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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복암선고는 自成- 군린- 용수-
漢希 -廣陵三益 체제를 일단 정립시킨 것은 參派의 합일 위한 것으로
原시조는 자성이요, 重시조는 한희이며, 廣陵三益으로 형제간 임을 特記한 것으로,
우리광이의 合一을 위한 진전된 求正이라 할 수가 있다.
이기양 상신께서는 선계의 연원을 求하고 定하자 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율정공파가 가져온 칠원 부족설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지만은
다른 것들은 세전의 상고이니, 이를 전부 부정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8. 사실 우리 廣이를 오늘의 大東甲우가로 올려놓은 것은, 둔촌공의 근칙유현행 학행의 정신으로,
조선조 8극을 비롯한 동고 한음상공과 장신분들이
조선의 황조와 사림의 명분을 이끈 둔촌공파의 후손들인 선대들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광이는 광이인지라,
자성 비조를 주장하는 석암탄공과 율정공파는
고려 중기 이후 諱 한희-삼익시대 부터 탄탄한 문반과 무반의 직위에
출사를 한 것을 연유로, 추사정 군부좌랑 동정, 영동정, 호장이라는 마을의 首長으로 지내오면서
廣州에 모여 살며 대대로 이룬 集姓村의 어른들인 만큼, 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諱 자성 비조를, 口傳이든 世傳이든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할 것이다.그래서 신라 내사령을 지내신 분을 우리의 선족으로
이어져 오게하는 것도 석율당 3派의 합일을 위해서 크게 틀리지않는 思事란 것이다..
(신라기원에 관한 世傳의 상고기록)
우리들은
고려 수절신이요, 충신이자, 선대에 대한 효행과 국가에 대한 충절이
어느 가문보다도 강한 시조 어르신님들의 후손들이다.
(신라의 고려손국을 거절한다거나 고려수절신으로 개국을 반대한다거나)
또한, 동방조선의 서업을 이루면서 나라를 오늘까지 이르게한 선조들의
德業은 여타 제족들의 선망인 것이다.
遁村공님과 석탄암공님과 율정고부 서견님과 십운공님은
兄弟 叔姪간으로 그 情은 학문으로 뭉친 분이며. 亡한 신라에서 회안으로
파천한 忍苦를 지닌 선조의 후손분들이기에, 血의 정일 것이요. 이리하여
이나라 조선을 반석위에 올린 분들이고, 둔촌공의 외조부님 예언(호송산전설)처럼
세 번 개국할때마다 대대 흥복 성성할 것이다 하였고.
그래서 各自는, 따로 따로 시조요, 각자가 집안이라고 하였을까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중기 경술보 世考시부터 석암탄 율정공파는 이한희- 광릉3익을 모시었고
1700년도의 을사보부터 대대로 근 400년 동안, 자성비조와 삼익을 세계한 집안으로,
형제 집안의 廣李라하여, 희들의 "자성"비조를 모시지 말라고 한다고 하여
않을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또한 판서 諱하원공의 "율정파의 세전초보는
“언전과 잡기에 근거하여 (자성을) 비조(鼻祖)로 삼아서 보첩(譜牒)의 첫머리에 기록을 해두었으니,
위로는 선조께 죄를 짓는 일이요. 아래로는 세상의 비웃음을 살 일이로다”라 하였는데,
이는 當時 今의 충정의 시사로 당시의 판단인 것일 것이라, 달리 이론하자는 것이 아니다.
학자 율정, 節臣 석암탄공 집안이 代代로 口傳과 世傳에 이르러 모신 자성 始祖를, 오늘 해석으로
"傳疑라하여 이를 버리라"고 한다는 것은, 율정과 석암탄공 후손의 立場에서 생각한다면
"도리여의 의구와 만고의 불효의 罪"를 불러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 12월 겨울에, 삼가 둔촌공 할아버지님과 석암탄공 할아버지님과 율정공 할아버지님과
십운공 할아버지님 묘소앞에서 엎드려 嘆嘆獨白을 하는 심정으로 이글을 올리는 것이다.
