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반갑습니다.
이처럼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뿌리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 선배님같은 분이 글발을 유지해 오신 덕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십시요.
그러나 되도록이면 회원들의 작품은 자료실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면 운영자께서 정회원으로 정정을 해야 될 겁니다.
운영자님! 여기 최선배님은 저명하신 분이니기도 하지만 자존심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얼른 정회원으로 정정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지리가 보증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선배님 저희들 잘하고 있습니다.
격려해 주십시요.
사문안천은 원래 사행(蛇行)으로 흘렀다. 감돌아 휘돌며 흐르는 곳곳엔 선녀탕을 연상할 만큼 맑고 깊은 곳도 많았고, 그 연초록의 물 속엔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붕어떼가 노닐었다. 개울 양안(兩岸)에는 억새와 버들개지가 무성했고 한여름엔 어린아이 주먹만한 멍석딸기가 지천이어서 먹거리가 궁했던 그때 우리들에겐 감로(甘露)와 같은 자연식이 돼 주었다.
세탁기 씽크대가 없었던 시절, 개울가에는 아낙들이 하얗게 모여 수세미로 놋그릇을 닦고 아기기저귀를 흔들어 빨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개헤엄조차 못치는 젖을 겨우 땐 어린아이들은 빨래하는 엄마 곁에서 물장구를 치며 까르륵거렸다. 대교천(大橋川)과 합류되는 곳쯤에서는 사문안천에서 떠내려오는 음식찌꺼기와 샛노란 아기 똥을 받아먹으려고 피라미들이 은린(銀鱗)을 번쩍대며 몰려들었고, 종다래끼를 허리에 찬 얼레낚시꾼들은 이들을 연신 건져 올렸다.
지금 동주빌라와 소방파출소가 있는 곳에는 고만고만한 연못이 있었다. 동주빌라 쪽 연못 가장자리에는 사문안천이 스며 다시 솟는 샘(이 샘은 복개 전까지도 있었음)이 있어 중학 다닐 때 오가며 목을 축였고, 그 쌍둥이 연못에는 부들, 연밥 등 수초가 무성했고 방게, 물매암, 장구벌레 같은 수중곤충과 붕어 메기 등도 꽤 있었다. 어른 주먹만한 참개구리가 인기척에 놀라 퐁당거리며 뛰어들던 연못은 "나는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어쩌고 하던 동시 속의 연못과 꼭 닮은 곳이었다.
연못주변에는 인가가 별로 없었고 키를 솟는 쑥대와 제비꽃 엉겅퀴 아기똥풀 등이 군락을 이루었고, 고만고만한 바위와 언덕이 있어 어린 우리들이 전쟁놀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휴전뒤끝이라 흔하게 널려있던 대포 장약과 소총실탄들을 쌓아 불지르고 은폐 엄폐를 하며 목총을 들고 공격과 방어를 그럴듯하게 연출하던 멋진 각개전투장(?)이었다.
중학시절 장마뒤끝의 사문안천은 제법 격랑이었다. 그때 학교 교사(校舍)복도에는 마루가 아닌 나왕으로 만든 교잣상 크기의 발판들이 있었는데 청소 때 그 발판들은 뗏목이 되기도 했고, 래프팅의 탈것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우리 설익은 '뗏목꾼' 아니 '래프팅 선수'들은 포병대가 자리잡고 있던 상류에서 그 발판들을 줄레줄레 엮어 타고 내려오며 희희낙락했고 중심을 못 잡고 우줄거리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물 속에 처박혀, 더구나 흠뻑 물에 젖은 까만 교복의 모습이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어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뗏목놀이 아니 래프팅을 두어 번 즐기다 보면 흙먼지 투성이던 발판들은 저절로 닦여졌다.
소달구지가 지금의 1톤 트럭쯤 되던 그 시절엔 철공소가 성업 중이었고, 소달구지 바퀴에 쇠테를 씌우던 작업이 사문안천 공터에서 벌어지곤 했는데, 쇠테를 달구던 숯불은 갈치나 꽁치 토막을 구울 때 요긴한 연료여서 쇠테를 꺼내기가 무섭게 부삽을 든 주변사람들이 몰려 서로 한 삽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아귀다툼을 하기도 했다.
집을 중학교 뒤로 옮긴 후 초여름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고 새벽녘 창 틈으로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훈에 취해 몽유병환자처럼 세면도구를 챙겨들고 포병대 위병소 건너편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물봉선이 함초롬이 핀 샘터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그 시원하고 맑은 물을 배가 팅팅하도록 마시고 머리감고 양치질까지 하곤 흥얼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그 빨려들 것 같은 아카시아 향기 또 연초록의 맑은 물…. 새벽마다 나는 그곳을 찾으며 극락이, 무릉도원이 따로 없고 바로 여기가 그곳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그렇게 사문안천을 사랑했고, 금학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쉬임 없이 흘러가고 산천이 몇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살이도 많이 바뀌어 빨래방망이를 두들겨대던 아낙들이 하나 둘 세탁기 씽크대를 마련하고 소달구지가 포터 트럭으로 바뀔 즈음부터 자연은 우리에게 그 반대급부로 오염을 선사했다. 명경(明鏡)같던 사문안천은 하류부터 하이타이 퐁퐁 때문에 거품을 쏟아내고 피라미의 진수성찬이 되던 아기 똥 대신 정화되지 않은 똥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장마가 진 다음 겨우 며칠동안만 피라미가 역류해 올라올 정도로 맑아지다가 며칠 지나면 다시 오염되곤 했다.
그 무렵부터 사문안천을 복개해 주차공간과 우회도로로 이용하자는 그럴듯한 개발논리가 대두되더니 얼마 후 그 아름다웠던 사문안천은 피라미가 모여들던 대교천 합수머리께부터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연차적으로 불가살(不可殺)같은 시커먼 복개의 아가리는 중앙농조를 거쳐 노수교까지 올라갔고 지금의 소방파출소 '동팔네'까지 올라오더니 한동안 중단 되길래 그 반 토막 상류만이라도 남기려나보다 자위했는데 또 반의 반토막이 복개되고 올 봄엔 아주 그 포병대위병소 턱주가리까지 꽁꽁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무릉도원 극락은 사라지고 말았다. 물봉선은 포크레인 삽날에 무참히 파묻혀 버리고 학동(學童)시절의 뗏목놀이, 래프팅의 추억조차 회색 콘크리트 캄캄한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 칠흑 같은 사문안천엔 무슨 목숨붙이들이 살고 있을까.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달린 심연(深淵)의 동굴에 산다는 눈 퇴화되고 허여멀건한 새우나 도룡용 붙이들이 살고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똥덩이가 구르고 연신 하이타이 퐁퐁의 게거품이 흐르는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을 뿐이다.
머 언 먼 후대 어떤 용감한 환경론자나, 아니면 그 맑고 맑은 사문안천을 기억하고 있는 철원 토종의 사람들이 회색의 암울한 복개천을 뜯어내고 다시 버들붕어가 자라고 피라미가 역류해 올라오는 연초록의 사문안천을 복원해 낼까. 꽁꽁 묻혀버린 사행(蛇行)의 사문안천, 양광(陽光)이 내리비치는 그 파아란 사문안천의 꿈속에서라도 복원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