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잔틴 제국의 주된 종교인 기독교의 영향에 의해, 초기에는
정숙 및 금욕의 풍조가 생활 전반에 걸쳐 요구되었으나, 제국이 번성해 갈수록
장엄하고 화려한 양식을 띠게 되었으며, 또한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쳐 기독교의
정신이 복식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사상 등 여러 요소가
복합된 비잔틴 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동방 문화와의 교류로서, 이것은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물질적인 면을 변화시켰는데, 그 중 페르시아의 화려한 색채
감각과 중국의 견직물은 비잔틴의 조형 문화, 특히 복식의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비잔틴 문화는 당시 유럽 뿐 아니라 동방에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 비잔틴 복식
비잔틴 복식은 유럽 제국의 궁정복, 귀족의 축제복, 승복으로서 이끌어져갔다.
기독교를 공인한 비잔틴 제국의 복식은 그리스와 로마풍의 스타일에 동양의 영향을
받아 풍부한 색, 화려한 장식, 호화로운 직물을 사용하였다. 그리스 복식이 리드미컬한
음영을 주로 한 조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데 반해 비잔틴 시대의 것은 스스로 빛을
내고 색채·광택의 화려함이 강조됨에 따라 모자이크(mosaic)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비잔틴 복식으로, 팔루다멘툼 (paludamentum)과 달마티카(dalmatica),
그리고 튜닉(tunic)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클라미스(chlamys)가 로마를 거쳐 비잔틴 시대까지 계속 착용된
팔루다멘툼은 남녀 모두 착용한 기본 복식으로서 비잔틴의 대표적인 의복이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왕족, 귀족, 사제에 한해 공식복으로 착용되었다. 형태는 사다리꼴
또는 반원형의 천으로 왼쪽 어깨는 완전히 감싸고 오른쪽 어깨는 장식핀으로 고정시켜
오른손의 활동이 자유롭도록 하였다. 왕족의 것에는 원(圓), 양(羊), 비둘기,
십자(十字), 초상화, 종교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각형의 타블리온(tablion)을
붙여 계급 표시를 하였다.
달마티카는 고대 로마 시대 말기에 달마티아(dalmatia)지방에서 소수의 남녀 신자들이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 입기 시작한데서 유래하였고,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왕족, 교황, 사제들 뿐 아니라 귀족들도 모두 착용하였다. 달마티카는 4세기 이후
재단법이 변하여, 고대의 드레이퍼리형 의복에서, 진동 둘레, 가슴이 좁혀져 상부가
몸에 맞고 아랫도련이 넓어지는 형태가 되었다. 형태는 직사각형을 반으로 접어서 양쪽
팔 밑을 직사각형으로 잘라내고 가운데 一자, T자, U자 또는 원형의 네크라인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풍성한 소매가 달려졌다. 이 옷을 펴 보면 십자가 형태를 이루어
종교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달마티카의 특징은 어깨부터 아랫단 까지 그리고
소매 끝단에 보라색이나 붉은 색의 클라비스(clavis, clavus)라는 장식선을 넣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은 클라비스나 자수 장식이 없는 간단한
것을 입었으며, 왕족은 종종 클라비스 이외에 전면을 화려하게 수놓기도 하였다. 이
옷의 재료로, 처음에는 린넨(linen)이나 거칠고 성글게 짠 모(毛)를 사용하다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는 견으로 만들어져 화려한 의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달마티카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복의 기본을 이루었고, 현재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복으로 내려오고 있다.