이후 정묘보에서 다음과 같은 선대로를 부기하였고
복암선조의 정보도와 율정공파의 세보. 그리고 석암탄공파의 세보를 근거로
멀리 사로국의 자성이족부터 조선초까지 선대를 이어져 이를 계보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할 것이다. 즉,
---------
廣州李氏 上代 先系圖로 (대수는 이는 개인의 의견이다)
남원 세적과 성보에 전래 되는 각 시조 둔촌공, 십운공, 율정 석암탄 공,
이상의 우리 광이 4대 명휘 할아버님의 선계先系에 대하여
*아래에 게시된 비조 諱 자성할아버님으로 부터의 世數는
개인연구 의견이며.대종중과 종회의 특기는 廣陵 3익 할배님부터 世數로 친다
*자성족및 자선 李족의 태동은 기원전 2-3세기경 신라 지역으로
할배님 자성/자성족의 족장으로 전래 되신 분이다
부족의 이름과 족장의 이름은 같다는 (國名과 始祖名.부족 명과 부족 장 이름은 같다) 자선족의 장이다
내내 전래된 이름으로 래도 來途 북방 기마계이며.철기족으로 초기 서라벌 서남부, 아라가야域(?)에 세거
자성족을 이룬 것으로 기원 1세기경 이자성 李自成 이사금(부족장의 칭호
니사금이라 왈.니사 금.님금=님=임금=이사군. 주로 씨족의 장을 일컬은 우리말,계승의 님. 초기 부족長의 칭호)이다.
(1) 始祖 李自成 할아버지 자성시대, 초기신라 부족장 내사령,
신라 내물왕 이전부터 군집 주거해온 셔블 서남부일대 호족의 후예 이며
초기 신라시대 내령=내사령에 벼슬에 이르신 분으로
(신라 셔블 諸족에 의해 내물왕조 내령= 이사금으로 추대됨.신라는 김알지 계로 王通을 잇게 되는데
자성 할아버님과 자선 족의 도움으로 쇠족(김)系가 王으로 내내 血統을 잇게 되고
기여하게 되어 신라왕으로부터 족장 지위의 내사령과 서라벌과 그 지역 일대를 통치하는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원래 내물왕은 장군 自成 족의 지원을 받아서
내물의 直系인 눌지를 내물 王 다움으로 왕위로 옹립 하려다가.
구야系의 실성 王軍과 일대 왕위 쟁탈전이 있게 되는데 눌지王軍의
시조자성할아버님은 구야 系인 실성王 군에게 시조님이 전사하였으며,
실성王이 재위 얼마후에 죽게되자 다시 내물왕 직계인 눌지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서
자성 할아버지와 자성 후손들이 눌지왕으로부터 대대로 내사령의 벼슬을 받고,
신라 서남부 일대를 하사 받아 통치하면서
내내 중앙 관직과 성주를 승계하게 됩니다 (成立성립=성을 추대說=내물설),이후 대대로
후손은 신라 중앙의 관직과 성주를 세습함)
(2)군린..제2세조.어원은 족장= 님금.
(3)용수..제3세조.어원은 족장=님금
(4)자성.....
(5)자성......
(6)자성........시대,실성이금
(7)자성........시대.눌지매금(417---458)
(8)자성........시대,자비마립간(배부사흔의여,458 - 479)
(9)자성........시대,소지선공부인의여.479-500
(10)諱 군린 시대
(伯)君麟而 이사금,신라22대,
지증왕대(재위500 -514),
(11)군린?....
(12)군린?....
(13)군린?....
(14)군린?....
(15)군린?....
(16)군린?....
(17)諱용수시대
(伯) 龍首而 이사금,신라29대,
태종무열왕대(재위654--)의 인물(기원7세기)
(18)용수?.
(19)용수?
(20)용수?
(21)용수?
(22)용수?
(23)용수?
(24)諱동이 시대
(漆原伯) 同而 이사금,부령,당 유학하여 과거에 등과,
당의의 벼슬,귀국하여 부령을 지내고.
