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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7월 26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평택 소통 김 평 탁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국민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환영합니다
7월 26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26장 전문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28:3, 시5:6, 시139:19
10.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27:11
② 잠언 26장 전문
○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계
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것 같으니라 삼상12:17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잠27:8, 사16:2, 신23:5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잠10:26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찌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벧후2:22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 게으른 자와 거짓된 혀
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잠19:24
16.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26:12
17.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18.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사50:11
19.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약3:6
21.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데로 내려가느니라
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4.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찌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롬16:18
26.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찌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27.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28.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오늘의 역사
① 포츠담 선언(1945) :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반 무렵 독일 베를린 서남방 부근의 포츠담에서 미, 영, 소 3수뇌(트루만, 처칠, 스탈린)가,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 선언<회담>이다.
⇨11월 22일.
② 동국통감 간행(1485.음7.26) : 고조선 시대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엮은 역사서.
모두 56권 26책으로 된 인쇄본이다.
1463년(세조 9년)에 최항, 양성지 등이 세조의 명을 받아 엮기 시작하여 1484년(성종 15년)에 서거정이 완성하였다.
내용은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 한4군, 삼한의 역사를 책머리에 싣고,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의 1,400여 년에 걸친 역사적 사실들을 차례로 실었다.
<동국사략> <삼국사기> <고려사> 등을 참고 자료로 삼고, 중국의 <자치통감>의 체재를 본 떠 엮은 것으로, 내용에 잘못된 점이 지적되고는 있으나 고대사의 연구 자료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9월 10일.
③ 경주 155호 고분에서 금관 출토(1973) : 당시까지 발굴된 금관 중 가장 완전한 형태를 구비하였다.
④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1950) : 7월 26일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위에서 피난 중이던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들을 전투기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
피난민들이 철로밑으로 피신하자 제1기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뒤쫒아가 계속 사살했다.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500여명이 사살된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사건'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사건이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 군인이 위장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이들을 일단 적으로 간주해 적절한 행동을 취하라"고 지시한 당시 미군사령부의 기록도 발견됐다.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최소한 12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이 사건이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1994년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정은용이 사건을 토대로 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하자 AP통신 등의 외신과 국내 언론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취재하여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99년 유족들이 미국을 방문, 미 육군성은 사건의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밝혔고, 2000년 1월에는 미국에서 대책단과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충북 영동군 사건 현장을 찾아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2001년 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여 사건의 실체를 인정했으나 피해주민 및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미흡했다.
⑤ 아시아나 항공기 목포에서 추락 참사(1993) : 승객과 승무원 등 1백6명을 태우고 26일 오후 2시 27분 김포공항을 출발, 3시 15분 목포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 733편 보잉 737기는 강한 강풍과 안개로 인하여 3차례의 착륙을 시도하며 비행기가 착륙 보고 지점으로 접근하던 중, 기상이 갑자기 악화돼 조종사가 시계확보를 위해 고도를 낮춰 무리한 비행을 하다 균형을 잃고 추락하였다.
이 사고로 기장 황인기씨등 66명이 사망하고 승객등 44명이 생존했다.
추락 비행기는 목포공항 도착 예정시간부터 3차례의 착륙을 시도하다 강한 강풍과 안개로 실패하여 추락했다.
구조상황은 사고상황을 생존한 승객 김현식씨가 인근 마천리 주민에게 알리면서 부터였다.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이같이 많은 생존자가 있었던 것은 김씨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기다시피 내려와 소식을 알렸기 때문이다.
항공기가 추락한 운거산은 해발(海拔) 305m 밖에 안되는 야산이지만 인적이 없고 잡목이 우거져 산세가 험하고 비바람까지 몰아쳐 현장(現場)을 오르기엔 최악(最惡)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항공기 추락소식을 전해들은 마천마을민들과 인근주민 2백여명은 낫으로 잡목을 쳐 길을 내가며 현장에 도착 희생적인 구조활동을 폈다.
