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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주화운동공제회 준비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노지심
지난 20년간 마음 고생 많이 했다.
84년 대학 졸업하고 부천 단칸방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여동생 셋이서 자취를 했다. 어머니는 부산서 먹고자고 식당 주방,둘째 동생은 대구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자취,큰 여동생 서울서 혼자 자취. 하여튼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우리 가족이 살 때다. 나중에는 부천 단칸 방에 모두 합쳤다. 엄마가 합치기 전 일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될 줄 알았는데, 지방 따라지 대학 나와서 성적도 나쁘지 빽도 없지 돈도 없지 취직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웠다.
월세 방에 월세도 밀렸고,쌀 한 말 외상 가져 온지도 보름이나 되었는데, 쌀이 또 떨어졌다. 반찬은 없는게 당연하고, 어떻게 찌게나 국을 끓이면 그게 반찬이 다다. 밥이랑 먹으면 후한 식사이다. 하지만 쌀이 없으니
아버지 내보고 외상 가져오라고 이야기 하시고, 새벽 학원 강의 나가신다. 새벽 4시반이다. 밤늦게 까지 에이에프케이엔 귀꼽고 들어시더니 언제 일어나셔서 새벽 강의에 나가시나?
학원비는 몇 달째 못 받고 계신다. 한 시간에 1명 내지는 2명을 가르치신다. 정말 돈이 안된다. 그래도 묵묵이 몇 년째 하시는 일이다.
학교 수업이라곤 초등 몇 개월,중학교 몇 개월 그 것이 다인 아버지께서는 독학으로 영어,일어,중국어는 능통하시고,독어,불어 까지 독학하셨다.
대학 교육을 제대로만 받으셨다면 아마 학자가 되실 분이시다.
나의 선산 고향에서도 소문이 났다. 은식이는 천재다. 밤새껏 영어 사전을 전체를 펜촉으로 다 뺏겨서 한 권의 영어 사전을 만드신 분이다. 영어 사전 살 돈이 없으니까. 독학으로 대학 공부까지 끝내셨다. 6.25때 보통고시 되고도 전장으로 가셔서 늙은 상사가 될 때까지 군에 계셨다.
작은 아버지 그 만든 영어 사전으로 고등학교까지 사용하셨단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가게 집 아저씨한테 쌀 한 말을 달라고 부탁한다. 아저씨 아무 말 없이 외상을 주신다. 무척 고마왔다.
대학을 졸업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졸업 하던 해 까지 치면 3년이나 지난 것이다. 원서는 100군데도 넘게 넣었다. 면접도 대엇 군데 보았다. 빽도 썼다. 꼭 해 줄 것 같은 곳도 오란 소식이 없다. 빽이 돈 안쓴 빽이라서 부도가 났나.
데모 한 것으로 설마 취직까지 못하게 막지는 안하겠지? 난 정부를 꿀떡 같이 믿었다.
하지만 삼미특수강이란 국가 기간 업체는 안 되나 보다..빽다운 빽을 썼었는데...대포도 만들고,땡크도 만드는 회사라서,,, 빨갱이에 가까운 친구는 절대 안 되나 보다..빨갱이가 뭔지 난 모르지만
당숙모는 날 빨갱이 김대중이 돈 먹고 데모 하다 다쳤단다. 뺄갱이 공작금 받아먹고 데모했데?
다쳐서 죽을 뻔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빨갱이란 누명도 써니까 참 허탈하다.그것도 남도 아닌 5촌 당숙모가 그러니까.. 그런 빨갱이 데모를 했기 때문에 우리 집안 망구었다고 한 탄을 했다. 내가 자기 집안에 해꾸지 한 것도 없는데, 집 안 구석 구석 다니면서 날 욕하면서 다녔다. 아버진 어떻게 아무런 항의도 못하신다.
약점이 있나? 너무 호인이다... 요즈음 살아서 딸 놓고 살고 있는 것도 얼마나 복이고? 난 요즈음 정말 행복하다.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날 닮은 두 딸...그 것으로 난 억만금을 얻은 것 보다 더 행복하다.
난 눈에서 피눈물이 났지만, 돈 없고,빽 없고,뗏거리가 없는 우리 집안 사정상 누구에게 항명할 만한 여유는 더우기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한 참......... 아버진 내가 아버지 어깨를 좀 들어 주실 것을 바라셨나보다. 참 허탈하다. 아버지께서도 짜증도 나고 인내에 한계를 드러내신 것 같았다. 참을성이 많고 호인인 아버지께서 한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인내에 한계가 온 것이다. 나는 대뜸 아버지께 달라 들었다. 항명이다. 하마터면 아버지께 라디오를 집어 던질 뻔 했다.
