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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 원 서
침침한 조명에 익숙해진 후, 다시 한번 휘둘러보아도 아는 얼굴은 없다. 내가 제일 먼저 온 모양이다.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춰본다. 눈 화장이 암만해도 눈에 거슬린다. 눈을 크고 밝게 보이게 하기는커녕, 잘하면 곱살하게 보일 수도 있을 눈가에 잔주름을 노추(老醜)로 만들어 강조하고 있다. 눈가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몰라보게 늙어 있다. 연일의 겹친 피로 때문일까?
서울에 이사라고 온 후 갈현동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집을 사러 다니는 일이 이만저만 고된 일이 아니어서 나는 요새 거의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계동의 친정에서는 그 근처로 오라고 미리 몇 채 돋봐놓고 있다니 인사성으르라도 그 근처에 가서 보러 다니는 척 안 할 수 없었고, 수유동의 시칩에선 또 이왕 서울로 왔으면 시집 근처에 사는 걸 마땅한 일로 아는 눈치기에 그 근처도 가서 보는 척했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꿍꿍잇속은 또 달라서 주머니 사정에도 맞고 겉보기도 괜찮은 집을 구하려면 화곡동쯤이 알맞은 걸로 귀띔을 하니 그쪽도 안 가볼 수 없고, 그러자니 갈현동에서 상계동으로, 다시 수유동으로, 수유동에서 화곡동으로, 서울 동쪽 변두리에서 서쪽 변두리로, 남쪽 변두리에서 북쪽 변두리로, 중심가는 가로지르기만 하면서 싸다닌 셈이다.
그래 그런지 나는 과연 서울은 크구나 놀라기도 질리기도 했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구나 하는 그윽한 감회는 전연 없었다. 그야 아무리 서울에서 나서 자랐기로서니 차라리 고향이 없는 것으로 자처할지언정 서울을 고향으로 대접할 사람은 없지만, 나는 그래도 고향으로서의 선명한 영상을 갖코 있었고, 가끔 그림 엽서를 꺼내보듯이 그 영상을 되살리 며 향수를 앓았더 랬었다.
바퀴가 불안전하게 탈탈거리는 손수레에 피란 보따리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태우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번갈아 밀며 끌며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본 폐허의 서울―그땐 하늘이 낮고 부드럽게 흐려 있었고, 눈이 조금씩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었고, 폐허 사이에 도괴를 면하고 제법 의젓하게 서 있는 건물들도 창문이란 창문은 화염을 토해낸 시커먼 그을음 자국으로 아궁이처럼 음험하게 뚫려 있었고, 북으로부터의 포성이 바로 무악재 고개 너머에서 나는 듯 가까웠고, 사람들은 이고 지고 총총히 총총히 이 고장을 등지고 있었다.
아침 느지막이 중학다리 집을 떠나 종로 광교 을지로 입구 남대문까지 우린 너무 느리게 걸었고, 어머니가 이렇게 굼벵이처럼 걷다간 해 안에 한강도 못 건너겠다고 걱정을 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앞만 보고 기운 내서 열심히 가야겠다고, 마지막 돌아보는 셈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뎌워왔다. 남대문의 미(美)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간난의 피란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짙 수는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남으루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그 후 피란 생활이 맺어준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된 오랜 객지생활에서도 그때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은 조금도 퇴색함이 없이,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내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서울은 번화하고, 쳐다보고 우러러볼 높은 집도 많았거니와, 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버스에 앉아서도 줄창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해하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는 사이에 남대문에 대한 흥미를 쉽사리 잃어갔다. 나는 이미 이 고장이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가 지배할 고장이 아니란 걸, 남대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됐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 채자 이 고장의 희번드르르한 치장 뒤에 감춰진 뒤죽박죽까지 모두 알아버린 느낌이 들어벼렸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한 뒤죽박죽의 상태에 있는 건 나 자신이었다. 바쁜 길을 가다가도 건널목의 신호등에 푸른 불이 켜져 사람들이 일제히 건너는 것을 보면 나는 건널 필요가 없는데도 덩달아 건넜다. 번화가의 횡단보도를 푸른 신호등을 곧바로 처다보며 여러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건너는 게 나는 그렇게 떳떳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건너지 않아야 될 길을 몇 번 덩달아 건너다보면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그날의 할 일조차 잊고, 촌닭처럼 서투르게 허둥지둥하다가 우두망찰을 했다. 꼭 뭣에 홀린 듯 신나는 분주 끝에 오는 절망적인 우두망찰一비단 길을 가다가뿐 아니라 나는 자주 이런 느낌을 경험했다. 서울 살림의 시작만 해도 그렇다.
