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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11)
구자근 사모(광주 화평교회)
조직
시계의 정확함과 일의 철저함을 기하기에 늘 긴장을 안고 사는 오 신이, 하루 이틀 전부터 배아프다고 해대더니 드디어 오늘 새벽 6시쯤 부터는 굉장히 아프다고 호소해왔다. 신이의 배를 여기 저기 만져본 아빠의 진단 결과는 '신경성 급성 위염'이다.
"봐라, 신이야, 아빠 말 좀 잘 들어야지. 아침마다 떠드는 아이들 선생님께 이름 적어내지 말고 잘하는 아이들, 조용히 책을 열심히 읽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내라고 그랬잖아."
"그래도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떠드는 아이들을 적어내라고 그랬단 말이예요."
"그러면 선생님께 네 생각을 말씀드려 봐라."
"못해. 혼나면 어떡하라고."
"이것도 못한다 그러고, 저것도 못한다 그러고... 뭐냐? 선생님은 선생님 방법대로만 해오셔서 그렇게 시키신거야. 그러니까 더 좋은 방법으로 한번 해보자 이거지. 선생님도 분명 뭐라고 하시지 않을거다. 생각해봐라, 한번이라도 안떠드는 아이들이 누가 있겠니? 그리고 조금 크게 말할 수도 있고 작게 말할 수도 있을테고, 그런데 그걸 네가 일일이 지켜보면서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일이냐고? 똑같이 얘기했는데 누구는 너한테 적히고 누구는 안적히고, 그러면 적힌 애만 억울한 거야. 또 이름 적힌 아이들한테 미안하다고 엄마는 또 사탕사서 보내야 되고... 이게 뭔 수다스런 일이냐? 그리고 어린이는 원래 조금씩 떠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불공평한 일을 하면 적힌 애도 기분 나쁘고, 매일 이름 적는 네 마음은 기쁘더냐? 말해봐라."
가만히 고개를 가로로 젓는 신이...
"그래,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잘한 아이를 적어내봐. 그럼 너도 잘한 사람 세워주니까 기쁘고, 적힌 아이도 자랑스럽고, 또 억울하게 적힌 아이들이 없으니까 너한테 기분나빠 하는 아이들도 없을테고... 모두가 좋고 공평한 일을 하도록 애써야지. 그럼 신이가 긴장할 일도 없고 배 아픈 것도 싹 나을거다."
"신이 성격이 꼭꼭 맞추지 않으면 안되는 성격이라서 그래요. 혼자 짐덩어리를 다 진 것처럼 그러니 지가 몸이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지 뭐. 아침마다 다인이 유치원 교실에 데려다 줘야지, 끝나면 스쿨버스 시간 늦지 않게 다인이 데리고 타야지...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일 만도 하네. 신이같은 아이는 학급에서 아무 임원도 하면 안되는데..."
에이... 짜식도 참! 어째 그러냐?
"난 독서부장도 그렇고 부회장도 그렇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아유... 아직도 배가 아프네. 밥 그만 먹을래요."
"그런거 하는게 나쁜게 아니라, 네 마음이 너를 졸라매서 그래. 아빠가 지혜를 일러줬는데도 왜 말을 안듣는 거냐. 편하게 맘먹고 편하게 살아라. 잘할라고 하지마. 네가 선생님한테 안혼날라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너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하는 친구가 금방 생기는 것이다. 한사람 살면 한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그 말이다. 네 몸 한테 배워라. 가끔 아픈 것도 좋은 것이다. 네가 안쉬니까 몸이 알아서 쉬자고 그러는 것이지."
"알았어요. 아까부터 이제는 잘한 사람을 적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으니까..."
그렇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확함을 포기할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참... 조직이라는 것이, 어려서부터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니 원... 학교 교육에서 자율을 신장시킨다는 말은 애초에 모순된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반드시 조직이 편성되야 하고, 그러면 지도자가 생겨야 되는 것도 뻔한 이치고, 지도자와 평민 사이의 중간자가 만들어지고, 그러다보면 시켜야 되고 복종해야 되는 타율적인 인간관계가 맺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른바 조직의 질서유지를 위한 통제와 관리가 따르는 것인데, 여기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은 획일적으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관료체제의 작은 모형들이 판을 친다는 것이다. 다른 생각들이 들어갈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계획대로 일을 잘 추진해서 어서빨리 성과물을 축적하고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발전사관과 진보의식에서 나온 정치, 경제사관의 산물이다.