⑥ 제8대 국회 개원(1971) : 제8대 국회가 1971년 오늘 개원.
두 달 전인 5월 25일 실시된 총선에서 뽑힌 204명의 국회의원과 박정희 대통령, 주한 외교사절, 원로 정치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이 거행됐다.
8대 국회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명, 야당인 신민당 89명, 그리고 국민당과 민중당이 1명씩으로 구성됐다.
이날 국회의원 가운데 최고령자인 유봉영 의원의 사회로 국회의장단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국회의장에는 공화당의 백두진 의원이, 부의장에는 공화당의 장경순 의원과 신민당 정해영 의원이 뽑혔다.
의원들은 선서를 끝낸 뒤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참배했다.
⑦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 단식농성(1992) :
투쟁본부는 전국연합 민가협 등 24개 재야단체로 구성됨
농성 목표; 국가보안법 철폐와 장기복역 양심수 석방.
양심수 8백여명 전국 교도소에서 단식에 동참
⑧ 영산강 일대 수해(1989) : 우리 나라 남부지역에 집중호우가 사흘 째 쏟아진 1989년 오늘 영산강 제방이 붕괴됐다.
강물이 범람해 인근 나주평야와 마을이 물에 잠겼다.
이때까지 이 지역에 4백밀리미터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광주, 전남 지역에서만도 주민 7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또 이재민 수만 명이 발생하고 농경지 15만 헥타르가 물에 잠겨 3백백억 원이 넘는 재산피해가 났다.
⑨ 포니 첫 수출(1976) : “고유모델 차를 만들어 독자노선으로 갑시다.”
1972년. 정세영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큰형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회사가 크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며 찬성했다.
현대자동차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 설립 이후 포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코티나’를 조립 생산했지만 1972년 과감히 포드와의 제휴를 포기하고 독자적인 고유모델 개발에 나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 자동차 업계는 코웃음을 쳤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는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을 개발해 그 차를 수출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시아에선 일본 외에는 자동차 고유모델을 보유한 나라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 수준밖에 되지 않는 후진국. 그런 나라가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만들겠다니….
현대자동차의 기술책임자마저 “코티나 조립도면조차 제대로 카피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떻게 고유모델을 설계해 만들겠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주영 정세영 형제의 꿈은 곧 현실이 됐다.
일본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로 1975년 말 ‘포니(조랑말)’ 1호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국산화율 90%인 최초의 국내 고유모델이었다.
1976년 울산공장에서 본격 생산에 들어간 포니는 조랑말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시판 첫해에 1만726대를 팔아 국내 시장 점유율 1위(43%)에 오른 것이다.
그해 7월 26일에는 중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첫 수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외국에 판매하는 꿈만 같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니 구입을 희망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시판 첫해 수출대수는 1019대로 늘어났다.
지난해 현대자동차의 수출 물량이 190만 대라고 하니 30년 동안 국내 자동차 산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족(蛇足) 하나. 26일 개봉하는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에는 이집트에서 공수해 온 포니 다섯 대가 등장한다.
이집트에선 한국이 20여 년 전에 수출한 포니가 아직도 택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07)
⑩ 쿠바 혁명 발발(1953) : 7월 26일 카스트로가 혁명세력을 조직해 산티아고데쿠바 시에 주둔해 있던 몬카다 군병영을 공격하면서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7․26운동 조직을 지휘하다가 1956년 12월 2일 다시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그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동생 라울, 그리고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등과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8년 12월 31일 마침내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961년 쿠바 공산당의 서기장에 오른 카스트로는 이후 쿠바에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이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 만 침공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은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⑪ 프랑스 7월혁명 발발(1830) : 7월 26일 프랑스의 샤를 10세가 '1814년 헌장'의 정신에 역행해 기본권을 제한하는 3가지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7월혁명이 일어났다.
