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육회에서 발견된 선모충 유충 <출처: The fifth outbreak of trichinosis in Korea. Rhee JY, Hong ST, Lee HJ, Seo M, Kim SB. Korean J Parasitol. 2011 Dec>
은사님 차에 탄 채 강원도의 도로를 달리던 중, 차 앞으로 뭔가가 휙 지나갔다. 운전을 하던 은사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급정거를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물체는 바로 멧돼지였다. ‘차랑 부딪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차가 없는 상태에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다’ 등등의 얘기를 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우리와 달리 멧돼지는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개울을 건너 자기 갈 길을 가는데, 제왕의 풍모라는 게 바로 저런 건가 싶었다.
사람들이 멧돼지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사람을 물지도 모른다는 점, 하지만 멧돼지는 그렇게 나쁜 동물이 아니며, 궁지에 몰리거나 부상을 입지만 않는다면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없다. 멧돼지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멧돼지 근육에 사는 기생충 때문으로,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분노의 검색질?
2011년 1월 1일, 신년을 맞아 어머니 댁에 갔다가 약간의 짬을 내서 이메일 확인을 했다. 모르는 주소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저희 남편이 10일 전부터 이상한 증상이 생겼어요.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이 안 떠지더니만 갑자기 근육이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다행히 부기는 점점 빠지고 있지만 병원에서 진단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기생충학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스스로 ‘분노의 검색질’이라 칭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느 정도 남편의 병명을 알아낸 상태였다.
그녀는 우선 남편 회사 사람들 중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열 명이나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들을 추궁한 결과 11월 말 회사 사람들이 멧돼지를 재료로 한 바비큐 파티를 열었는데, 익힌 고기만 먹은 사람들은 아무 탈이 없었지만 육회를 먹은 열명에서만 증상이 나타났단다. 멧돼지를 날로 먹는 사람이 있나 싶겠지만, 네이버 검색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글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멧돼지 육회를 먹기로 했습니다.” “멧돼지 육회... 맛은 기대 이상이고 씹는 맛은 거의 죽음입니다.” “무척 부드럽고 냉동 소고기 육회보다 훨씬 나았다.” 원인이 된 음식을 알아냈다면 진단은 쉽다. 멧돼지를 따라 들어와 남편을 괴롭힌 그것은 바로 선모충이라는 기생충이었다.
멧돼지는 기생충을 가지고 있어 날로 먹으면 위험하다. <출처: (cc) Richard Bartz, Munich Makro Freak>
선모충(Trichinella spiralis.)
그 남편이 먹은 멧돼지 회에는 선모충의 유충(3기)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사람 몸에 들어오면 불과 이틀만에 어른으로 자라는데, 밀당과는 담을 쌓은 종이라 그런지 암컷과 수컷의 교미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욕구를 채운 선모충 수컷은 밖으로 나가 버리고, 분노한 암컷은 혼자 사람의 장 속에 남아 무수히 많은 새끼를 낳는다. 다른 기생충과 달리 선모충은 알 대신 꿈틀거리는 유충 (1기)을 낳으며, 이 유충들은 장에 연결된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퍼진다. 그 남편의 얼굴이 퉁퉁 부은 건 이 유충들이 얼굴, 특히 눈 주위로 몰려가 염증을 일으킨 탓이었다. 몸 여기저기에 퍼졌던 유충들은 하나둘씩 죽고 말지만, 상당수는 팔, 다리, 어깨, 가슴 등 근육이 많은 곳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근육에 자리를 잡은 유충들은 3기 유충으로 자란 뒤 똬리를 틀고 앉아 새로운 숙주에게 건너갈 날만을 기다린다. 유충이 근육에 침투할 때 심한 근육통이 생기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증상이 없어지고 기생충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시작된다. 기생충이 근육 안에서 얌전히 있는 대신 우리 몸은 기생충에게 살 집을 마련해 줄뿐 아니라 먹을 것을 주고 배설물까지 치워주니,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 기생충을 상전으로 모시는 셈이다. 연구에 의하면 선모충의 유충은 사람 몸에서 40년까지 살 수 있다는데, 선모충에 걸렸지만 진단이 안돼 치료를 못 받은 사람들의 근육 속에는 선모충의 유충이 살아 숨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선모충에 걸린 모든 사람들이 이런 무난한 결말을 맞는 건 아니다. 환자의 5~20% 정도에선 선모충의 유충이 심장을 침범해 염증을 일으키는데, 심장은 우리 몸 전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장기, 극히 드물긴 하지만 이 경우 환자가 죽을 수가 있다. 이것 말고도 뇌에 유충이 들어가 뇌염을 일으킨 경우에도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돼지고기 기피는 선모충 때문
원래 선모충은 야생 동물들 간에 유행하는 기생충이었다. 선모충은 육식을 하는 모든 동물이 종숙주-어른이 돼서 새끼를 낳는 숙주-이자 다른 동물의 감염원이 되는 특이한 생활사를 가졌는데, 야생 쥐의 근육에 있는 선모충의 유충을 멧돼지가 먹으면 멧돼지가 걸리고, 이 멧돼지가 죽고 난 뒤 그 시체를 쥐가 먹으면 쥐가 걸리는 식으로 생활사가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가고 있다.
선모충의 생활사
야생 곰에도 선모충이 흔해서, 일본의 경우엔 곰 고기를 덜 익혀 먹는 게 환자들의 주된 인체 감염 경로라고 한다. 그 밖에도 오소리나 족제비, 퓨마 등 거의 모든 육식동물이 인체 감염원 역할을 한다. “에이 설마, 퓨마를 날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지라, 스페인에는 퓨마를 먹고 선모충에 걸린 환자가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선모충의 가장 중요한 인체 감염원은 그냥 돼지고기다. 우리나라야 돼지한테 사료를 먹여서 기르니 100% 안전하지만, 음식 찌꺼기나 도살장 부산물을 돼지한테 먹이는 나라들에선 돼지의 선모충 감염률이 상상 외로 높다. 그런 나라들에선 심지어 시장에서 파는 돼지고기에도 선모충이 들어 있어, 조금만 덜 익혀 먹으면 감염되기 십상이다.
