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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며 군인이 되었다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군인의 길을 접고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해 마흔여섯 살에 사제품을 받았고, 50세 때 예수회를 설립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 성인은 제자 교육과 많은 저술로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1622년에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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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태오 13,54-58)
Jesus came to his native place
and taught the people in their synagogue.
They were astonished and said,
“Where did this man get
such wisdom and mighty deeds?
Is he not the carpenter’s son?
말씀의 초대
레위기는 파스카 축일 날짜를 법으로 정한다. 그만큼 중요한 축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달 14일 저녁에 시작하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첫째 달을 ‘니산 달’이라고 하였다. 축제가 시작되면 그들은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레위기는 속죄의 날과 초막절에 대해서도 날짜를 정해 주고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하지만 그들은 겉모습에 매달려 그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주님께서도 기적을 베푸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정여립’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된 분입니다.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천 명 이상이 죽거나 귀양 간 조선 시대 최악의 사건입니다. 정여립은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통할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고발되었고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왕위 세습을 반대했습니다. 왕권이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엄청난 진보 사상입니다. 선조는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쳐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이른바 ‘파가저택’의 형벌입니다. 가족과 친척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았다면 모두 색출되어 엄한 문초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유증도 컸습니다. ‘개혁적인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무도 바른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은 그대로 조선 사회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선각자들은 늘 반대를 받습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푸대접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편견을 깨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사람들에게서 반대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형제와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겉모습에 매달려 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마을 한복판에는 시장이 있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면 회당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흰 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가!’ 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가 성공했어도 고향 친구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어릴 때 자신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는데 더 훌륭하게 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친구라도 그의 숨은 능력을 잘 볼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한 까닭에 그 친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을 지니고, 또 어떤 능력은 어려서는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인정하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회당에 들어가시어 말씀을 전하시는 그분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형제들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언제 저런 실력을 쌓았단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다 곧바로 인간적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영적 기회를 잃는 순간입니다.
편견의 어리석음입니다. 고정관념의 해악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신심이 깊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한쪽만 생각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도 때로는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듭니다.
은총은 영적인 모습을 갖출 때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이었기에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이 편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기적을 베풀고 싶어도 참으셨을 것입니다.
편견은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쓰라림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서서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편견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린 지도자도 적지 않습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에게는 대부분 좋은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참모는 지도자의 편견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습니다. 기적을 방해할 만큼 두려운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1코린 13,7 참조).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새벽을 열며
제 동창신부 중의 한명이 어느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 신부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어떤 교우가 홍탁(洪濁)을 가져온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제나처럼 하나를 집어 먹고서는 “와~~ 너무 맛있어요.”를 반복하여 말하면서 홍탁을 드셨다고 합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심한 냄새를 내는 이 홍탁을 좋아하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본당신부가 왔다고 홍탁을 들고 오신 교우의 성의에 감사해서 정말로 좋아하는 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부님께서 어느 집을 가든지 항상 눈앞에는 홍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홍탁을 갖다 주어서 홍탁 처리하는데 참으로 힘들었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신부님께서는 어디를 가든 맛있다는 소리를 안 한다고 합니다.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싫어하는 음식을 그 본당에 있는 동안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사실 좋아하는 음식도 계속 먹다보면 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본당의 교우들에게는 하나의 편견이 생겼지요.
‘신부님은 홍탁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아마 이렇게 간단한 명제는 이렇게까지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신부님은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오로지 홍탁만 먹는다.’
그 본당신자들은 신부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신부님을 더욱 더 힘들게 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대한 고향사람들의 편견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같은 동네 살았던 목수의 아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마저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폄하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각종 편견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편견은 지금의 내 행동을 항상 최선의 방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편견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최악의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셨고, 그 기준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만약 세상의 편견을 가지고 제자들을 뽑으셨다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만나는 나의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눈인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편견이 사라지는 곳에 주님의 기적도 있습니다.
편견을 버리세요.
