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중인(中人) 문화의 산실, 인왕산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서울 도성을 사방에서 병풍처럼 호위하고 있는 네 곳의 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북쪽의 북악산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 인왕산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명서 그들 특유의 문화를 꽃 피운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이곳에 거주한 까닭과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만개한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기술과 실무능력 가졌지만 신분적 차별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했던 계층, 중인. 조선시대에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한 역관, 의관, 율관이나 양반의 소생이지만 첩의 아들인 서얼, 중앙관청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 등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불렀다. 양반은 아니면서 상민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 이었던 중인. 이들 중 역관이나 의관 율관은 외교관, 의사, 변호사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요즈음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로 잘 나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분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이들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를 떠돌았다.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까지는 그리 신분차별이 심하지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사회 곳곳에 투입되면서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심해지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자리를 잡게 된다. 중인들이 양반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존재로 자리 잡은 것도 16세기 이후이다.
기술이나 행정실무 능력을 소지하고 있었던 중인들의 의식은 17세기 이후 점차 깨어나게 된다. 1613년 서얼들이 중심이 된 은상 살해 사건은 소설 『홍길동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영조, 정조 등 국왕들이 서얼들의 능력을 주목하게 되고, 사회의 변화로 기술직 중인들의 존재가 중시되면서 중인들의 위상은 보다 강화되어 간다. 장동 김씨 등 양반층의 후원도 중인층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2. 양반을 닮고 싶었던 중인층의 위항(委巷)문학운동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인층을 중심으로 신분상승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중인층의 신분상승 운동의 모델은 양반이었다. 중인들은 무엇보다 양반을 닮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지금의 문학 동호회쯤 되는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그들이 지은 시와 문장을 발표하였다. 대개 중앙관청의 하급 관리로 일했던 중인들은 인왕산 아래 옥계천이 흐르는 곳에 주로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사 활동은 인왕산과 옥류천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옥류천 계곡’에서 따온 ‘옥계’라는 말을 따서 ‘옥계시사’라 하였다. 현재에도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 옛 송석원 등 희미하게나마 중인문화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위항(委巷)문학 운동이라 한다. ‘위항’이란 누추한 거리를 뜻하는 말로서 중인층 이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뜻하였지만, 대체로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인들의 시사 활동은 단순히 모여서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인들은 그들의 공동 시문집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1712년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海東遺珠)』를 시작으로 하여 『소대풍요(昭代風謠)』(1737년), 『풍요속선(風謠續選)』(1797년), 『풍요삼선(風謠三選)』(1857년)으로 이어졌다. 1791년에는 옥계시사 동인들의 시와 옥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인들은 시문집 발간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 못지 않는 학문적 수준이 있음을 널리 과시하였다. 『소대풍요』에서 『풍요삼선』까지 60년 마다 공동시집을 내자고 한 약속을 120년간 지킨 것에서 이들의 공동의식을 느껴볼 수가 있다.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회를 결성하여 시와 문장을 짓은 한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던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서 봄과 가을에 열린 백일장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이 백일장은 무기 없이 맨 손으로 종이 위에에 벌이는 싸움이란 뜻으로 ‘백전(白戰)’이라 하였는데,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을 여길 정도였다. 당시 치안을 맡았던 순라꾼도 백전에 참가한다면 잡지 않았다고 하며, 시상(詩想)을 떠올리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위한 참가자들의 경쟁도 치열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쓴 시축(詩軸:시를 쓴 두루마리 종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양반들도 중인들의 백전에 깊은 관을 보였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들이 백일장의 심사를 맡아볼 정도였다. 백전은 정조 시대에 특히 활발하였다.
영, 정조시대 문예중흥을 국가의 기치로 내걸은 시대분위기에 맞추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중인들의 위항문학 운동이 전개되면서 문화의 저변은 보다 확산되어 갔다. 백전이 벌어지는 날 인왕산과 옥류천 일대에 울려 퍼졌던 중인들의 함성은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목소리였다.
3. 새로운 사회변화를 주도하진 못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보면 최상위 신분층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지식인 집단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사회의 길로 들어선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골품제도의 차별 속에 있었던 신라하대의 6두품 세력은 지방 호족과 연합하여 고려왕조를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권문세족에 맞섰던 고려후기의 신진사대부는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조선후기의 중인층 또한 양반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양반 신분사회를 극복할 생각 보다는 자신들도 양반을 닮아가고자 했던 안일한 입장에 머물렀다. 중인들의 시문집 편찬이나 개인 전기 편찬에 주력한 것 역시 이들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결국 중인층은 새로운 사회변화 세력으로서 역사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그친 중인 문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이 거주한 인왕산 지역의 중인 유적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저작물은 조선후기 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했던 중인의 삶과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신분 차별은 벽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서울 도심에 위치하지만 지금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공간 인왕산. 이 일대에 산재한 중인문화 관련 유적지들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