튜닉은 고대 로마에서 착용했던 튜니카(tunica)가 비잔틴에서 더욱 화려하게 발전한
것으로,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 드레스이다. 그 형태는 소매가 길고 좁은 형이 주를
이루었고 활동이 편하도록 앞 또는 옆솔기선을 터 놓은 것이 많았으며, 허리에 띠를
매어 입었는데 남자는 허리보다 아래에 여자는 허리보다 위에 매어 입었다. 길이는
무릎까지 오는 짧은 것에서부터 발목까지 오는 긴 것까지 다양했고, 황제의 것은 양
어깨나 소매에 둥글거나 사각형의 장식이 있는데 이것을 세그멘티(segmenti)라 하며,
동·식물의 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복식은 독창적인 디자인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그리스의 복식이 로마로
전해진 것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었고, 다만 실크와 금·은실의 자수, 보석 등을
많이 사용하여 중후하고 화려하게 조화시켜 나간 것이다. 그러나 남녀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던 복식이 5세기부터 성별에 따라 의복형태가 구별되기 시작하였으며, 장려한
복식미의 창안과 뛰어난 직물제조 기술의 발달은 서양복식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3) 장신구와 문양
비잔틴 시대에는 직물 이외 금·은 세공 기술과 유리 세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그 기법도
매우 정교하였다. 또한 보석이 풍부한 여건에서 그리스와 동방의 장신구가 전래되어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왕관, 목걸이, 머리 장식품, 팔찌,
벨트는 예술적이고 화려하였으며, 장신구의 전체적인 모양은 보석을 많이 사용하여
색이 다채롭고 규모도 비교적 컸다.
종교적 색채는 양식화되어 성서에 나오는 장면을 전면적인 문양으로 나타내었다.
사용한 문양으로 원(圓)은 영원한 안녕을, 양(羊)은 그리스도를, 비둘기는 성경을,
십자형은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등 모두가 기독교에 관계된 것이었다. 색상도 종교적
의미를 포함하여 백색은 순결, 청색은 신성함, 적색은 신의 사랑, 녹색은 영원한 젊음,
황금색은 선행, 밝은 황색은 풍성함의 의미를 지녔는데, 이러한 풍부한 색 철학은 현대
의장(意匠)에 이르기까지 기본적 감각이 되고 있다.
비잔틴 시대 사람들은 그리스·로마인과는 달리 머리에 관을 쓰거나 장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남자는 짧은 단발 모양의 단순한 형태를 하였으며, 여자는 초기에는
로마인처럼 땋아서 내려뜨리거나 위로 올려 리본으로 묶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터번이나 베일 등으로 머리를 싸서 장식하였다.
2. 로마네스크(Romanesque)시대의 복식(11∼12세기)
(1) 사회·문화적 배경
동유럽에서 비잔틴 문화가 성행하는 동안 서유럽은 오랜 기간의 혼란기인
암흑기(5∼9세기)를 거쳐 11세기 경에 비로소 통일과 안정을 되찾게 되어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 시기는 자급 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폐쇄적 농업 경제 구조였으나, 생산 기술의 발달로 도시의 성립과 농업 이외
수공업의 발달을 가져와 농업 위주의 경제 구조에서 공업이 분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직물 공업이 기본적 체제를 굳혀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의 교회는 정신적
안식처였을 뿐 아니라 직조·자수·금속 세공술 등도 가르쳤는데, 교회를 통한 직조나
자수의 보급은 이 시대의 의상·장신구의 미화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이 후 현대
복식에서의 프랑스 자수 기법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종교적 이해 관계로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당시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전쟁의 목적 자체보다는 동방과 더욱 직접적인 접촉을 초래하게 됨에 따라
정신적·물질적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틴 양식이
전개되어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양식의 예술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십자군 전쟁이 가져다 준 또 다른 영향은, 모슬린(mousseline), 다마스크(damask),
새틴(sateen), 벨벳(velvet) 등의 견직물, 면직물이 진보된 직조 기술과 함께
동양으로부터 수입되어 복식의 양과 질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수공업의 발달로 중세 사회 수공업자들의 조합인 길드(guild)가 형성되어 활발한 생산
활동과 상업 경제가 이루어지고 활동량이 증가되어 의복의 형태도 생활에 적합하도록
몸에 맞는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기독교는 신체의 노출을 종교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몸을 전체적으로 다 싸고 외관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는
것이 특징이었다.
