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용어500(22)신 심 명 (信心銘) ~신중~사찰은 왜 산속에 많은가?
285. 신 심 명 (信心銘) <삼조 승찬(三祖僧瓚)>
「신심명」 글 전체는 사언절구(四言絶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1천 7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 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들 평(評)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불법(佛法)이 전해진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고 학자들이 격찬할 뿐만 아니라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글 전체가
모두 양변(兩邊)을 여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글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대(對對)를 40대(四十對)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대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따름(逆順), 옳고 그름(是非)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생의 상대개념, 즉 변견(邊見)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 준 드문 저술입니다.
일관된 논리로써 선(禪)이나 교(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를 통해서 양변(兩邊)을 여읜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사상(思想)임을 표현한 총괄적인 중도(中道)총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 심 명 (信心銘)
至道無難(지도무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唯嫌揀擇(유혐간택)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하늘엔 흰 구름 유유히 흘러가고, 강가엔 산들바람에 갈대가 춤춘다.
但莫憎愛(단막증애)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 洞'꿰뚫을 통'
洞然明白(통연명백) 통연히 명백明白하리라. : 然막힘없이 트여 밝음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에 늘 다른 것이 없다.
毫釐有差(호리유차) 털끝 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 釐저울눈의 毫와釐
天地懸隔(천지현격) 하늘과 땅 사이로 멀어진다.
한 생각에 속으면 온 세계가 망상妄想의 세계가 된다.
欲得現前(욕득현전) 도道가 앞에 나타나길 바란다면,
莫存順逆(막존순역)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더할 것도 없고 빼낼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違順相爭(위순상쟁)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투는 것, : 違어긋날 위
是爲心病(시위심병)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둘로 나누어 취取하고 버림이 곧 병病이다.
不識玄旨(불식현지)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니
徒勞念靜(도로념정)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애쓴다.
온갖 생각이 곧 법이고, 시끄러움이 곧 법이고, 고요함이 곧 법이다.
圓同太虛(원동태허) 두루두루 큰 허공과 같아서
無欠無餘(무흠무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언제나 전체이고, 어디서나 하나이다.
良由取捨(양유취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所以不如(소이불여)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다.
늘 둘이 아닌 하나라면, 마음대로 취하고 버리더라도 언제나 한결같다.
莫逐有緣(막축유연) 인연을 쫓아가지도 말고,
勿住空忍(물주공인) 빈 곳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
있다고 여기지도 말고, 없다고 여기지도 말아라.
一種平懷(일종평회) 한결같이 평등하게 지니면, : 懷 품다[가슴],마음[생각]
泯然自盡(민연자진) 사라져 저절로 끝날 것이다. : 泯然 形跡없이, 망할 민
언제나 둘 없는 하나라면, 저절로 갈등葛藤은 없다.
止動歸止(지동귀지)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止更彌動(지갱미동) 멈춤이 다시 움직이게 된다.
움직임에도 머물지 말고, 멈춤에도 머물지 말아라.
머묾없이 움직이면 자재하게 움직이고, 머묾없이 멈추면 자유롭게 멈춘다.
唯滯兩邊(유체양변) 오로지 양 쪽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 滯막힐 체
寧知一種(영지일종) 어찌 한 가지임을 알겠는가?
한결같이 하나라면, 이쪽에 머물러도 하나요, 저쪽에 머물러도 하나이다.
一種不通(일종불통)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양처실공) 양 쪽 다 공덕을 잃으리라.
만 가지 법을 잘 분별하면서도 언제나 하나이고, 늘 하나이면서도 만 가지 법法을 잘 분별한다.
遣有沒有(견유몰유) 있음을 버리면 도리어 있음에 빠져들고, : 遣보낼 견
從空背空(종공배공) 공[空]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지게 된다. 沒잠길 몰
있음도 헛된 이름이고, 없음도 헛된 이름이고, 색色도 헛된 이름이고, 공空도 헛된 이름이다.
언제나 하나이면서 자유롭게 있음도 말하고 없 음도 말하고 색도 분별하고 공도 분별한다.
多言多慮(다언다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전불상응) 더욱 더 상응치 못한다.
모든 생각과 모든 말이 바로 이 하나이니, 막힘없이 생각하고 막힘없이 말하라.
絶言絶慮(절언절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무처불통)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말을 해도 말이 없고, 생각을 해도 생각이 없다.
歸根得旨(귀근득지)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 旨 뜻 지
隨照失宗(수조실종) 비춤을 따라가면 종취를 잃는다.
돌아가도 돌아감이 아니요, 따라가도 따라감이 아니다.
돌아갈 근본이 따로 없고, 따라갈 경계가 달리 없다.
須臾返照(수유반조) 잠깐이라도 비춤을 돌이키면, : 臾 잠깐 유
勝脚前空(승각전공) 공空을 앞세우는 것 보다 훨씬 낫다.
비추지도 말고, 돌이키지도 말고, 공空을 앞세우지도 말고, 공을 뒤에 두지도 말라.
수행을 하지도 말고, 그대로 있지도 말라.
前空轉變(전공전변) 공을 앞세워 이리저리 바뀌어감은,
皆由妄見(개유망견) 모두 허망한 견해 때문이다.
공[空]도 견해요, 색[色]도 견해이다.
不用求眞(불용구진)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유수식견)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
모든 견해는 허망할 뿐, 어떤 진실도 없다. 견해 없이 견해를 일으키면, 모든 견해에서 허망함도 없고
진실함도 없다. 허망함도 없고 진실함도 없으니, 다만 이 하나이다.
二見不住(이견부주)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신막추심) 삼가하고 좇아가 찾지 말라. : 追따를 추 尋찾을 심
둘로 보는 것이 곧 이 진실이고, 견해가 곧 이 진실이고, 머물거나 좇아가는 것이 곧 이 진실이고,
찾는 것이 곧 이 진실이다.
纔有是非(재유시비) 옳으니 그르니 따지기만 하면, : 纔 재주 재
紛然失心(분연실심)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게 된다.
모든 생각이 생각 아니어서 생각을 해도 생각이란 물건이 없다면 해탈 한 부처겠지만,
생각하면 생각이 있고 말을하면 말이있다면 망상에 묶 인 중생이다.
二由一有(이유일유)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나,
一亦莫守(일역막수) 하나 또한 지키고 있지 말라.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이다. 여럿도 허망한 이름이요, 하 나도 허망한 이름이다.
허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면 하나가 허망하지 않고, 여럿이면 여럿이 허망하지 않다.
一心不生(일심불생)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만법무구) 만 법이 허물이 없다. : 咎 허물구
한 마음이 나도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
無咎無法(무구무법)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不生不心(불생불심)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
법이라 해도 허물이 없고, 마음이라 해도 허물이 없다.
能隨境滅(능수경멸)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境逐能沈(경수능침) 객관은 주관을 따라 사라진다.
주관이 있으니 객관이 있고, 객관이 있으니 주관이 있다.
境由能境(경유능경)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能由境能(능유경능)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도 없다.
欲知兩段(욕지양단) 두 끝을 알고자 하는가?
元是一空(원시일공) 원래 하나의 공[空]이다.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
一空同兩(일공동양) 하나의 공空은 양단(兩段)과 같으니,
齊含萬象(제함만상) 삼라만상을 모두 다 포함한다.
색[色]이 곧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이다.
不見精麄(불견정추) 세밀함과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 麄 거칠 추
寧有偏黨(영유편당)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 偏 치우칠 편
세밀함은 세밀함이 아니고, 거칠음은 거칠음이 아니다.
大道體寬(대도체관) 대도는 본체가 드넓어서,
無易無難(무이무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
대도(大道)는 없는 곳이 없어서, 쉬워도 대도이고 어려워도 대도이다.
小見狐疑(소견호의) 좁은 견해로 여우같이 의심을 하면,
轉急轉遲(전급전지) 서둘수록 더욱 늦어진다.
의심이 곧 대도(大道)이면, 의심(疑心)은 사라진다.
執之失度(집지실도) 집착하면 법도(法度)를 잃고서,
必入邪路(필입사로)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간다.
법도가 분명하면 집착이 없고 법도가 한결같으면 삿됨과 바름이없다.
