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송암 선생 권공 묘갈명병서(松巖先生權公墓碣銘幷序)
공은 성이 권(權), 휘가 호문(好文), 자가 장중(章仲), 호가 송암(松巖)이다. 권씨가 영가(永嘉)를 본으로 한 것은 고려 태사(太師) 행(幸)에서 비롯되었으며, 안동부 서쪽 송파리(松坡里)에 살게 된 것은 예의판서(禮儀判書) 인(靷)에서 비롯되었다.
증조부 개(玠)는 부사정을 지냈고, 조부 숙균(叔均)은 성균관 진사이시다. 아버지 육(稑)은 안주 교수(安州敎授)이고, 어머니는진성 이씨(眞城李氏)충무위(忠武衛) 잠(潛)의 딸이다. 가정(嘉靖) 임진년(壬辰年, 1532, 중종 27) 6월 19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ㆍ8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겨우 약관(弱冠)에 퇴계 선생 문하에 집지(執贄)하였다. 선생이 시를 주었는데, ‘밝고 넉넉한 기상과 절개를 지녔네〔嘐嘐饒氣節〕’라는 구가 있다. 또 박약(博約)과 성명(誠明) 등의 말로 권면하였다. 공이 이에 더욱 분발하여 집 앞 남쪽 산에 집을 짓고 주위엔 도서(圖書)를 채워 스스로 즐겼다.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이미 30세였다. 이 보다 앞선 기유년(1549)에는 부친상을 당했고, 갑자년(1564)에 이르러서는 모친상을 당했다. 모두 여묘살이로 3년상을 마치면서 슬픔으로 몸이 여위어거의 삼년상을 견뎌내지 못할 뻔하였다.
이때부터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는데, 퇴계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일찍 판단하기를 면려하였다. 마침내 과거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청성산 아래에 정사를 지어 ‘무민재(無悶齋)’라고 편액하고는 유유자적하며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널리 퍼져서 고을 사람들이 학행(學行)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과 내시교관(內侍敎官)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정해년(丁亥年, 1587, 선조 20)에 병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다가 갑자기 병이 심해지자, 시를 지어 문도들을 사절하고는 사자(嗣子) 행가(行可)에게 말하기를, “치상은 검소하고 간단하게 하고, 묘표에는 단지 ‘청성산인 권 아무개의 무덤〔靑城山人權某之墓〕’이라고 쓰면 된다.” 하고는 7월 24일 관물당(觀物堂)에서 운명하였다. 10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 병향(丙向) 터에 장사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뒤따른 것이다.
아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두텁고 운치가 맑고 높으며,귀의할 바를 얻어내외(內外) 빈주(賓主)의 구분을 더욱 잘 알았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는 오로지 옛 전적(典籍)에만 정심하였다. 성현들의 격언을 뽑아내어 손수 차록(箚錄)하여 보고 살피는 자료로 준비하였으며, 송조(宋朝) 현인들의 초상(肖像)을 모사(摹寫)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 숙연하게 대하였는데, 남들이 그의 자득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예법에만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을 아쉽게 여기어, 고례(古禮)를 널리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또 〈주례(酒禮)〉와〈가잠(家箴)〉등의 글을 지어 집에서 시행하였다. 청성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맑은 날에는 단에 올라 먼 산을 감상하고 달뜨는 저녁에는 뱃놀이를 하였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술동이를 열어 회포를 풀다가 이어 시를 읊으면서 초연히읊으며 돌아오는흥취가 있었다.
만년에는 덕이 더욱 높아지고 이름이 더욱 알려져서 수학하는 선비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언제나 흉금을 터놓고 가르쳐주어서 성취한 자가 많았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유자의 기상을 지녔다고 칭찬하였고, 또 맑고 깨끗한 산림의 풍모를 지녔다고 칭찬하였다.
서애 선생이 시에서, “일생의 사업을 논하자면, 백세의 스승이 됨직하다.〔平論一生事, 堪作百世師.〕” 하였고, 학봉 선생이 제문에서,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노닐었으며, 학문에 연원이 있도다.〔早游溪門, 學有淵源.〕”하였다. 아, 3현의 말씀이 한결같구나!
공이 세상을 뜨고 수십 년 뒤에 문인들이 무민재(無悶齋) 서쪽에 묘우(廟宇)를 세워 봄가을로 향사를 올렸는데, 지금의 청성서원(靑城書院)이 그것이다. 지은바 시문 약간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첫째 부인은 광주 안공(廣州安公) 경인(景仁)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진주 유공(晉州柳公) 종인(宗仁)의 딸이다.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로 후사를 이었는데, 곧 행가(行可)이다.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딸은 생원 김시강(金是杠)에게 시집갔다. 행가는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중정(中正)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명시(命時)ㆍ임시(任時)이고, 네 딸은 김형수(金亨壽)ㆍ김수(金燧)ㆍ이상(李翔)ㆍ이보(李簠)에게 각각 시집갔다. 차남 수정(守正)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산림에 고상한 선비 오래도록 없었더니/ 山林高義久寂寞
하늘이 현인을 낳아옥처럼 숨겨 놓았네/ 天爲生賢玉鞰櫝
퇴계를 사사하고 서애와 학봉을 벗하면서 / 師事陶山友厓鶴
냇가에서 어진 은자로 한가롭게 노닐었네/ 考槃在磵碩人軸
고명하게 마음을 수양하여 진락을 누렸고 / 玩心高明饒眞樂
분분한 벼슬길을 헌신짝 버리듯 보았는데 / 俯視紛紛雙屣脫
하늘이 일찍 데려갔으니나라의 불행이네 / 天不憖遺邦運厄
근엄한 사당에 넉넉한 향기가 남아 있으니 / 有儼淸廟留餘馥
영원히 훌륭한 자취는 청성산처럼 우뚝하리라 / 萬古芳躅城山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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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진성 이씨(眞城李氏):
송암집에는 진안 이씨(眞安李氏)로 되어 있다.