(2) 로마네스크 복식
복식은 게르만적인 요소와 고대 로마, 비잔틴 요소가 융합된 양식이 나타났으며 특히
기독교의 정신적 의미 표현이 강조되었다. 고대 복식 스타일이 주를 이루었고 여기에
새로운 동양적인 요소가 더해졌으며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 문화를 받아 들임으로서
견직물의 수입과 소비가 증대되어 이때부터 의복의 형태가 복잡해지고 색채도
풍부해졌다.
로마네스크 복식의 일반적인 모습은 흰색의 린넨으로 만든 쉥즈(chainse) 위에다
블리오(bliaud)를 입고 맨틀(mantle)을 걸친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의 복식은 여전히
비잔틴과 같았다.
쉥즈는 린넨(linen), 견, 또는 얇은 모로 만든 튜닉형 속옷으로, 윗몸은 꼭 맞고 소매가
좁으며 소매 부리에는 수를 놓거나 끝동을 달았다. 스커트 부분은 넓고 길었으며
목둘레에는 금·은사로 수를 놓아 장식하여 비교적 화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세 말기에 슈미즈(chemise)로 바뀌었다.
블리오는 달마티카(dalmatica)와 수퍼 튜닉(super tunic)이 변형된 남녀의 기본
의상으로 9세기 후반 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것은 몸통이 헐렁하고
소매부리가 넓은 원피스 드레스였는데, 12세기부터는 상체가 몸의 윤곽선이 나타날
정도로 몸에 끼고 하체는 통이 넓어 졌으며 발등을 덮는 길이였다. 또한 블리오는
소매부리가 넓어서 속에 입은 쉥즈가 보이며, 소매 끝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것도
있어 중간에 한 번 잡아 매기도 하였다. 허리보다 조금 내려간 곳에서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곡선화의 경향은 평면적인 비잔틴의 의복형과는 다른 것으로, 그 후
유럽 여자 복식의 실루엣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화이었다. 재료로는 동양에서 수입해 온
부드러운 견이나 머슬린을 사용하여 잔주름을 잡아 기능성을 살리기도 했으며 직물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치스럽게 장식화되었다. 오늘날의 블라우스는 이 블리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맨틀은 고대부터 착용한 팔리움, 클라미스, 팔루다멘툼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 여자의
맨틀은 반원형이나 직사각형이며 재료는 대개 아름다운 견에 견색사나 금사로 단을
장식하였다. 남자의 맨틀은 반원형·직사각형· 타원형이며 무릎 길이의 것이
많았으나 블리오의 길이가 길어짐에 따라 조금씩 길게 변화하였다. 입는 방법은 몸에
한 번 두르고 앞중심선이나 오른쪽 어깨에 핀이나 브로치로 고정시켜 입었다.
꼬르사쥬는 여자들의 블리오 위에 입는 조끼형의 옷으로, 밑단은 허리 주변에서
곡선상이며 그 위에 가죽이나 천으로 된 벨트를 허리에 매고 있고, 몸의 곡선을
나타내기 위해 블리오처럼 등 뒤를 트고 끈을 끼워서 잡아 당겼다. 꼬르사쥬의 부분이
따로 떨어지게 된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 병사가 착용했던 조끼인 지뽕(gipon)과
같은 모양이었다.
(3) 머리 장식과 장신구
남자들의 머리 모양은 주로 짧은 단발이었으며, 귀족층은 모자를, 서민층은
후드(hood)를 많이 착용하였다. 후드는 남녀 공용으로 애용되었고, 이것의 변형으로
코이프(coif)가 상류층 여자들에게 애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크기가 매우 작고 어린
아이의 모자처럼 턱에다 묶는 것이었다. 여자의 머리는 정면에서 가리마를 타서 머리를
두 가닥 또는 세 가닥으로 길게 늘어뜨린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종교적 관습에서
수녀나 미망인, 일반 부녀자들은 외출시나 종교적 행사시 웽플(wimple)이라는 흰색의
베일을 썼다.