이 칙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파업과 항의시위에 이어 27일부터 3일간 파리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지지하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상황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은 1792년 프랑스 혁명을 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7월혁명으로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지 계급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⑫ 퀴리 결혼(1895) :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는 피에르 퀴리와 결혼한 뒤 퀴리부인으로 불렸다.
실용적인 생활이 몸에 밴 마리는 예복이나 금반지도, 피로연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식을 올렸고,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1902년 퀴리 부부는 방사성 원소를 발견, '라듐'이라 이름붙였다.
이 명칭은 라틴어로 '광선'이라는 뜻의 '라이우스'에서 유래했다고.
라듐은 인체의 병든 세포들을 파괴시켜 암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퀴리 부부는 그 다음 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⑬ 디즈니 사의 영화 <라이언 킹> 로스엔젤레스에서 개봉(1994) : <라이언 킹>은 개봉된 지 41일만에 20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하이에나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는 우피 골드버그가 맡았고, 엘튼 존의 노래가 삽입되었다.
⑭ 이탈리아 유람선 침몰(1956) ; 1956년 오늘 새벽 6시 51분 !
미국 뉴욕항에서 3백여km 떨어진 대서양의 낸터컷(Nantucket) 섬 근처에서 이탈리아의 호화 유람선 '안드레아 도리아' 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는다.
이 배는 미국 동부 표준시간으로 전날 밤 11시 15분 스웨덴 여객선 '스톡홀름'호와 충돌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타이타닉' 호의 경우와 달리 배가 충돌후 곧바로 가라앉지 않아 많은 승객들이 목숨을 건졌다.
승객 2천여 명 가운데 56명이 사망했다.
'안드레아 도리아' 호의 침몰 사건을 계기로 모든 민간 선박이 항해용 레이더를 탑재하게 됐다.
⑮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1956) :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의 동북쪽 끝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한다.
1869년 프랑스인 레셉스가 공사를 시작, 10년이 걸려서 1869년에 완성했다.
총연장 161Km이며 통과하는데 13-15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운하와 그 양쪽 지방은 프랑스 소속의 수에즈운하회사의 조차지였다.
⇨1월 15일.
⇨2월 5일.
⇨9월 29일.
⑯ 남미(南美) 독립영웅 2人회동(1822) :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마르틴 !
스페인 식민지에서 태어나 식민통치에 맞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이끈 두 사람은 나란히 ‘위대한 해방자(리베라토르)’로 불린다.
부유한 크리오요(식민지 태생 백인)로서 ‘인디오도 아니요, 유럽인도 아닌 중간 존재’라는 울분 속에 떨쳐 일어난 볼리바르.
스페인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지만 결국 태생적 한계를 느끼고 크리오요 혁명가들과 하나가 된 산마르틴.
불굴의 의지와 용맹, 천재적 군사전략을 발휘한 두 사람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볼리바르는 신경질적이고 마음이 급한 이상주의자였지만 산마르틴은 매사에 신중하고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현실주의자였다.
볼리바르는 카라카스(베네수엘라) 보고타(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 남미 북쪽에서, 산마르틴은 라플라타(아르헨티나) 산티아고(칠레) 등 남쪽에서 각각 해방전쟁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맞부딪친 곳은 페루. 리마에 입성해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섭정이 된 산마르틴은 볼리바르가 먼저 점령한 항구도시 과야킬(에콰도르)을 편입하길 원했다.
1822년 7월 26일, 두 사람은 과야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을까.
두 사람만의 대좌였기에 여러 가지 추측만이 나올 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해방된 나라들의 장래 통치형태에 관해 의견이 엇갈렸을 것이다.
군주제에 마음이 끌렸던 산마르틴은 완강한 공화주의자 볼리바르를 설득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두 지도자 간의 협력 문제도 있었다.
당시 44세로 다섯 살 연장자인 산마르틴은 볼리바르에 이어 자신은 2인자의 지위로 족하다고 제안했지만 볼리바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원제 ‘묻혀진 거울’)에서 과감히 이렇게 썼다.