빠다킹신부
존중
-임문철 신부-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만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당 부근에 늘 차가 막히는데, 기사가 다른 길로 돌아가길래 “다른 길로
가려면 한마디 해주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꽤나 공손하게 지적했다고 했는데, 그 택시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막힌 걸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때 내려달라지 않고 왜 이제 이야기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다른 상황에서 더 싸울 수도 없고, ‘손님이 그 정도 말도 못하느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라’ 하고 내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저 당연한 내 권리를 상기시킨 것뿐인데, 고약한 기사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로만 칼라까지 하고
있었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택시 기사와 말다툼이나 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다. 이런 저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니, 늘 인정받고
대접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자들과 회의를 할 때,
저와 의견이 다를 때는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신부인 제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는 쉽게 화가 나곤 합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좀 더 너그러웠다면
택시 기사에게 어쭙잖은 훈계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막힐 땐 참 짜증나시죠?” 하고 먼저 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숨겨진 시간 속의 영적 여행
-이인주 신부-
사람들은 가끔 잠적 내지 잠수를 한다. 이유가 뭘까? 영원한 시간의 신비를 알고자 함이고, 영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설산이나 밀림, 우주를 여행한 사람은 그 안에 자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느낌이 바로 영적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분의 숨겨진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의 영역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이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사람이 지혜를 어떻게 얻었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랄 때 예수는 저런 위인이 아니었는데.’ 하며 부정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아 예수님은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성장과정에서 신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이 더 예수님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에겐 다 때가 있다. 예수님도 홀연 자신의 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서른이 되어 나자렛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나자렛에 들렀는데 그때는 이미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과거의 행적만 보고 단언을 하는 것일까?
내 이야기를 해보자. 초중학교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은 “뭐? 그가 신부가 됐다고?”, “야! 서천 소가 웃겠다.”라고 할 것이다. 초중학교 시절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 영적 삶의 과정을 헤아린다면 과거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 또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뭐 대수인가? 예수님은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들에겐 조금의 흔적만 남기고 떠나신다. 그렇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지금보다 한 단계 그분께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며, 영적인 삶에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아는 게 병이다
-서현승 신부-
복음에서 묘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놀랐으면서도, 그분의 출신을 알아내고는 못마땅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가정이 동네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유별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역시 어렸을 적부터 신동이었다거나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민초 출신인 나로서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그렇게 동네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진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을 보면서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는 게 병입니다. 우리 말에도 ‘사람은 열 번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정 지음, 생활성서사)
라는 책 서문에서 인용하는 어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죄를 짓고 수감 중인 아들을 찾아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알았으면 좋겠다며 끝까지 아들을 믿어주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결국 아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뿐더러 실제로 구원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
- 장용진 신부 -
저희 성당 앞에는 1.5톤 트럭을 가게삼아 여러 가지 과일을 파시는 분이 계십니다. 소규모로 하시는 일이다 보니 그 과일들의 상품 정도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맛있지도 않은 과일을 맛있다며 판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상인으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개신교 신자로서 그 교회에서 집사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상인으로서는 별로였지만 교인으로서는 본받을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없는 과일을 몇 번 맛있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과일이야 이것이 맛있으면 저것은 맛없을 수도 있고, 자신이 먹어 본 것은 맛있지만 남이 먹은 것은 맛없는 것일 수도 있기에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주일을 지킨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로서 그런지 맛없는 과일을 파는 것 같은데도 여지껏 장사를 계속 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우리 성당 앞의 그 개신교 신자 장사꾼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과일 장사를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주일에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거룩한 모임을 하라는 계명을 알기라도 하는지 아주 굳굳하게(!) 주일에 장사를 계속 하십니다. 그러다 가끔 주일 미사에 빠지시기도 합니다.
이런 천주교 신자의 주일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분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하루라도 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들이 가진 생각, 신념, 믿음 때문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계절에 따른 야훼 하느님의 축제일과 거룩한 모임을 하는 날에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함을 알려줍니다.
이 두 이야기를 오늘 현실에서 보게 되는 두 과일 장사에게 적용한다면 전자인 개신교 신자 과일 장사는 그 믿음과 행동이 후자인 천주교 신자 과일 장사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개신교 신자의 경우엔 제1독서의 말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의식주의 해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루가 복음 12장 31절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걱정하며 휴식도 없이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박혜원-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곳이다. 고향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벗은 몸으로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은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음행한 여자를 치려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했을 때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또한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은폐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어둔 역사에 동참하는 공범자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명성이 통하지 않는 고향에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 속에 예수님도 함께 몰아넣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고와 지식 안에서 예수님을 인식하려 했다. 그리고 자기의 범주 안에 예수님을 넣으려 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이것이 우리 인간 인식의 한계다.