족장에 이르다,
(25)동이
(26)동이
(27)동이-
(1)諱한희 漢希 시대,
신라 경애왕- 경순왕조에 칠원백,
10세기경 910-970.경기도 회안으로 이주함 戶長
(28)고려시대 漢希?.........
(27)고려시대 漢希?.........
(30)고려시대 漢希?......
(31고려시대 )漢希?.....
(32)고려시대 漢希?.....
(33)고려시대 방린시대 (향임 방임 존임 당임) 시대
(34)고려시대
(35)고려시대
(36)고려시대 방린 향임 방임 존임 당임 시대
(37)고려시대
(38)고려시대
(39)고려시대
(40)고려시대
(41)고려시대 (1) 始祖 諱 방린 公은 세 아들을 두었다.
(42) 고려 광릉 3익시대
諱 益俊-益비(호장.大司諫 대사간 )-益康(영동정令同正) 三兄第 時代.廣李의 原祖
(廣陵三益,廣陵三賢,호장,동정)-고려 희종대
各各 호장 과 령동정을 지냄, 희종(1204 -1211)
제1子 諱 益俊의 後孫은 現在 失傳
제2子 諱 益庇의 후손(廣李 율정공파.廣李 둔촌공파. 廣李십운공파)
제2子 諱 益庇의 후손--문--[름. 蔚]
(3)諱 문이며 아들은 諱름. 諱울
(4)諱름. 諱蔚
*諱름의 後孫은 諱신, 諱정
(5)諱름 제1자 諱신---諱사달--諱 직-諱 금동- 諱 주
諱 의동-
(5) 諱름 제2자 諱정---諱미장--諱탕--諱세 ---諱구---諱영
(5) 諱 蔚 의 제1자 諱한(추사정공.樞司正公)---추사정공파
(5) 諱 蔚 의 제2자 諱당 (국자감 생원)---------생원공파
*율정공파는 第1자 諱한(추사정공.樞司正公)--- 諱녹생 / 諱인생의 후손이다
(6) 諱한(추사정공.樞司正公)의 아들, 諱녹생--- 諱밀--- 諱지---諱관인-- 諱지
諱관의---諱점. 퇴. 지
(6) 諱한(추사정공.樞司正公)의 아들, 諱인생--- 諱돈--- 諱의---諱경빈---諱시생
*생원공파는 第2자 諱당(생원공)의 후손을 말하고 子는
諱인령.원령[집].희령.자령.천령이다
(6) 諱당 (국자감 생원)의 아들, (1)諱인령-諱조-諱동-慶先庫史派
(1)諱당 (국자감 생원)의 아들, 諱원령(集.둔촌공파)--諱지직-
諱지강-
諱지유-
---諱장손--克
諱인손--五克--派
諱예손-
諱맹손-
諱일원-
諱중원-
諱정원-
諱계원-
(1)諱당 (국자감 생원)의 아들, 諱희령---諱女 洪 순(남양군.개국공신). 남양인[子홍복기]
(1)諱당 (국자감 생원)의 아들, 諱자령(판서 건)---諱연동---諱영의정 봉로---諱판서 두신---십운과공파
(1)諱당 (국자감 생원)의 아들, 諱천령(성)
제3子 諱 익강益康(영동정)의 後孫
(3)諱성우(영동정.令同正)---諱잠
(4)諱잠--- 諱전사(군부좌랑)
(5)諱전사(군부좌랑)---諱방귀 (문과.부사 府事)
(6)諱방귀 (문과.부사 府事)---(7)諱 석탄공 양중, 암탄공 양몽
*석탄공파 諱방귀 (문과.부사 府事)의 아들, (1)諱양중(석탄공 시조) ..諱우생.수생
諱우생-諱수철---
수철의 子-諱손.
諱소(개위 명)
-諱수언/순언/온언/성언/성윤조/권견/갑엄/諱창언,
諱우생-諱석철---諱 붕.난--諱사윤.諱사성
諱수생(춘여)----諱景哲(士賢)-諱蔭-諱乙富
*암탄공파 諱방귀 (문과.부사 府事)의 아들, (1)諱양몽(암탄공시조)--- 諱술생/적생/진손/영손형제
諱술생--- 諱원근--- 諱사방
諱숙침
諱사(俠)-
諱적생
諱振孫--- 諱 潤根--諱 枝綱.枝直 諱명仁
諱영손--- 諱난근.배근.석근-
..의子 諱신헌.