대표적인 장신구는, 블리오의 허리와 아랫배를 매주는 허리끈(girdle, string, belt)이
있었고, 여기에 작은 주머니인 앨모너(almoner)를 늘어뜨렸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 때
성직자가 신병으로 나가는 십자군에게 십자가를 넣어 준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재
여자 핸드백(hand bag)의 모체가 되었다.
3. 고딕(Gothic)시대의 복식(13∼15세기)
(1) 사회·문화적 배경
고딕은 게르만족인 고드(Goths)족이란 어휘에서 유래된 말이지만 로마, 비잔틴
양식이 쇠퇴한 후에 사용된 미술 용어이다. 서유럽의 학문과 예술, 산업 등은
13∼14세기에 이르러 십자군 원정에 의해 자극을 받아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게 발전을 한 것은 직물 공업으로, 고딕 양식의 예술과 교차하면서
특징적이고 복잡한 복식 양식을 형성하였다. 십자군의 영향은 복식에
직접적·간접적으로 형태나 모양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 왔다. 군복이 일상복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을 수놓은 문장(紋章, heraldry)
장식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1차 십자군 전쟁시 십자군 의복의 가슴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단데서 비롯되었다. 문장은 계급과 가문을 상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부와 가문의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되풀이되고 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도시가 번성하게 되고 부르조아(bourgeoisie: 중산계급)가 출현하여, 그들에게
부(富)가 편중되고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취업도
활발해져 분업에 참가하게 되어 의류점은 의복 품목별로 세분화된 전문점으로
발전하였고, 또한 이러한 분업화는 길드의 원숙함을 낳았으며 복식 문화를 보다 창의성
있고 다양하게 발전시킨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고딕 양식은 프랑스인에 의해 형성되어 북으로 영국, 남으로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보급되어 중세 특유의 예술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고딕 양식의 외관적인 특징은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탑, 첨형(尖形: 끝이 뾰쪽하고 모난 형상) 아치와 서로 얽힌 격자
무늬 그리고 벽 대신 유리창을 많이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힘있고 밝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첨두선(尖頭線)은 천상의 신에 이르려는 것을 상징하며, 그들의 종교적 정열은
천국에 대해 무한한 동경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복식에도 영향을 주어, 의상이
전체적으로 길고 흐르는 듯한 실루엣, 앞이 뾰족한 구두와 높고 뾰족한 모자, 소매나
옷단의 톱니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직물이나 장신구에 나타난 풍부한 광택, 선명한
색조는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의 대표적 특징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당시 의복에는 직물을 풍부하게 사용하였는데, 이는 방적기의 발명과 일의 분업화가
생산 능률을 높이고 숙련된 비법에 의해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며 이같은 과정은
당시 복식의 종류와 형태에 다양성을 돋보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고딕 시대의
복식은 로마나 동방의 모방을 떠나서 북유럽의 독자적 스타일을 형성하게 되었다.
(2) 고딕 시대의 복식
얇고 부드러운 직물로 인체의 윤곽선을 나타내 주던 12세기의 의상이 13세기에
흑사병과 천재지변을 겪은 후 밀착된 의상에 대한 반발로 잠시 무겁고 헐렁하게 인체를
감추는 듯 하였으나, 다시 부드러운 직물을 사용하여 육체의 곡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직물로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운 린넨(linen),
브로케이드(brocade), 수놓은 벨벳(velvet) 등이 사용되었고 모피가 유행하였다.
이전의 정적인 생활에서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활동적인 생활로 바뀌자
복식도 합리적인 형태를 추구하였다. 수세기 동안 거의 없었던 남녀 의복의
성차(性差)가 14세기에 처음으로 뚜렷해져서, 남자의 의복은 짧아지고, 여자의 의복은
몸에 꼭 끼게 되어 몸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화려하게 장식을 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기본 복식은 튜닉(tunic)이나 꼬뜨(cotte)를 입고 그 위에 쉬르꼬(surcot)
종류 중에서 한 가지를 입기도 했으며, 아래에는 호즈(hose)라는 긴 양말을 신었다.