어린이나 어른 사회나 똑같다. 그런 조직 속에서 마음이 접어진채로 자라났으니 모두가 함부로 자기의견을 낼 엄두를 못낸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여러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스스로 심장이 쫄리고, 조직에 역행되는 무슨 의견을 한마디 하느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속 편하고 아무 일 없는 것이다. 건전하고 예의바르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분위기와 교육훈련이 되어있지 않은채 자라난다. 이렇게 성장한 어른들의 조직사회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조직이 추진해나가는 일에 있어서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는 참말로 몇십번을 곱씹고 난 후 행해지는 일이지만, 가령 무슨 색다른 의견을 내놓았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의견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는 대신,
"저 사람이 누구야? 저 여자가 누구야? 아니, 무슨 교회 사모라고? 사모가 저렇게 나서? "
말한 내용을 생각하는 건 고사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부터 따진다. 누군데 감히 저런 의견을 내놓으며, 좋게 좋게 넘어가지 못하고 혼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냐 이거다. 만일 학교 교장이나 무슨 조직의 임원이라도 되어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런 질타는 쑥 들어가고 말 성격의 말들이다. 질서가 흩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관료체제가 낳은 계급의식이요, 지도자의 가치관에 묻혀서 키워진 무서운 노예의식의 발로이다. 어느 큰 교회 담임 목사가 '소나타 2000 cc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 대단히 검소한 사람이 되어 박수 받는 것이고, 10명이 될까말까한 화평교회 오목사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는 일은 지극 당연한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니 19세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20세기의 러시아 혁명이후 시작된 사회주의 체제는 결국은 같은 뿌리라고 단정짓는 일본의 어느 사상가의 진단이 이러한 면에서도(우리의 주변현실을 돌아볼때) 명쾌하게 맞아 떨어진다. 발전과 진보의 성과물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기보다는 하나의 동일한 상품으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인간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서 얻어지는 '이윤'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상품으로서의 경제적 가치가 제일로 매겨지는 것이다.
만일 민주적인 인간상을 고민하는 조직의 지도자라면,
"제가 언제나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해서 다른 생각이 있나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언제라도 사랑의 질타를 아끼지 마십시오."
"미안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제겐 역부족입니다."
"얘들아, 미안하다. 선생님도 잘못하는 일이 있단다. 실수도 잘하지? "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연락주시고 찾아오십시오. 같이 생각하면 좋을 것입이다."
등등의 말을 자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도자에게 소속되어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얼마나 존경할 것인가? 부족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며, 오히려 풍성한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안심이 된다. 그러나 세상의 조직을 살펴보건데,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진실로 없다. 어찌나 내세우고 또 내세워대는지...
3월달에는 아이들 때문에 원치않게 초등학교 어머니들 모임에 몇번 나가게 되었는데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자기들을 믿으라고 난리다. '열심'이 뭐 별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살아나야 되는 자리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누가 뭐라 해도 열심히 하기 마련이다. 제정신 아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안전과 명예와 품위와 돈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울 것인가. 다 자기 선에서 열심히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열심낸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큰 소리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왜 떠드는가. 조직사회에서의 인간이 내는 열심은, 한계지워진 인간이 내는 열심이기 때문에 이미 위험소지를 안고 출발한다. 예컨데, 이제 처음 영어교과를 배우기 시작한 3학년 어린이에게, 담당교사는 처음 내준 숙제를 안해왔다고 그 자리에서 손바닥에 힘을 주어 머리를 올려치는 행위가 있다. 무섭게 꼼짝 못하게 아이들을 잡아야 교사가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방법대로 열심을 내어 행하는 것이다. 무섭고 긴장된 마음으로 혓바닥이나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여기에 걸려드는 사람들은 능력면에서 강자보다는 주로 약자들이다. 그러니 꿈과 비젼과 사랑을 떠드는 세상조직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게 운영되고 있는가.
세상조직의 줄줄새는 모순과 헛점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무리, '성도'를 생각하게 된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조직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조직처럼 자신의 있는 곳을 인간적인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홍보하고 드러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가지가지 문화 공간 마련, 상처 치유, 영적 문제 해결, 직장과 입시를 위한 기도회, 상담목회, 가정목회, 청년목회, 노인목회, 결혼정보...... 등등 세상처럼 시끄러우며 세상의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과 어찌 그렇게도 같은 모습인지...... 예수님은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명하시는데 우리는, 늘 십자가와 반대방향으로 질문해대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게다가 서양 근대의 발전과 진보사관의 영향아래 있는 세상조직처럼,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성과물을 위해 사람을 모으고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모으고 축적하며 더 크고 아름답게 확장시키는 일에 온갖 열정을 내고 있지 않은가.