諱성헌-
--- 諱維成/維恒/金龜秀/維興
위와 같이 둔촌공.십운공 형제의 증손자/율정공의 증손자/ 석암탄공의 손자들은
같은 항렬로 조선 전기, 조선의 중앙 정부를 사실상 주도하고
이끈, 문무 관료 세력이며, 여타 諸宗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을 받은 선비들이다.
이분들을 모태로 贊成 오겸/判書 박계현/이산해 등이 讚한
[동방의 서업을 이룬 家]이자 韓판서가 말하기를[만극 화룡봉]이요[화주 崇閥 대동지家]이다 .
*영동정 동정, 원래는 正의 다음직 동정을 말한다. 고려초기에는 2,3품직으로 예:동지공거처럼 지공거의
다음직으로 同은 항상 원관직 다음의 官직으로사용됨,
이러한 관명의 연원淵源은 조선조까지 이어져 사용되는데
정,부정,첨정,동지라는관명으로 품계 사용됨, 후에 관계는 정5품직에서 7품직까지,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장의 직을 보좌하는 중간관료로 문반,무반,음관직으로 운용되었다.
즉 영동정은 영의동정,사재동정은 사재의 동정,주부동정은 주부의 동정이고,영사동정이라고도 함,
영사동정은 고려문종시에 처음 설관 됨, 상서성과,상서육부와 상서도관,삼사,어사대,전중성,예빈성,비서성,중추원,제비주부,동궁관에 있었으며, 대우는 998년목종1년 개정전시과16과와 1076년순종30년 경정전시과17과로 전지 23결,22결을 받았다,초기는 과시를 통해 임용 되었으나,
후에 음서직(공음)으로,고려중기의 문벌사회를 조성하는데 주로 음관직으로 운용되었다,
음서는 1039년에 5품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재에게 임용되고,1134년인종12년에는 前代 재신의 내외손과 생질에, 영사동정의 관직을 주었다.고려말에는 중앙관직을 지내고 퇴직한 자나 그 자제 에게 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고려말에 시조를 내세워 세계世系 하고있는 동국의 만성성씨들의 시조 관직이 대부분 영동정인데,
이는 중기 문벌사회 파생의 예이다,이 관직이 주로 세습직 이였다는것과 음관직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 국자 생원이상 광릉삼익三益이상의 선계 또한 오래전 부터 출사出仕하여 현사顯仕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우리 선조가 회안의 향리로서 중앙관료로 출사 하지 못한 시기는
대략 태조왕건대(서기950년)부터 고려의종대(서기1150년)까지 200년간이라 추정된다,그러나 諱필행 할아버지가 쓰신 광이세적이나 기타사료,문서를 고신하면 "4대명휘이전 다른 지파에서는 대대로 현재가 있었다 한다"라는 구절과, "성주는 강계(降階=벼슬의품계를 낮추다)하여 광이의 위분 들을 호장으로 삼았다""는
등의 문구로 보면, 휘 필행 이 이야기한 다른 지파란
곧 " 다른 파와 석암탄공의 선대를 말하며 이는 광이의 삼익어르신들을 보면 고려시대 이미 중앙직 내지는 관료로서 진출이 있었다고 본다.
....................................
그러므로, 자성 鼻祖에 대하여는 曰否하여서는 아니되고, 그래서, 그러므로,
일단은 內史令 비조님을 받들어 모시는 분들은
선세의 유업인 그를 따라서, 따르고 이어 가야할 것이고,
국자생원 諱당 할아버지와 여말 학자 둔촌先祖를 모신 분들은
한음상공 경술보의 취지와 예판하원 선고의 계손훈은 "附書存置와 전의구정의 당부"를
이르는 유지인
것으로,
세상에 근원이 없는 것은 없으므로,
初期 新羅 시대의 內史令 부족장의 후예로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의 거족이다라는 자부심을 지니면서
今의 근행을 당부한, 둔촌공의 학행과 효행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한음의 유지를 받아, 今顧금고한 복암선고또한
"역사를 기록할 때, 萬의 하나 사사로운 뜻이 섞이거나
또는 前에 알고 있던 사실에 집착하여 새로운 史實을 받아들이기 꺼려한다면,
또 先入見을 버리지 못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결국 받아들여야할 것을 버리고 버려야할 것을 취하게 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기록이 그러하지만 족보를 기록함에는 더욱 그러하다.