3,2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미라에서 선모충이 발견된 것처럼, 선모충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돼지고기를 먹고 얼굴이 부었다면 돼지고기가 원인이라는 것 정도는 과거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돼지는 발굽이 갈라졌으면서도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너희들에게 위생적이지 않다. 너희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죽은 돼지의 몸에 손도 대지 마라.” 미국 성경책에 쓰인 이 구절을 보면 성서시대 초기에도 이미 돼지고기의 위험성을 알았던 모양이고, 과거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못먹게 했던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게 보이는 돼지를 잡아먹은 뒤 쓰라린 경험을 했던 게 한 원인이 됐단다. 7세기 경 모하메드가 식단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한 것 역시 선모충의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1791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모차르트의 사인으로 중독설을 비롯해서 연쇄상구균 감염설 등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선모충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44일 전 덜 익은 돼지고기 요리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선모충이 들어가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류가 모차르트의 주옥 같은 곡을 더 즐길 기회를 빼앗은 용의자 중 하나가 선모충인 셈이다.
돼지의 근육 섬유에 들어 있는 선모충 유충
우리나라의 선모충 사례들
예부터 산이 있고 야생동물이 뛰노는 나라에선 어김없이 선모충이 유행했다. 더구나 이웃 중국은 선모충 환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 뭐든지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식습관을 생각한다면 선모충 환자가 제법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1996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선모충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학회 때 만난 일본 기생충학자는 우리한테 “있는데 너희가 못 찾은 거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제대로 진단을 못해 선모충으로 보고되지 않은 경우도 틀림없이 있었을 거다. 얼굴이 붓고 눈을 못 뜨게 된다고 해서 기생충을 의심하는 의사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던 1997년 12월, 거창에 사는 30대 남자 네 명이 산에서 오소리를 잡아 “근육과 간, 비장, 혈액을” 먹었다. 열흘 가량의 잠복기가 지나자 후 본격적으로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환자들은 처음엔 얼굴과 눈 주위가 붓다가 며칠이 지나자 팔, 다리, 어깨의 통증을 호소했다. 선모충 감염을 의심한 의사는 환자의 종아리 근육을 조금 떼어 내 현미경으로 관찰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선모충의 유충이 똬리를 튼 채 근육 속에 있는 거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선모충 감염이었다. 선모충의 진단은 근육을 떼어내 그 안의 유충을 관찰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근육을 떼어내는 게 여의치 않을 경우 환자의 혈액에 항체가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혈중 항체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기까지는 감염된 지 한 달 이상이 지나야 한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선모충 발병례는 모두 7번이 있었다.
1) 1997년 12월, 지리산에서 잡은 오소리를 먹고 걸린 30대 남자 네 명.
2) 2001년 2월, 강원도 인제군에서 멧돼지를 먹고 다섯 명이 감염됨. 이는 멧돼지를 먹고 선모충에 감염된 국내 첫 번째 증례다.
3) 2002년 2월, 강원도에 살던 40대 남자가 멧돼지를 잡아 아내와 장인, 장모를 모시고 즐겁게 먹었는데, 네 명 모두 선모충에 걸렸다.
4) 2003년 3월, 강원도 인제군의 주민 13명이 트럭에서 파는 멧돼지 육회를 나눠먹은 뒤 모두 선모충에 걸렸다.
5) 2010년 11월, 강원도 양구군에서 잡은 멧돼지를 모 회사 사람들끼리 맛있게 먹었는데, 육회를 먹은 열 명만 선모충에 걸렸다. 앞서 말한 ‘분노의 검색질’ 사례다.
6) 2010년 12월, 강원도에서 사냥해 온 멧돼지를 마을주민 20여명이 나누어 먹었고, 역시 육회를 먹은 12명만 선모충에 걸렸다. 마을 주민이 냉장고에 보관해 뒀던 멧돼지 고기를 조사한 결과 선모충의 유충이 잔뜩 들어있는 걸 발견했다.
7) 2012년 8월, 충북의 한 식당에서 자라회를 먹고 여섯명이 감염됐다. 파충류를 먹고 선모충에 감염된 예는 세계적으로 드문데, 대만에서도 2009년 비슷한 증례가 보고된 바 있다.
야생동물에는 얼마나 많은 선모충이 있을까?
이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선모충은 주로 멧돼지를 먹고 감염되며, 야생동물이란 게 혼자 먹기보단 여럿이 같이 먹기 마련인지라 한번 발병할 때마다 최소한 네 명 이상의 환자가 생긴다. 날것을 즐기는 우리나라의 식습관에 비춰보면 7번의 발병은 오히려 적은 감이 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멧돼지들의 선모충 감염률은 극히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긴 해도 야생동물의 선모충 감염 실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는 있다. OECD에 속하는 국가들은 물론이고 조금 산다는 나라 중 야생동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안 한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으니 말이다. 막연하게 “멧돼지를 조심하라”라고 하는 것보다는 “멧돼지의 몇%가 선모충에 감염됐으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 이에 대한 조사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건 우리 기생충학자들의 몫이겠지만, 의사들도 갑자기 얼굴이 붓고 근육이 아픈 환자를 본다면, 혹시 선모충이 원인이 아닐까 한번쯤 생각해 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진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증상은 시나브로 없어지겠지만, 환자는 몸 속에 수십 년 간 기생충을 가지고 살아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