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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타★용대] 배드민턴 이용대 공식 팬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아리아
<정말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현재 미국 루이지애나에 거주 중인 그는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해설을 맡아 팬들과 만난다.(사진=이영미)>
미국 텍사스 주를 벗어나 3시간 정도를 내달리면 만나게 되는 루이지애나 주 슈리브포트(Shreveport). 고급 주택가들이 즐비한 동네를 따라 들어가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저택 앞에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멈췄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인지 집주인이 차를 보고 맨발로 뛰어나온다. “어서오세요. 여기까지 정말 취재를 오시네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방수현(44)이었다.
선수 시절 ‘배드민턴 여왕’이란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뽐냈던 그. 방수현은 배드민턴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여자 단식 은메달을, 그리고 4년 후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는 방수현이 유일하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곧장 은퇴 선언을 하고, 두 달 후 재미교포 레지던트와 결혼식을 올렸던 방수현. 그를 루이지애나 자택에서 만났다.
인터뷰의 시작은 배드민턴 얘기가 아닌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던 방수현의 결혼 스토리였다. 그동안 자세한 내용이 소개된 적이 없어 개인적인 얘기부터 풀어갔다.
남편 신헌균 씨와 어떻게 만난 건가.
“시어머님이 나랑 친한 후배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다. 시어머님은 남편과 함께 애틀랜타에 살고 계셨는데 한국에 볼 일 보러 나오셨다가 후배 어머니랑 만났고, 후배 어머니를 통해 내 얘기를 들으신 거다. 마침 아들의 배우자를 찾고 계셨던 터라 시어머님은 후배 어머니의 주선으로 친정 엄마랑 먼저 인사를 나눴다. 서로 얘기가 잘 통하셨는지 시어머님이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날 만나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내게 사실대로 얘기하면 도망칠까봐 어느날 빵집에 같이 빵을 사러 가자며 날 끌고 나가셨다. 그 자리에서 시어머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때도 인사드리는 분이 누군지 전혀 몰랐나.
“당시엔 남편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엄마가 그냥 아는 분이라고 해서 가볍게 인사만 드렸다. 나로선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소개시켜줘서 인사드렸을 뿐이다.”
그럼 남편은 언제 처음 만난 건가.
“1995년 8월, 애틀랜타로 프레올림픽 경기를 떠나기 전날, 엄마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수현아,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하면 어떤 남자랑 그때 빵집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나와 계실 거야. 그분들이 널 도와줄 거니까 잘해드려.’ 난 그분들이 누군데 내가 잘해야드려야 하냐고 다시 물었고, 엄마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으셨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마음에 두진 않았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까 정말 그 아주머님(시어머니)이 나와 계시는 거다. 옆에 어떤 젊은 남자와 함께. 감독님이 내게 그분들이 누구냐고 물어보셔서 당황스런 마음에 ‘친척들’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재미있는 건 배드민턴 대표팀이 애틀랜타에 머무는 동안 시부모님이 선수단 가이드를 도맡아 해주셨다는 점이다. 나랑 남편이랑 몇 마디 대화도 나눠보지 않았는데 시부모님들은 마치 며느리라도 되는 듯 날 살뜰히 챙겼고, 선수단까지 정성스레 돌봐주셨다.”
<1996년 10월 명동성당에서 치른 방수현-신헌균 씨의 결혼식 장면. 고 김수환 추기경이 이들의 주례를 맡았다.(사진=연합뉴스)>
감독이나 코치들은 눈치 채지 못했나.
“전혀 알지 못했다. 기사를 통해 결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시부모님을 친척이라고 믿고 계셨다.”
사실 올림픽이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결혼할 남자를 소개받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애틀랜타에 머물면서 우리 엄마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엄마는 원래 내가 운동하는 걸 싫어하셨다. 여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기 바란 덕분에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명예롭게 은퇴하라고 회유하신 적도 있다. 따라서 엄마한테는 내가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보단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더 중요했고, 그 시기가 올림픽 전이라고 해도 엄마한테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레올림픽을 떠난 장소에서 남자를, 그것도 시부모님까지 다 인사를 드리게 됐다는 건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남편의 첫 인상은 어떠했나.
“진지하고 똑똑하고 착해 보였다. 하지만 내 이상형은 아니었다(웃음). 그 사람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레지던트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지만 내가 애틀랜타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빼 대회장이나 숙소로 찾아왔다. 그리고 프레올림픽 마치고 귀국하면서부턴 전화로 인연을 이어갔다. 얼굴보는 것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내가 무슨 얘길 해도 남편이 다 들어줬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있을 때 감독, 코치는 물론 동료 선수들한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오빠랑 전화하며 수다로 풀었다. 그게 긴장감 완화에 큰 도움이 됐다.”