放之自然(방지자연)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體無去住(체무거주)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놓아도 본래 그러하고 쥐어도 본래 그러하며, 머물러도 본바탕이고 오고가도 본바탕이다.
任性合道(임성합도)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니,
逍遙絶惱(소요절뇌) 소요하여 번뇌가 끊어진다. : 逍노닐 소 遙멀요
지킬 본성이 없고 얻을 도道가 없으면, 한가하고 자재롭다.
繫念乖眞(계념괴진)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과 어긋나:繫맬계 乖어그러질 괴
昏沈不好(혼침불호) 혼침에 빠져서 좋지 않다.
생각을 해도 생각이 없고, 말을 해도 말이 없다.
不好勞神(불호노신) 좋지 않으면 정신을 괴롭히거늘,
何用疏親(하용소친) 어찌 친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멀어도 다름이 없고, 가까워도 다름이 없다.
欲取一乘(욕취일승) 일승을 얻고자 하거든,
勿惡六塵(물오육진) 육진 경계를 미워하지 말라.
색깔이 법[法]을 말하고, 소리가 법을 나타내고, 냄새가 법을 가리키고,
맛이 법을 드러내고, 촉감이 법을 확인해 주고, 생각이 법을 증명한다.
六塵不惡(육진불오) 육진 경계를 미워하지 말아야,
還同正覺(환동정각) 바른 깨달음과 같아진다.
색깔이 깨달음이고, 소리가 깨달음이고, 냄새가 깨달음이고,
맛이 깨달음이고, 촉감이 깨달음이고, 생각이 깨달음이다.
智者無爲(지자무위) 지혜로운 자는 함[爲]이 없지만,
愚人自縛(우인자박)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어 매인다.
해야 할 일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없다.
法無異法(법무이법) 법(法)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는데,
妄自愛着(망자애착) 망령되이 스스로 좋아하고 애착한다.
붙잡는 것이 곧 법法이요 놓는 것이 곧 법이니, 붙잡아도 붙잡는 것이 아니고, 놓아도 놓는 것이 아니다.
將心用心(장심용심) 마음을 가지고서 마음을 찾으니,
豈非大錯(기비대착)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랴?
찾지 않으면 온 우주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찾으면 마음은 어디 에도 없다.
迷生寂亂(미생적란)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생기고,
悟無好惡(오무호오) 깨달으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다.
언제나 다만 하나이니, 좋아하니 싫어하니 고요하니 시끄러우니 하는 어떤 차별(差別)도 없다.
一切二邊(일체이변)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良由斟酌(양유짐작) 자못 헤아려 보기 때문에 생긴다.
견해見解가 하나라도 생기면, 온 세계가 어둠 속에 갇힌다.
夢幻虛華(몽환허화)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何勞把捉(하로파착)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모든 꿈과 허깨비와 헛꽃이 그대로 진실하여 잡을 것도 없고 놓을 것도 없다.
得失是非(득실시비)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一時放却(일시방각) 일시에 놓아 버려라.
지금 당장 분명하면, 놓을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이 늘 한결같아 차별 (差別)이 없다.
眼若不睡(안약불수) 만약 눈이 잠들지 않으면,
諸夢自除(제몽자제) 모든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꿈속에서 잠을 깨니 꿈이 꿈이 아니로다.
心若不異(심약불이)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萬法一如(만법일여) 만 가지 법이 한결같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가운데, 산들바람에 풀잎에 흔들리네.
一如體玄(일여체현) 한결같은 본체가 현묘하니,
兀爾忘緣(올이망연) 올연히 차별 인연을 잊는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모든 일이 다름없이 하나이고 차별 없이 전체이다.
萬法齊觀(만법제관) 만법이 다 현전함에,
歸復自然(귀부자연) 돌아감이 자연스럽다.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잔다.
泯其所以(민기소이) 그 까닭을 없애 버리면,
不可方比(불가방비) 견주어 비교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고 까닭도 없고 목적도 없다.
止動無動(지동무동) 그침에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따로 없고,
動止無止(동지무지) 움직임에서 그치니 그침이 따로 없다.
움직임과 그침으로 분별하면, 움직임과 그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결코 따로 있을 수가 없고, 서로 연기緣起하여 나타난다.
兩旣不成(양기불성)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一何有爾(일하유이) 하나가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둘을 분별이라 하면, 하나 역시 분별이다.
究竟窮極(구경궁극) 마지막 끝까지 결코,
不存軌則(부존궤칙) 격식을 두지 말아라.
끝내 하나의 견해도 두어서는 안 되니, 한 조각 생각이 영원토록 얽어 매는 굴레가 된다.
契心平等(계심평등)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서,
所作俱息(소작구식) 짓고 짓는 바가 모두 쉬어진다.
하나하나의 일에 전혀 다름이 없으니, 일을 해도 일이 없다.
狐疑盡淨(호의진정)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正信調直(정신조직)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눈앞이 분명하지 못하므로 생각으로 헤아리지만, 눈앞이 분명하면 헤아 릴 까닭이 없다.
一切不留(일절불류)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면,
無可記憶(무가기억) 기억할 아무 것도 없다.
생각이 곧 공(空)이요 기억이 곧 공(空)이니, 생각하여도 생각이 없고 기억하여도 기억이 없다.
虛明自照(허명자조)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니,
不勞心力(불로심력)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비출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으니, 나타나는 족족 저절로 통通한다.
非思量處(비사량처)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識情難測(식정난측)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렵다.
생각이 곧 이것이고, 의식이 곧 이것이고, 감정이 곧 이것이다.
眞如法界(진여법계)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無他無自(무타무자) 남도 없고 나도 없다.
나도 이것이고, 남도 이것이다.
要急相應(요급상응) 재빨리 상응하고자 한다면,
唯言不二(유언불이) 오직 둘 아님만을 말하라.
다만 둘 없는 이 하나일 뿐, 달리 어떤 진리도 없다. 둘 없는 하나이니 취(取) 하거나 버리는(捨)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언제나 일여(一如)하고 여여(如如)하다.
不二皆同(불이개동)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無不包容(무불포용)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둘이 아니라면, 나와 세계가 따로 없고, 실상과 망상이 따로 없 고,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고,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따로 없고, 고요함 과 시끄러움이 따로 없고, 적멸[寂滅]과 생멸[生滅]이
따로 없고, 나와 남이 따로 없다.
十方智者(시방지자) 온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은,
皆入此宗(개입차종)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온다.
근본은 둘이 없으니, 둘 없음이 곧 근본이다.
宗非促延(종비촉연) 종취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 促재촉할촉 延늘일 연
一念萬年(일념만년) 한 생각이 곧 만년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영원한 시간이 곧 이 순간이고, 이 순간은 둘이 없다.
無在不在(무재부재)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十方目前(시방목전) 온 세상이 바로 눈앞이다.
공[空]도 아니고 색도 아닌 이것이 공을 분별하고 색[色]을 분별한다.
極小同大(극소동대)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忘絶境界(망절경계)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끊는다.
아무리 작아도 이것이고, 아무리 커도 이것이다.
極大同小(극대동소)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不見邊表(불견변표) 그 끝과 겉을 보지 못한다. : 邊 가 변
안도 이것이고 밖도 이것이며, 중심도 이것이고 가생이도 이것이다.
有卽是無(유즉시무) 있음이 곧 없음이요,
無卽是有(무즉시유) 없음이 곧 있음이다.
있음도 이것이고, 없음도 이것이다.
若不如此(약불여차)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必不須守(필불수수) 반드시 지켜서는 안 된다.
지킬 것도 없고, 머물 곳도 없다.
一卽一切(일즉일체) 하나가 곧 모두요,
一切卽一(일체즉일) 모두가 곧 하나이다.
하늘이 여기 있고, 땅이 여기 있다.
但能如是(단능여시) 다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何慮不畢(하려불필) 무엇 때문에 끝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信心不二(신심불이)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
不二信心(불이신심)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다.
아무리 둘로 나누어도 본래 둘이 아니다.
言語道斷(언어도단)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非去來今(비거래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로다.
말을 하지만 말이 없고, 분별을 하지만 분별(分別)이 없다.