남편은 꼭 집을 살 듯이 나와 복덕방 영감을 속이다가 하루아침에 전셋집으로 바꾸더니 부랴부랴 이사를 하고는 응접 세트다 화장대다 문감이다 하고 번 질번질한 세간들을 사들이는 바람에 전셋집이란 서운함도 잊고 집을 꾸미는 재미에 신바람이 나서 바삐 돌아가다가도, 김포가 지척인 화곡동 특유의 비행 기 소리가 유리창이란 유리창을 들들들 흔들면서 모가지라도 도려낼 듯이 낯게 지나가면 마치 온 집안이 얇은 유리로 되어 있어 당장 박살이 날 듯한 겁에 질렸다가 굉음이 무사히 멀어지면 일손에 맥이 쑥 빠지면서 예의 우두망찰에 빠졌다.
남편은 촌티 좀 작작 내라고, 그까짓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게 뭐냐고 얕봤지만 남편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 정신이 나가는 게 아니라 드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소리가 멀어지고 들들대던 유리창도 멎은 후의 해밝은 정적 의 일순, 나는 우리 살림이 얼마나 어벙한 허구 위에 섰나를 똑똑히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동안을 오래 갖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남편은 늘 나를 바쁘게 하려 들었다. 나는 늘 허둥지둥해야만 했다. 남편의 성품이 본래 그렇기도 했지만, 서울로 이사를 오자 한층 의욕이 왕성해져 단박에 떼돈을 벌듯이 설쳐댔다. 그의 눈은 의욕 과잉으로 핏발이 서 있었고, 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마디로 눈부셨다. 그는 나도 자기의 손발처럼 덩달아 바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나는 그의 분망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홉 시에 중요한 용건으로 만날 사람이 있으니 서둘러야겠다고 시계를 골백번도 더 보면서도, 별로 급한 것 같지도 않은 전화를 몇 통화씩 거는가 하면, 통화중인 곳에는 욕지거리를 해가면서도 끈질기게 돌리다가 아홉 시를 삼십 분도 못 남겨놓고서야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질러대면서 옷을 주워 입고, 내가 골라주는 넥타이를 마땅찮아 하고, 다시 고른 것도 또 신통찮아 하고, 거듭거듭 그 짓을 하면서 그는 교묘하게 자기가 이렇게 늦고만 것이 마치 내 탓인 것처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겨우 고른다는 게 내가 처음 골랐던 것을 다시 고른 것도 모르고 만족해하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는 불난 집을 뛰처나가듯 곤두박질을 치면서 뛰어나갔다간 오 분도 안 돼서 숨이 턱에 닿아서 되돌아와서 중요한 서류를 잊고 나갔다고 찾아내라고 고함을 쳐댔다. 그럴 때 만약 내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보관했던 서류를 단박에 첫째 서랍에서 꺼내주면 도리어 남편은 나를 핀잔주려 들었다. 답답하다느니 안차고 다라지다느니 하면서. 그런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나도 덩달아 “어머머, 큰일 났네. 이 일을 어쩌누. 글쎄 그 서류를 어디 뒀드라. 에구구…… 내 정신이야.” 하며 하던 일을 내던지고 뱅뱅 맴을 돌며, 발을 구르며 이 서랍 저 사랍 날쌔게 빼보고, 말을 안 듣는 서랍을 냅다 빼 동댕이치며, 콩 볶듯이 날뛴 끝에 서류를 찾아내야만 했다.
매사를 이런 투로 그에게 장단을 맞춰야 했다. 난 그게 서툴렀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어 젠장 서로 장단이 맞아야 뭘 해먹지 하는 투정을 자주 했다. 나는 늘 피곤했지만 육체적인 노동 끝에 오는 쾌적한 피로가 아니라 불쾌한 조음(璪音)에 맞춰 서투르게 몸을 흔들어댄 것 같은 허망한 피로였고, 몸의 피로라기보다는 마음의 피로였다.
