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하나가 되는 진실의 순간, 영원의 문은 열리고...”
(서울시향 보컬 시리즈 III, 2012년 8월 24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 프로그램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전막)
* 협 연
: 존 맥 매스터(테너, 트리스탄),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소프 라노, 이졸데),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메조 소프라노, 브랑게네),
크리스토퍼 몰트먼(바리톤, 쿠르베날),
미하일 페트렌코(베이스, 마르케 왕),
진성원(테너, 젊은 선원 & 목동),
박의준(테너, 멜로트),
김장현(베이스, 조타수)
* 지 휘 : 정 명 훈
* 연 주 : 서울시립교향악단
* 합 창 : 국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소금꽃, 눈물꽃,
흐드러지네
부러진 비녀 사이에서
풀어진 향기
눈물 흐르는 땅에
곱기도 하네”
(최순우, <옥잠화> 중)
여름의 끝자락, 옥잠화 필 무렵이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빛과 함께 사그라졌다가 어둠 속에서 눈물 꽃을 피우는 옥잠화의 모습은 ‘빛과 어둠의 경계이자 혼례의 시간’ – 자정(子正), 시침과 분침마냥 서로 몸을 포개고 영원을 꿈꾸는.. 끝내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침잠해 버리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올해에도 옥잠화 필 무렵 비가 내렸지만, 이번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직접 보러 집을 나섰다. 그동안 국내 악단에 의해 바그너의 오페라 일부분(1막)이나 갈라 콘서트 형태로 오페라 아리아가 공연된 것은 봤지만, (과문한 탓인지) 바그너 오페라 전막이 공연된 것은 듣지 못했다. 이번에 서울시향 보컬 시리즈(III) 프로그램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비록 콘서트 형식이긴 해도 국내 최초로 국내 악단에 의해 바그너 오페라가 전막 공연되는 중요한 순간을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사랑이란 한숨으로 일으켜지는 연기,
연기가 개면 애인의 눈 속에서 번쩍이는 불꽃이요,
흐리면 애인의 눈물로 바다가 되네.
그게 사랑 아닌가?
가장 분별 있는 미치광이요,
또한 목을 졸라매는 쓰디쓴 약인가 하면,
생명에 활력을 주는 감로(甘露)이기도 하네.”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
비록 타인에 의해 우발적으로 맺어진 관계. 환각으로 인해 맺어졌다가 결국 허위의 가면을 부정하지 못한 채 한숨 속 침잠해 버리고.. 한숨으로 일으켜졌다가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오페라 전막 속에서 그들은 ‘불꽃’과 ‘눈물’, ‘광란’이라는 위 구절, 셰익스피어가 말한 사랑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브랑게네가 건넨 ‘사랑의 묘약’은 ‘목을 졸라매는 쓰디쓴 약(독약)’이자 두 사람을 (가면 속?) 영원으로 이끄는 ‘감로수(甘露水)’와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4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완주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공연에서 이 같은 맥락까지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멋진 공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날 공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느린 템포로 서서히 응축해 나가는 1막 전주곡, 최근 발매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4악장 마지막 부분을 떠오르게 하는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림, 전체적으로 굵직굵직한 흐름 속 때로는 세심함이 돋보이는 악단의 연주가 그러했다. 간결하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연기까지 선사하며 전막 내내 몰입하는 모습을 보인 가수, 가수와 악기의 적절한 배치(잉글리시 호른, 우든 트럼펫)와 조명의 활용을 통해 선보인 입체감 덕분에 한결 생생하게 곡과 대본을 음미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고른 기량을 선보인 구르노바(브랑게네 역)와 몰트먼(쿠르베네), 등장하는 시간은 적었지만 강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페트렌코(미르케왕 역)가 인상적이었다. 빌스마이어(이졸데 역)는 1막에서는 몸이 덜 풀린 듯 했으나 이후 마지막으로 갈수록 좋은 컨디션을 보이며, 이름에 걸 맞는 마무리로 대미를 장식했다. 매스터(트리스탄 역)는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2막 이후 탈진할 정도(?)의 최선을 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수의 목소리가 악단의 연주에 가려지는 부분도 있었고, 대본의 행간을 채워주기에는 약간 부족하게 느껴졌던 성근 해석이 아쉬움으로 다가왔지만, 실황의 아쉬움은 어느 연주에서나 있는 법이다. 오히려 최초의 완주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이날 연주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트리스탄과 하나가 되며, 영원 속으로 가라앉는 이졸데의 아리아 ‘사랑의 죽음’일 것이다. 앞서 적었듯 ‘자정’의 시침과 분침마냥 하나가 되어 영원히 정지해 버리는 모습은 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의 소설, 실락원(失樂園)의 결말을 연상시킨다.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 진실은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빌스마이어의 훌륭한 마무리와 사그라지는 조명 덕분에 연주 후 잔향은 어느 때보다 컸다. 관객 대부분 기립박수로 화답할만한 멋진 연주였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하니,
둘로 된 사랑이지만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별개의 둘이지만, 전혀 나눌 수 없는 하나이기에,
둘의 사랑에서는 숫자가 없어진다.
가슴끼리 멀어져 있어도 외 따로인 것은 아니다.
두 연인은 서로의 내 것이다.
그들은 별개의 둘이기 때문에 하나라 할 수 없지만,
하나의 실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둘이라 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 <불사조와 산비둘기> 중)
첫댓글 포스터와 셰익스피어가 어우러져 멋진 느낌입니다. 늘 좋은 글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