나도 모든게 싫을 때여서 그런가 보다. 아버지 나를 키우시면서 평생 매 한 번 때리시질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 맞아 본 적이 없다, 세 명의 여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년들이!"하는 욕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속을 뒤집어 놓아도 욕 한 번 한 적이 없다. 최고의 욕이라고 한다면 " 이 여자가!"이다. 정말 허패 뒤집어 지는 사건이 생기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첨으로 담배를 배웠다 . 한 숨을 쉬기가 역겨워 나는 만화방에서 담배를 피웠다. 맨 한 숨은 쉬기 싫었다. 담배 연기를 내 뿜는 한숨.............................
젊은 25살 청년의 한숨
여동생이 건네 준 용돈이 있으면, 가차없이 만화방으로 쫓아갔다. 만화방에서 한 숨 대신에 처음 배운 담배를 애써 열심히 피웠다.
한 편은 신촌 여동생 자취방에 갔다가 이화여대 전철역에서 뛰어 내릴려고 작정 한 적 있었다. 하지만 맨 정신으로 절대 실행하지를 못했다. 그 때 우연히 연대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박재원,차한빈,박경융이다.
자식들 연세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참 부러웠다.
친구 공중보건의 보건소에 6개월이나 얹혀 있었다. 참 좋은 친구다. 싫다. 귀챦다 소리 한 번 안했다. 놈팽이가 된 지 만 3년.........
대구 작은집에 년 말에 제사 지내러 갔다. 1월1일이다. 영남대 법대 졸업하고 삼성에 취직한 육촌형과 형수를 만났다. 형님 나에게 물었다. "병도야 네 요즈음 뭐 하노?" "예, 저 요즈음 작년에 하던 것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뭐 했는데?" "예 작년에 놀았심더." "그라만 이 것 함 해봐라" "뭔데요?" "니 영등포 중학교에서 공인중개사 시험 봤제? "예" "부동산 함 해 봐라. 같이 있던 직원은 한 방에 6천만원 벌어가지고 사무실 떴다. "예? 6천만원"
놀랄 노자다. 뭐인데 한 건에 6천만원을 벌어가냐? 난 6천만원이 아니고 1백만원만 벌고 때려 치우고 고시공부나 계속할란다. 안되면 낮쳐서 검찰직 시험이라도 봐서 가야지..
86년 당시 6천만원이면 요즈음 6억하고 맞먹는다. 그렇게 3개월만 할라고 작정했다. 딱 3개월.................
나는 두 말 안하고 뛰어들었다. 딱 3개월만 하자. 돈 얼마 벌면 그것 가지고 고시 공부해서 꼭 고시 합격해 가지고 남은 평생을 편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아보자.
그 3개월이 20년을 하였다.
나를 소개한 육촌형은 현재 빚이 약 20억이다. 부동산 주위는 항상 한 방을 노리는 자가 많다. 그 한 방이 사람들을 병신 만들고,폐인을 만들어 버린다.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 가정 파괴되고, 호래비 된 부동산 선배들을 난 많이 봤다. 그래도 육촌형은 아직 호래비가 안되었다. 형수가 너무 착하다. 아버지 즉 당숙 아파트 팔은 돈,동생들 퇴직금, 동생이 은행서 보증서서 준 돈, 친구 미국 유학가면서 집 판돈 등 등 정말 한 푼도 날려서는 안되는 그런 돈을 홀랑 다 날리고 월세 집에서 연명하고 있다.
20년이 되었는데 못 갚아 주고 있다. 주위를 싹 말아 먹어 버렸다.
형수가 간호사 생활로 연명을 한다. 86년 당시 육촌형이 소개해서 같이 부동산 한 사장의 이력은 또 화려했다.
86년 당시 부동산 사무실에 근무할 때 사장이 기소중지자였다. 사기 전과 몇 범
육촌 형과 같은 동료는 땅 사기에 걸려서 고생 고생 했다. 사장 집까지 수소문해서 찾아 가 봤더니 , 오지 산 꼭대기 동네 지하 단칸방........ 뗏거리도 없이 식솔을 버려 놓고 다닌다.
자기의 행색은 최고급 양복에 기사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기사 월급도 못 받았고,차도 계약금 조금 주고 온 차. 모든게 깡통이다.
형님 몇 개월 고생했다. 노주현보다 더 잘 생긴 얼굴이 갑자기 기미가 끼였다.