...삼가族譜 책머리에 자성이후의 세계를 기록하여 우리의 生員공께서 根本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傳하고자 한다" 하시면서 定譜한 만큼, 和의 衆에서 이른 제의로
混題를 풀어가는 것이 도리일 것이며,
비조와 대수는 명자의 것에 各派가 토론하여 回究하고
學界의 助言과 傍證의 理論을 附說하여 合家하는 것이
한음 상공의 附書存置와 傳疑求正의 정신이고,
先世를 대하는 바른 마음이 아니겠는가,
호소하는 것이다.
호소하는 것이다.
2016년 12월 31일
生員公 諱 당 할아버지 24대손 민영 올림
이민영
-보성출생. 초중고 首席入學 首席卒業. 대학에서 法學공부 전공.
(군필 영관장교 전역)
-서울시행정직 공무원 退職
-한국시사랑사람들 문학인회장
-정수장학상청회 회원
-현, SILA of service co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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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보(庚戌譜)
광주이씨 족보서
옛날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를 보았는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으나 아들과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기록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간단하여 한스럽게 여겼는데 자라서 옛사람들의 종법을 자세히 검토해 본 뒤에야 이 족보의 깊은 뜻을 깨달았으니 모두가 동고상공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더라.
임진란 때 나라의 서책들도 다 불타고 없어졌거늘 하물며 족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종중의 어른이신 이사온(李士溫)씨께서는 우리나라 여러 집안의 계보를 잘 아셔서 가승보를 아주 자세히 편찬하여 여러번 나에게 교정하기를 청했으나 그러지를 못했었다. 근자에 문소(聞韶*경북 의성 옛 이름) 이사군(李使君*수령의 다른 애칭) 사수(士修)씨가 기록한 족보 한권을 보내 왔는데 모두가 동고상공의 옛책을 그대로 적었고, 또 소씨(중국 성씨) 족보의 자세함과 간략함을 본 떴으니 전에 내가 교정하지 못했던 것과 그 뜻이 같고 믿을 수 있음을 한번에 알았으며 그 기록을 대대로 남길만하였다. 한두군데 틀리고 빠진 것이 있어 들은바 대로 고치고 바로잡아 그 전말을 서술하여 다시 보냈다.
아아! 우리 둔촌선조께서는 역적 신돈을 배척하시다가 화가 미쳐 멀리 피하셨으며, 참의선조는 소도지변(방원이 두 아우를 죽인 변란) 때 방원의 말고삐를 잡고 간곡히 말리셨으니 그 곧은 명성과 절개는 옛날부터 달리 비할바 없었으니 후손된 자들이 가문의 명성을 더럽힌다면 이 족보를 보면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 둔촌 이후로 서로 멀어졌지만 그 가지는 하나인데 원래 한 뿌리이면서 서로 화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마음일까?
선조의 정을 생각하면서 이 족보를 보고 가문을 빛낼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느끼는 감회로다.
만력 사십일년 세재 계축맹하(1613年 여름)
효충 분의병기 익사 분충병의결기 형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한원부원군 이 덕형 서
...............................
