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6일 현충일, 인천공항에서. 작년 여행에 탔던 KLM의 악몽을 떠올리며 한 컷.
지난 2월 어느 날 아침, 소년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출근하기 위해 아침을 먹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고 소화가 안된다던 마린은 조용히 방에 있다가 갑자기 꽥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테스터기다.
"오빠, 임신인가봐!!"
그녀는 잠시 제 눈을 의심하는 것 같더니 이내 침대에 누워 발을 구르고 있다.
답답하기는 소년도 마찬가지다. 순간적으로 날짜 셈을 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일이 연말 쯤이니...
'올해 여행은 글렀구나!'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으로 만났고, 평생 함께 여행하기로 약속한 소년과 마린에게는 무척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
아무리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임산부가 비행기를 열 몇시간 타고 여행을 가서는 안될 거 같기는 했다. 그래서 마음을 열번도 더 고쳐 먹고, 눈 딱 감고 동남아 휴양지로 휴가를 다녀올까 생각해봤지만 절대로, 마음은 동하지 않았다. 왜 동남아와 나는 서로 맞닿지 않는 평행선일까? 그런 궁금증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미 내 마음은 지중해 어딘가의 바닷가로 달려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다! 올해도 유럽인거야!
설득시키자!
나 자신을 설득시키긴 했으나 더 큰 난관들이 버티고 있었다. 노골적인 엄마의 반대가 있었고, 마음을 알길 없는 첩첩산중같은 아버지가 계셨으며, 허허 웃으시는 웃음에 미안한 말 못꺼내겠는 장인어른이 계시고, 딸걱정 지극하실 장모님이 계셨다. 이런 무시무시한 반대파 라인업에 마린은 지레 겁을 먹고 언감생심 꿈도 못꾸고 있었다.
일단 마린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은 후, 과학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해외 여행을 하는 산모들의 케이스와 가장 믿을 수 있는 의사의 의견들을 종합해서 양가 부모님께 보고하기로 했다. 조사 결과, 의외로 임산부의 여행은 안전한 것이어서 대략 5~6개월 정도면 여행에 최적의 시기라는 것이었다. 모든 조사를 면밀히 끝내고 마침내 정기 검진이 있는 날, 나는 어머니를 동석시켰다. 처음 보는 초음파 영상에 신기해 하시던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여행에 관한 질문을 했고, 어머니께서는 임산부가 여행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선생님의 대답을 똑똑히 들으셨다. 나중에 병원을 나서시면서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
"저 소리 듣게 하려고 오늘 불렀냐?"
"..."
이런 식으로 차례로 한 분씩 설득해서 결국 우리는 6월에 이른 휴가를 가게 되고 말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서 빨리 비행기 표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표를 알아보니 학생표만 잔뜩 있을 뿐, 이상하게도 성인용 티켓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신혼부부 특가 티켓만이 하나 있었는데, 가격도 저렴한데다 알리탈리아 항공이라 대한항공 마일리지도 쌓을 수 있어서 우리는 그 티켓을 덜컥 예약해버리고 말았다. 그후에 그 티켓 뒷수습을 하느라고 너무 마음 고생을 해서 개인당 목덜미에 주름이 하나씩 생겨버리고 만다. 하여간 천신만고 끝에 티켓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한달이나 시간이 있었는데도 별다른 준비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이맘 때는 눈뜨고 일어나면 일주일씩 시간이 푹푹 지나가버리던 시기였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하며 마음을 살짝 놓았더니 어느새 출발 일주일 전. 여행 준비하는 시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도 있는데, 그말에 의하자면 가장 행복한 시간을 허비해버린 셈이었다. 생떽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도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만일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꺼야."
하지만 현대의 직딩 여우들은 너무 바쁜 상태였다. 아니면 나사가 하나 풀려 있었던가.
하여간 시간이 흘러 마침내, 출발 당일이 되었다.
무엇인가 빼먹은 바람에 마린이 잠시 집에 다시 올라간 사이 트렁크들 한 컷.
공항버스를 타러 트렁크를 끌고 가면서 '며칠 후에 같은 길을 반대로 걸어 오겠지?'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안좋아졌다. 버스를 탔는데 마린이 급격히 피곤해 했다. 그녀는 휴가 전에 일을 마무리짓느라 무려 새벽 3시에 귀가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공항버스에 오른 셈이었다. 휴가 한번 가보겠다고 하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발권을 하고, 짐을 부치고, 검색대를 지나 출국 심사를 하고, 로밍을 하고, 면세점 물품까지 찾고 나서 우리가 간 곳은 sk 텔레콤 라운지였다. 11번과 12번 게이트 사이 2층에 위치한 이곳은 앉아서 시간을 죽이기 매우 좋았다. 쿠키와 주스 등 간식이 무료고, 국제 전화와 잡지, 인터넷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시간이 남는 여행자들에게 무척 유용한 곳이었다.
SK 텔레콤 라운지에서는 간단한 스낵이 무료다. 요기하기에는 안성맞춤.
마린과 내가 타고 갈 우리의 날개, 대한항공 비행기의 모습이 보인다.
발권하면서 날개를 피해달라는 말을 깜빡 잊었더니 날개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비행기에 요즘 그 흔한 개인용 모니터가 없다. 역시 직항은 에어 프랑스가 최고.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한다.