「묵자」 공수(公輸) 편에 보면 묵자가 초나라의 침략을 저지했음에도 송나라 문지기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대했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믿을 것이 못 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인정받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진정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기적 속에 살면서도 기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 이영훈 신부 -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꽃다발 대신 푸대접의 원인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방문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6)을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장황한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고향을 떠나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 전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한 지 3년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도 했다.(마르 3,21) 한번은 예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러가야 했었다.
오늘 고향을 방문한 예수님께 나자렛 사람들이 준비한 것은 축하의 꽃다발이 아니라 푸대접과 불신(不信)이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지만 그 놀라움은 예수께 대한 불신과 거부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인격을 서로 떼어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수께서 지니신 지혜와 능력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것을 예수라는 인물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는 그들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요, 그들과 같은 범인(凡人)이라는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한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초적으로는 사람 안에 들어 있었던, 사람의 주관적인 인격이 일구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물을 배제한 그분의 객관적인 가르침과 업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과 인격, 즉 예수님 전체를 믿는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폰소 성인의 설교를 들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성인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알폰소 성인이 자신의 삶으로 가르침을 보여주었듯이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상지종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 사람의 직업을 압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사람에게 속한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고 정작 그 사람 자신만이 남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상대방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과연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껍데기들을 바라 보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편한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얻어진 상대방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잦은 만남을 갖는 사람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미워하며, 자기 식대로 믿고 자기 식대로 불신합니다.
만남이란 관계맺음입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참된 관계라면, 믿음의 관계라면 만남의 당사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만남의 또 다른 당사자인 또 하나의 나와 남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틀을 고집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면,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알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 자신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벗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생각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보고 그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앎이라는 두꺼운 틀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 안에, 내 관념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자유로워진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저 사람이 어디서?>(13,54-58)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대개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 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가짜 소금
-홍성남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진짜가
아닌 가짜 소금들이 많습니다. 가짜 소금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삶의 실제보다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에 의지합니다. 이것은 상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들은 내담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이론에 근거해 내담자를 파악하고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지나치다 보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상담자가 지나치게 이론에 의존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냥 지나치기 쉽고 자기 기만적이고 섣부른 이해를 환자에게 강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새롭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롭게 성장한다는 진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얇팎한 지식으로만 모든 걸 바라보고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돌아봅시다.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 이정석 신부-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양승국신부- <더 이상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형제들과 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수도공동체 청빈생활에 대해 점검하면서, 저희 살레시안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돈보스코의 말씀들을 묵상해보았습니다. 돈보스코는 평생 얼마나 청빈하게 사셨는지, 그리고 몸소 실천한 청빈생활을 얼마나 자주 형제들에게 강조했었는지, 가끔씩 회원들 사이에서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 이렇게 먹고 어떻게 견뎌내겠어?’하는 불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하신 돈보스코의 몇 가지 권고들입니다. “한가함이나 논쟁을 피하고, 음식이나 음료 및 침실을 극히 간소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들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오히려 크나큰 영예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로 제대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것일까요?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것일까요?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것일까요? 부족함이나 불편함 하나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일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춥고 배고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늘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전하고, 아쉽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권력자들이나 세력가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 예언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이신 세례자 요한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청빈하고 당당한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세례자 요한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보다 잘 갖춰지고 안락한 곳으로, 보다 빛깔 좋은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기를 썼습니다만,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패 권력 앞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다가 순교당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반하는 일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용기의 바탕에는 그 무엇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도(正道)만을 추구했던 삶이 있었습니다. 청빈하고 티 없이 깨끗한 삶이 있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때로 고독하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실한 구도자의 길은 언제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 쓸쓸함, 그 고독함, 그 외로움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쓸쓸하지도,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기 인연에 가두지 마라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쉽게 깨우치신 다음
고향에 가십니다.
왜 고향에 가셨을까요?
지나는 길에 그저 들리신 것인가?
그리워서 일부러 가신 것일까?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신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만일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셨다면 그 똑똑하신 주님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심리를 모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님들에게 나이를 묻고 과거를 묻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고
수녀님들에게도 이런 점은 비슷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연,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자기와의 인연에
다른 사람을 가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라는 인연에 아들을 가두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코 흘리던 초등학교 때 인연에 친구를 가두어
친구의 놀라운 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인연에
성공한 고향 사람의 운신을 곤란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가 위인 성직자를 만나면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그러다 어찌 나이 얘기를 하다가 동갑임을 알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성직자로 대하던 사람이 그때부터
동갑네기로 대하려는 기류가 역력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일도
자기 인연에 가두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자기 인연에 가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예외는 아니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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