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NE의 운명
산행을 마치고 아름다운 들꽃가든에서 산채정식을 먹는 자리에서 CNE소식의 폐간 이야기가 나왔다. CNE소식을 세상에 탄생시킨 장본인의 하나이며 금년도 44호 편집장을 맡고 있는 꼴찌의 이야기라서 믿을 만한 이야기이다. 물론 총회에서 정식으로 상정해서 논의를 해봐야 결론이 나겠지만, 반대하는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아 폐간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CNE소식이 처음 나온 것은 우리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지 6년째 되는 1967년 2월이다. 25,6세의 한창 나이로 정상적으로 군에 간 친구들은 거의 제대를 하고 대부분 안정된 직장을 가졌으며 몇몇은 벌써 결혼했을 무렵이다. 1968년 3월에 실린 회원 분포 상황에 의하면, 총원 89명 중 41명이 육지부에 나가 있었으며 그 중 많은 친구들의 소재를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제주방송국에 근무하던 꼴찌와 광양교에 있던 원민이가 주축이 되어 CNE소식을 시작했다. 서로의 소식을 알아 돕고 격려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CNE소식을 보면 그 당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리방’으로 긁고 등사판으로 밀어서 만들었던 그들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CNE소식을 몇 번의 폐간 위기를 넘겼다. 첫 번째 위기는 1968년 꼴찌가 대구방송국으로 전보되는 바람에 약 6,7년 동안 중단되었다. 다시 속간한 것은 1975년으로 지령 10호이다. 역시 꼴찌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 후 동창회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CNE소식도 본 궤도에 올라 순탄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시대에 맞게 변신을 꽤한 것도 꼴찌다 1999년 38호부터 지금까지 인쇄소에 맡기는 옵셋 인쇄 방식에서 PC를 이용한 자가 제작 방식을 택했다. 발행 부수도 대폭 줄여 회원 중심으로 내실을 기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손으로 CNE소식의 숨통을 끊으려 한다. 나는 안다. 제 분신과도 같은 CNE소식을 제 손으로 마감하려는 그의 아픔을. 시대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서로 소식을 몰라 애타하던 그래서 이 종이 한 장 받아보면 고향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나던 40년 전 하고는.
내가 어느 자리에서 우리 CNE소식을 보면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50호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만, 내 가장 친한 친구이며 CNE소식을 이 세상에 있게 한 꼴찌가 제 손으로 막을 내리겠다는데 내가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멋있는 휘나래를 장식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 녹음 우거진 붉은오름에 올라
어제부터 한반도가 장마철에 접어들어 오늘은 남해안과 제주지방에 많은 비를 뿌리겠다는 예보다. 우천불구라 산행을 계속하지만 여간 긴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들 우의에 우산까지 준비하고 붉은오름 자락에 모였다. 모두 열여섯 명이다. 궂은 날씨를 각오하고 나온 셈 치고는 많은 수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는 친구들이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산하네는 거의 한 달여 만에 나왔고 오늘 처음으로 진시기 부인이 나와서 우리들의 박수를 받았다.
오늘 진시기 부인이 나온 것은 진시기의 애틋한 부부애의 결과다. 남편이 몇 번 산행에 참석해 보고 이렇게 좋은 일은 혼자 즐길 수 없다고, 손자 보는 일로 산행에 나 올 수 없는 부인을 대신 보낸 것이다. 부인에 대한 사랑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붉은오름은 남조로 변에 자리하고 있다. 교래리 사거리에서 수망리 쪽으로 약 4km 지점, 남북군 경계 표시가 있는 부근에서 서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500m 정도 들어가면 삼나무 숲 사이로 오르는 길이 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오르는 길이 이렇지 않았었는데 그 동안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 제법 눈에 띄게 뚜렷하다. 그래서 우리의 똑똑한 앞장도 혹시 다른 길인가 하여 되돌아오는 헤프닝도 있었다.