난 그래도 당사자가 아니니까 마음고생 없이 이 부동산 저 부동산 잘도 전전했다. 가는 곳 마다 사기꾼 같아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다. 삼촌 친구가 있는 사무실로 갔다. 여기도 범의 소굴인 줄 모르고........
땅 계약을 첨 했다.커미션을 받았다. 60만원
그 돈으로 난 부천 남부 시장을 찾았다, 닭 2마리와 감자 그리고 큰 솥에 하나 가득 닭도리탕을 했다.내일까지 먹어야지
하지만 그 날 저녁 동이 났다. 아버지,나,여동생 세명이 살 때다.어머니는 먹고 자고 식당에 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밥,빨래는 모든 내 차지다. 아버지께서 내복을 한 달씩 입고 벗어놓고, 팬티도 우린 즉 아버지와 나, 한 달씩 입었다. 빨래 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혼자 계실 때 빨래가 하기 싫어서 그랬나 보다. 내가 있으니 챙겨 드려야 되는데, 난 식사는 준비하지만 요리는 정말 잘한다. 입 맛에 쩍쩍 들어 맞는다. 여동생들 전부 젓가락만 들고 오빠가 요리 해 주기를 기다린다. 오빠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란다. 하지만 빨래는 정말 하기 싫었다.
세탁기가 어디 있나? 손 빨래인데
막내 여동생 대구서 부천여중으로 전학 시켰다. 아침 매일 굶고 가고, 먹는게 시원챦아서 병이 생겼나 보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갈려고, 일어나서 문밖을 나가다가 부엌 바닥으로 내동이 쳐졌다. 정신을 잃었다. 병원은 못가고 주인집 할머니에게 침을 맞았다. 정신을 차렸다.
그 때 이후로 동생은 병원은 안 갔다. 병원 갈 돈이 없다. 우리 같은 사람은 병나면, 그 때 당시는 그렇게 방에 누워있다 저절로 나으면 일어나고, 죽을 중병이면 그냥 죽는 시절이었나 보다.
주위 가족은 그냥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끝이다.
아버지,나,세 명의 여동생이 같이 한 방을 쓸 때, 큰 동생이 양념 치킨을 한 마리 사 왔다. 서로 먹을려고 난리를 쳤다. 쇠젓가락을 입에 꼿고 양념치킨으로 달려 드는 중학생 막내 여동생을 난 뒤로 밀치는 바람에 쇠젓가락이 목젓을 꽤 뚫었나 보다. 1주일 동안 아파서 밥도 먹지 못했다.
삼촌 친구 부동산 사무실, 몇 달이 지나자 첫 손님에게 소개해 주어서 사준 발안 지역 땅이 즉 상업지,주거지 된다는 도면이 김부장이 그린 가짜 도면이었다고, 김부장 즉 삼촌 친구가 직접 도면에다가 진짜 같이 그려서 사진을 찍어서 도면을 만든 것이라고, 직원 동료들이 수근 대었다. 삼촌 친구다. 고향 사람이라고 찾아간 곳인데........... 앞이 캄캄하다. 감방에 갈 지도 모른다. 정말 좋은 손님을 만났다. 그 손님 가짜 도면이란 것을 알지만 날 용서 해 주었다. 그리고도 오랫동안 만났다.
육촌형과 여러 동료들 몽땅 그 사무실을 그만 두었다.
내 말만 믿고 산 손님에게 뭐라고 그래야 되나? 아직 그 땅 19년이 되었는데 못팔고 있다.투자 손익이 안 나온다.
내가 이 때까지 사 준 땅은 20년 가까이 하나도 팔아 준 게 없다.
부동산이 이게 현실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 안될거야, 지방 땅은 거의 사기 맞는다고 보면 정확하다. 특히 개발지.상업지,주거지 된다는 땅은 거의다가 이익금을 부동산 중개업자가 다 챙긴다.
땅 원금의 2배내지는 3배를 챙긴다. 양심 없는 부동산 중개업자는 10배를 챙긴다.
난 93년 정말 친한 친구에게 땅을 사주었다. 사무실에서 하는 이야기가 상업지,주거지 되는 땅이다. 3만원이상 인정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4만원,5만원씩 팔아서 이익금을 챙겼지만 ,난 친구기 때문에 사장에게 사정했다.깍았다.2만7천원씩 사 주었다, 쉽게 말해서 안 먹고 사 주었다.