‘산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나는 내 과업을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네”라고 말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산마르틴이 회담 결과에 낙담해 서둘러 리마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산마르틴은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자신이 해방시킨 땅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볼리바르는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무질서 속에서 암살 위협에까지 직면한 그는 실의에 빠져 1830년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불능”이라고 한탄하며 세상을 떴다.
통합되고 강력한 국가를 꿈꿨던 두 사람의 꿈과 달리 남아메리카는 이후 분열의 길을 걸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2008)
⑰ 공공채무 상환법 : 독립 직후 미국에 위기가 찾아왔다.
돈이 없어서다.
연방은 물론 각주도 빚 독촉에 시달렸다.
독립전쟁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발행된 공채와 차용증서의 합계액이 약 7,600만달러. 연방 재정규모의 14배에 달했다.
해결방안을 둘러싼 갑론을박 속에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파격적인 해법을 내놓았다.
골자는 차환 발행. 연방이 모든 부채를 떠안겠다는 방안에 즉각 반발이 따랐다.
반대론자들은 연방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질 우려가 있는데다 상대적으로 성실하게 재정을 운용하거나 빚을 갚은 주보다 부채를 많이 지고도 덜 갚은 주들이 유리하다며 목청을 높였다.
최대 쟁점은 투기 논쟁. 애국심과 애향심으로 독립전쟁 채권을 주로 매입한 농민들 가운데 끝까지 보유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액면가격의 25%로 채권을 사들였던 동북부 투기세력에 대한 특혜라는 지적이 두고두고 해밀턴의 발목을 잡았다.
당파 싸움도 더욱 심해졌다.
결론은 해밀턴의 승리.
독립채권의 원소유자와 유통시장에서 사들인 투기세력을 구분할 수 없으며 악성채권의 차환을 미루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국제적 신용까지 떨어진다는 설득과 ‘거래’ 덕분이다.
해밀턴은 반대론의 좌장격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연방 수도를 뉴욕 대신 남부에 가까운 포토맥강 인근으로 이전한다는 조건을 걸어 양보를 얻어냈다.
1790년 7월26일 의회를 통과한 ‘공공채무 상환법’은 신생 미국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연방정부의 지도력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월스트리트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차환발행을 통해 75%라는 차익을 거둔 ‘투기자금’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정적이었던 해밀턴과 제퍼슨의 타협과 양보 속에서 신생 미국이 위기를 넘기고 경제성장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⑱ 기타 오늘의 역사
1847 라이베리아 공화국선포.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통치국가 탄생
1896 국내전보규칙 반포
1909 피의 일주일-에스파냐 정부, 계엄령하에 총동맹 파업 진압
1922 일본 신사현(나카다현) 신월전력공사장에서 한인 노동자
100여명 학살됨
1926 이청천․홍진 등 길림서 한국 독립군 조직
1930 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당군 창설
1931 독일의 금융공황구제 7개국회의
1939 미국, 대일본 통상항해조약 파기통고
1941 더글라스 맥아더, 필리핀주둔 미군사령관에 임명
1943 이탈리아 바도리오정권 성립
1948 미국-영국-프랑스 3국 군정장관 서독정부 수립 결정을 성명
1953 피델 카스트로, 쿠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 습격 실패로 체 포
1956 이승만 대통령 휴전협정 이미 사문화(死文化)임을 강조 1957 한국서 영국연방군 철수
1962 한국-요르단, 국교수립 1957년 한국서 영국연방군 철수
1963 일본, 국제경제협력기구 가입
1970 서울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지하 LP저장실 폭발
1971 백두진 제8대 국회의장 피선
1971 미국, 아폴로 15호 발사
1972 태풍 리타호 강타, 54명 사망 실종
1972 공화당 의장서리에 정일권 임명
1976 한국 보수신학교협의회 창립
1976 미 항공우주국(NASA), 바이킹 1호가 보낸 화성표면 사진 공개
1981 인도 국민단합회의, 동북아지역 국제단합상 수상자로 전두환 대통령을 선정
1981 이란대통령에 라자이 수상 당선
1984 자니 카슨쇼, TV쇼로서는 처음으로 입체음향으로 방송
1988 한국-멕시코, 항공협정 체결
1989 문규현 신부, 임수경양의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방북
1991 제임스 베이커 미국국무장관, 서방외교관으로는 처음으로 몽 고 의회서 연설
1991 소련 공산당,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한 새 강령 승인
1992 이라크, 유엔 무기사찰단에 대량살상무기 관련 서류수색 동의
1994 이스라엘-요르단 46년만에 적대관계청산
1994 미국 하원에서 '화이트 워터'사건 청문회 시작
