열의도 대단했구요...
감명깊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