14세기에는 주로 꼬따르디(cotehardie)를 입고 그 위에 쉬르꼬나 맨틀을 입었다.
꼬뜨는 로마네스크 시대 블리오(bliaud) 대신에 나타난 상체가 꼭 맞는 남녀 공용의
원피스 드레스형의 튜닉으로, 상체가 비교적 여유있게 맞고 스커트 부분이 넓어져서
자연스러운 주름이 생겼고, 길이는 주로 발등을 덮을 정도의 길이가 많았으며 여자들의
것은 좀더 길었다. 소매는 끝이 좁아지는 돌먼 슬리브(dolman sleeve), 소매통이
전체적으로 좁은 기모노 슬리브(kimomo sleeve), 혹은 꼭 끼는 타이트 슬리브(tight
sleeve)도 있었으며, 팔꿈치에서 소매 부리까지 단추를 잠그는 형 등 모양은 여러
형태이었다.
꼬따르디는 꼬뜨의 변형으로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유행되었다. 이 옷의 특징은,
몸통에서 허리에 걸쳐서는 꼭 맞게 하여 신체의 곡선이 잘 나타나도록 한 후 단추를
촘촘하게 달거나 끈으로 매어 꼭 끼게 하였으며, 목선은 어깨 근처까지 크게 하였다.
남자의 옷길이는 무릎길이거나 더 짧았으며, 여자의 것은 스커트가 풍성하고 길이는
바닥에 끌리게 길고, 다른 폭의 무(gusset)를 대어 플레어(flare) 스커트처럼 퍼지게
했다. 꼬따르디의 소매는 타이트하게 만들고 부분적으로 색을 달리하기도 하였으며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단추로 잠그게 되어 있었다. 팔꿈치에는 좁고 긴 천을 달아
무릎까지 늘여 뜨렸느데, 이 천은 티펫(tippet)이라 불리는 일종의 장식천으로 주로
금실로 섞어 짠 견이나 모, 린넨(linen), 모피 등으로 만들어졌다. 색은 주로 흰색이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안팎의 색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후부터 티펫은
장식적인 행잉 슬리브(hanging sleeve)로 변하게 되었다. 꼬따르디 위 힙(hip)부분에
보석으로 장식한 금속판 벨트를 하였는데, 이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 주었다.
쉬르꼬는 13세기의 가장 특징있는 의복으로 남녀 모두 착용하였는데 외출시 꼬뜨 위에
입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강한 햇빛의 반사와 눈, 비, 먼지로부터 갑옷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이 갑옷 위에 입기 시작하였고, 초기에는 두 개의 직사각형 천을 양쪽
어깨에서 꿰매어 걸쳤는데, 후에는 옆솔기선을 꿰매기도 하고 가슴부터 스커트 단까지
풍성한 주름을 잡아 넓히는 등 실루엣이 다양해졌다. 쉬르꼬는 장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옷감도 아름답고 꼬뜨와의 조화를 고려하였다. 쉬르꼬 오베르(surcot-ouvert)
는 쉬르꼬의 변형으로 꼬따르디 위에 입는 옷으로 오늘날의 점퍼 드레스(jumper
dress)라고 할 수 있다.
이 옷은 진동이 크게 벌어져 허리선이나 힙(hip)까지
보였으며, 목둘레선은 턱밑 부분이 파여진 것부터 어깨까지 깊게 파여진 것 등
다양하였다. 스커트 앞자락에는 양손을 넣어 앞자락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슬릿(slit)이
있는데 이것은 의상에 주머니가 생기는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쉬르꼬의 또 다른 변형인
시클라스(cyclas)는 호화로운 옷감으로만 짜여진 쉬르꼬를 말하며 귀족 계층에서 주로
의식용으로 입었다. 옷감은 안에 착용한 옷감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신체의 앞뒤를
덮어 도련이 바닥까지 끌리게 하였으며, 옆선은 전부 터져 있으나 겨드랑이에서부터
꿰맨 것, 전부 꿰맨 것, 단추로 채운 것 등 다양하였다.