1994 사법개혁 관련 법률 공포
1998 캄보디아 첫 다당제 총선
2000 미국 연방법원 온라인 무료 음악공유 사이트 '냅스터
'(Napster) 잠정폐쇄 명령
2001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러시아 방문을 위해 열차편으로 북
오늘의 인물
① 김대건(金大建 ; 1821 - 1846.7.26) : 한국 최초의 신부.
교명은 안드레(Andre).
아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본관은 김해(金海).
충청남도 당진(唐津) 출생.
증조부 진후(震厚)가 순교하고 조부 택현(澤鉉)이 1827년(순조 27) 정해박해(丁亥迫害)로 고향을 떠나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내사면(內四面) 남곡리(南谷里)로 이사함에 따라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1836년 초에 입국한 프랑스신부 P. 모방에게 영세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와 함께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났다.
중국인신부 유방제(劉方濟)와 함께 마카오에 도착, 조선교구의 포교를 담당한 칼레리신부에게 신학과 외국어를 배우고, 전교회 책임자인 리부아신부와 데플레슈신부의 배려로 그곳 중등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였다.
1842년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귀국길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페레올주교의 지시에 의하여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함경도 땅에 잠입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다시 몽골 빠자즈[八家子(팔가자)]에 기착하여 페레올주교로부터 고국으로 잠입하라는 지시를 받고 경원(慶源)을 거쳐 입국하려 했으나 다시 실패하였다.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1844년 부제(副祭)가 되었다.
1845년 1월 단신으로 서북국경선을 돌파하여 밀입국에 성공, 가톨릭 박해로 타격을 받은 교회를 재수습하고 8월에 다시 상하이[上海(상해)]로 건너가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주교의 집전하에 사제서품을 받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그 뒤 서울로 돌아와 용인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선교사 영입을 위한 잠입통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관헌에 체포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라는 죄명 등으로 해주감영으로 이송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서울로 옮겨져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이라는 죄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40일 뒤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1951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福者)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성인위에 올랐다.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무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9년 이래 한국가톨릭교회는 그를 모든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으며, 한국가톨릭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칭하고 있다.
② 서상륜(徐相崙 ; 1848.7.26 - 1926) : 한국 최초 개신교회 설립자.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
한국 그리스도교 초창기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양반 출신이었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1876년 행상(行商)으로 만주 뉴좡[牛莊(우장)]에 갔다가 J.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동만주 일대의 교포에게 전도를 하였다.
이성하(李成夏)․이응찬(李應贊) 등과 신약성서의 번역을 맡아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펴내고, 1884년 《예수셩교젼셔 마복음》과 《말코복음》, 1887년 신약성서 전체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셔》를 간행하였다.
1884년 국내전도를 위하여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종교집회를 가졌으나, 정부의 체포령으로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피신하였다. 1887년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솔내[松川(송천)] 마을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를 세웠다.
③ 박계주(朴啓周 ; 1913.7.26 - 1966.4.7) : 숭고하고 깨끗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소설 《순애보(殉愛譜)》를 쓴 소설가.
⇨4월 7일.