「신심명」의 대의(大意)는 우리가 모든 상대적인 양변의 차별견해를 모두 버리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 또는 진여법계(眞如法界),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선종에서는 ‘마음’ 또는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하지만 ‘마음’, ‘자성’이라 하는 것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서 그것도 다 거짓말이며,
깨치면 결국 이런 말이 다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물을 마셔 보아야 물이 차고 더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처럼 진여법계· 둘 아닌 세계· 무장애법계·
부사의해탈경계라 하지만, 깨치고 보면 이러한 표현들이 도저히 적용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이대로가 견성이고 선종(禪宗)의 구경(究更)인줄 알면 큰일 납니다.
삼조 승찬대사가「신심명」을 지은 것도 중생을 위하여 할 수 없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중에 참으로 스스로 자성(自性)을 깨치고 보면 이것도 아이들 말장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높은 데 올라가려면 사다리 안 딛고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들의 말씀도 그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사다리를 딛고 실제로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사다리 그것 또한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신심명」이라는 이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이것이 참 진리라는 생각도 하지 말며 오직
부지런히 정진해서 자성을 바로 깨치며 「신심명」자체가 거짓말인 줄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신심명」전체가 거짓말이며 부처도 한 푼어치가 못 된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때 가서 참으로 삼조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지은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불법을 바로 알아서
부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인 무애자재한 세계를 말씀해 놓은 이「신심명」도 모를 때는 금덩이처럼
소중하지만 깨치고 보면 거름처럼 더러운 것입니다. 글자만 따라가서는 영영 죽고 말지니 여기 모인
대중들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하루 빨리 견성성불(見性成佛)합시다. [性徹 스님]
286. 신앙 (信仰)
최근 교계에서는 신앙보다 신행(信行)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절대자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의미가 강해 타종교 용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신앙은 ‘신심(信心)으로 귀의(歸依)하는 것’으로 불교와 인연이 깊은 단어이다.
신앙은 신심귀의ㆍ신심예배ㆍ신심공양ㆍ신심찬불ㆍ신심예경ㆍ일심정례ㆍ지심정례ㆍ지심귀명례 등을 뜻한다. 신경ㆍ신향ㆍ신수ㆍ신락ㆍ신시ㆍ신행(信敬 信向 信受 信樂 信施 信行) 등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경전 근거도 뚜렷하다. <대보적경>에 “여래에게 공경하고 존중하며 신앙하는 마음을 배로 내었다”고
등장할 정도이다.
미륵신앙ㆍ관음신앙ㆍ정토신앙ㆍ약사신앙 등의 표현을 불가에서 사용하는 것도 불교와 가까움을
보여준다.
287. 신중 (神衆, 神將)
신중(神衆)은 불법이나 가람이 수호라는 외향적 성격과 벽사(辟邪)라는 내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지켜주는 신으로서, 안으로는 질병을 없애주고 복락을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성격이 강한 신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신앙되고
예배되었다.
신중단에는 법당 중앙 상단의 부처님께 올렸던 공양구(供養具)를 퇴공(退供)해서 올리고 의식을 행하는데, 이것은 신중들이 부처님의 퇴공을 받겠다는 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밖으로는 불법수호의 역할을 원력으로 삼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고 가람을 지키는 호법신중님들을 모신 신중탱화(神衆幀畵)는 크게 제석ㆍ범천ㆍ
천룡탱화ㆍ39위 신중도ㆍ104위 신중도ㆍ금강탱화 등으로 분류되는데, 보통 상ㆍ중ㆍ하단의 3단으로
이루어지는데, 상단 중앙의 대예적금강성자는 부처가 화현한 모습으로서 삼두팔비(三頭八臂)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상단에는 8금강, 4보살, 10대명왕 등 밀교적인 신들이 표현되고, 중단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등 원시불교의 호법신과 태상군과 자미대제 등 중국 도교의 신들이 주류를 이루며,
하단에는 인도와 한국의 토속신이 조성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온갖 신들로 가득 차 있다. 사천왕상을 비롯해 인도의 가장 대표적인 신으로 부처님
생전부터 부처님을 호위했다는 제석천, 욕계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부처님의 정법을 실천하는 범천, 그리고 금강역사, 산신 등 이들은 모두 불법을 찬양하고 외호하여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신중은 신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화엄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일체 삼라만상의 의인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외에 대예적금강성자ㆍ8금강ㆍ4보살ㆍ10대 명왕 등 밀교적인 신들과
원시불교의 호법신과 성군 등 중국 도교의 신들이 있다.
이러한 신중들을 한 화면에 모아 표현해 낸 조선시대의 신중탱화는
우리나라 신중신앙의 결정체이자 민중불교의 구현체로서 민중들에게 보다 친밀한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104위의 명칭과 성격을 <석문의범>에서는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단(上壇) (성격은 “탱화 163쪽 김의식저 운주사”참조)
예적금강(穢蹟金剛)ㆍ청제재금강(靑除災金剛)ㆍ벽독금강(碧毒金剛)ㆍ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ㆍ
백정수금강(白淨水金剛)ㆍ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ㆍ 정제재금강(定除災金剛)ㆍ자현신금강(紫賢神金剛)ㆍ대신력금강(大神力金剛)ㆍ경물권보살(警物眷菩薩)ㆍ정업색보살(定業索菩薩)ㆍ조복애보살(調伏愛菩薩)ㆍ군미어보살(羣迷語菩薩), 10대명왕은 천부의 신들로서 3보(佛,法,僧)를 옹호한다.
특히 밀교에서 명왕은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영을 받드는데, 엄하고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 모든 마군을 제압한다.
염만달가대명왕(焰曼怛迦大明王)ㆍ발라니야달가대명왕(鉢羅抳也疸迦大明王)ㆍ발납마달가대명왕(鉢納摩疸迦大明王)ㆍ미걸라달가대명왕(尾乞羅疸迦大明王)ㆍ탁지라야대명왕(托枳羅惹大明王)ㆍ
이라능라대명왕(尼羅能拏大明王)ㆍ마가마라대명왕(摩訶摩羅大明王)ㆍ아좌라낭타대명왕(阿左羅囊他大明王)ㆍ박라대다라대명왕(縛羅擡多羅大明王)ㆍ오니쇄작걸라박리제대명왕(塢尼灑作乞羅博里帝大明王),
중단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등 원시불교의 호법신과 성군(星君) 등 중국 도교의 신들이 주류로서 각 명칭은 다음과 같다.
범천왕(梵天王)ㆍ제석천왕(제석천왕)ㆍ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多聞天王)ㆍ지국천왕(持國天王)ㆍ
증장천왕(增長天王)ㆍ광목천왕(廣目天王)ㆍ일궁천자(日宮天子)ㆍ월궁천자(月宮天子)ㆍ금강밀적
(金剛密迹)ㆍ마혜수라천왕(摩醯首羅天王)ㆍ산지대장(散脂大將)ㆍ대변재천왕(大辯才天王)ㆍ대공덕천왕(大功德天王)ㆍ위태천신(韋駄天神,童眞菩薩)ㆍ견뇌지신(堅牢地神)ㆍ보리수신(菩提樹神)ㆍ귀자모신
(鬼子母神)ㆍ마리지천(摩利支天)ㆍ바갈라용왕(婆竭羅龍王)ㆍ염마라왕(閻魔羅王)ㆍ자미대제(紫薇大帝)ㆍ탐랑태성(貪狼台星)ㆍ거문성군(巨文星君)ㆍ녹존성군(祿存星君)ㆍ문곡성군(文曲星君)ㆍ염정성군
(廉貞星君)ㆍ무곡성군(武曲星君)ㆍ파군성군(破軍星君)ㆍ외보성군(外報星君)ㆍ내필성군ㆍ개덕진군ㆍ
사공성군ㆍ사록성군ㆍ천열요제대성군ㆍ아수라왕(阿修羅王)ㆍ가루라왕(迦樓羅王)ㆍ긴나라왕(緊那羅王)ㆍ마후라가왕(摩睺羅伽王),
하단은 인도와 한국의 토속신이 함께 표현되는 다양한 성격의신들이다.