남편은 나가 있는 동안에도 숙제를 내주듯이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동회나 구청에서 무슨무슨 증명을 떼다 놓으라든가, 어디어디서 전화가 오면 용건을 듣기만 해서 메모해 두라든가, 어디어디서 오는 전화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고, 무슨 말을 물어오면 어떻게 둘러댈 것 등인데 그것은 거의가 다 거짓말이어서 혹시 잊을까, 혹시 뒤바뀔까 겁도 났고, 남편이 각계각층의 인사를 너무도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남편의 능란한 허풍은 많은 유명 인사와 유력 인사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꾸미는 웅대한 사업의 참모 본부가 바로 화곡동 우리의 전셋집과 전세 전화인 듯한 착각까지를 나에게 일으킴으로써 나를 질리게 했다. 구래서 실제로는 잘못 걸려온 전화와 어디서 연락 없었느냐는 남편의 전화 외에는 걸려오는 전화도 없었는데도 나는 온종일 긴장하여 그 일에 나를 얽맸다. 남편이 없는 낮 동안 전화가 남편 대신 내 상전 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나는 우리의 전셋집도 마땅찮았지만 그놈의 전세 전화가 더 싫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좀처림 내 서울 살림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서울 살림이자 한창 깨가 쏟아질 신접살림인데도 말이다. 나는 이 나이에 인제 신접살림이었다. 나는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의 남편이 내 세 번째 납편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전세 전화 덕분에 이십여 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쉽사리 옛 동창들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연락이 닿았다기보다는 당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나는 누구에게 전화번호 한번 대준 적이 없는데도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머…… 정말 너구나. 서울에 아주 왔다며? 어쩌면 서울에 와서도 그렇게 꼼짝 않고 들어앉아 있을 수가 있니. 요런 깍쟁이,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안달횰 떠는 전화가 예서제서 걸려오더니, 몇몇이 모여서 나를 만나기로 약속이 된 모양이다. 저희들 멋대로 정한 시일과 장소가 나에게 통고됐다. 나는 옛 동창을 만나는 일이 좀 뜨악하고 좀 귀찮았지만, 만나기가 아주 싫을 것도 없어서 그냥 찧고 까부는 대로 당하고 있을 밖에 없었다.
나는 보고 싶다는 느낌, 특히 여자 친구끼리 보고 싶다는 느낌을 암만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되레 남편이 적극적이었다.
“거 참 잘됐구려. 오래간만에 나가 바람 좀 씌고 와요. 사람은 그저 사람을 많이 알아놔야 되는 거야. 다 써먹을 데가 있다구. 있구 말구. 줄이나 빽이 별건가. 그렇구 그런 거지. 당신 동창 중에라도 재벌이나 고관 사모님 없으란 법 없잖아. 하다못해 세리(稅吏) 마누라라도 있어봐. 그게 어디게.”
공연히 흥분해서 눈을 번쩍이고 삿대질까지 했다. 그러곤 엄숙하게 덧붙였다.
“어떡허든 우리도 한밑천 잡아 한번 잘 살아봅시다.”
나는 울컥 징그러운 생각이 났다. 그러곤 아아, 아아,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편을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나쁜 징조였다. 더 나쁜 것은 숨 가쁘게 아아,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첫 남편과 헤어질 때도 그랬었고, 두 번째 남편과 헤어질 때도 그랬었다. 남들이 알기로는, 내가 첫 남편과 헤어진 것은 애를 못 낳아서 쫓겨난 것으로, 두 번째 남편과 헤어진 것은 그까짓 일부종사 못한 팔자 두 번 고치나 세 번 고치나지 하는 팔자 사나운 헌 계집이면 으레 그렇게 하는 빤한 소행쯤으로 되어 있을 터였다. 내가 겪은 아아 징 그럽다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 나는 이번 남편과도 헤어지게 되려나 싶어 다시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춰본다. 또 한 번 시집을 가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확인으로 스스로를 겁주기 위해서다. 눈가의 뚜렷한 늙음보다 차라리 더 짙은 온몸의 피로, 그냥저냥 안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새삼 간절하다.
콤팩트 뚜껑을 찰카닥 닫는데 화려한 한복차림의 여자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선다. 어둑한 다방 안을 저녁노을처럼 물들일 듯 강렬한 오렌지 빛 한복이다. 희숙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고 요란한 호들갑을 떨면서 반가워했다. 곧 영미도 왔다. 영미는 말 없이 나를 포옹했다. 서양 여자들처럼 그렇게 하는 게 영미에겐 썩 잘 어울렸지만, 당하는 나는 너무 쑥스러워 촌닭처럼 비실비실 어색하게 굴었다.
“예뼈졌다 얘.”
“정말 몰라보게 예뻐졌어.”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라면 우선 눈에 띄는 게 늙음일 게다. 그런데도 그 대목은 살짝 건너뛰어 다만 예뻐졌다고 한다. 그게 아마 서울식인산가 보다. 나는 뭐라고 답례를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냥 나를 시골뜨기처럼 느낄 뿐이다.
“그래, 서울로 아주 왔다며? 잘됐다. 잘됐어. 온 지 얼마나 되지?”
“글쎄 거진 두어 달 됐나 아마…….”
“뭐 두어 달이나. 그래 그동안 나 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안 나던? 요런 깍쟁이.”