[주02] 거의 …… 뻔하였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상을 견뎌내지 못하면, 곧 자애롭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한 데에 비유된다.[不勝喪, 乃比於不慈
不孝.]’ 하였다.
[주03] 귀의할 바를 얻어:
퇴계 선생에게 나아가 배운 것을 뜻한다.
[주04] 내외(內外) 빈주(賓主)의 구분:
《논어》〈옹야(雍也)〉의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밖의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쯤 거기
에 이를 뿐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는 공자의 말에 대해서, 장재(張載)가 해설한 내용 중에 “학
문을 시작하는 요체는, 응당 ‘삼월불위(三月不違)’와 ‘일월지언(日月至焉)’ 중에서 어느 것이 안[內]이 되고 밖[外]이 되며 어느 것
이 객[賓]이 되고 주인[主]이 되는지 그 구별을 알아서, 마음과 뜻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순서대로 따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始學之要, 當知三月不違與日月至焉, 內外賓主之辨, 使心意勉勉循循而不能已.]”라는 말이 나온다.
[주05] 읊으며 돌아오는:
《논어》〈선진〉에,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공자의 물음에 대하여 자기 뜻을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이뤄지거든
관자(冠者) 5ㆍ6인, 동자(童子) 6ㆍ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
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권호문이 세상에 아무런 욕심이
없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기상을 뜻한다.
[주06] 산림에 …… 없었더니:
“선비들은 어지러이 더러운 것을 쫓아가니, 산속의 높은 뜻 오랫동안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儒林紛紛隨溷濁, 山林高義久寂
寞.〕”에서 나온 말이다.《古文眞寶前集 156 七言古風長篇(卷六) 〈陶淵明寫眞圖〉-謝薖》
[주07] 옥처럼 숨겨 놓았네:
자공(子貢)이 일찍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으니,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
고 팔아야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論語 子罕》
[주08] 냇가에서 …… 노닐었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현자의 은거를 찬미하여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현자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
人之寬.]” 하였다. 여기서의 석인(碩人)은 권호문을 가리킨다.
[주09] 하늘이 일찍 데려갔으니:
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는 말인데,《시경》〈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
의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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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松巖先生權公墓碣銘幷序。
公姓權。諱好文。字章仲。號松巖。權之氏於永嘉。自高麗太師諱幸。其卜居府西松坡里。自禮儀判書諱靷始。曾祖諱玠。副司正。祖諱叔均。成均進士。考諱稑。安州敎授。妣眞城李氏。忠武衛諱潛之女。以嘉靖壬辰六月十九日生公。幼穎脫。七八歲。已知讀書。纔弱冠。立雪退陶門下。先生贈詩。有嘐嘐饒氣節之句。又有博約誠明等語以勖之。公於是益自奮勵。築室屋前南山。左右圖書。有以自樂。辛酉。中進士。年已三十矣。先是。己酉遭內艱。至甲子遭外艱。皆廬墓終三年。哀毀幾不勝喪。自是無意於進取。退陶先生貽書勉其早與判斷。遂決意廢擧子業。築精舍于靑城山下。扁其齋曰無悶。囂囂然若將終身。而休聞益播。鄕人屢以學行聞。荐除集慶殿參奉內侍敎官。皆不就。丁亥。感疾彌留。疾革。爲詩謝門徒。謂嗣子行可曰。治喪務儉。碣面只書靑城山人權某之墓可也。七月二十四日。卒于觀物堂。十月日。葬于府西麻甘山丙向原。從先兆也。嗚呼。公天分甚厚。韻致淸高。旣得依歸。益知內外賓主之分。杜門却掃。專精墳典。拈出聖賢格言。隨手箚錄。以備觀省。摹寫宋朝諸賢像。每晨起。肅容對越。人莫窺其自得之淺深焉。嘗病世之泥於禮而不知變通。博採古禮爲一書。又著酒禮及家箴等書。行於家。愛城山山水之勝。或晴日登壇。或月夕叩枻。客至。開罇暢敍。繼以吟詩。超然有詠歸趣味。迨夫晩年。德益尊名益重。從遊之士益衆。輒開襟訓誨。多所成就。退陶先生嘗稱其有儒者氣像。又稱其有蕭灑山林之風。西厓先生詩曰。評論一生事。堪作百世師。鶴峯先生文曰。早遊溪門。學有淵源。噫。三賢之言。其揆一也。公歿後數十年。門人等立廟無悶齋西。春秋俎豆之。卽今靑城書院是也。所著詩文若干卷藏于家。前配廣州安公景仁女。後配晉州柳公宗仁女。無後。以兄子後。卽行可。壬午。司馬順陵參奉。女適生員金是杠。男二。曰中正。二子。命時,任時。四女。金燧,金亨壽,李簠,李翔。曰守正。二子一女。幼。銘曰。
山林高義久寂寞。天爲生賢玉鞰櫝。師事陶山友厓鶴。考槃在澗碩人軸。玩心高明饒眞樂。俯視紛紛雙屣脫。天不憖遺邦運厄。有儼其廟留餘馥。萬古芳躅城山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