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오래살기를 원하거든 중용의 길을 걸어라”고 했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중용의 길을 배우고 걸어가야 한다. 중용의 덕은 진리의 가르침으로 변하지 않으며 삶의 핵심적인 지침으로 공자는 덕들 중에서 으뜸이라고 까지 하였다.
중용은 매우 평범한 일상(日常)에서 주로 빛을 발하는데, 진리는 바로 이처럼 주로 평범한 곳에 평이(平易)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무슨 별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용은 무슨 일이나 극단에 흐르지 않고 과격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적정(適正)한 상태이다. 중용은 오랜 동안 사람들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섭리(攝理)안에 있는 것이다. 극단과 과격을 피하고 적정한 중용의 행동을 하려면 언제나 총명한 이성의 판단과 지혜가 필요하다. 밝은 이성과 지혜가 없이는 중용의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 때 그 자리에 그 경우에 꼭 맞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자도 70세에 이르러서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관련해서 많은 선조님들은 견문수(見聞修)를 매우 강조하였다. 특히 백강 이경여 선생은 바로 학문이 견문수에서 출발한다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이 학문을 배우려는 것은 모든 것을 많이 듣고 널리 물어 견문을 넓히는데 있으며 또한 의아한 것을 저버리지 않고 익히려는데 그 고귀함이 있는 것이니, 이로써 그 배움이 높이 오르고자 함에는 이를 먼저 기약함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학문하는 한평생의 길은 천 가지 길과 만 가지 수레바퀴가 있으나 그 궁극의 결과는 하나로 돌아오는 법이니, 반드시 먼저 뭇사람들의 인심을 옳게 파악해서 위험한 길에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 나가야 한다.
* 이 詩는 문정공 백강 이경여 선생(당시 우의정)이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가 청나라 사형수 감옥인 남관(南舘)에 구속되어 있을 때 지은 詩이다.
우리는 몸의 눈과 마음의 눈을 가지고 많은 고전의 책들을 읽고 세상을 널리 보아야한다. 그래야 편견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귀를 가지고 많은 것을 널리 들어야 한다. 특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역사의 소리, 자연과 하늘의 소리, 성현(聖賢)들이 남기신 진리의 말씀들을 경청(傾聽)하여야한다. 나아가 우리는 마음과 인격을 갈고 닦아가야 한다. 그래야 만 공정하고 차원 높은 눈이 뜨이고 지혜의 길이 열린다, 견문수를 많이 쌓아야만 중용의 덕이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과 품성을 닮아 가도록 배워 나가는 것이 바로 천국(天國)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말씀하였다.
성경에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evil)에서 떠나게 하라” (잠언 4:27) 하며 중용의 덕으로 악을 떠나 의로운(righteous) 길로 나갈 것을 말씀하였다. 예수그리스도는 스스로를 가리켜 온유(gentle)하고 겸손(humble)하다고 하며, 자기를 따라 살아가면 마음이 평안케 되고 세상의 짐이 가볍게 된다고 하며 그를 따라 배울 것을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온유는 “넘치기 쉬운 힘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말하며 겸손은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위에 두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들 말씀 모두가 바로 중용의 덕을 배우고 실천하는 지름길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