영미가 눈을 흘기며 내 넓적다리를 꼬집는다. 영미는 나하고 단짝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영미를 보고 싶어 해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만나서도 희숙이보다 영미가 더 반가울 것도 없다. 다방 속은 소음과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언성을 높여 수다를 떨었다. 희숙이 등지고 앉은 벽에는 고흐의 복사판이 걸려있다. 하늘은 땅을 향해 무너져 내리고, 땅은 하늘을 향해 삿대짓을 하며 끓어오르는 악몽 같움 그림이었다. 희숙의 오렌지 빛 한복은 질 좋은 실크여서 매무새가 흐르는 듯 아름다웠지만 유감스럽게도 낡은 싸구려 내복이 소맷부리로 넘실대고, 다이아 반지를 낀 손은 기칠고 상스러웠다. 고생고생 하다가 한밑천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남편을 가진 여편네 티가 더덕더덕 났다. 한밑천 잡는다는 게 바로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입맛이 썼다. 영미의 양장은 수수하고 비교적 세련된 편이었으나, 중년을 넘은 직업여성의 피곤과 싫증 같은 게 짙게 느껴져 오랫동안 맞벌이로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온 티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옛 친구를 다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마치 노련한 전당포 주인 영감이 물건을 감정하고 값을 매기듯이 나는 그녀들을 순식간에 감정했고, 흥, 너희들도 별거 아니로구나 하고 값을 매겼고, 나는 내 감정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녀들의 수다에 시들하게 참견하고 시들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내가 남편의 각본대로 그녀들이 고관이나 재벌의 사모님이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한눈에 알아낸 것 이상의 것을 그녀들에게서 알아내고픈 흥미가 전연 일지를 않았다.
“참 네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냐?”
희숙이가 물었다.
“응, 사업하는 이야.”
“사업? 무슨 사업인데.”
“일본과 기술 제휴한 전자 회사.”
나는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꾸며댄 거짓말은 아니었다. 남편이 계획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를테면 들은 풍월이었다.
레지가 커피에 카네이션을 한 방울 뚝 떨어뜨리고 갔다. 꼭 콧물만큼 떨어졌다. 나는 흐르지도 않은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래? 참 이상하다. 난 네 남편이 충청도 토박이 호농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사업가가 됐니?”
영미가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너만 이상하니? 나도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기론 얘 남편이 대학 교수쯤 될 텐데.”
희숙이 능구렁이 같은 소리로 능글댔다. 둘의 눈이 같은 목적으로 합세해서 더욱 악랄하게 더욱 짓궂게 빛났다. 그제야 나는 그녀들이 진작부터 내가 세 번씩이나 결혼한 걸 알고 있었다고 깨닫는다. 늦게 그걸 깨달은 게 좀 분했지만 이제라도 깨달은 바에야 뻔뻔히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짐짓 재미나 죽겠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맞았다 맞았어. 너희들 둘 다 맞았어.”
“뭐라고?”
“첫 번째 남편은 토박이 시골 부자였고, 두 번째 남편은 지방대강사였고, 지금 남편은 사업가니, 안 그래?”
“그럼 넌 정말 세 번씩이나 개가를 했단 말이니?”
개가란 참 듣기 싫은 말이다. 그래도 난 개의치 않고 너그럽게 다시 한번 웃어주곤
“아니지, 한 번은 어차피 초혼이었을 테니 개가는 두 번이면 족하지.”
내가 개가란 말을 얼마나 멋있게 자랑스럽게 했는지 내 두 친구는 완전히 질린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도 유쾌하지 않아서 이마를 몹시 찡그렸다.
“너 참 많이 변했구나. 부끄럼도 꽤는 타더니.”
영미가 경멸하듯이 말했다. 내 앳된 시절을 말하는가 보다. 요새 여학생들은 그렇지도 않지만 우리 때만 해도 여학생이 수줍어하는 것은 애교요 예절이었다. 그러나 내 경우는 특히 그게 좀 심했던 것 같다.
조그만 실수에도 부끄럽다든가 창피하다든가 하는 생각도 미처 들기 전에 얼굴부터 빨개졌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열기를 의식하자 하찮은 일에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고 마는 내 변변치 못한 성품이 싫고 부끄러워 한층 얼굴이 빨개지면서 엉망으로 찔쩔맸다. 그렇다고 내 부끄럼은 실수한 경우에만 타는 게 아니었다. 간혹 수학 시험의 최고 득점자로 내 이름을 부를 때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내가 얼마나 남들에겐 공부 안 하는 척하느라 학교에선
소설책만 읽다가 집에선 밤을 꼬박 새워 공부했던가가 생각나고, 그래서 내 흉물스러움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갈 듯이 위축됐다. 혹시 내가 쓴 작문을 잘됐다 선생님이 아어들 앞에서 읽어주기라도 하면, 저 구절은 어디서 표절한 것, 저 느낌은 어디서 홈쳐온 것 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읽을 때마다 나를 찌르는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 그러자니 나는 늘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 눈에 안 띄는 모범생이었다.