96년 이 친구는 나에게 전화 왔다. 사기꾼이라고 나를 호도했다.왜 그러니? 야이 이 사기꾼아 소새끼 ,말새끼 할 수 있는 욕은 다 했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 부답이다. 평당 1천원도 안되는 땅을 2만7천원에 팔았단다. 날 죽일려고 했다. 난 설득했다. 임야는 원래 공시지가가 낮다. 원래 시세와 공시지가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설명해도 들을려고 하질 않았다.원래 지방땅은 그 당시 공시지가 현실화 하기 전이라서 공시지가와 현시가는 심한 경우 몇 십배 차이 났다.
그 친구는 대전에 사는데 그 외 친한 친구가 있다. 다른 친구 둘을 더 불렀다. 나와 입회를 시켜 놓고 나를 비참하게 묵사발 내었다. 그래도 난 큰 죄를 지은양 아뭇 소리도 못했다. 난 죽일 놈인가 보다. 다른 친구가 옆에서 "너 왜 그런 나쁜 짓을 했니? 더우기 친구한테.."난 그냥 묵묵부답이었다.. 진짜 주거지,된다카던데............
그 친구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차용증을 받았다 . 자기가 싼 땅값을 나에게 차용증을 써 내란다. 그리고 이자까지 계산해 내란다. 난 아뭇 소리 안 하고 차용증을 써 주었다. 그리고 기어 들어 가는 소리로 "그라만 땅은 내한테 등기 넘겨 주나? " 이 친구 왈 "돈은 돈대로 나에게 갚고, 땅은 자기 아들에게 상속해 준다"란다. 그래? 난 그래도 아뭇 소리 안 했다. 차용증을 써 주면 그러면 땅은 나에게 넘겨 주는 것이 맞지 않나? 막무가내다.
땅은 자기 아들에게 먼 훗날 넘겨준단다. 그리고 나에게만 차용증만 받아갔다.
설마 저 친구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하지는 않겠지. 난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 중풍을 4번째 맞았다 . 이 번에는 심하게 맞았다. 중풍을 맞은 지, 4년여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가질 못했다.
내 마누라는 심한 우울증에서 헤어 나질 못했다. 특히 시집 컴플렉스로 인한 우울증
1년에 2번도 부천 아버지에게 가질 못했다. 다행히 돌아가시기 전 1년 동안 중, 몇 개월간 난 혼자서 부천에서 강남 수서지구에 출퇴근하였다.
마누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개포동 월세아파트를 뺐다. 몇개월 월세가 밀리고, 마누라 병원비도 대어야 하고,부천 엄마 식당으로 짐을 구겨 넣었다
큰 딸넴이는 부천에서 학교를 보낼려니 너무 위험했다. 대형 차가 씽씽 다니는 큰 도로를 건너야 했다.처갓집에서 데리고 오란다. 큰 딸만 평촌에서 초등학교 2년에 전학시켰다. 작은 딸은 부천에 난 부천서 출퇴근했다. 처음으로 아버지랑 둘이 있었다. 밤 늦게 부천 집에 오면 그 때서야 얼큰한 쇠고기 국을 끓였다. 아버지 이 것 3일은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갔을 때는 다 드셨다. 하여튼 식사는 정말 잘 하셨다.단 얼마라도 아버지께 식사 대접을 한 것이 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가까이 한 것이 다이다.정말 죄스럽다. 항상 꿈에서도 사죄를 드린다.효도를 하지 못한 것을 .........
처갓집에서는 날 미워 죽을려고 한다. 멀쩡한 딸 자식 , 못사는 집에 시집 보내어서 조졌다고 분해서 난리다.
아버지 서울대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모셨다. 내가 근무하는 부동산 상가에서 상가 총무를 했다. 30만원의 수당을 받아 먹었다. 그 먹은 죄로 상가 방화관리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안 받으면 벌금300만원을 맞는다고? 방화관리자 교육받을 때이다. 첫 쨋 날 삐삐가 울렸다. 전화 했더니 막내 동생 울고 불고 난리 났다. 아버지 가망 없단다.부리나케 부천 제일 병원에 쫓아갔다. 작은 병원에서 수술 안 되니까, 서울대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머리에 압력제거 구멍을 뚫고 생명은 건져셨다. 의식이 있었다. 아버지 수술 받기 원하시냐고 물으시니까 오른 손을 위로 버쩍 치켜드셨다. 수술을 받아서라도 살고 싶어셨다. 난 믿고 그 다음날 방화관리자 교육 받으러 갔다.