호계대신(護戒大神)ㆍ복덕대신(福德大神)ㆍ토지신(土地神)ㆍ도량신(道場神)ㆍ가람신(伽藍神)ㆍ옥택신(屋宅神)ㆍ문호신(門戶神)ㆍ주정신(主庭神)ㆍ주조신(主竈神)ㆍ주산신(主山神)ㆍ주정신(主井神)ㆍ측신(廁神)ㆍ대애신(대磑神)ㆍ주수신(主水神)ㆍ주화신(主火神)ㆍ주금신(主金神)ㆍ주목신(主木神)ㆍ주토신(主土神)ㆍ주방신(主方神)ㆍ토공신(土公神)ㆍ방위신(方位神)ㆍ시직신(時直神)ㆍ광야신(廣野神)ㆍ주해신(主海神)ㆍ주하신(主河神)ㆍ주강신(主江神)ㆍ도로신(道路神)ㆍ주성신(主成神)ㆍ초훼신(草卉神)ㆍ주가신(主稼神)ㆍ주풍신(主風神)ㆍ주우신(主雨神)ㆍ주주신(主晝神)ㆍ주야신(主夜神)ㆍ신중신(身衆神)ㆍ족행신(足行神)ㆍ사명신(司命神)ㆍ사록신(司祿神)ㆍ장선신(掌善神)ㆍ장악신(掌惡神)ㆍ행병이위대신(行病二位大神)ㆍ두창고채이위대신(痘瘡痼瘵二位大神)ㆍ이의삼재오행대신(二儀三才五行大神):
二儀는 천지 음양의 조화이고, 三才는 천ㆍ 지ㆍ인이며, 五行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니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이다. <탱화 160쪽 김의식저 운주사>
288. 신통 (神通) 삼명육통(三明六通)
삼명육통(三明六通)중
삼명(三明)은 뛰어난 수행자가 지니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① 숙명명(宿命明)으로 번뇌가 다함으로서 얻는 지혜로 과거사를 모두 아는 것을 말하며
② 천안명(天眼明)은 미래의 과보를 모두 아는 것을 말하며
③ 누진명(漏盡明)은 번뇌가 다함으로써 얻는 지혜를 말한다.
육통(六通)은 아라한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신족통ㆍ천안통ㆍ천이통ㆍ타심통ㆍ숙명통ㆍ
누진통을 말하며 범어 ‘abhijna'의 번역으로 선정(禪定)을 통한 수행으로 얻는 작용이며 걸림없이
자재(自在)한 초인적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작용을 일컫는다.
사람들은 흔히 불교이야기를 할 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증거 가운데 하나로 육신통(六神通)을
말하곤 한다. 한자의 의미로는 신통력의 신(神)은 불가사의한 것이고, 통(通)은 걸림이 없는 무애(無礙)를 뜻하므로 신묘하고도 걸릴 것이 없는 신통력을 말한다.
삼국유사 ‘어산불영조’에도 “그 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에게 영을 내려 여섯 신통력을 얻은 이에게
자기의 뒤를 따르게 했다”라는 보도가 있었다.
결국 석가모니 생전에도 비구들이 육신통(六神通)을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첫째 신족통(神足通) 또는 여의통(如意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어디든 왕래할 수 있으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구애됨이 없이 무엇이나 꿰뚫어 밝게 볼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무슨 소리를 잘 분별해서 들을 수 있는
신통을 말한다.
넷째 타심통(靑心通)은 중생의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바를 다 알 수 있는 신통이다.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은 자신뿐만 아니라 육도(六道)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의 전생과 금생, 내생의
일을 다 알 수 있는 신통이다.
마지막으로 누진통(漏盡通)은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끊어지고 소멸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신통을 말한다.
제1통에서 제5통까지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불교외의 외도(外道)나 신선, 천인(天人), 귀신들도
얻을 수 있고 약을 쓰거나 주문을 외워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제6통 누진통만은
아라한이나 불보살만이 지닐 수 있다.
이에 대해 선종의 임제 스님은 육신통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여섯 가지 경계인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色聲香味觸法)에 전혀 미혹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결국 육신통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신비능력과는 달리 불교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땅인사람’의 저자 현일 박재봉은 지금까지 견해와는 전혀 다른…>
“신족통은 축지법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힘든 곳에도 갈 수 있는 실천입니다. 천안통은 안목입니다.
천이통은 겸손입니다. 타심통은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숙명통은 만족을 알고 자신의 길을 무쏘의
뿔처럼 가는 것입니다. 누진통은 고통과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고 인내해 감내해야
할 일을 완성하는 책임감입니다. 신비하고 초자연적 능력은 배제합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신비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마음 닦기입니다.
능력을 생각하지 말고 왜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나 왜 내가 그런 능력을
바라는지를 아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즉 보이면 왜 보아야 하는지, 알면 왜 알아야 하는지 항상
자신 내면의 성찰입니다”라고 육신통을 설명한다.
☀ 다음은 <하도겸 박사의 ‘삶이야기 禪이야기’에서 발췌>
1) 천안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하늘이 보는 것인데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이겠는가?
법을, 이치를, 세상을, 나를, 남을, 그 사이를, 그 뒤를 보아야 하는 결국은 안목이며 관법이며 견성이며
인식의 확장을 말하는 깨우침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왜 그렇게 보는가? 왜 무슨 의도로 그렇게 봅니까? 이것을 보고 알고 또 행동하면
천안통이 열린 것이다.
하늘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눈은 필요 없고 오직 행동할 것만 남는다.
부처님과 같은 보리행만 필요할 뿐이다.
2) 천이통은 말을 듣고 손짓을 듣고 몸짓을 듣는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듣고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다.
말대꾸한다고 나무라거나 대화를 거부하거나 비판을 수용 못 하고 억지로 따르게 하거나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다른 사상과 종교를 허용 못 하는 것 모두 듣지 못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순(耳順)과 같다.
관세음처럼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듣는 것이고 이해해 주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너무도 많은 것이 들릴 텐데, 누구나 듣지만 정말 듣는 이는 없다.
3) 타심통은 대학의 혈구지도(絜矩之道)나 불가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비쳐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싫은 것은 대개 남도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한다. 때론 아닌 것도 있지만,
그것까지 알면 제대로 열린 것이다. 말 그대로 남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마음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음을 알면 된다.
내 마음속에 비친 타인의 마음은 내 마음의 그림자다. 타인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마음을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의 빛이 상대를, 세상을 비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와
나를 비추는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뜻이 여기에 있다.
4) 숙명통, 운명은 개척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며 바라왔던 것이며
내가 이루어냈고 이루어야 하는 업이다. 능동적, 긍정적으로 뜻을 가지고 살면 운명은 숙명이 된다.
숙명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내가 알고 가야 하는 길이다. 타인의 명에 간섭하거나 알려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의 운명은 남의 운명이고 나는 나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이루고 하늘 아래 오직 홀로
가는 것이 명이며 이걸 아는 것이 숙명통이다.
5) 신족통은 원효보살 소성거사가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직접 들어가 치료를 하는 것이다.
전염될까 봐 아무도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자기를 너무 위하는 마음을 넘어서 더럽고 힘들고
굴욕적이라도 그곳에 겸허하게 갈 힘이다. 소성거사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소성거사는 자기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며 부질없는 생각이나 이론을 들어 변명하면서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두려워서 도망가려는 마음이 드는 그 순간에 그가 있어야 하는 것을 바로 그곳에서
깨닫고 그렇게 실천한 것이 바로 신족통이다.
6) 누진통,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 고통과 자존심과 뜻의 능멸과 마음도 버리는 상황의 고난도 이겨내며
세상을 밝히는 분들이 있다. 번뇌로 망상으로 힘겨워하지 않고 윤회를 이겨내는 것이 누진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보살행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누진이고 윤회의 고통도 막지 못하는
그 서원이 누진이다.
지장보살도 지옥에서 여러 중생 고통의 전이로 스스로 힘들고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도 이겨내고
그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있다. 보살도 부처는 아니라서 불퇴전은 아니니 순간순간 퇴보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지만, 오직 서원만을 지킬 수 있다면 이게 바로 누진통이다.