(1996년 8월 1일.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 월드콩그레스 센터는 방수현이 결코 잊지 못할 대회 장소이다. 바로 그곳에서 일생일대의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인생의 라이벌이었던 수지 수산티를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 천재’ 미아 아우디나를 물리친 끝에 방수현은 금메달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결승전 현장에는 남편은 물론 시부모님들도 모두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고 한다. 금메달 획득 후 <동아일보>에서 단독으로 방수현이 미국 명문 존스 홉킨스대를 졸업한 애틀랜타시 에모리 의과대학원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신헌균 씨와의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미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이후 은퇴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겠다고 밝힌 방수현으로선 난감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수 시절 인도네시아 수지 수산티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을 맛봤던 방수현. 당시엔 수산티의 존재가 버거웠지만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수산티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사진=연합뉴스)>
메달 획득 후 결혼 기사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올림픽을 치렀다는 얘기나 마찬가지 아닌가.
“1995년 겨울에 오빠가 한국으로 나와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고, 나도 그때는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 상태라 올림픽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내 결혼을 적극 서둘렀던 엄마의 노력 덕분에 올림픽 가기 전 이미 명동성당을 결혼식 장소로 잡고 당시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 주례를 부탁해놨었다. 그런데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가족들 외엔 아무도 내 결혼 소식을 알지 못했다. 올림픽 마치고 정리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기사가 나오는 바람에 대표팀 관계자들로부터 서운하다는 얘길 정말 많이 들었다.”
방수현의 배드민턴 인생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수지 수산티이다.
“내가 수산티를 처음 본 건 1987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였다. 당시 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 나이에 인생의 ‘벽’을 만난 것이다. 성적이 기억 안날 정도로 완패했다. 그 후로 국제대회 나갈 때마다 수산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중국의 예자오잉과 수지 수산티, 그리고 내가 여자 단식 ‘빅3’로 불렸는데 그중 최고가 수산티였다.”
상대할 때마다 패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수산티랑 경기하기 전부터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다.
“당시엔 정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 선수는 다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아파서 시합 뛰지 못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선수 시절의 난 경기 후 시합 내용을 복기하며 상대 선수와 나의 장단점을 적어 놓곤 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수산티는 단점이 보이지 않았다. 게임하다가 내가 지쳐서 포기하기 일쑤였다. 4,50회 정도 랠리를 벌이면 다리 힘이 풀려서 더 이상 뛰질 못했다. 게임은 하고 싶은데 뛸 수가 없어 패하는 일이 반복됐다. 난 계속 수지 수산티를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수산티의 벽을 넘는다는 건 당시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 언제부터 수산티와 맞대결이 가능해진 건가.
“1990년 정도 되니까 그 선수도 이전만큼 완벽해보이지 않더라. 어느 순간부터 그의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6년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전영오픈 준결승에서 수산티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전에도 그를 두세 번 정도 이긴 적은 있지만 전영오픈에서 70분에 걸친 접전을 펼쳤고, 체력 소모가 심한 상태에서 그를 잡고 나니 자신감이 불붙기 시작했다. 더욱이 애틀랜타 올림픽 직전의 대회라 올림픽에 대한 자신감도 키울 수도 있었다.”
수지 수산티를 이기려고 특별한 훈련법을 사용했다고 들었다.
“남자 선수들과 훈련했다. 수산티를 이기려면 스피드와 파워가 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자들과 훈련하면서 그 부분을 보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체력을 완벽하게 비축해 놓으면 2세트, 3세트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1995년 일본여자오픈 결승전에서 수산티를 만났는데 그때 9-9 동점 상황에서 60회 가까운 랠리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결국 체력에서 밀린 내가 공격 범실로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경기를 통해 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남자 선수들과 훈련하며 내 단점을 보완해 나갔다.”
올림픽 첫 출전이었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결승전에서 수지 수산티와 만났지만 1세트를 잡고 나선 아깝게 2,3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그때 1세트라도 잡은 게 어딘가(웃음). 그때는 솔직히 금메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동메달만 따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준결승전에서 세계 랭킹 2위인 중국의 탕주홍을 이기는 바람에 결승까지 진출한 것이다. 수지 수산티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코트에 들어갔다. 그동안 그를 이기지 못했는데 올림픽에서 그를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1세트라도 그를 이긴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표로 했던 건가.