여학교를 미처 졸업하기 전에 난리(6·25)를 만났다. 여름내 남다 겪는 고생도 겪고 겨울엔 남 다 가는 피란도 갔다.
그 통에 나같이 고생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나서 봤댔자 엄살밖에 안 되겠지만, 난리 통일수록 무자식 상팔자라는데 우린 너무 아이들이 많았다. 아버지도 안 계신 데다가 내가 맏이니 집에 의지할 장정 식구란 없는 셈이었다.
우리 식구의 생활의 기반은 세(貰)놔 먹던 중학동 넓은 고가밖에 없었는데, 집을 떠메고 갈 재간은커녕 식구 목숨 하나라도 안 빼놓고 이끌고 가기도 힘 에 겨워, 반반한 옷가지 하나 제대로 못 가지고 떠난 처지라 곧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도 피란민을 위한 밀가루 무상 배급 같은 게 불규칙하게나마 있어 근근이 연명은 할 수 있었으나 그 무렵에 동생들이 먹고 또 먹어대는 꼴이라니 영락없이 밑 빠진 가마솥이었다. 먹고 또 먹고도 빼빼 말라서 글겅글겅 온종일 먹을 것에 환장을 해쌓았다.
어머니와 나는 빈 솥바닥을 득득 소리나게 긁으며
“난리 통엔 어른은 배곯아 죽고, 애새끼는 배 터져 죽는다더니 맞다 맞아. 우리가 그 꼴 되겠다.”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툭하면 “이 웬수 같은 놈의 새끼들.” 하며 아이들을 불문곡직하고 흠뻑 두들겨 패주는 버릇이 생겼다. “이 웬수야, 뒈져라 뒈져.” 하며 정말 전생부터의 원수라도 노려보듯이 아이들을 노려보며 삿대질을 하던 무서운 어머니와, 아이들의 악마구리 끓듯 하던 울음소리를 나는 지금도 끔찍스러운 지옥도의 한 폭으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봄이 오고 나는 동생들과 먹을 만한 풀을 캐러 온종일 들과 산을 주린 짐승처럼 헤매는 게 일과였다. 어느 날 우리는 산 너머 불탄 학교 자리가 있는 샛노란 황무지 같은 들판에 통나무를 켜서 늘어놓은 것 같은 콘셋이 들어선 것을 발견했다. 누런 지프차와 트럭이 부릉부릉 빵빵 하는 신나는 소리를 내며 그 근처로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미군 부대가 주둔한 것이다. 우리는 괜히 신바람이 났다. 갑자기 풀을 캐러 다니는 일이 치사하고 못난 짓 같은 생각이 들
었다.
산 너머에 부대가 생겼다는 소문은 빠르게 온 동네로 펴졌다. 큰 살판이나 난 듯한 이상한 활기가 이 피란민과 원주민이 삼 대 일쯤인 마을에 넘쳤다. 벌써 아이들은 산나물을 넣고 끓인 멀건 수제빗국에다 코를 들이대고 킁킁대면서 누르께한 육기(肉氣) 냄새를 맡지 못해 안달을 해쌓았다.
그러나 먼저 퍼진 것은 육기나 기름기가 아니라 느글느글한 화냥기였다. 마치 항구에 정박한 큰 선박에서 폐유가 흘러나와 항구의 해수를 오염시키듯 이 미군 콘셋에서 흘러나온 수상쩍은 에로티시즘이 단박에 온 마을을 뒤덮었다. 이상한 그림이 나돌고, 계집애들은 엉덩이를 휘젓는 망측한 걸음걸이로 괜히 히죽히죽 웃으며 싸다니고, 아이들까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한두 마디씩 지껄이며 양키만 보면 팔때기를 걷어붙이고 이상한 흉내를 냈다.
때맞춰 야미 퍼머쟁이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계집애들을 꼬셔서, 머리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을 칠하고 돌돌 말아 숯이 든 쇠집게로 찝어놓더니 고실고실 볶아놨다. 그 시절에 한창 유행하던 불퍼머였다. 펴머하다가 머리통이 군데군데 데는 것쯤은 약과였다.