☀ 육신통과 십계(六神通 及 十界)
육신통을 얻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계(十界)가 벌어 지나니
1) 화(진심,嗔心)를 내면 즉시 지옥세계(地獄)가 벌어지고
2) 욕심(탐심,貪心)을 내면 즉시 아귀세계(餓鬼)가 벌어지고
3) 어리석으면(치심,癡心) 즉시 축생세계(畜生)가 벌어지고
4) 포악(暴惡)하면 즉시 아수라세계(阿修羅)가 벌어지고
5) 정직(正直)하면 즉시 인간의 세계(人間)가 벌어지고
6) 선행(善行)하면 즉시 천상의 세계(天上)가 벌어지고
7) 괴로움(고,苦)을 벗어나면 즉시 성문(聖門)의 세계가 벌어지고
8) 인연(因緣)에서 해탈하면 즉시 연각(緣覺)의 세계가 벌어지고
9) 바라밀(婆羅蜜)을 행하면 즉시 보살의 세계(菩薩)가 벌어지고
10)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佛)가 된다.
289. 십이지상 (十二支像)
십이지상은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 나라마다 있으나 춤추는 십이지상은 우리나라애서만
볼 수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십이지번화(十二支幡畵)가 그 대표적 예인데, 이 번화(幡畵)의
십이지 동물은 모두 갑주무장(甲冑武將)의 수수인신(獸首人身)형태로, 활발하게 탈춤을 추듯 약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십이지상 형태는 불교 신장의 수호의 기능과 십이지의 방위 개념, 그리고
한국 전통의 무속 신앙이 교차적으로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십이지 미술의 기본 성격이 중국과의 교류와 전파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십이생초(十二生肖) 개념은 중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유럽의 국가에도 십이생초의 개념이 있다.
예컨대 인도의 십이지 동물은 쥐⋅소⋅사자⋅토끼⋅용⋅뱀⋅말⋅양⋅원숭이⋅새(金翅鳥)⋅개⋅돼지이며,
리스의 십이생초는 목우(牧牛)⋅산양⋅사자⋅나귀⋅게⋅뱀⋅개⋅쥐⋅원숭이⋅홍학⋅매⋅악어로 되어있다.
그리고 맥시코의 경우를 보면, 호랑이⋅토끼⋅용⋅원숭이⋅개⋅돼지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십이생초와 같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다르다. 베트남에서는 토끼 대신에 고양이를 십이생초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불교에도 뱀⋅말⋅양⋅원숭이⋅새(닭)⋅개⋅쥐⋅소⋅호랑이⋅사자⋅토끼⋅용 등으로 구성된 십이수(十二獸)의
개념이 있다. 5세기경에 편찬된<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중국 北涼의 曇無讖번역>내용 중에서
십이생초와 십이수 간의 유사성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사는 섬인 염부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 바다에 유리산(琉璃山),
서쪽 바다에 파리산(玻璃山), 북쪽 바다에 은산(銀山), 동쪽 바다에 금산(金山)이 있다.
이 네 개의 섬에 각각 3종류씩 모두 12종의 동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리산(南)에는 뱀⋅말⋅양,
파리산(西)에는 원숭이⋅새⋅개, 은산(北)에는 쥐⋅소⋅호랑이, 금산(東)에는 사자⋅용⋅토끼가 살고 있는데,
각 짐승들은 동굴 안에서 수신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밤낮 12시간⋅12일⋅12월에 나누어,
교대로 염부제에 나가 돌아다니면서 교화를 계속한다.
열두 동물 중에서 돼지가 사자로 닭이 새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중국과 한국의 십이생초의 구성 내용과 같다.
십이지 미술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나타났고, 통일신라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당시의 십이지상은 외호 신상으로 왕릉의 호석에 새겨지기도 했고, 사천왕 등 불교 신중들과 더불어
불탑에 장엄되기도 했으며, 불전 포벽 장식 그림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십이지신장의 형태는 머리는 동물, 몸은 사람 모양인 수수인신(獸首人身)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착의는 장포 또는 갑옷을 입은 경우가 있고, 무기를 들거나 무기 없이 공수(拱手)자세를 취한 경우가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롭고 독특한 모습의 십이지상이 창안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도무(蹈舞)십이지상인 것이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십이지번화(十二支幡畵)가 그 전통을 이은 도무십이지상(蹈舞十二支像)의 대표적 유례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도무십이지상의 특징을 확연히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번(幡)이란 의식장 주변을 장엄하기 위한 일종의 깃발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관정(灌頂)의식 등 의식을 행할 때 불전 기둥이나 당간, 또는 탑의 상륜부에 매달아 놓기도 하는데, 특별히 십이지번화는 십이지
동물의 방위에 맞춰 12방위에 배치된다.
번화(幡畵)의 내용을 살펴보면, 십이지 동물은 수수인신(獸首人身) 형태로 되어 있으며,
화려한 채색의 갑옷을 입고 손에 칼⋅창⋅방망이 등의 무기를 들고 춤추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갑옷에 시문된 문양은 곱팽이문ㆍ호피문ㆍ원문(圓文)ㆍ귀면문(鬼面文)ㆍ용비늘문ㆍ소슬문ㆍ
여의두문ㆍ쇠코문양 등 매우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굵은 선을 사용하여 갑옷, 박대, 지물 등을
개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색채는 원색에 가까운 오방색을 기조로 하고 있다.
번화(幡畵)의 십이지상은 신격(神格)을 상징하는 박대(博帶)를 걸치고 있다는 점,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 신장과 유사성이 강하다.
불교신장은 불법(佛法)과 사찰을 지키는 외호적인 성격과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조성하는
내호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불교 신장 집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약사여래 권속의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인데,
불화에 나타난 약사 십이지신장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찰100美100選 하권268쪽, 불교신문사, 허균 글>
290. 십대제자 (十大弟子)
부처님과 늘 함께 하던 1천여 명(경전에는 1250명)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10인(人)의 대 제자들을
십대제자라고 한다. <유마경>에 열거되어 있는데 이 순서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제1사리불(舍利佛 범명(梵名) Sariputra :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고 하는 데 참으로 으뜸가는 제자로
어떤 문제이든 즉시 지혜롭게 해결한다. 마갈타국 왕사성 북족 나라촌에서 출생하여 이웃의 목건련과
함께 바 리사바(波離闍婆) 외도인 산사야(刪闍耶)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뒤에 마승비구로 인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부처님 교단에서 중요한 인 물이었으나 부처님보다 먼저 입적하였다.
제2목건련(目犍連 Maudgalyayana):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하는데 가벼운 걸음으로 어디에서든
남을 도와주며 지옥에서 고통 받는 어머 니(청제부인)을 구함으로 우란분절(백중기도)의 시작이 되고.
대(大) 목건련 또는 목련(目連)이라고도 불렀다. 범명(梵名) Maudgalyayana. 중인도 왕사성 근방의
구리가촌 바라문의 아들로 처음에 바리사바(波 離闍婆) 외도인 산사야(刪闍耶)에게서 사리불과 함께
도를 배웠으나, 사리불과 함께 죽림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제3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한다. 頭陀(두타)란 불도 수행에
있어서 의,식,주(衣,食,住) 세 방면에 걸쳐 소욕지족(所欲知足)이라 하여 최소한의 할당량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고행을 잘 견디어내며 전도했다. 부처님 생존 중에 이미 사리불과 목건련이 타계했으므로 부처님 입멸 후 의 교단을 마하 가섭이 책임지고 관리했으며 선종 제1조로 추앙받는다.
大迦葉ㆍ摩訶ㆍ迦葉ㆍ迦葉波ㆍ迦攝波, 의역(意譯)은 음광(飮光), 왕사 성 근교의 장자 바라문
니그로다칼파의 아들로 일찍이 비야리성 바라 문 딸 발타라가비리야와 결혼하지만 12년만에 부모를
여이고 세속적 인 욕망의 무상함을 깨닫고 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8일만에 아라한과 를 증득하였다.
항상 두타행을 하였으며 부처님 입멸 후 상수가 되어 아난ㆍ우바리와 함께 경을 결집하였다.