교장은 무엇이며 교사는 무엇이며 목사는 무엇이며 여자는 무엇이며 사모는 무엇인가. 어른은 무엇이며 어린이는 무엇이며 반장은 무엇이며 부회장은 무엇이며 신발부장(오단)은 무엇인가. 공통점은 모두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요, 차이점은 몇 개는 세상의 조직에서 세워진 샘플이고 몇 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샘플로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역할의 차이점은 몇 개는 계속해서 더 좋은 성과를 올려야 되고 실적을 쌓아야 인정받는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효율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계급과 차별이 눈에 띄는 위치이고, 몇 개는 전자의 해석 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죄인들의 증상에 불과한 것이라 끊임없이 선포하며 오로지 하늘 위로부터 오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죄의 은총없이는 인간은 한번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을 알리는 이정표의 위치이다. 한 쪽은 계속해서 노력하고 발버둥쳐야 더 큰 기쁨, 더 큰 즐거움이 얻어지는 세계요, 한쪽은 가만 있어도 누려지는 세계,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세계이다. 한 쪽은 더 크게크게 번성하는 것이 목표요, 한 쪽은 더 이상 망할래야 망할 자리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이다.
세상 조직에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그래서 차별되이 살아지는 약자의 표상,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낳아주신 성도 가운데에는 필수적으로 포용되어 나타난다. 그들 앞에서 너의 강함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자로 살지 말고, 너희 또한 그들처럼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살라는 의미로 두신 성도의 자화상이니, 진실로 이것은 거룩한 무리 가운데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징표이다.
자본주의 사회면 무조건 다 민주주의 사회요, 사회주의 체제면 무조건 다 독재정치인 줄 알았다가 큰 충격을 받았던 15년 전의 처음 직장생활, 초등학교 교단이 생각난다. 하기사 그것으로 기인하여 몇 년을 인간 조직에 대하여 회의하며 고통스럽게 번민하면서 몇 년 후 성경을 접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의 나라를 확인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은총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더 깊고 넓게 확인되고 있지만, 지금의 학교 조직, 교육의 현실은 15년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의 조직 속에서 읽어지는 인간의 내세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만 했던 인간의 악함과 죄성을 알아갈 뿐이다.
성도는 세상조직을 보면서도 사무치게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렇게 애통해하는 몸짓이 인간의 위치와 자리 등의 이름으로 비난받기도 하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면서, 진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셨던 그 한분,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의 일거수 일투족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머물고 계시는 주님의 눈길을 더 깊이 알게 된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에 바쁜 당신의 자녀들이 잠시라도 빗나가는 것을 허용치 않으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는 자로, 성도의 곁에서 성도를 이끄시는 십자가상의 주님과 더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
* 신발부장이란, 신발장을 정리정돈하는 책임을 맡은 것이란다. 얼마나 귀한 직분인지.
신발이라... 그 위태하던, 그러나 영예롭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모세, 여호수아, 세례요한... 반 친구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한 켤레 한 켤레 가지런히 놓을 때,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저기 땀내 절인 어린 질고의 흔적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신발도 어김없이 있다는 것도 외면할 수 없으리라.
엊그제 저녁에 3-2의 오 단 신발부장과 그의 엄마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너 신발부장 역할은 잘하고 있는거야? 3학년 2반 신발장이 제일 깨끗하겠네?"
"응, 이제 우리반 신발장이 아주 깨끗해졌어. 애들이 철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신발을 똑바로 잘 놔. 아휴, 좀 힘들어... 그런데 3학년 1반은 신발부장이 없나봐. 흙도 되게 많고 신발도 삐뚤어져 있고... 만약에 내가 1학년 2학년 3학년 1반까지 신발장을 다 정리해 준다면 어떨까? "
" 그럼 그렇게 해 봐. 근데 시간이 없겠다."
"쉬는 시간이 있잖아. 아니 안되겠어. 내가 만약에 다른 반에 가서 신발을 정리하면 그 반 선생님들이 혼내실걸? "
............
그 말을 들은 아빠의 독백,
"제 신 한짝(수고하고 무거운 짐, 예수님이 져주셔야만 하는) 들기도 감당 못하는 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