“그렇다. 꼭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수산티로 인해 난 세계 배드민턴계에서 ‘영원한 2인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그 꼬리표를 떼어 낼 작정이었다. 수산티와의 준결승전을 앞둔 날 아침,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했다. 게임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대회 장소를 향하는데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그 경기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남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파워와 스피드를 키웠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대단했다. 결국 2세트를 모두 가져오면서 수산티와의 끈질긴 악연을 정리했다.”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귀국해서 어머니 김정희 씨와 만난 방수현. 아래 사진은 TV로 결승전을 지켜보던 가족들이 방수현의 금메달 확정 후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이다.(사진=연합뉴스)>
1996년 10월 신헌균 씨와 결혼하고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3월 대교눈높이 배드민턴 팀으로 복귀했다. 왜 다시 라켓을 잡게 된 건가.
“내가 속해 있던 오리리화장품 팀이 해체 위기에 처했다.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 어느 한 팀에서 모두 데려가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다 대교눈높이에서 내가 선수로 들어오는 걸 전제로 오리리화장품 선수들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다시 코트로 돌아온 것이다. 1999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나경민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내가 빠지게 됐다. 대교는 경민이 입단 후 전관왕에 올랐을 정도로 나경민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방수현과 나경민. 한국 여자배드민턴의 양대 산맥이었다. 후배 나경민은 어떤 선수라고 평가했나.
“나보단 경민이가 선수로 더 뛰어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체격도 좋고, 복식면에선 훨씬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단식만 내가 조금 앞섰을 뿐이다. 서로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2003년 대교눈높이 트레이너 겸 선수로 잠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다 모든 걸 접고 미국에서 전업주부로만 생활했는데 배드민턴이 그립지 않았나.
“만약 내 주거지가 한국이었다면 지금까지 계속 일을 했을 지도 모른다. 결혼은 했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꼼짝도 못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계속 미련을 두고 있자니 가정에 소홀해질 것 같아 고민 조금 하다가 완전히 접은 것이다.”
이젠 올림픽을 코트가 아닌 중계석에서 즐기고 있다. 2012 런던올림픽에 이어 이번 리우올림픽에서도 마이크를 잡는다고 들었다.
“내가 브라질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서 친정 부모님이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아버지(코미디언 방일수 씨)가 아이들이라면 끔찍하시다. 나보다 더 잘 봐주실 거다. (성)지현이가 위축되지 말고 자신감 있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여자단식, 남자단식도 기대하지만 혼합복식에서 메달을 기대해봐도 될 것 같다. 일단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게 중요하다. 마이크 잡고 해설하는 입장이지만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도 해주고 싶다. 최근 대표팀 선수들이랑 자주 문자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읽고 있는 중이다.”
방수현에게 올림픽이란 무엇이었나.
“한 번쯤 내 인생을 걸어 볼 만한 무대? 결과가 좋으면 보상도 뒤따르기 때문에 충분히 ‘올인’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대회인 것 같다. 올림픽 금메달로 인해 난 젊은 시절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은퇴할 수 있었다.”
방수현은 하랑(아들)이와 예랑(딸)이 두 아이의 엄마이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 루이지애나에서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는 남편 신헌균 씨가 퇴근했고, 기자와 인사를 나눴다. 신헌균 씨의 잔잔한 미소를 보며 1995년 애틀랜타 공항에서 그가 어떤 심정으로 방수현을 기다렸을지 궁금했다. 이후 식사 자리에서 신 씨에게 그때 상황에 대해 물었다.
“방수현 선수가 당시 최고 스타플레이어였는데 그 유명세를 알고 있었나요?”
“전혀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좋은 색시감이 온다고 해서 도망다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나갔어요. 그러다 아내를 보게 된 거죠. 아내가 얼마나 유명한 선수였는지 잘 몰랐어요. 그랬으니 거기까지 나갔겠죠. 느낌이요? 음, 좋더라고요.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보단 친구들이 더 난리였어요. 아내와의 결혼 기사가 나오면서 아는 동료 의사들이 난리가 아니었거든요. 그때 깨달았죠. 아, 내가 정말 유명 선수랑 결혼하나보다 하고(웃음).”
<남편 신헌균 씨와 딸 예랑이, 방수현 씨. 큰아들 하랑이는 학교 캠프에 참가하느라 함께 촬영하지 못했다. 아래 사진은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방수현의 모습.(사진=이영미)>
<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