손정도(孫貞道 ; 1872.7.26 ~ 1931.2.19) : 독립운동가.
⇨2월 19일.
④ 임측서(林側徐 ; 1785.7.26 - 1850) : 중국 근대화의 선각자.
복건성 출생.
1839년 광동에서 영국 상인이 반입한 아편을 소각, 아편전쟁의 발단을 초래했다.
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 1856.7.26 - 1950.11.
2) : ⇨11월 2일.
아일랜드의 극작가.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56년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난 쇼는 20세가 되던 1876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소설을 썼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활동하면서 그의 진면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재치와 언변을 동원해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1892년 입센풍의 희극 <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의 공연으로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 놓았고, 이어 대작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 등을 발표했다.
쇼는 그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인 음성학에 대한 교훈극 <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으로 1938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 각색되어 인기를 끌었다.
<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으로 1925년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부했다.
⑥ 마치니(Giuseppe Mazzini ; 1805.6.22 - 1872. 3.10) : 이탈리아의 혁명가.
변호사 일을 하다가 정치 운동에 몸바쳐 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으나, 굽히지 않고 싸워 조국 통일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44살에는 삼두 정치를 조직, 프랑스군에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스스로 망명했다.
이탈리아를 위해 몸을 바친 그는 가리발디, 카부르와 함께「이탈리아 통일의 3걸」이라고 불린다.
⑦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 1894.7.26 ~ 1963.
11.22) : 영국의 소설가 ․비평가.
아버지는 서리주(州) 고덜밍에 있는 차터하우스학교 부교장이었고, 조부는 저명한 동물학자 T.H.헉슬리이다.
시인 ․문예비평가인 M.아놀드, 종교와 사회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묘사한 햄프리 워드 부인은 그 외척이고, 생물학자 J.S.헉슬리는 그의 형이다.
이러한 지적(知的) 환경 속에 태어나 이튼학교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웠다.
이튼 시절에 거의 실명(失明)에 가까운 안질을 앓은 탓으로, 당초에 마음먹었던 의학도의 길은 포기하였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판한 이래 몇 권의 시집도 냈으나, 그가 소설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 《크롬 옐로》(1921)가 인정을 받게 된 후부터였다.
기지(機智) 있고, 박식하며 염세적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관념소설이라는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H.G.웰스 등의 사실소설(寫實小說)이나 사회소설에 대한 하나의 도전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 무렵 서로 알게 된 T.S.엘리엇이 헉슬리에게 소설가가 되라고 권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 소설 《어릿광대의 춤》(1923)은 생존의 의의를 상실한 삶의 권태 속에서 방황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지식인과 유한부인(有閑夫人)을 묘사한 작품인데, 이것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하찮은 이야기》(1925)는 《크롬 옐로》의 세계를 이탈리아로 옮겨 놓은 느낌을 주는 소설인데, 다음 소설 《영원의 철학》에서 전개되는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지칭되는 《연애대위법(戀愛對位法)》(1928)은 갖가지 형의 1920년대 지식인들이 풍자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며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일종의 유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1932),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한 가공소설(架空小說) 《원숭이와 본질》(1948)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고, 《루당의 악마》(1952) 《천재와 여신》(1955)에 이어 1962년 발표된 《섬》은 과학에 지배되지 않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생활을 추구한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은 근대과학의 맹목적인 신뢰를 배경으로 하는 19세기의 안정된 모랄에 반대하여, 격동하는 20세기에 걸맞는 모랄 탐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랄을 가지지 않은 모랄리스트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모든 모랄을 부정하는 그의 작품이 사실은, 언제나 새로운 모랄의 실재(實在)에 대한 확신을 배경으로 한다.
넘치는 지성과 분방한 공상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교훈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일면에서는 현실적인 인생의 현장교사(現場敎師)라는 풍모마저 느끼게 한다. 1937년 당시 나치스의 대두를 지켜본 그가 폭력을 부정하고 유럽이 현실적으로 선택해야 할 길을 가르친 평론집 《목적과 수단》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본질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11월 22일.