족보서 갑진보(甲辰譜)
族弟判隸院夏源甫가 세보를 중수하여 교정을 마치고 장차 그 叔父北伯(함경 감사) 공립소로 보내어 인쇄에 부치고자 할제 나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일은 형의 선대부께서 일찍이 경영하기 시작하였던 바이거늘 형이 어찌 이 세보에 일언이 없을 수 있겠오." 하기에 내 가로되, "좋다, 그것은 내 본의이거니 어찌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리오."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데 구간 동성보 한 권은 곧 우리 동고선조께서 찬정하신 바이나 임진에 이르러 병화에 잃어버린 바 되었고 그 후 고조고 찬성공께서 이어 편차하시고 한음상공께서 서하였는 바, 생원공 이상 사대명휘가 언전잡기에서 처음 나왔고 명문의 가거할 만한 것이 없는 고로, 권말에 기록하고 그 각파자손도 부기하여 본보와 구별하였으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술보가 이것이다. 거슬러 경술까지는 거의 백 여 년이 되어 세대는 멀어지고 자손은 번성하니 보첩의 개수가 시기로 보아서 합당하다 하겠다. 지난 신미년에 선왕고께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각파단목을 수합하여 첨삭 보증하여 벌로함이 없었고 두루 방주를 달고 외손까지 목록하였으니 예규는 문란스럽지 않고 생략도 적당하여 드디어 상중하 삼권으로 나누어서 초본이 정해지자 왕조께서 하세하시고 그 책은 族叔父(족숙부)참판공에게 돌려져 시기를 보아 인출하려 하였던 바 말기에 참판공께서 또 별세하시니 상자 속에 넣어둔 지 또 몇 년이 지났다.
얼마 전에 北伯公(북백공)이 참판공의 동생으로 변경을 관찰하게 됨을 구공판사(공구를 모으고 일을 처리함) 할 만하고 판결군은 참판공의 아들로 명민정근하여 실제 교정 소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이에 임초양본(인은 경술보, 초는 중수할 초본)에 의거하여 자못 증책과 거치가 있었다. 별거 자손을 기록치 못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빠지기 때문이요, 사대명휘를 그대로 등재하였음은 마땅히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원고가 상세하게 하면서 몇 달이 못되어 편찬과 각판을 마치니 판결군의 힘이 이토록 많았으며 이는 또한 오종의 대행한 일일 것이다. 오호라, 고어에 이르기를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성하고 원천이 멀면 흐름이 길다 하였으니 이치에 떳떳한 바이로다.
우리 이씨는 여계에 현달하기 시작하여 본조에 이르러서는 광묘 성묘대에 극성하였고 명종 선조 때에 이르러 명공과 석보가 우련 배출하여 문장과 덕업이 역사에 빛나고 자손은 천억이오, 과갑이 연이어오니 이는 조선이 쌓이고 쌓인 후음의 소지가 아닐 수 없은 즉 이 족보를 보는 자, 조선의 여체를 이어서 단양하고 가성을 떨추지 않을 것을 생각치 않을 수 있을까. 이는 나와 종인이 마땅히 함께 힘쓸 일이요, 나로서는 따로 마음에 서글픈 바가 있으니 내가 전에 조부님을 모시고 이 일을 서찰을 대필하여 드리는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역력하건만 깜빡할 사이에 이미 삼기(일기는 십이년)가 지났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고 슬퍼 울먹이지 않을 수 없어 이에 몇 마디 아울러 적는 바이다.
숭종 갑진년 계하
후손 통운대부 전 행홍문관 교리지제교 겸 경연시독관춘추관 기주관 승원 삼가 씀
................................
廣州李氏族譜 丙辰譜 重修序
우리 이씨(李氏)의 족보(族譜)가 옛날에 세가지가 있으니 처음에는 우리 충정공(忠正公:東皐) 선조께서 세보(世譜)를 만드셔서 활자(活字)로 인쇄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고, 이어서 시정선조(寺正先祖:士修)께서 성보(姓譜)로 중수(重修)하셨는데 충정공(忠正公:東皐)의 구서(舊書)를 계술(繼述)하셨으니 지금에 이른바 "경술보(庚戌譜)"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끝으로 "갑진보(甲辰譜)"라는 것은 숙조(叔祖)이신 판서공(判書公:夏源)께서 교감(校勘)을 하시고 농은공(農隱公:判決君)께서 간행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족보(族譜)를 만드는데 우리 시조(始祖)를 위로 모시자면 규모가 크지 않을 수 없고 체제(體裁)가 완비(完備)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대체로 시대적(時代的)으로 각각 맞아가는 일이다.
