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탄용사전적비
개요
화촌면과 두촌면 경계 지점을 통과하는 44번 국도는 말고개를 이루고 있는데, 이 말고개 중간 지
점에 육탄용사전적비가 우뚝 서 있다.
1950년 북괴군 전면 남침 때에 38선 전선이 밀려났으나, 홍천과 춘천에서만 승전으로 적의 침공
을 2~3일 간 늦추게 했다. 한국전쟁사에는 말고개 전투의 승전보를 기록하고, 그 무공을 높이 평
가하고 있다.
6월 25일 새벽, 국군 6사단 2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홍천지방을 공격해 온 북괴군 7사단은 춘천 총
공격과 때를 맞춰 전차를 앞세우고 인제 남면에서부터 물밀듯 쳐들어 왔다. 국군 2연대는 S자형으
로 된 말고개에서 진을 치고 57㎜ 대전차포를 배치하는 한편, 성산에 포진한 제3포대가 철정리로
오는 북괴군에 포격을 가했다. 제2차에 걸친 북괴군의 침공도 국군 6사단의 저지로 실패하고 말았
다. 북괴군은 춘천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으나 홍천을 점거치 못하게 되자 말고개 일대를 융단포격
하며 말고개 뚫기 돌진작전을 개시했다. S자 굴곡에 매복했던 6사단 2연대 소속 장병 11명이 육탄
으로 적의 탱크에 뛰어올라 선두 전차 2대를 파괴하였고, 적이 다시 후퇴할 무렵 춘천에서 전공
을 올린 19연대가 가세, 적을 완전 격퇴한 것으로 한국전쟁사에 기록되었다. 바로 이곳 화촌면 주
음치리 말고개 중앙지점에 1975년 육탄용사전적비를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 말고개 전투
개요
- 일시 : 1950년 6월 27일~28일
- 지역 : 말고개 (홍천 동북 14km)
- 적군 : 북한군 제12사단 예하부대 (주:일부 공간사에는 ‘7사단’으로 기술하고 있음)
- 아군 제6사단 19연대 특공대
상황
- 1950년 6월 26일 밤, 제6사단장은 춘천지역에서 선전하고 있는 제7연대(사단 좌 일선)와는
달리, 홍천 동북방에서 고전중인 제2연대(사단 우 일선)의 전황을 크게 우려한 나머지, 동 연대
를 말고개 일대로 철수시켜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하는 한편, 춘천지역에 위치한 사단예비인
제19연대를 홍천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작전경과
- 홍천으로 이동한 제19연대장은 대전차 특공대를 편성하여 말고개 일대에서 이를 운용하기로
결심했다. 연대장은 11명을 엄선하여 특공대를 편성하고는 이들에게 81밀리 박격포탄 1발, 화염
병 1개, 수류탄 2발(연막탄 포함)씩을 휴대시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차 공격 요령을 교육시
켰다.
해치가 열려 있을 경우 : 수류탄과 화염병을 그 속에 투입
해치가 닫혀 잇을 경우 : 81미리 박격포탄을 궤도 밑에 밀어넣어 파괴
박격포탄이 불발일 경우 : 연막으로 시계를 차단하여 해치의 개방을 강요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 : 화염병을 엔진실 상판 덮개 위에 투척
특공대는 27일 22:00, 폭우를 무릅쓰고 3/4톤 트럭에 탑승하여 연대 수색대장 인솔 하에 말고개
에 도착했다. 수색대장은 그곳에 잔류하고, 특공대는 적진지로 진입해 들어갔다. 약 1km 전진했
을 무렵, 선두에 섰던 조달진 일병이 적의 전화선을 발견하고는 이를 돌로써 절단하는 순간에 기
도가 폭로되어 적의 기습 사격을 받고 특공대는 분산되고 말았다. 조일병 이하 5명이 얼마 후 합
류하여 적 전차 집결지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날이 샐 무렵 말고개
로 복귀하여, 이곳에서 다행히도 잔여 대원 6명과 합류했다.
조일병은 말고개에 특공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371고지 하단부의 S자 급경사 커브에 각
2명으로 구성된 6개 특공조를 30m 간격으로 배치했다. 10:00경, 한계리 벌판 쪽에서 접근해오고
있는 10대의 적 전차를 발견하고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기했다. 얼마 후 적 전차가 나타나는
순간, 먼저 제2연대 57밀리 대전차포(사전에 협조)가 1번 전차를 사격하여 명중시키자, 모든 적
전차는 발악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속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번 전차가 마지막 매복조 앞을 통과하는 순간 조일병이 81밀리 박격포탄을 궤도 밑에 밀어 넣었
으나 불발이었다. 바로 이때 제2연대 대전차포의 2, 3탄이 1번 전차에 다시 명중했다. 전차가 허
둥지둥하자 당황한 승무원이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조일병이 신속히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전차는 파괴되었다. 한편 중간
특공조는 연막 수류탄을 터뜨려 전차의 시계를 차단했다. 시계의 차단으로 더 이상의 기동을 포기
한 승무원이 모두 하차하여 371고지 쪽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이들은 모두 우리 제2연대의 방어
진지에서 사살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 전차 파괴 4대, 노획 6대, 적 사살 24명이라는 큰 전과를 올린 특공대원 모두 2계
급 내지 1계급씩의 특진과 함께 훈장을 받았다.
교훈
- 특공대장의 임명과 책임이 불명확하다. 수색대장의 책임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일등병을 특공
대장으로 임명한 것도 부적절하다.
조 일병의 용기와 과단성 있는 지휘는 훌륭했다. 전차 공격에 알맞은 지형을 이용했고, 특히 전
차 공격방법이 적절했다.