⑧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 1875.7.26 - 1961.
6.6) : ⇨6월 6일.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스위스의 심리학자요, 정신과의사이다.
바젤에서 태어났고, 취리히 근처 퀸스나흐트에서 졸(卒).
1902년 바젤과 취리히의과대학에서 공부한 뒤, 취리히대학교 부설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대표적 저서로 <무의식의 심리학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1912)․<심리적 유형 Psychologische Typen>(1921) 등이 있다.
융은, 대부분의 초기 프로이디언들과 달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도 이점으로 작용해, 한 때 프로이트의 수제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스승과 결별하고, 스스로 분석심리학이라고 부른 독자적 이론 체계를 수립했다.
프로이트와 융의 결별을 가져온 것은 리비도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융이 보기에 리비도는 프로이트가 생각하듯 오로지 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생의 에너지였다.
그 보편적 마음 에너지인 리비도가 외부 세계로 향할 때 외향형 성격이 빚어지고 그것이 내면의 삶으로 향할 때 내향형 성격이 빚어진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융은 또 원형(原型: archetype)의 개념을 확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무의식을 개개인이 생활사 속에서 따로 획득한 개인무의식과 전체로서의 인류의 마음이 그 전체 역사를 통해 획득한 집합무의식으로 나누고, 이 집합무의식 속에서 신화.전설.예술 따위를 통해 되풀이 나타나는 모티프를 원형이라고 불렀다.
개인무의식보다 더 심층에 자리잡은 집합무의식은 민족이나 문화 또는 개인사를 초월한 인간 뇌 구조의 동일성에 바탕을 둔다.
융은 흔히 관념복합체로 번역되는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학 용어의 창안자는 아니지만, 그것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가 일종의 마음 속 응어리라면, 융의 콤플렉스는 어떤 감정에 의해 통합된 심리적 내용의 집합이다.
물론 이 두 개념이 늘 깔끔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피터팬 콤플렉스니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롤리타 콤플렉스니 시스터 콤플렉스니 아도니스 콤플렉스니 온달 콤플렉스니 하는 표현에서 보듯, 이 말이 일상적 남용어가 된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고종석,2004).
⑨에비타 에바 페론(Eva Peron ; 1919.5.7 - 1952.7.26) : ⇨5월 7일.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에비타 !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퍼스트레이디 !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진실로 나는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에게서 멀리 떠나지 마세요.
재산이나 명예에 나는 욕심을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것들을 열망할지 몰라도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기에….
우리에게 영화와 뮤지컬 등으로 잘 알려진 노래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오(Don't Cry For Me Argentina)>의 가사 중 일부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에비타로 알려진 에바 페론(본명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대지주였던 아버지와 그의 가정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가난이 싫었던 에바는 14세 때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도전했지만 단역과 조연 생활을 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라디오 방송국 성우로 일하던 중 일생일대의 대전환을 맞는다.
1944년 지진 희생자를 위한 모금행사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 대령을 만난 것.
후안 대령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에바는 대통령 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불우했던 과거를 잊지 않았던 에바는 사회 빈곤층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회개혁프로그램을 만들어 빈민과 노동조합의 문제를 해결했다. 여성의 투표권을 관철시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단을 통해 학교와 병원, 보육원을 세웠다.
노동자와 빈민들은 그를 성녀(聖女)처럼 떠받들었다.
그 한편으로 에바에 대한 악평도 뒤따랐다.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대중주의) 때문에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이어 나가기 위한 안전장치였다는 것이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자신이 부통령 선거에 나갈 계획을 세우다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에바는 1952년 자궁암과 척수백혈병으로 쓰러졌다.
결국 그해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에바는 지금도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퍼스트레이디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에 있다.
낮은 사랑은 그 울림도 크기 마련이다.