삼나무 숲을 벗어나자 연이어 자연림이 울창하여 하늘을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의 산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였는지 비도 내리지 않는다. 비고가 130m 정도 되는 오름이지만 숲이 우거져서인지 그리 힘들지 않고 능선을 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이따금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를 쳐들고 누워있다. 오름의 표토가 붉은 송이로 되어있어 뿌리를 잘 지탱하지 못함이리라. 지금은 숲에서 생성된 낙엽으로 흙이 검게 보이지만 나무가 없을 때에는 붉은 송이로 이루어져서 붉은오름이라 이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우리는 숲이 우거진 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아 정상으로 향했다. 작년에 이 부근에서 길을 잃고 헤맨 기억이 난다. 운공은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던 기억이. 정상에 도착하였으나 우거진 숲 때문에 주변 경관은 볼 수가 없어 조금 안타까웠다. 몇 군데 터진 곳을 찾아보았지만 시원하게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우리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록이 우거진 숲은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리다. 바람은 없지만 나무에서 쏟아져 내리는 산소 방울에 몸은 그지없이 시원하다. 여기에 술이 있고 예쁜 여학생들이 있고, 선달님의 우스개에 찰진 웃음이 있어 행복이 넘쳐흐른다. 장마도 차마 어쩌지 못해 눈치만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 아늑한 굼부리와 아름다운 들꽃가든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숲속의 정담을 나누다가 우리는 굼부리 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동쪽 능선을 따라 가니 자연히 내리막이 되며 굼부리 쪽을 향할 수 있었다. 이런 송이오름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가 우리를 맞는다. 한 쪽 방향은 움푹 패여 굴 모양이다. 무속인들이 공을 들인 흔적도 보인다. 신령한 바위임이 분명하다. 굼부리 바닥으로 내려서니 이건 필시 어느 아늑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시골 마을에서 봄직한 양애도 길섶에 수북하다.
일행은 환성을 지른다. 산딸나무가 하얀 꽃을 하나 가득 머리에 이고 우리를 맞는다. 직경이 수백m 됨직한 원형 굼부리 바닥에는 사람 키 정도의 억새로 가득하다. 이따금 키 큰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어 TV에서 보는 아프리카 초원을 보는 느낌이다. 굼부리 바닥은 오랜 세월 낙엽 등으로 상당히 비옥해져서 나무가 풀의 자람이 남다르다. 지금까지 고사리가 올라오고 있어 고사리 꺾기에 한창 열을 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원형 굼부리 바닥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아름드리 삼나무로 계획 조림이 되어 있어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5,60년대에 심어진 이 나무들이 이제 좋은 산림자원으로 잘 쓰여졌으면 좋겠다.
점심은 지난번에 두 번 간 일이 있는 대흘초소 부근의 들꽃가든을 택했다. 들꽃이 핀 정갈한 정원과 주인아주머니와 며느리의 친절에 다시 올 수밖에 없었다. 이 번에는 산채정식을 먹었는데 특히 여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 동안 점심때마다 제 몫을 챙기지 못한 남산부인에게는 최고의 만찬이었으리라. 오늘 월드컵 스위스와 마지막 16강 예선전을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초저녁에 자다가 새벽 1시에 일어나 이 글을 쓰다 보니 경기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가 이 번에 꼭 승리하여 16강에 오르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06. 6. 22)
첫댓글 기원이 부족했는지 우리가 지고 말았다. 하루종일 힘이 없다. 우리의 실력이 결코 스위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자. 운도 실력이라는 말 맞다. 심판 욕도 하지 말자. 운이 없었을 뿐이다.
오름답사에 처음으로 참가한 와이프의 소감. < 그날 참가한 모든 회원님들이 너무너무 반겨주고, 잘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나도 힘들거나 지치지도 않고,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고 좋읍디다. 자꾸 만나게예? > 혼자서 첫 산행에 참가 해 준 부인이 고맙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카페 회원님들이 고맙다. <그래, 우리는 친구아이가 ? >
맞다, 우리가 남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