집을 나설때부터 좋지 않던 하늘은 여전히 흐린 상태다. 빠른 속도로 흰 구름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것들이 날개를 스쳐지나간다. 드디어 출발하는가. 이 하얀 구름들을 뚫고 올라가면 파란 지중해의 하늘과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어린 아이처럼 들뜬 것도 같았고, 애늙은이처럼 아무 감동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여러 감정들이 번갈아 나를 지배면서,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내 몸에 가해지는 중력을 더욱 배가시키는 것 같았다.
출발과 동시에 돌아오는 날의 악몽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왜일까. 여행을 너무 많이 다녔다는 뜻일까.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바깥은 온통 하얀 기운 뿐이어서 눈이 부셨다. 어서 빨리 날아올라 파란 창공과 두툼한 목화솜같은 구름을 보고 싶었다.
개인용 모니터가 아쉽기는 했지만 대한항공에는 최대의 강점, 고추장 비빔밥이 있다! 진짜로 두 그릇 먹고 싶었다. 식사 시간에는 숫가락이 사기 그릇에 쨍강 거리는 소리가 기내에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자다가 내가 어디 왔는지 보려면 고개를 들어 중앙 모니터를 주시해야...
로마 행 비행기에 로마를 엄청 사랑하는 1인 발견.
첫댓글 아웅~ 1등!! 근데 소년님~~~ 너무너무 짧아요!!! sk 라운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나요?
통신사및 카드사 라운지는 가입자만 이용가능합니다.sk,ktf는 봤는데 lg는 잘 모르겠어요.^^
mia 님께서 정답 알려주셨네요. ^^
여행을 떠나시기전 상황을 상세히 적어주셔서 너무 실감나네요..앞으로의 여행기 기대됩니다 ^^
아놔,그래도 첫아기 임신인데 그 반응이 기쁨이나 설레임,두려움도 아닌 여행을 갈수 있느냐 마느냐에 대한 계산과 좌절이라니 너무 웃겨요.. 양쪽 부모님들이 얼마나 어이 없어 하셨을까 ㅋㅋㅋ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너무 철들게 행동하면 놓쳐야 하는 재미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적당히 철없이 살려고요. ^^
여행전에 라운지 이용은 정말 도움이 되지요.여행기 정말 꼼꼼하게 적으셔서 읽을거리가 풍부해서 너무 좋아요.보잉747이라서 개인모니터가 없어요.777은 있지만..와이프되시는 분이 한 미모하셔서 사진이 더 빛나요..^^
아, 보잉 747이라 그렇군요.. 옛날에 747하면 제일 좋은 비행기인줄 알았는데.. 세월앞에 장사 없는 셈인가요?? ^^
하하, 드디어 시작하셨군요. 탄력받으셔서 어서 올려주셔요. 저도 읽다보니 설레네요. 아기를 낳고 아기 데리고 가는 여행 매우 하드한데요 용기내서 더 늦기전에 잘 다녀오셨어요.~~
아, 네~ 이렇게 칭찬이 드문데.. 감사합니다~~
이 여행은 순전히 임산부 마린언니가 건강했기에 가능했었을꺼같애요. 그리고 소년님의 글솜씨가 일취월장 하십니다~ㅎ
미라클 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6개월까지는 개인적으로 추천하구요. 감사합니다~
와..드뎌 이탈리아 여행기로군여... 저때만해도 벌써 마린이의 배가 저리도 불렀구나~~~
우앗~!! 드디어 올리셨군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빨리 다음편도 올려주세요~
소년님 사진들을 보고있자면, 마치 제가 출국을 앞둔거마냥 설레입니다. 여행기가 리얼해서 긍가봐요.^^ 나중에 2세까지 함께하는 세가족의 여행기도 갑자기 확 기대가 됩니다. 제가 너무 앞서갔나요?^^;
대한항공의 저 비빔밥 기내식은 유럽노선에만 나오는건가요??동남아갈때 대한항공탔는데 안주더라는..ㅠㅠ그래서 비지니스이상만 주나부다 포기했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미아 루이스 님이 아시지 않을까요?
예고편도 넘 재밌어서...본편 느무 기대되용~ 빨리 업뎃해주세염~~^^
예고편 아닌데... 이 시점부터 프롤로그 삼기로 하죠, 뭐. :)
이런 초장부터 장황하게 설명해주는 서술형 여행기 넘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어요 ^^
아 너무 멋진 여행기잖아욧! 이렇게 멋드러진 여행기를 이때까지 잘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2편을 위해서 지중해소년님께 응원의 박수를 짝짝짝 !!!!/ 저도 마린님의 여행 그것도 유럽여행을 적극 권장한 사람중에 하나라눈..^^
저도 작년에 이탈리아 다녀왔는데. 로마로 가서 로마로 안나가고 바로 국내선타고 시칠리아로 갔었는데.. 이상하게 두 번의 유럽여행이 모두 로마행 비행기를 타는 걸로 시작되었었는데.. 이탈리아편 너무 기대되네요~
polyana님 리플보니 저희가 무지하게 철없고 개념없는 부부긴 하네요 ㅋㅋㅋ 뱃속 아가에게 쬐금 미안해서 반성중이라는... 얼른 저도 한편 써야겠군요, 소년님이 혼자 여행준비 다 한척 하면서 선수쳐서 써버리면 전 쓸말없게 될까봐 불안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