뿌르뽀엥(pourpoint)은 누빈 옷이란 뜻으로, 영국에서는 더블릿(doublet)이라고
불리웠으며 지뽕(gipon)이 변형·발달된 것이다. 앞중심선은 트여 단추가 연속해서
달려 있으며, 팔꿈치에서 손목까지도 단추가 촘촘하게 달려 있다. 一자인 단추 구멍은
동양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그 후 서양 남성복에 널리 사용되었다. 옷감으로 견,
벨벳, 브로케이드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뿌르뽀엥 안쪽에는 고리나 끈이 달려 있어서
쇼오스(chausses : 일종의 양말)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한 기능을
하였다. 후기에는 옷길이가 매우 짧아졌으며, 소매 디자인은 어깨에 퍼프(puff)를 넣어
어깨선이 위로 올라가고 어깨가 넓어 보임으로써 아래의 꼭 끼는 호즈(hose)와 대조를
이루어 색다른 남성미를 나타내었다. 뿌르뽀엥은 오랫동안 남성만이 착용했던 특유의
의상으로 이것으로부터 남녀 성차가 의복에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쁠랑드(houppelande)는 14세기 말부터 나타난 특수한 모양을 가진 원피스
드레스로 남녀 모두 뿌르뽀엥 위에 착용하였다. 이 옷의 특징은 소매의 디자인에있는데, 소매 끝이 바닥에까지 끌리며 깔대기처럼 거창하게 넓어지고 가장자리가
꽃잎이나 잎사귀 모양으로 매우 장식적이었다. 옷길이는 무릎 길이인 것과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것이 있었고, 벨트를 매기도 했다. 옷감은 호화로운 견이나 수놓은 견, 얇은
모, 벨벳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겉감과 대조적인 색의 안감을 사용하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로브(robe)로 명칭이 바뀌었다.
브레(braies)는 바지, 쇼오스(chausses)는 양말을 말하는데, 14세기에 와서
남자들의 상의가 짧아짐에 따라 브레가 점점 위로 올라 가면서 길이가 짧아지고,
쇼오스는 점점 길어져 힙(hip)까지 올라 가게 되었다. 따라서 브레는 속옷으로 바뀌고
쇼오스가 바지로 되어 뿌르뽀엥과 함께 한 벌의 남자 의복이 되었다. 쇼오스는 좌우
색을 달리하는 것(parti-color)이 많았다.
(3) 머리 장식과 신발
13세기 남자는 머리를 중앙에서 나누어 컬을 해서 어깨까지 늘어 뜨렸고 그 위에
로마네스크 시대의 것이 그대로 내려온 프리지앙 보닛(phrygian bonnet),
깔로뜨(calotte), 토끄(toque)를 쓰거나, 시대 감각에 맞게 새로운 형으로 변한
샤쁘롱(chaperon), 샤뽀(chapeau) 등을 썼다. 14세기에는 의복이 전보다 점차
화려해지고 사치해지므로 머리 형태와 장식에 새롭고 과장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딕 시대 여자의 모자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에넹(hennin)으로, 고딕 건축의
뾰족함을 가장 잘 살리고 있는데, 높이는 점차 높아져서 높이에 따라 착용자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신발은 고딕 건축 스타일의 뾰족한 감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발달한 것으로, 구두의 길이는, 평민은 13∼15㎝, 중류층은 30㎝, 왕은 60㎝로 신분을
나타내었다. 끝이 뾰족한 신발은 발끝이 너무 길어 동여 매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쁠렌느(poulaine)라 하였다. 이 시대에는 복장보다도 신발을 더 중요시하여 제작
과정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재료는 부드러운 가죽, 펠트, 벨벳, 브로케이드,
두꺼운 견 등이 사용되었다.
출처; 유레카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