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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온 지 두달 가까이 되었으나, 귀가 아프다는 핑계로 아직 옆방의 대학 친구와 소주 한잔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강인한 의지가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밤 11시경 옆방친구의 “호프 한잔하자”는 부드러운 권유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둘은 결국 그동안 밀렸던 술(酒) 공부를 새벽 3시까지 치르고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씻고 막 잠이 들려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는 고시원 할머니의 전갈에 화들짝 놀라 한걸음에 전화가 있는 지하 식당방으로 달려갔다.
울면서 애절하게 떨고 계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의 간장을 녹이는 것만 같았다. 나보다 불과 두 살 위인, 결혼해 아직 첫 애기도 보지 못한 형이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말씀과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가라고 하신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달아나며, 어머니께 죄송하고 형이 불쌍해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두 살 차이라 크면서 많이 다투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형을 좋아하고 의지해 왔는데, 젊고 이제 막 결혼해 새 인생을 출발하려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이 콱 막혀 버리는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리며 어떻게 내방까지 왔는지도 모른 채 방에 들어서자 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시각 새벽3시에 무슨 수로 대구까지 내려간단 말인가? 급히 내려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잠시 마음이 진정되자, 오로지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학적․과학적인 처치는 대학병원 의사선생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부처님께 기도하는 일 뿐이란 것을 알았다.
서울 올라오기 전 1월 1일 이른 아침에 앞산 은적사에 참배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 다음날인 1월 2일에 해인사에 1박 2일로 정진법회를 간다고 했다.
1월 2일엔 친구와 함께 서울 고시원으로 올라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 - - - 잠시 망설이다 친구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고, 해인사 법회에 참여치 못하는 아쉬움을 부처님께 참배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1080배를 올렸다.
(은적사(隱迹寺)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기다 일시 몸을 숨긴 곳인데, 당시 왕건이 굴에 숨은 뒤 거미들이 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 은폐해 줌으로써 견훤의 군사에게 들기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다)
은적사는 평소에도 자주 참배했던 곳인데, 이날따라 대웅전 부처님의 상호는 더욱 원만하시고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만 같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해주셨다. 해인사 법회에 참여치 못하는 서운함을 일배 일배 정성스런 절로 대신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절을 내려왔었다.
문득 은적사 부처님의 상호가 떠올랐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면 분명 형을 낫게 해 주실 것이란 믿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번에 다 낫게 해달라는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10일 이상 발끝부터 목까지 전신이 마비되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대학병원에서는 10일이 넘도록 그 원인조차 알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는 그간의 병의 진행속도로 보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진단을 내린 상황인데, 단 번에 낫길 바란다는 것은 과욕이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흐르는 눈물과 함께 꿇어앉아 차분히 부처님께 발원했다. “부처님 가엾은 저의 형이 조금씩 조금씩 나을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목부터 서서히 마비가 풀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게 3시간동안 기도를 올리고 일어나 고속터미널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부처님 이젠 목 밑까지 마비가 풀리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발원하며 고속버스에 올랐는데 좌석이 운적석 뒤 1번이었다.
조금 있으니 2번 손님이 탔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미인인 20대 중반의 아가씨가 옆 좌석에 앉았다. 나는 20대 후반의 미혼이고, 대구까지 가는 첫 버스에서 만난 미모의 아가씨였지만, 그런 곳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시종일관 창밖만 내다보면서 마음속으로는 “이제 목을 지나 가슴부위까지 마비가 풀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아직은 추운 날씨에 아침 첫차라 손님도 몇 사람 없었는데, 운전석 바로 뒤 1, 2번 좌석에 앉은 젊은 남녀가 단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무거운 분위기로 앉아 있는 모습이 뭔가 어색해 보이는 듯, 기사 아저씨는 간간이 운전대 앞 거울을 통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계셨다.
금강휴게소에 도착하자, 아가씨가 먼저 내게 말을 걸듯하다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내 모습에 아가씨는 혼자 휴게소를 다녀왔다. 그동안도 꼼짝하지 앉은 채 “부처님 이젠 가슴을 지나 배 부위까지 마비가 풀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버스가 출발하고 대구가 차츰 가까워지자 마음은 거의 평정을 찾았고, 부처님께서 형을 낫게 해 주실 거란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김천을 지나면서 “부처님 이젠 허리를 지나 무릎까지 마비가 풀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대구에 도착하자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이젠 무릎을 지나 발목까지 마비가 풀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병원에 도착하여 계단을 오르면서는 “이젠 발가락까지” 라고 기도하며, 3층 계단을 올라 제일 안쪽에 있는 병실을 향해 불과 20여 미터를 수백 미터나 되는 듯한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 안쪽에서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10여 미터 정도 남은 거리에서 통곡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쾅쾅뛰고 남은 10여 미터는 다시 수백 미터로 멀어진 것만 같았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요 바깥으로 나와 있는 형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발가락의 움직임을 보고 어머니, 누님, 형수, 옆 병상의 보호자 아주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소리없이 흐느끼고 계셨다. 그런데 형이 나를 쳐다보면서 두 눈을 크게 뜬 채 “바쁜데, 뭣 때문에 내려왔노” 라고 말하자, 어머니와 모든 여자들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형 옆으로 다가가 형의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손을 잡는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툭툭 병상 카바 위로 떨어졌다.