밤에 병원에 오니까 수술을 하지 않았다, 아니 엄마가 수술을 거부 하셨다. 나는 병원에서 난리를 쳣다. 의사 왈 보호자는 아들 혼자가 아니란다. 옆에서 지켜줄 엄마도 보호자고 딸도 보호자란다. 이미 체념한 듯 이야길 해주었다. 오랫동안 대소변 수발을 들 준비를 해야만 하는 지경이다.
나는 그래도 고함치고 난리를 쳤다.수술을 해 달라고,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 난 땅 산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 새끼 너 죽인다. 빨리 내 돈 내놔! 안 내놓으면 형사고소하는 것은 둘 째고 현금 차용증을 사채업자 해결사에거 단돈 얼마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넘기겠단다. 네 발목을 짤라서라도 돈 받는 친구줄 알지"라고 이야기한다. 분풀이라도 하겠단다. 난 그 전에 그 친구에게 없는 돈 빌리고, 만들어서 200만원를 부쳐 주었다. 아무런 부쳐 줄 이유가 없는 돈을 부쳐 주었다.
그 돈만 있으면 아버지 수술해서 살릴 수도 있었는데..........
나는 중학교때 부터 친구인 대학교땐, 내 형편을 더 잘 알고, 머릴 다쳤을 땐 그 때부터 우리 집에서 밤마다 와서 자고 간 친구이고 대학교때 자기 영문과에 가질 않고, 나하고 나의 법학과 수업을 들었다. 몇 년을 붙어 다닌 친군데..........
허탈하고 큰 망치로 뒷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토록 이 친구에게 몹쓸 짓을 했나?...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할 ........3년 여를 놀아 봤쟎아?
아버진 돌아가셨다.서울대병원에서 부천 대성병원으로 옮긴지 보름을 버티셨다. 쉽게 가시기가 서럽고 아쉬워서 그랬을 것이다. 요즈음도 꿈에 자주 오신다. 더 살 수 있었는데...가난이 문제 였다.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 빨리 가시라고 밀려 가신 것이다.
난 육촌형에 꼬시켜서 근 1년을 불법체류자 외국인근로자 수송을 맡았다.
강남구 신사동에 살고 있는 형님 동업자는 나중에 알고보니 사회 밑바닥 양아치였다. 그것도 모르고 난 1년을 충성을 바쳤다. 없는 돈 짤아서 엄마에게 400만원을 빌렸다. 육촌 형이 1주일 만에 갚아 드리겠단다. 그 돈으로 봉고차를 샀다. 걸핏하면 김포공항에 갔다. 그리고 공항장 여관에 대기하고 있는 태국 불법체류예정자를 태우고 경기도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아니? 전국 방방 곡곡을 누볐다.
구석 구석 안 가본 곳이 없다. 가는 곳 생산 근로자, 소규모 공장에는 외국 근로자들이 많았다. 3 D업종에는 외국 근로자가 없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 꼭 필요한 존재다.
외국 불법 체류 근로자 부로커 중 제일 돈 되는 근로자가 방글라데시사람들이라고 그랬다. 한 사람 빼내면 8,000불이라고 그랬다.840원대이니까, 우리나라돈으로 650만원정도 였다.
이 사기꾼 대구에 있는 불쌍한 인간에게 사기쳐서 돈도 받고, 청와대 안기부직원에게 청탁을 하여서 공항출입국관리직에게 압력 눌라가지고 근 40명의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빼냈다.
이 양아치 나중에 알았는데 신사장이라고 다카에서 방글라데시 여자랑 결혼해서 살고 있는 신사장이란 62살 먹은 이에게 선불로 몇 억을 받아 챙겼나보다.
그 이후로 모두 빠꾸다. 공항에서 바로 온 비행기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카사람 그 곳에서는 평생 모으지 못하는 돈 마련해서 한국에 나올려고 돈내었는데 만약 빠꾸되면 그 돈 안 갚아 주면 부로커 칼침 맞고 죽는다.
난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르는데 그 양반 안 죽었나 걱정이다. 여기에 목사님도 한 분 만났다. 이 분도 이송책이었다.
다카사람들 데리고 나오곤 했단다. 하여튼 공항 주변 여관 여관 마다 이런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곳에는 항상 부로커들이 있었다 몇 천명의 부로커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기꾼에게 먼저 엮인 육촌 형은 몇 천만원을 이미 갖다 바쳤다. 그 본전이 아까워서 나를 끌어 들인 모양이다.