제4수보리(須菩提 Subhuti):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고 하는데 일체개고 (一切皆空)의 이치를
터득하여 그것을 해명하는 데 제1인자였다. 반 야사상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수보리존자편 참조>
제5부루나미다라니자: 줄여서 부루나(富樓那,Purna)라고 부르는 ‘설법제 일(說法第一)’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탁월 했기 때문이다. <부루나존자편 참조>
제6마하가전연: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고 한다. 도교(道敎,진리)를 논하 고 언제나 남에게 지지
않았다. 줄여서 가전연(迦旃延)이라고도 불 렸다. <가전연존자편 참조>
제7아나율: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하는데 쉽게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현대 과학자들 중에도 천안을 가진 사람이 많 이 있을 것이다. 천안은 생득(生得), 수득(修得)으로
구분되는데 수생 불이(修生不二)가 이상적이다. <아나율존자편 참조>
제8우바리: 지율제일(持律第一)이라고 하는데 지율(持律)은 계율을 잘 유 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바리존자편 참조>
제9라후라: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한다. 밀행은 계(戒)를 비밀히 행하 는 것이다. 원래 부처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출가한 후 불제자들 틈에 끼여 계율의 항목대로 생활했다. <라후라존자편 참조>
제10아난다: 범명(梵名) Ananda, 뜻으로 번역하면 환희(歡喜)ㆍ무염(無 染), 생몰연대 미상,
신분은 찰제리(刹帝利), 왕사성(王舍城) 출신, 부처님의 4촌 동생으로 55세 때 부터 시봉하여
열반할 때 까지 20년 간 모시면서 법문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로 줄여서 ‘아난’이라고도 부르는
‘다문제일(多聞第一)이다. 때를 알고 사물을 분명히 하고 부처 님한테서 들은 것을 죄다 암기했다.
그것을 어느 누가 요구하여도 그 대로 외웠으므로 오늘날처럼 불교가 존속하게 되었다.
291. 십바라밀도 (十婆羅蜜圖) 해인도
십바라밀이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한 열 가지 수행법으로, 이것을 정진(精進)ㆍ수행하게 되면
생사의 미해(迷海)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의 <명법품(明法品)> 내용을 보면, 정진혜보살의 물음을 받고 법혜보살이
방일하지 않는 열 가지 행법과 그 행법으로부터 이루는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열 가지 행법이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ㆍ
방편(方便)ㆍ원(願)ㆍ역(力)ㆍ지(智) 등 십바라밀이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의 내용은 1935(1931?)년에 편찬된『석문의범(釋門儀範)』의 정진도설(精進圖說)
조(條)에 해인도(海印圖)와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석문의범(釋門儀範)』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정진도(精進圖)의 특징과 그 의미를 해석하여 정리해 본다.
① 원(圓)은 보름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시바라밀을 상징한다. 재(財)ㆍ법(法)ㆍ무외(無畏)의 3종
보시로써 중생심을 따라 모두 만족케 하는 것이 마치 청정 허공에 광명월륜(光明月輪)이 치우침이
없이 원조(圓照)함과 같으므로 보시바라밀을 보름달에 비유한 것이다. 달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수월보살, 만월보살 등 관음보살의 화현들이 있고, 같은 뜻을 표현한 말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잘 알려져 있다.
② 반원은 반달 또는 상현달을 나타낸 것으로 지계바라밀을 상징한다. 옳지 못한 일과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정계(淨戒)를 점차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마치 상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지계바라밀을 상현달에 비유한 것이다.
③ 신발(鞋經)은 인욕바라밀을 상징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치욕을 견디어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이 마치 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하여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발에
비유한 것이다.
④ 가위(剪刀)는 정진바라밀을 상징한다. 한 곳에 마음을 쏟아 수행하는 도중에 마음을 딴 데로
옮기지 않는 것이 마치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에 유진무퇴(有進無退)함과 같으므로 가위에 비유한 것이다.
⑤구름 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습의 구름은 선정바라밀을 상징한다. 마음을 깊은 한 곳에 모아서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많은 구름이 드리워 대지의 열염(熱炎)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음으로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⑥ 금강저는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지혜의 공장(工匠)으로써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산을 뚫고
부수어 번뇌의 광맥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불로써 단련하여 자기 불성의 금보(金寶)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치 금강저의 견고함과 날카로움과 밝음이 구족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금강저에 비유한 것이다.
⑦쌍원 작은 두 개의 원을 수평으로 둔 것은 두 개의 샘(泉)을 나타낸 것인데, 방편바라밀을 상징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샘을 두 개의 샘으로 나누어 동서(東西)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좌우쌍정(左右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⑧쌍원 작은 두 개의 원을 아래위로 둔 것은 앞과 뒤의 샘을 나타낸 것으로 원(願)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찰(佛刹)과 일체 중생의 바다에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편입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샘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음료를 각기 얻는 것과 같으므로 전후쌍정(前後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⑨ 두 개의 동심원과 그 내부의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도형은 집과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담을
나타낸 것으로 역(力)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국토에 정력(正力)으로 들어가 정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마치 집과 담을 수리, 축성하여 밤낮으로 순시하여 외침을 막는 것과 같으므로 탁환이주(卓環二周)에 비유한 것이다.
⑩ 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삼세의 일체법을 여래의 지혜로 두루 깨우치되, 가로막는 것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이 마치 달이 별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성중원월(星中圓月)에
비유한 것이다.
<사찰100美100選 下卷200쪽에서 발췌, 허균 글, 불교신문사>
292. 십선계 (十善戒)
십선계는 신체에 의한 행위(신업,身業), 언어에 의한 행위(구업,口業),
마음에 의한 행위(의업,意業)의 3가지로 나누어지며 다음과 같다.
① 살생하지 않는다(不殺生:불살생)
② 도둑질하지 않는다(不偸盜:불투도)
③ 사음하지 않는다(不邪淫:불사음) <이상은 신체에 의한 신업(身業)>
④ 거짓말하지 않는다(不忘語:불망어)
⑤ 이간질하지 않는다(不兩舌:불양설)
⑥ 욕설하지 않는다(不惡口:불악구)
⑦ 아첨하지 않는다(不綺語:불기어) <이상은 언어에 의한 구업(口業)>
⑧ 탐내지 않는다(不貪慾:불탐욕)
⑨ 성내지 않는다(不瞋埃:불진애)
⑩ 어리석지 않는다(不痴暗:불치암) <이상은 마음에 의한 의업(意業)>
이와 같이 불교 윤리는 일반적인 행위에 대하여 신체에 의한 신업, 언어에 의한 구업,
생각에 의한 의업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의업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선(善)을 추구하는 정도(正道)인 것이다.
293. 심우도, 십우도 (尋牛圖,十牛圖)
사찰에서 자주 대하는 벽화 그림 중에는 한 동자가 소를 찾아 헤매다가 소를 타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십우도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곽암과 보명이 만든 십우도는 심우도(尋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하며 불도를
닦는 자의 입문 초기부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심우도는 사람이 본래 지녔다가 잃어버린 마음(소)을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견적(見跡),
소의 모습을 얼핏 바라보는 견우(見牛,)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소를 잡고 있는 득우(得牛),
소에 고삐를 물리는 목우(牧牛),
그리고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에 들었음을 의미하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집에 왔으나 소는 없는 무(無)의 세계를 상징하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도 자신도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본심의 청정함을 상징한 반본환원(返本還源)과
중생 제도를 그린 입전수수(入廛垂手)가 그려져 있다.
(1) 중국송대 곽암스님 심우도(“中國宋代 廓庵스님 尋牛圖)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진리인 불성을 소에 비유하여 목동이 소를 먹여 기르는 과정을,
불성을 구하여 도를 이루고 부처가 되는 수행과정으로 비유하여 열장의 그림과 시로 표현한 것이다.
심우(尋牛); 첫 번째가 심우로 소를 찾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찾으려고 발심하는 과정을 말한다.
인간의 자성을 구하고 불법을 만나는 일이 이에 속한다.
즉 자신의 본래 불성(佛性)이 있음을 모르고 다른 곳에 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소 잃은 사람이
소를 찾아 헤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견적(見跡); 두 번째가 견적으로 소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일이다.
마음속 깊은 곳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망상과 번뇌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본성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실상은 잡히지 않지만 그 흔적인 소의 발자국을 언뜻언뜻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발자취를 따라 가는 단계를 말한다. 소의 발자국 즉 본성의 흔적은 도처에 있다. 그것을 알아보느냐 그렇지 못한가는 오직 그것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목동의 마음에 달려있다.