“부처님 부처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부처님 정말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병실을 나와 앞산 은적사로 달려갔다. 삼배를 드린 후 법당에 엎드려 그제서야 안도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108배를 올리고 다시 형에게로 와서 그동안 긴 수염을 깎아줬다.
대학병원 측에서는 아직까지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열흘 동안이나 마비가 되어가던 몸이 왜 하룻만에 갑자기 풀렸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병의 원인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뒤에 밝혀졌고, 지금은 아주 건강한 형이지만 26년 전의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이고,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떠올리면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하는 마음에 몸에 소름이 돋는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처님 오신날이면 절을 찾았고, 대학 때는 공부를 위해(속가의 공부) 4년의 대부분을 절에서 보내면서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빠지지 않고 참배했었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없어 그저 책을 보거나 1주일에 한번 정도 절을 찾아 참배를 하는 정도의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는 제가 오랫동안 사찰에서 기거하다 보니 가까이서 스님들의 일상생활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그러는 중에 기대했던 만큼의 성직자 모습을 보지 못한 실망감에서 스님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습성이 든 것 같습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어 특정사찰이나 신행모임을 찾은 적이 있지만, 正法과는 무관한 법문, 마음을 편하게 하기 보다는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두려움 때문에 기도나 불전을 올려야 하도록 하는 등의 강요, 진정한 구도를 위한 법회가 아니라 세력을 만들기 위한 법회, 돈있고 명예있는 신도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친절함에 반해 일반 신도들에 대해서는 무덤덤한 모습 등 敎와 行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들로 인해, 차라리 혼자만의 신행으로 와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늦게나마 인연이 닿아 무착거사님의 권유로 금강도량을 찾게 되었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모임의 성격, 무엇보다도 正道를 향한 정진자세와 경주법사님을 위시한 모든 도반님들의 훌륭하신 정진모습에, 지난날의 저의 신행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지 그 오랜 세월 늘 부처님법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청화 큰스님의 법에 닿을 수 없었음을 애석해 하면서, 이제나마 큰스님의 법향을 가까이서 몸소 체험하셨던 도반님들을 만나게 되어 크나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사찰은 사찰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새로운 신앙심을 주고, 그곳에서 얻은 신심은 일상에서 참신한 활력소가 됩니다. 금강도량 덕분에 매월 1회 前에 가보지 못했던 절들을 찾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가볍게는 다른 지방으로의 주말여행의 기분을, 한 걸음 나아가면 따뜻하고 편안하신 도반님들을 만나는 기쁨, 더욱이나 밤 산사에서 철야정진 할 수 있는 혜택, 이 모두는 참으로 淸福(하늘이 주신 큰 복인 天福이라고 할 수도)이라고 할 만 합니다.
달마산 미황사는 지금까지 보아 온 절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습니다. 병풍처럼 우뚝우뚝 솟은 바위산, 그 아래 천년을 넘게 지켜오는 정법도량, 맑고 힘있는 법당, 수많은 고승대덕이 거쳐 가신 이곳에서 하룻밤 철야정진을 할 수 있었다는 인연에 감사해 하는 가운데, 슬라이드를 통해 알현한 괘불 부처님을 보는 순간 환희심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정진을 하는 참뜻은 자성을 바로보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간절히 기도드리며 부처님께 의지하는 일이나 기쁜 일을 맞아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우리 불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슬라이드 속 괘불 부처님을 뵙는 순간 문득 26년 여 전의 일이 떠올랐고, 미황사를 다녀온 첫 휴일인 25일 2년 전에 사서 읽었던 光輪 2005년 겨울호를 다시 꺼내 보다가 경주법사님이 쓰신 ‘큰스님 2주기를 맞이하여’ 그리고 승진행님께서 청화 큰스님을 그리워하면서 쓰신 글인 '내 삶의 화두인 그 이름, 청화! ’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웠고, “인연이란 억지로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고 이렇게 때가 되어야 만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일어나 은적사를 찾았습니다. 과거 자주 참배하던 절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옆길로 올라갔는데, 한참을 가도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습니다. 아마 마음공부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을 염하며 발 가는 데로 산길을 가다보니 어느 듯 절 앞 小路에 닿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를 떠올리며, 옛 기억을 더듬어 글을 씁니다. 이 이야기는 형은 물론이고 가족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혼자서만 가슴에 담아둔 사연이나, 수승하신 금강도반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피를 나누고자 외람되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2007. 12. 26. 송강 합장
이렇게 좋은 글을 왜 이제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장하십니다. 이 글 한 편으로 오늘 하루 내내 깊은 신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무진당부처님의 신심이 깊으셔서 좋게 보신것 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