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들도 3.1운동에 대해서 알지만 김정일 독재정권은 3월 1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3월 1일은 김일성이 ‘죽을뻔한 날’이다. 1946년 ‘3.1운동 기념연설’을 하던 김일성에게 누군가 수류탄을 던진 것.
북한에서 3.1운동을 기념하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수령 독재와 연관된다.
김정일 독재정권은 북한의 진정한 역사는 김일성의 ‘혁명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억지 선전한다.
그것은 김일성의 ‘혁명 활동’이 아닌 반일 투쟁이나 애국운동은 모두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3.1운동 관련 북한 내부 교양자료 전문-
조선인민이 1919년 3월 1일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위하여 한 결 같이 들고 일어나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희생적으로 싸운 전 민족적인 반일항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 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일제를 반대하여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3.1인민봉기는 나라가 일제침략자들에게 강점된 후 쌓이고 맺힌 우리 인민의 민족적 분노와 반일 감정이 폭발되여 일어났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침략자들은 극악한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놓고 우리 인민을 야만적 방법으로 통치하였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선인민은 자주적 권리를 무참히 유린당하고 그 처지가 나날이 어렵게 되여 더는 그대로 살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애국적 우리 인민들은 일제의 가혹한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을 여러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벌리였다.
1918년 말경부터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에 의하여 큰 규모의 반일봉기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사업이 평양과 서울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곳에서 진행되였다.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우리 인민의 민족적 울분과 사무친 원한은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전 민족적인 봉기로 폭발하고야 말았다.
3.1인민봉기는 평양에서 있은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는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 선생님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되여 반일시위투쟁이 일어났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이미 짜놓은 계획에 따라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수천명의 각계각층 군중이 장대재에 있던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한 청년학생대표가 단우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은 독립국가라는것을 선포하였다.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선두로 한 수천명의 군중들은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웨치면서 거리를 누비며 행진하였다. 시위군중 속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렬은 삽시간에 10여만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들은 달려드는 일제침략군과 경찰들을 맞받아 계속 전진하였으며 시내 여러곳에서 용감히 싸웠다.
3월 1일 서울에서도 큰 규모의 반일독립만세시위투쟁이 벌어졌다. 이날 고종의 장례식에 모였던 서울의 청년학생들과 애국적 인민들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오후 2시 30분 청년학생대표가 탑골공원 단우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라는것을 선포하자 군중들은 한결같이 반일항쟁에 떨쳐나섰다.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벌리였다.
시위대렬이 여러대로 나뉘여 시내 각 곳으로 퍼져나가자 청년학생들과 함께 로동자, 도시소시민 등 각계각층 군중들이 모여들어 그 대렬은 무려 수십만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 안은 애국적시위군중에 의하여 교통이 차단되고 일제의 식민지통치질서가 마비상태에 빠졌다.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서울시 안의 헌병, 경찰은 물론 룡산주둔 제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시위군중을 탄압학살 하였다. 거리는 삽시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나 시위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인민대중이 일제의 탄압을 박차면서 시위투쟁을 벌리고 있을 때 33명의 <조선민족대표>로 자처한 부르죠아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은 청년학생대표들과 한 <약속>을 다 줴버리고 명월관(료리점) 지점인 태회관에 모여 먹자판을 벌려놓고는 <독립선언서>조차 읽지 앓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투항변절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그러나 인민대중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3.1봉기의 불길은 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를 비롯한 전국각지로 번져갔다.
반일항쟁이 급속히 확대되는데 따라 평화적인 만세시위투쟁은 점차 폭동적인 성격을 띠고 더욱 견결하게 전개되였다.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오늘의 평양시 만경대구역)인민들의 대중적 시위투쟁은 처음부터 폭동적성격을 띠고 진행되였다. 만경대 일대의 인민들은 열렬한 반일혁명투사이신 강진석(김일성의 외삼촌, 편집자 주)선생님의 지도밑에 남자, 녀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떨쳐나서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평양으로 힘있게 전진하였다.
이때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여덟살 되시는 어리신 몸으로 반일봉기 대렬에 참가하시여 보통문으로 가시였다.
보통문까지 진출한 시위군중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앓고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강동(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지역, 편집자 주)에서도 봉기가 치렬하게 벌어졌다.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김일성의 아비, 편집자 주)선생님께서 조직지도하신 조선국민회와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에 망라되였던 수많은 성원들은 각 리의 군중과 함께 강동읍으로 쳐들어가 일제강점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족치였다.
첫댓글 ' 유관순 ' 없는 한국 교과서에 대해 전교조도 말좀 해 봐라 이런짓도 뇌무현정신 이어받기냐?
도대체 개념없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니 확실히 정신병자이구나...뇌무현때는 초등학교 4년 교과서에 유관순에 3.1운동에 대해서 상세히 나타나 있는것을 이번에 친일 뉴라이트 또라이들이 교과서 개정시 삭제했다가 국민여론이 좋지 아니하자 5학년 교과서에 슬쩍 내용을 줄여 집어 넣었단다.. 제발 공부좀 하고 댓글 달아라.. 또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