적진 속에서 돌로써 유선을 절단한 행동과 박격포탄의 폭발 원리를 모르고 사용한 것은 잘못이
었다.
※ 이는 제19연대가 평소 대전차육탄공격훈련을 해 온 결과로 분석됨. 이후에도 제19연대는 대
전차공격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게 됨. 지연작전간 제6사단이 문경 부근에서 적 전차 매복습격작
전.
북한의 남침 공격 4일째인 1950년 6월 28일, 춘천으로 침략한 북한군 제7사단의 주력은 전차를 앞
세우고 홍천을 공격해 왔다. 이때 국군 제6사단 19연대는 적 전차를 저지, 격멸하기 위해 특공대
를 편성했다. 30여명이 자원했으나 육탄공격할 특공대로 선발된 인원은 조달진 일등병을 비롯, 원
근호. 양학모. 지용철. 조문종 등 11명이었다. 특공대원들은 적 전차의 장단점, 파괴 요령 등을
교육받고 각자 81㎜ 박격포탄 1발과 수류탄 2발씩을 지급받았다.
조달진 일등병은 선두 전차를 막기 위해 굽은 도로의 배수로에 누워 적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대원들도 20m 간격으로 배수로 근처에 눕거나 도로변 숲속에 은폐해 있었다. 얼마 후 적의
선두 전차가 다가왔다. 이때 아군이 쏜 57㎜ 대전차 포탄이 적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잠시 멈칫했
을 뿐 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질주해 왔다.
이를 본 조 일등병은 공포를 느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육탄공격 태세를 갖췄다. 드디어 눈앞에
커브길을 돌면서 서행하는 전차가 나타났다. 순간 조 일등병은 81㎜ 박격포탄을 적 전차의 궤도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이에 조 일등병은 적 천차의 후미로 올라가 수류탄 2발
을 전차 속으로 집어넣은 다음 벼랑으로 굴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선두 전차
는 화염에 휩싸였고, 동료들이 파괴한 마지막 전차 사이에 낀 7대의 전차는 진퇴양난에 빠져 전차
병들은 전차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때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도망가는 적을 모두 사살하고 남은 전차 7대를 포획하는 대전과를 올렸
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육탄전을 수행한
조 일등병 등 11용사의 장거는 국군의 전사(戰史)와 함께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 장
병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 <육탄용사전적비> 비문
- 반만년 역사의 비극인 6.25 !
평화롭고 살기 좋은 이 강토에 잔악무도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인하여 고요한 이곳 홍천에도
악마와 같이 밀려드는 북괴군 정규 7사단을 맞아 강토를 지키려는 피끓는 국군용사들은 열악한 장
비와 병력으로 오직 조국과 민족을 구하겠다고 하는 일념에서 국군 6사단 주력부대인 제2연대와
예비부대인 제19연대 용사들은 각기 “대전차 돌격대”와 “육탄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 자주
포 1대와 탱크 9대를 폭파 및 노획하는 6.25 개전 초 아군 독자적인 힘으로 승리를 거두는데 전과
를 올림으로써 6월 30일까지 이곳 홍천 동.북부 전선을 방어하여 풍전등화같이 위기에 처한 조국
을 구한 자랑스런 국군용사들의 살신성인의 호국정신을 길이 후손에게 계승 및 선양하기 위해서
이곳 말고개 갈림길에 홍천군민의 성금으로 전적비를 세워 님들의 열과 넋을 받들고자 한다
1999년 12월 22일
※ 당시 지휘관
제 6보병사단 사단장 준장 김종오
제 2보병연대 연대장 대령 함병선
제19보병연대 연대장 중령 민병권
■ <육탄용사충용탑> 비문
- 1950년 6월 27일 오후 민병권 연대장은 홍천국교 교정에 도착한 3대대장 장병들 중에서 11명의
용사를 선발하여 박준수 중위(육사 8기)의 지휘하에 말고개에 도착한 후 2명이 1개조씩 조를 편성
하여 도로 양쪽에 시체를 가장하여 매복중 대전차포 대원들의 집중 화력지원으로 적 전차가 움찔
하고 동작을 멈추자 조달진 대원이 1번, 양학진 대원이 3번, 원근호 대원이 5번 전차 등을 일제
히 공격하여 적 자주포 등 전차 10대를 폭파하는 개전 초 아군 독자적인 노력으로 대승을 거둠으
로써 우리도 육탄으로 적 탱크를 부술 수 있다고 하는 신화를 창조하여 군의 사기 앙양 및 전투
력 강화에 기여함은 물론 위기에 처한 전선을 유리하게 이끈 육탄용사님들의 멸사봉공의 호국정신
을 군의 귀감으로 삼고자 충용탑을 세워 그 숭고한 얼을 받들고자 한다.
1999년 11월
■ <돌격용사전공탑> 비문
- 1950년 6월 26일 김주형 소령(2연대 1대대장)은 대전차 돌격대를 조직하여 자은리에서 적 전차
2대를 격파하여 적의 기세를 꺾은 후 철정리로 돌격해오는 적의 전차부대를 맞아 보병과 전차를
분리하는 데 성공, 말고개 정상으로 돌진해오는 적 전차를 향하여 대전차포 사수인 김학두 일등중
사 외 10명의 돌격대원들은 적 1번 탱크를 향하여 57미리 대전차포를 이용, 1탄 철갑탄을 적 자주
포 바퀴에, 2탄은 정면에 명중시켜 화염에 싸인 틈을 타서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여 선두 자주포
와 탱크를 폭파하는 데 전공을 세움으로써 위기에 처한 아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를 한 자랑
스런 돌격용사님들의 호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서 이곳에 전공탑을 세워 님들의 넋을 위안코
자 한다.
1999년 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