LAUNDRY니, D. P. 니 하는 꼬부랑글씨 간판이 붙은 집까지 생겨났다. 물론 이런 현상은 눈에 띄게 겉에 나타난 현상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고, 원주민이라면 과년한 딸을 딴 고장의 친척집으로 피신을 시키고, 피란민이라면 아예 식구가 몽땅 말찍이 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런 짓은 다 돈푼이나 있는 배부른 사람들 짓이었고 없는 사람들은 살판난 듯이 생기가 나서 도대체 어떤 수를 쓰면 저 껌을 쩌덕쩌덕 씹으며 지프차를 부릉부릉 몰고 다니는 코큰 사람 호주머니에 든 신기한 달러돈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떡하면 레이션 박스 속에 든 별의별 달고 향기롭고 고소한 것의 맛을 남보다 먼저 보나, 혹시 저 산 너머 부대 철조망 속에서 양키들 시중드는 일자리라도 하나 얻어걸리지 않나 그런 생각만 했다. 어떻든 그런 움직임은 마을을 생기있게 했다.
돈푼이나 좀 있는 사람이나, 점잖은 체하려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개탄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너희들도 두어끼 굶어만 보렴, 점잖은 개 부뚜막에 올라간다고 아마 한술 더 뜨면 더 뜰 걸 이런 투였다.
타관에서 하나둘 양색 시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 동네는 점점 기지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자 불퍼머로 머리를 볶은 처녀들 사이에 급속도로 화장법이 보급되었다. 횟 됫박을 쓰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고 눈썹을 그리고, 껌을 씹는 아가씨들이 늘어났다. 그래도 아무리 어려운 피란민의 딸들이라도 여염집 처녀가 곧장 양색시가 되는 법은 없었다. 처음엔 그래도 부대 내의 하우스걸이나 웨이트리스니 하는 떳떳한 이름으로 취직이 돼서 들어갔다. 아들녀
석들도 하우스보이 취직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집집마다 먹는 것에서 누르께하고 느글느글한 냄새가 풍기고 까실하던 살결이 제법 윤기가 돌았다. 우리 집만 여전히 가난했고, 어린 동생들은 문자 그대로 아귀 귀신이 된 것처럼 먹여도 먹여도 허기져 했고, 남 먹는 것만 보면 환장을 하려 들었다.
어머니의 신경질은 하루하루 더해 갔다. 동생들 대신 나를 심히 들볶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펴머쟁이를 데려오더니 나보고도 그 불화로를 뒤집어쓰는 불퍼머를 하라고 종주먹을 댔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내 고집을 꺾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더니 홧김에 자기의 트레머리를 뚝 끊어버리더니 불화로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볶았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가뜩이나 새카맣게 말라비틀어진 얼굴에 고실고실 들고일어나 새둥우리처럼 된 머리가 덮치니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넉넉히 비참의 극인데, 어머니는 게다가 화장까지 시작했다. 어디서 분가루랑 입술연지 토막을 얻어다가 깨진 거울 앞에서 치덕거렸다. 그러곤 낮도깨비처 럼 길가를 오락가락 했다. 나는 부끄러워할 수조차 없었다. 불쌍한 어머니, 그러나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어머니가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더니 가슴을 풀어헤지고 맨살을 드러냈다. 희끗희끗 비늘이 돋은 암갈색의 시들시들한 피부가 늑골을 셀 수 있을 만큼,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어중간히 매달린 검은 젖꼭지가 몇 년 묵은 대추처럼 초라하니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 가슴을 손톱으로 박박 할퀴며 푸념을 했다. 누웠던 비늘이 일어서며 흰 줄이 가더니 드디어 붉게 핏기가 솟았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년아, 똑똑히 봐둬라. 이 인정머리 없는 독한 년아. 이 에미 꼬락서니를 봐두란 말이다. 어디 양갈보짓이라도 해먹겠나. 어느 눈먼 양키라도 템벼야 해먹지. 아무리 해먹고 싶어도 이년아, 양갈보짓을 어떻게 혼자 해먹니. 우리 식군 다 굶어죽었다, 죽었다. 이 독살스러운 년아, 이 도도한 년아. 한강물에 배 떠나간 자국있다던? 이 같잖은 년아.”
나는 무서워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순간 내 내부의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이 영영 두터운 딱지를 붙이고 말았을 게다. 제 딸을 양갈보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그 후 나는 시집을 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예전 같으면 애어멈이 되고도 남을 나이 였다. 양갈보짓 시켜먹긴 싹수가 노랗고, 열 식구 버는 것보다 한 입 더는 게 낫다는 옛말도 있으니 그까짓 거 후닥닥 지워버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중신 에미 말에 어머니는 솔깃했고, 나도 순종했다. 나는 시집가는 것도 양갈보짓 하는 것도 똑같이 싫었지만 그렇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시집가는 게 양갈보짓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양갈보짓을 해서, 딸을 그 짓을 시키지 못해 환장을 한 어머니를 만족시키기도, 누나는 굶건 말건 저희들 배만 채우려는 아귀 귀신 같은 동생들을 부양하기도 싫었다. 나는 내 희생의 덕을 어느 누구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는 부자라고 일컬어지는 집에 50이 넘은 신랑의 후취로 들어갔다. 시골의 호농가라고 서울까지 소문이 난 것은 환도 후에 어머니가 자기 형편이 피자, 어머니다운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풍겼을 뿐, 실상은 중농 정도의 농사를 짓는 집안이었다. 다만 농사꾼 상대로 돈놀이도 하고, 돈 생기는 일이라면 남의 이목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손을 대 농사꾼답지 않게 약게 살면서 착실히 돈푼깨나 주무르는 눈치였다.