즉 소를 찾아다닌 보람이 있어 겨우 소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있으니, 선(禪)에 발을 들여놓고
경(經)의 뜻을 알고 교(敎)를 지켜 자기의 본심이 이런 것인가 하고 눈떠 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다.
견우(見牛); 세 번째는 견우로 소를 발견하는 일이다.
발자취를 따라가던 목동이 마침내 들녘에서 유유히 풀을 뜯으며 방목(放牧)되어 있는
소를 찾아내는 단계이다.
소를 보았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본성(本性)을 보았음으로 견성(見性)한 단계이다.
즉 이때까지 모든 곳으로 찾아다니던 소를 자기 집 뒤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빛을
자기에게서 찾은 것을 말한다. 또한 이는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득우(得牛); 네 번째는 득우로 소의 고삐를 붙잡는 일이다.
벌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았으니 목동은 당연히 다가가서 소를 붙들어야 한다.
방목되던 소는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하고 목동에게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구도의 과정에서 견성(見性)했다 하더라고 그것이 최종단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발견한 본성을 현상적인 자기에게 안착시키려는 피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넓고 넓은 풀밭에서 맘대로 뛰놀던 소를 찾기는 찾았으나 번뇌와 망상으로 인하여 따라잡기 어렵고
방총(芳叢)이 그리워 견디기 어렵다.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깨달았으나 아집이 세고 야성(野性)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순리(純理)를 얻으려면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할 뿐이다.
또한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땅 속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찾아낸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때의 소는 검은 색을 띤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아직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목우(牧牛); 다섯 번째는 목우로 소를 길들인다.
들판에서 제멋대로 뛰어 다니던 소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해 소의 코에 구멍을 뚫고 코뚜레를 꿰어
붙잡고는 목동의 의지대로 소를 치고 길들여야 한다. 소의 고삐를 굳세게 끌어 머뭇거리는 생각을
용납지 말라. 마침내는 애쓰지 않아도 소는 스스로 따른다.
순하게 길들인 후에 비로소 소의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견성 후에도 본성을 보는 것에 그
쳐서는 안 된다. 즉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장면이다.
삼독(三毒)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 상황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차츰 검은 색이 흰색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득우와 목우의 과정은 도(道)를 깨우친 대선사들의 보임 생활에서 엿볼 수 있다.
깨우친 후에도 본성대로 법답게 살아가려면 수생 동안 몸에 밴 습(習)을 타파하고 진면목(眞面目)의
모습을 현상의 자아에 안착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함을 알 수 있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여섯 번째는 기우귀가로 소의 등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잘 길들인 소를 내 것으로 하여 그 소의 등에 올라타고 흥이 나면 젓대(橫笛)를 불며 마음의
본래 고향인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단계다.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으로 인한 고통도 사라져 번뇌와 망상이 없어진 무심의 단계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것들을 넘은 절대지(絶對智)와 절대의 환희에 몸을 맡긴 채 유유히
환지본처(還地本處)하는 과정이다.
즉 소를 길들인 보람이 있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잡아당겨도 서지 않는다.
이때의 소는 전체가 흰색을 띄고 있다. 이것은 동자와 소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본성의 소리를 의미한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일곱 번째는 소는 없어지고 사람만 남아있는 망우존인이다.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경지를 말한다.
법성이니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자각하는 것, 그것은 구도자가 뛰어넘어야 할 벽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살불 살조(殺佛 殺祖)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를 얻었다는 생각을 잊고 소가 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단계를 말한다.
즉 소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이미 타고 온 소도 잊어버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도(道)의 빛이
진리를 밝게 비춘다.
즉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간데없고 자기만 남은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결국 소는 본성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됐으니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했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교종(敎宗)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여덟 번째는 사람도 없고 소도 없는 인우구망이다.
소를 버린 후 마침내 소를 버린 자신마저 버리는 경지이다.
즉 소도 자기도 다 잊어버린 경지이니, 번뇌를 탈락하니 깨침의 세계가 모두 공(空)이다.
깨달음도 깨달았다는 법도 깨달았다는 사람도 모두 버렸을 때 비로소 진공(眞空)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했다는 일체의 생각이 없는 참다운 사람 이른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관과 객관의 혼융상태를
상징화 한 것으로서 이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간주된다.
곽암선사는 이 단계를 일원상(一圓相)으로 그려 나타냈다.
반본환원(返本還源); 아홉 번째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반본환원이다.
깨치고 보니 깨친 것 아님과 같아 본래성불(本來成佛)임을 아는 자리다.
소를 잃은 것도 아니며 찾은 것도 아님을 깨친 것, 즉 미혹함을 깨달은 것이다.
선의 세계에 들어서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버리고 이면을 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애초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던 것을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확철대오하면 다시 원래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
이러한 과정이 단지 말의 유희로써가 아니고 몸소 체득된 진리라면 깨달음의 과정을
바르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유록화홍,柳綠花紅)는 소동파의 시구에서와 같이
“눈은 가로 찢어졌고 코는 세로로 서 있다”(안횡비직,眼橫鼻直)는 도원선사의 말처럼 아무런 인위도
가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왜곡되지 않은 진실한 모습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즉 이제 주객의 구별이 없는 경지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를 상징화한 것이다.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지막 열 번째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입전수수다.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단계로서
세상의 거리로 직접 들어가 중생들과 더불어 함께 살며 그들을 제도하는 경지를 말한다.
즉 깨친 다음이라! 중생구제를 위하여 표주박 차고 거리에 나가 지팡이를 끌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대중을 이끌어 성불을 이루게 한다.
‘노자’가 말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의미이다.
‘화광(和光)’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높은 도덕적 품성과 빼어난 재능의 빛을 완화시켜 노골적으로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동진의 ‘동(同)’은 남을 감화시켜 나와 똑같게 하는 동화의 뜻이고
‘진(塵)’은 티끌이나 먼지로 오염된 세상을 말한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부처와 보살이 티끌세상에 섞여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 하겠다.
불보살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고통 받는 세속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잠시 지혜와 덕을 숨기고
티끌세상에 들어가 중생과 인연을 맺고서 그 중생들을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속세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대자비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동자가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큰 포대는 중생들에 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294. 십일면관세음보살 (十一面觀世音菩薩)
십일면관음은 관세음보살님의 머리 위에 열한가지 얼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일면관음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십일면관음신주심경(十一面觀音神呪心經)’을 근거로 합니다.
이 경에 의하면 『십일면관음』은 죄를 소멸하고 복을 얻게 하며, 몸에 항상 병이 없게 하고,
시방제불이 거두어주고, 재물, 의복, 음식이 늘 풍부하고, 모든 원수와 적을 물리치고,
자비로운 이들과 함께하고, 전염병, 칼, 몽둥이, 물, 불 등의 재난이나 나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는 등의 절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열한 가지 모습의 얼굴을, 왼손에는 붉은 연꽃을 꽂은 감로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보배염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의 감로병은 중생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것을, 염주는 중생의 번뇌를 단절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머리 위의 열한 가지 얼굴, 곧 11면은 관세음보살님이 본 얼굴 위의
두부(頭部)전면의 3면은 자상(慈相:자애로운 모습),
좌측의 진상(瞋相:성난 모습)3면,
우측의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흰 이를 드러내고 미소짓는 모습)3면,
후면의 폭대소상(暴大笑相:큰소리를 내면서 호탕하게 웃는모습)1면,
정상의 불면(佛面:부처님 모습)1면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 모습 하나하나에는 중생구제의 깊은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상(慈相:자애로운 모습)을 셋으로 한 것은
①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고득락(離苦得樂)게 하는 것과,
②복이 있으나 지혜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가지게 하는 것과,
③지혜가 있으나 도통(道通)하지 못한 자를 통하게 하는
관세음보살의 세 가지 자심(慈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진상(瞋相:성난 모습)을 셋으로 한 것은
①선업을 쌓지 않고 선과를 구하려는 것,
②미혹과 고통의 업보를 거듭하면서도 고통과 업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③어지럽고 산만하면서도 적정(寂靜)을 즐기려고 하는 것 등 잘못을 깨우치게 하려는 관음보살의
세 가지 서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흰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 모습)을 셋으로 한 것은 삼업(三業) 즉
①살생, 투도, 사음 등 몸으로 짓는 업
②망어, 기어, 양설, 악구 등 입으로 짓는 업과,
③탐심, 진심, 치심 등 뜻으로 짓는 업을 짓지 않게 하는 관음보살의
서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부처님이 얼굴(佛面)이 하나인 것은 인과의 도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후면의 대소상(大笑相)이 하나인 것은 선악과 잡되고 더러운 것을 한번으로 웃어넘겨 섭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의 부처님이 정면 중앙에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근본스승인
아미타불입니다.