지금 갑진(甲辰:景宗*1724)년이 지난지 칠십여년(七十餘年)이 되였으니 세대(世代)가 뻗어내려 오고 파류(派流:지파)가 널리 퍼졌다. 종인(宗人)들이 오래도록 개수(改修)하기를 의론한 끝에 그 중책을 상도(尙度)한테 맡기니 사양타 못해서 책임을 무릅쓰고 시작한지 육년(六年)만에 공사가 끝나니 무릇 판을 만든 것이 육백칠십구(六百七十九)요, 편(編)을 만든 것이 열둘(十二)이요, 권(卷)을 만든 것이 일곱(七卷)으로서 일종(一宗)의 족보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옛날 소명유(蘇明允)이 족보를 만드는데 그 친족(親族)을 고조(高祖)에서 끝이고 홀로 자기의 생겨난 줄거리만 자세히 밝히고 그 뜻을 밝혀 말하기를 이 족보는 나를 위해 만든 것이라 하였다. 지금 내가 갑진보에 이어서 만든 족보는 우리 일종(一宗)의 것인즉 이 족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특별히 내가 주관(主管)을 해서 만들었을 뿐이다. 그를 상세(詳細)히 하거나 또는 간략(簡略)하게 하는 것을 가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 한 종문(宗門)의 사람이 장차 이 족보를 가지고 각자가 자기의 소자출(所自出)을 밝히면 다들 이 족보는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 각자가 상세히 기록한 것을 모아서 한 종문(宗門) 전체의 족보를 만든다는 것은 널리 수족(收族)하는 도리에 유감이 없다 하겠다.
아 ! 우리 둔촌선생(遁村先生)께서 덕행(德行)과 지절(志節)로서 그 복을 후세에 내리시니 이름난 벼슬한 분과 훌륭한 선비가 대(代)를 이어 많이 나오고 위대한 공신(功臣)과 장한 열사(烈士)들이 역사에 빛나니 동방(東方)의 씨족(氏族)중에서 우리를 가리켜 갑(甲)이냐 을(乙)이냐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데 그 옛날 생각을 하고 지금을 본다면 어찌하여 이다지도 쓸쓸하고 부진(不振)할 수 가 있는가?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족보 중에 여러 선조께서 이룩하신바 그 당세(當世)에 푸짐히 하시고 후세를 빛나게 하신 것은 모두 다 뜻을 다잡고 힘써 배우는 중에서 잘 성공하고 수양(修養)해서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도 요행이 솟아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잘되고 못되는 까닭을 옛날로 돌이켜 본다면 구구하게 저절로 생기는 영광과 명예에 매일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선조(先祖)의 뜻한 바를 뜻으로 삼고, 선조(先祖)의 배우던 바를 배워서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며 걱정하고 걱정해서 잘못됨이 없이 살아가면 저 하늘이 회복해주지 않음을 걱정할 바는 아니다.
우리 일가들은 어찌 이같이 힘써야 할 일을 모를 것인가 !
만약 그 사실을 취하고 버릴때는 오직 조심스럽게 국사(國史)에 의거(依據)하고, 그 경중(輕重)은 순서(順序)를 두고 예법(禮法)에 따라 대체로 세번 이상 주의하였다. 어찌 이것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겠는가 ?.
백대(百代)까지 돈목(敦睦)하게 지낼 의(誼)는 문익공(文翼公:漢陰)의 계축서(癸丑序)에 다 말하였고, 세번 족보(族譜)에 자리한 자취는 참판공(參判公)의 갑진보서(甲辰譜序)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에 거듭하지 아니하노라.