낡고 값싼 세간과 장독, 솥뚜껑 등이 온퉁 기름독에서 빼낸 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집이었다. 소위 길이 들었다는 그 윤기는 정갈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나를 압박했다.
신랑은 무식하고 교만했다. 나는 여태껏 자기의 무식과 자기의 돈에 그렇게 자신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 외의 딴 사람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철저하게 막혀 있었다.
다행히 전실 애들은 없었으나 층층시하에 시동생 시누이들 시중으로부터 세간의 윤기를 유지시키기 위한 끊임 없는 걸레질까지 온갖 드난이 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되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자유에의 가슴 설레는 유혹이나, 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미칠 듯한 궁금증을 누르고 그 짓을 십 년 동안이나 할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건강했는데도 나는 애기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시앗을 보았고 나는 시집을 떠났다. 남의 집에 들어와 애 하나 못 낳는 주제에 시앗 좀 봤다고 시집을 안 사는 년이 그게 어디 성한 년 이냐고 시집 식구들은 욕을 했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이혼이란 확실히 결혼보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못 되지만 나는 그 일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생전 처음 어떤 선택을 행사했다는 데 기쁨마저 느꼈다.
둘째 남편인 지방 대학 강사는 실물을 처음 만나기는 친구의 소개를 통해서 였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 알기는 미리부터 였다. 그는 지방 신문에 칼럼 같은 걸 기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글을 몇 개 안 읽고도 쉽사리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돈이니 명예니 하는 것에 담박하고, 돈이니 명예니와 상관없는 보잘것 없는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냄으로써 거기서 자기의 삶을 가꾸고 풍부하게 할 어떤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으로 그를 이해했다. 그것은 내가 겪은 최
초의 생생한 경이였다. 또 그의 글에는 구질구질한 소도시 T시에 대한 향토애가 서정시처럼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나는 T시 주변의 농촌에서 겪은 슬픈 일 때문에 도저히 정들 것 같지 않던 T시를 고향처럼 정답게 느끼기도 했다.
소개받은 그는 내가 동경하고 상상하던 것보다 암울하고 이지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상처한 지 얼마 안 된다는 사실 때문에 크 이지러짐조차 가슴이 저릴 만큼 감동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곧 나는 그에게 열을 올렸다. 나는 꼭 한 번 행복해 보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잃은 불쌍한 그의 어린애들을 사탕과 과자로 매수하고, 눈웃음과 뽀뽀와 모성애의 흉내로써 아첨을 떨고 해서 그의 가정에 깊숙이 파고들어 마침내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곧 내가 속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그는 겁쟁이고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였다. 순엉터리였다. 그의 본심은 돈과 명예에 기갈이 들려 있었고 T시와 T대학 강사 자리를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런 곳에서 썩 긴 너무 아까운 존재라고 억울해했고, 서울의 일류 대학에서 자기의 명성을 흠모하고 모시러 오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기도 했다. 그의 명성에 대한 자신이란 것이 또 사람을 웃겼다. 자기의 전공 공부에는 게으르고 자신도 없는 주제에 잡문 나부랭이나 써가지고 지방신문을 통해 매명(賣名)을 부지런히 해쌓는 것으로 그런 엉뚱한 자만을 갖는 것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그는 그의 글을 통해 결코 도시, 돈, 명예에 대한 그의 절실한 연정을 눈곱만큼도 내비치는 일이 없이 늘 신랄한 매도를 일삼는다는 거였다.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이 비비꼬인 남자였다.
그도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자기같이 학문밖에 모르는 선비는 유능한 여편네를 얻어야 출셋길이 트이는 건데, 처덕이 더럽게 없어서 맨날 이 꼴이란 소리를 서슴지 않고 했다. 누구는 부인 덕에 어떻게 영전을, 누구는 처가에서 밀어주어 어떻게 출셋길을 달리는데 난 무슨 놈의 팔자가 어떻게 옴이 붙었기에 재취마저 저런 밥이나 죽일 재주밖에 없는 년이 얻어걸렸는지 모르겠다고 이지러진 얼굴을 더욱 이지러뜨리고 욕을 하기도 했다. 공부는 하기 싫은 주제에 엄마더러 치맛바람 일으켜 일등을 시켜달라고 생떼를 쓰는 개구쟁 이라면 차라리 귀여운 맛이라도 있겠는데 수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사나이가 이 꼴이니 정 밖에 떨어질 게 없었다.