엄마는 게 아버지도 얍삽하더니만, 우리 아버지에게 대구 있을 때 친구들하고 술먹고,우리 아버지를 불러서 술값 뒤집어 씌우는 것도 다반사였단다.
게도 똑 같이 압삽한 짓을 한다고 불평을 하셨다. 엄마한테 빌린 돈 아직 갚질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엄마 돈 뜯고 살았다. 혼자 사시는데 돌보아 드리지도 않은 채
그러다가 5년 동안 같이 한 반을 했던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 친구도 여행사 사장이면서 불법체류자 공범이었다. 이 친구 여행사 상호를 쓴 핏켓만 들고 있으면, 출입국 관리직원 불법체류 예정 외국 근로자들을 오라고 해서 입국 도장 쾅쾅 찍어 준다 . 프리 패스다. 버스 한 대로 단체로 뺐다. 태국 불법 체류 예정자들을
이 친구 그 때 그렇게 날 못하게 말렸지만, 난 육촌 형의 꼬시킴에 또 한 번 넘어가서 그리고 크리스마스날 까지 열심히 충성을 바쳤다.
밤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운전하는 것을 밥먹듯이 한 덕으로 고혈압과 당뇨를 얻었다. 당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도 절도 없이 두 딸과 마누라를 장인이 아파트 경비 월급으로 연명하는 처갓집에 얹혀 있었으니까....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처가살이 하는 꼬라지를 난 처음 겪었지만 내가 너무 성격이 모질지를 못해서 그런지 난 폐인지 모르게 얼렁뚱땅 넘어갔다.
199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광주를 갔다가 또 밤 12시에 눈이 펑펑 오는 호남 고속도로를 달렸다. 사기꾼이 빨리 올라 가야 된단다. 금방 쏟아지는 눈의 미끄럼을 그 때 알았다. 난 고속도로를 6바퀴 반을 돌고 옆에 쳐 박혔다. 다행히 통과 차량이 없어서 목숨은 건졌지만 6개월이 넘게 임시 남버를 달고 있는 봉고 버스는 파괴 되었다. 보험도 안 되었다.
이 사기꾼 그 차를 현대자동차 판 친구에게 도로 갔다 주라고 시킨다. 이 사기꾼 사기 친 돈이 많이 있을텐데 한 푼도 나눠 주질 않았다.
난 그 차를 현대자동차 영업소에 갖다 주고 그 길로 실업자가 되었다.
차가 없으니까 이 사기꾼 날 부르지를 않는다. 필요 가치가 없어진거지 뭐?
정말 다행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였다. 그 차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난 수원교도소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5월5일에 전에 있던 강남 수서지구 부동산에서 다시 오라고 호출이 왔다. 두 말 안 하고 갔다. 그래도 수입이 항상 딸렸다. 경비 제하고 나눠 먹는데 항상 최저 생계비가 안 되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녔다.
그리고 사장 동생이 권하는 30평형 도시개발아파트 입주권을 동창들에게 그리고 아는 손님에게 10개를 팔았다. 그게 다 하자다.
하여튼 부동산에 엮여서 마음 고생한 것을 다 이야기 하자면 밤을 새워도 다 못할 것이다. 부지기수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권하면 그것은 거의 다가 하자라고 보면 맞다.
특히 수익이 몇 배를 보장한다든가, 투자 최고라고 권하면 그것은 하자다. 그렇게 좋은 수익이면 자기가 하지? 자기는 안 하면서 남에게 권하는 것은 하자라고 보면 정확하다.
경찰서도 많이 조사 받으러 갔다. 마음 고생 한 것 다 따지면 말 할 수 없이 많다. 검찰도 가곤 했지만 인생이 헛되이 살지는 않았나보다. 인덕이다. 그래도 벌금 전과 하나 없이 살 수가 있었다.
내가 이야기 하고 있는 이야기가 동갑들이나 선배, 후배 그 당시 70년대 학번은 거의 다가 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보면 비슷할 것이다.
하나 같이 고생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 아버지 이야기를 글로 쓰면 정말 눈물 짓지 않고는 다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난 유복하다. 어머님 살아 계시고, 세 여동생과 그리고 많은 친척들이 있으니까, 항상 주위에 나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정말 정말 행복하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지나간 시간을 넋두리 했습니다
노 병도
첫댓글 젊은나이에 파란만장 하게 살았어도. 글쓴이의 글에서는 오히려 낙천적이고 씩씩함 마저 느껴져서 아퍼하다가. 웃음짓다가 .눈물 찡하게 읽었어요. 정말루. 이분에게 앞으로는 좋은일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