☀ 월탄 박종화 선생은 그의 <석굴암> 시에서 십일면관음보살상을 이렇게 상찬했다.
“원광(圓光)보관이 모두 다 거룩하다
부드러운 두 볼, 날씬한 두 억개
춘산(春山) 아미(峨眉)가 으적이 열린 미테 결곡하게 드리우신 코 어엽부다 방울조차 없구나
고은지고 보살의 손, 돌이면서 백어(白魚)같다
신라 옛 미인이 저러트시 거룩하오
무릅 꿀어 울어러 만지면 훈향(薰香) 내 높은 훈훈한 살기운
당장 곧 따수할 듯 하구나.”
<삼천리> 제11권 제1호 1939.1.1
295. 십팔물 (十八物): 출가수행승의 열여덟 가지 물건
출가수행승들의 안거(安居)나 두타행(頭陀行) 때 필수적으로 소지하는 열여덟 가지 물건으로
양지ㆍ조두ㆍ물병ㆍ발루ㆍ삼의ㆍ좌구ㆍ석장ㆍ향로ㆍ녹수낭ㆍ수건ㆍ칼ㆍ화수ㆍ섭자ㆍ승상ㆍ경전ㆍ
율문ㆍ불상보살상 등이다.
먼저 양지(楊枝)는 버드나무를 쪼개어 이를 닦기 좋도록 만든 것으로, 요즈음의 칫솔에 해당하며,
조두(澡豆)는 콩자루 같은 것으로 옛날에 비누로 사용한 것,
삼의(三衣)는 대의(大衣), 중의(重衣), 내의(內衣)로 대의는 승가리(僧伽梨)라고도 하는데 외출을 할 때나 궁중에 드나들 때, 중의는 예불, 청법, 독경 포살을 할 때, 내의는 안타화(安陀和) 또는 중숙의(中宿衣)라고도 하며 작업할 때나 잠을 잘 때 입게 된다.
또 녹수낭(漉水囊)은 물을 깨끗하게 거르는 주머니로 마실 물에 들어 있는 먼지 등을 걸러내고 벌레 등을 죽이지 않기 위해 거르는 것이다.
화수(火隧)는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어나게 하는 쇳조각이요,
섭자(鑷子)는 족집게와 비슷한 것으로 코털을 뽑기 위한 도구이고,
승상(繩牀)은 끈으로 얽어 만든 걸상이다.
296. 선 (禪)
선(禪)이란 범어(梵語) 드야나(dhyana)의 음역(音譯)인 선나의 준말인데
그 뜻은 ‘고요히 생각한다.’고 번역된다.
부처님은 6년의 수행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그 후
‘나는 일체승자(一切勝者)이며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선언하셨다.
과연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수행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부처님은 고통과 쾌락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하셨다.
선은 마음을 통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기의 참모습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본성(本性)을 본다고 하여 견성(見性)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믿는 자와 믿는 대상이 없는 것이며 부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원적인 본래의 자기, 진실한 본성에 환귀(還歸)하는 것이지 밖을 향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오히려 경계한다.
그러므로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고 절대주체의 바탕에 입각한 자각적 종교임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수행방법이 선(禪)인 것이다.
선(禪)의 궁극적 목적이 진실한 자아추구에 있으므로 형식과 표현을 중요시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 교설을 올바로 깨닫는데 있어서 교설의 표현방법인 문자나 언어는 한낱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선(禪)를 실천하는데 있어 흔히 쓰이는 방법은 간화선(看話禪)이다.
297. 사찰은 왜 산속에 많은가?
평지가 많은 인도나 중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와 일본도 고대의 사찰은 주로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우리나라 사찰은 수행이나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사찰은 크게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ㆍ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ㆍ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발전되었다.
평지가람은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넓은 사역(寺域)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王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등으로 많이 건립되었고, 동시에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산지가람은 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거하여 수도 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닌다.
석굴가람은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하는 사찰로서, 주로 기도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이 석굴가람은 우리나라보다는 인도나 중국에 많았던 유형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평지가람이 산지가람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산지가람은 그 규모에 있어서 도저히 평지가람에 미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찰(大刹)은 거의 산 속에 있고, 사찰이라고 하면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 우리나라만 이렇게 산지가람이 많아지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산악신앙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고 그들은 기쁘고 궂은 일이 있을 때
산신을 찾아 기도하고 산신의 뜻에 운명을 맡겼었다. 이와 같은 산악신앙이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에 불교의 참된 빛 또한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승들은 산봉우리 마다에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이나 불교의 지고한 사상을 응축시킨
용어들로 봉우리 이름을 지어 붙였으며, 그 산 속 모든 곳에 부처님이 머물고 있고 부처님이 숨쉬고 계신 도량이라고 설파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산악신앙을 무리 없이 흡수하였다.
전국의 이름 있고 성스러운 산, 특히 경주의 남산, 금강산, 오대산 등에 있었던 많은 사찰들은 고유의
산악신앙을 기초로 하여 그 산들을 불보살이 머물러 있는 불교의 성지(聖地)로 변화 발전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찰(道場)이 창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에서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다. 즉, 왜구들의 침략과
관련하여 창건된 금정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 등의 사찰 등,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등에 신라의 사찰을 건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하된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승려들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도읍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남한산성, 그리고 전국의 주요산성 안에 승군(僧軍)들을 주둔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찰을 지었던 것도 실리적인
호국 의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불교의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 경향 때문이었다.
세속의 명리나 행복보다는 '탈속(脫俗)과 해탈을 추구하라'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인들의
수도처로는, 그 어느 곳보다 한적한 산중이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신라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학에 입각하여 제창하였다는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산천비보란 나라 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국가의 기업(基業)을 튼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도선국사의 설에 의하면, 지형이나 지세(地勢)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땅에도 쇠약함과 왕성함, 순조로움과 어긋남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도선은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절과 탑을 쑥으로 삼아 쇠약하거나 어긋남이 있는 곳에
뜸질을 하면 삼재(三災)가 가시고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을 세울 곳을
선정하였었다. 이와 같은 산천비보설은 왕건(王建)에 의해서 깊이 신봉되어 고려시대 5백 년 동안
도선이 지정한 산에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사찰이라고 하면 산사(山寺)를 연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 때문이다.
1392년 조선 개국(開國)에서부터 대한(大韓)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1897년까지의 불교는 한마디로
배척과 억압을 당한 수난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왜 불교가 산속으로 숨어야 했던가? 많은 억압책 가운데 몇 가지 예만 들어 보기로 하자.
ㆍ태종 6년(1406)에는 전국의 사찰 가운데 242개만을 남겨 두고, 그 나 머지를 폐사(廢寺)로 만들어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ㆍ세종 6년(1424)에는 36개의 사찰만을 남겨 두었으며, 승려들의 도성 (都城) 출입을 금하였다.
ㆍ그리고 성종은 도성 안의 염불소(念佛所)와 비구니 사찰 23개를 모두 헐어버리고 전국 승려의
환속을 꾀하였으며,
ㆍ연산군은 승려의 무조건적인 환속과 더불어 그들을 노비로 삼아 사냥 을 할 때 데리고 가서 살생의
동조자인 몰이꾼으로 이용하기도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억압은 개화기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에 동반한 유생들의 횡포 속에서
승려들은 맞아 죽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으며,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사찰은 유생들이 주연(酒宴)을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
결국 왕릉을 돌보거나 왕족의 원찰(願刹)이 되었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산 속에서 승려들은 피나는 정진을 통하여 불도(佛道)의 명맥을 이어왔고,
그것이 5백년이 세월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사찰은 으레 산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지고 있다. -하략-
<김현준저, 사찰, "그속에 깃든 의미" 2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