正祖 卽位二十年 丙辰(1796) 仲夏에 通情大夫·司諫院
大司諫 尙 度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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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광이파 중에서 최대의 인구와 주축인 휘당 생원공 둔촌공 후손분들인 둔촌 광이 동성보의 입장과
자성비조를 1700년도 을사보 이후, 400년간 이를 받들고 모신 석암탄 율정공파의 입장입니다
(석암탄공파. 율정공파 보서는 자성으로부터 시작)
석암탄공파. 율정공파의 자성, 원시조 옹립
율정공파의 을사보 내용 표지
율정공파 석암탄공파의 상대도
가. 신라 기원에 대한 광이 동성보 입장(둔촌공 광이 동성보)
나. 경술보에서의 4대명휘 선고에 대한 동성보의 입장(둔촌공 광이 동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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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경술보의 범례(둔촌공 광이 동성보)
「동고상공께서 만드신 광릉세보에는 생원공 이전의 세계에 대한 내용이 없으며, 경술보 편수 시 안팎의 자손들이 가져왔다는 언전 잡기의 내용을 보시고 경술보(庚戌譜)의 범례(凡例)에 이르시기를 “둔촌 선생 윗대에는 예전부터 족보(譜牒)가 없었는데, 요 몇 해 사이에 안팎의 자손들에게서 그 내용을 구하였으니, 언전(諺傳)에서 찾거나, 혹 잡기(雜記)에서 얻었다. 그러나 그 세대와 지파(支派)를 근거 할 만함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수(代數)의 뒤바뀜과 명자(名字)의 어긋남을 면치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을 빼는 것이 마땅할듯하다” 또 이르시기를 “옛 일 가운데 의심스러운 점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또한 바른 것을 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니, 우선 언전(諺傳)과 잡기(雜記)에서 얻은 내용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글의 출처에 대해 밝은 사람이 그것을 바로잡기를 기다리겠노라”」
다. 병진보선세 사대명휘에 대한 판서공 변설 13조훈, 입장
*계유보의 입장-병진보를 따랐다(둔촌공 광이 동성보)
휘 하원, 판서공께서는 본 “변설13조”첫 부분에 경술보의 한음상공 글을 인용하시어「동고상공께서 만드신 광릉세보에는 생원공 이전의 세계에 대한 내용이 없으며, 경술보 편수 시 안팎의 자손들이 가져왔다는 언전 잡기의 내용을 보시고 경술보(庚戌譜)의 범례(凡例)에 이르시기를 “둔촌 선생 윗대에는 예전부터 족보(譜牒)가 없었는데, 요 몇 해 사이에 안팎의 자손들에게서 그 내용을 구하였으니, 언전(諺傳)에서 찾거나, 혹 잡기(雜記)에서 얻었다. 그러나 그 세대와 지파(支派)를 근거 할 만함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수(代數)의 뒤바뀜과 명자(名字)의 어긋남을 면치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을 빼는 것이 마땅할듯하다” 또 이르시기를 “옛 일 가운데 의심스러운 점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또한 바른 것을 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니, 우선 언전(諺傳)과 잡기(雜記)에서 얻은 내용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글의 출처에 대해 밝은 사람이 그것을 바로잡기를 기다리겠노라”」라는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 후 114년이 지나 갑진보 편수시, 판서공께서는 역시 합보를 요구하며 율정·석탄 양파의 종인이 가지고온 세전초보와 언전·잡기의 내용을 사적을 통하여 검토하신 다음 그 내용의 오류 됨과 의심되는 부분을 하나하나 밝히시어 갑진보 후단에 기록하시고 후대에 예상되는 혼란을 경계토록 하신 것입니다.
판서공께서는 본 변설13조 끝부분에 율정파의 세전초보는 “언전과 잡기에 근거하여 비조(鼻祖)로 삼아서 보첩(譜牒)의 첫머리에 기록을 해두었으니, 위로는 선조께 죄를 짓는 일이요. 아래로는 세상의 비웃음을 살 일이로다”라고 본서에 기록하고 “별보의 여러 파를 본보에 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별보에도 또한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니, 한희 이하 4대(생원공 이전)는 동고 선생의 옛 족보를 그대로 따라서 기록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 ‘변설13조’는 그 후 만들어지는 병진보, 계유보, 기미보, 앞부분에 계속 수록되고 방계종파의 내용 역시 각 상대족보 후단에 “별보”로 수록해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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