물론 그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와는 별도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2006)
⑩ 갤럽(George Horace Gallup ; 1901.11.18 ~ 1984.7.26) : ⇨11월 18일.
미국의 여론조사 통계가.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우고, 드레이크대학 ․노스웨스턴대학 ․컬럼비아대학에서 신문학 ․광고학 강의를 담당하였다.
1935년 미국 여론연구소(American Institute of Public Opinion :
Gallup Poll)를 창설, 그 소장이 되었다.
또한 1939년에는 시청자 조사연구소를 설립, 반 세기에 걸쳐 사회 ․정치 ․경제의 동향을 과학적 샘플링법에 의해 측정해냈다.
그는 T.브라운의 표본조사 이론에 입각하여 미국 인구의 단면도(斷面圖)를 작성하기 위해 성(性) ․수입(收入) ․정치적 견해, 지방색(地方色) 등을 범주별(範疇別)로 선택한 대상을 상대로 한 면접조사를 실시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193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의 당선을 예측 ․발표한 것이 적중함으로써 일약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실시되는 여론조사, 즉 갤럽여론조사는 정치가의 선거전략으로부터 기업의 제품개발에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는데 그 선구적 역할을 하여 세계에 보급시킨 그의 업적은 크다.
⑪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 1895 ~ 1993.7.26) : 미국의 군인.
버지니아 출생.
대장(大將)이다.
D.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도쿄[東京]에 주재하였다.
191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수군단을 이끌고 각지에서 싸웠다.
특히 1943년 7월 시칠리아섬 공략에서는 미국 육군사상 최초의 대공수 강습작전을 감행하였다.
1950년 6 ․25전쟁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를 만나자 미 제8군을 이끌고 남한을 수복, 1951년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년 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3년 미육군 참모총장을 역임,
1955년에 퇴역하였다.
⑫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 1908.7.26 ~ 1973.9.
11) : 칠레의 정치가.
⇨9월 11일.
⑬ 기타 오늘의 인물
1733 쉬뢰크 출생.독일 루터교인.그의 신학적 입장은 초자연주의적 인 것이었다.
1782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을 만든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 필 드 출생
1802 플러머 출생.장로교 신자.그는 설교에 있어서의 독특한 감동 과 교수의 은사를 지닌 인물이었다.
1813 브리스토우 출생.감리교 성직자.그는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았 으며,성인이 되어서 직업을 법조계를 선택하였다.
1856 하퍼 출생.침례교 평신도.1884년 히브리어 어학원을 설립함. 시카고대학을 탁월한 능력으로 발전시킴.
1872-1931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 출생
1876 장석초 출생.성결교 목사,수난자.1925년 경성성서학원(서울신 학대학교) 졸업.1928년 압해도에 대천리 및 동서리 교회를 설립.
1881 차이석 출생.기독교인,독립운동가,교육가.호는 동암.1904년 평양숭실학교 1회로 졸업.안창호 신민회에 가입.평양대성 학교 설립및 교육에 종사.
1887-1979 매독 검사법을 개발한 미국의 면역학자 칸 출생
1892 김홍식 출생.기독교인,체육인,청년운동가.이승만 대통령 비서 관,경기도 사회국장 등 임직.
1895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 출생
1908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 출생
1928-1999 미국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생
1943 록가수 믹 재거 출생
1957 과테말라 아르마스 대통령 피살
1974 구로공단사건 범인 이종대, 문도석 다시 살인난동끝에 자살
오늘의 샘터
① 카를 융의 말 : "실용의학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예술이며, 그 점은 실용분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예술이란 창조이며 창조란 일체의 이론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초보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이론들을 배울 수 있는 한 배우시오.
하지만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기적 앞에서는 이론 같은 것은 잊어버리시오.
이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창조적인 개성이 판단하게 하시오."
② 헉슬리의 말 : "대부분의 무지는 극복할 수 있는 무지다.
우리가 무지한 것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