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23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데자뷰(deja-vu)’]
데자뷰(deja-vu)
-이상하다. 내 나이가 천 살이 넘었구나. 많은 시공간 너머 우주의
일곽에서 오늘을 본 것 같다. 시를 쓸 때면-
나는 이제 눈을 씻지 않는다
이 세상
언젠가 와 보았던 틀림없는 물색物色,
그 위에 길다랗게 부유한다
갈급한 본능에 치를 떨었던
어느 세기말
하얀 고래의 뼈로 지은 높다란 누각 처마 밑에
비끄러맨 심상의 끄트머리,
황홀한 눈물을 철철 흘렸던 것도
알고 보니 모두가 오늘이었다
나는 이제 눈물을 훔치지 않는다
이 세상
이 길 위
썩지 않을 낙엽덤불에서 부유하니
(2004 . 10 . 28)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데자뷰(deja-vu)>**는 단순한 기시감(旣視感)을 넘어, 시적 화자가 느끼는 초월적인 시간 의식과 생의 윤회적 통찰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시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 주요 대목을 나누어 해설해 드리겠습니다.
1. 시공간을 초월한 자아 (서시/도입부)
-이상하다. 내 나이가 천 살이 넘었구나. ... 시를 쓸 때면-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현실의 물리적 시간을 벗어납니다. 여기서 "천 살이 넘었다"는 표현은 육체적 나이가 아닌, 영혼이 기억하는 무한한 시간의 층위를 의미합니다. 시 쓰기는 망각했던 우주의 기억을 되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2. 현실을 긍정하는 '씻지 않는 눈’
나는 이제 눈을 씻지 않는다 / 이 세상 / 언젠가 와 보았던 틀림없는 물색物色
보통 '눈을 씻고 본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거나 자세히 보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눈앞의 풍경(물색)이 낯선 것이 아니라, 이미 전생 혹은 머나먼 과거에 경험했던 **'확신할 수 있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낯설음이 사라지고 깊은 유대감과 안도감을 느꼈음을 시사합니다.
3. 고통과 환희의 일체화 (심상의 누각)
갈급한 본능에 치를 떨었던 / 어느 세기말 ... 황홀한 눈물을 철철 흘렸던 것도 / 알고 보니 모두가 오늘이었다
이 대목이 시의 핵심입니다. 과거의 고통(갈급한 본능)과 압도적인 슬픔 혹은 기쁨(황홀한 눈물)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결국 '오늘'이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 응축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얀 고래의 뼈로 지은 누각 :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화자가 겪어온 정신적 고난이나 고결한 슬픔의 깊이를 형상화합니다.
⚫모두가 오늘이었다 : 시간의 선형성(과거→현재→미래)이 무너지고, 모든 존재의 경험이 현재라는 지점에 합일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4. 영원성 속에서의 유영 (결미)
나는 이제 눈물을 훔치지 않는다 / 이 길 위 / 썩지 않을 낙엽덤불에서 부유하니
'눈물을 훔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픔이 사라졌다는 뜻보다는, 그 슬픔조차 존재의 당연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달관을 의미합니다.
⚫썩지 않을 낙엽덤불 : 원래 낙엽은 썩어 없어지는 필멸의 존재지만, 시인의 시선 속에서는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의 일부입니다. 화자는 그 속에서 '부유(浮遊)'하며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평온을 찾습니다.
⛹ 총 평
한기홍의 <데자뷰>는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노래합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오늘의 일상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기억이 집약된 황홀한 순간입니다.
시인은 데자뷰라는 현상을 통해 삶의 비극과 희극을 모두 포용하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는 명상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