우린 헤어졌다. 첫 번째 이혼보다 두 번째 이혼은 훨씬 쉬웠다. 정 좀 떨어졌다고 간단히 헤어지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뭐 서양 여자들처림 애정 생활에 철저해서라기보다는 애가 없었다는 극히 동양적인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세 번째 남편은 T시에선 돈 좀 번 것으로 소문난 장사꾼이었다. 상처하고 십여 년을 후취를 맞지 않고, 남매를 키워 출가시키고 비로소 후췻감을 물색한다는데 우선 호감이 갔다. 나는 전실 애를 거느린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두 번째 결혼을 통해 알고 있었고, 애를 낳을 자신도 없었으므로 더 바랄 것 없는 좋은 혼처였다. 삼세번에 득한다는 옛말대로 나는 세 번째 결혼은 꼭 성공하고 싶었다. 그가 장사꾼이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게 떳떳한 본분이니 대학 강사님 같은 위선은 필요 없을 게 아닌가. 과연 그는 그의 철저한 배금(拜金)주의를 조금도 위장하려들지 않았다.
“한밑천 잡아 잘 살아보자.”, 그의 동분서주는 이 한마디에 요약됐다.
“경희도 이리로 나오기로 했는데 어쩐 일일까?”
희숙이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다.
“경희?”
“왜 경희 몰라? 얼굴이 이쁘고 송곳니가 하나 덧니고, 너처럼 부끄럼을 유별나게 타던 애 말야. 웃을 땐 덧니가 부끄러워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있었지. 총각 선생이 뭘 물으면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엉뚱한 대답을 해서 별별 소문을 다 뿌리던 애 말야.”
“걘 어전하단다. 어전히 젊고 여전히 이쁘고 부끄럼 잘 타고, 시집을 잘 가서 고생을 몰라서 그런지 무슨 애가 고대로야.”
나는 느닷없이 경희에게 강한 적개심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격하고 싱싱한 느낌이었다. 빨리 보고 싶었다. 경희를, 부끄럼 타는 경희를 보고 싶었다. 나는 마치 경희가 이 세상의 부끄럼 타는 마지막 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지금이 바로 그 사라져가는 표정을 봐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이 초조했다.
“왜 이렇게 안 올까? 집으로 전화 연락 좀 안 될까.”
전화를 걸고 돌아온 영미가 약간 아니꼬운 듯이 입을 비죽대며
“저희 집으로 다들 오란다. 뭐 귀한 손님이 오셔서 못 나왔다나. 귀한 손님 이라야 뻔하지. 와이로 가져온 손님일 거야. 가자, 가서 점심이나 얻어먹자. 걔 속셈 뻔하지 뭐. 아마 저 잘 사는 거 자랑시키려고 그러는 걸 거야.”
누구라면 알 만한 고위층에 속하는 남편을 가졌다는 경희는 그 나름으로 선망과 질투의 대상인 성 싶었다. 그러나 한남동 경희네가 가까워지자 희숙과 영 미의 태도는 묘하게 나를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경희가 얼마나 으리으리하게 잘사는가를 입에 거품을 물고 세세히 열거하면서 내 반응을 빤히 관찰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경희네 사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라고 부러워하나에 따라 내가 사는 형편까지 짐작해 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 친
구들은 내가 어느 만큼 사나 그게 궁금할 텐데 아마 아직 그걸 추리해 내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이 친구들이 그걸 알 리 없다.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아직 내 남편이 부잔지, 빈털터 린지, 빚덩어린지 그걸 도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만나면 친구끼리건 친척끼리건 우선 상대방의 그것부터 알고 싶어 하는데 나는 내 남편의 그것도 모르니 하긴 좀 답답하다.
경희넨 집도 컸고 정원도 넓었지만 난 별로 눈부셔하지 않았다. 내 집보다 규모가 크고, 좀 더 희번드르르한데도 어딘지 내 집과 비슷했다. 편리한 양옥 구조가 다 그렇듯이 그저 그렇구 그랬다. 세간도 그랬다. 하긴 경희네 안방 자개 문감과 내 집 자개 문갑이 같은 값일 리 없고, 그 문갑 위에 놓인 청자가 우리 집 것과 같은 육백 원짜리 가짜일 리는 만부하다 하겠다. 그러나 경희나 나나 이런 가장 집기들에게 약간의 용도와 금전적 가치와 전시 효과 외엔 특별한 심미안이나 애정을 두지 않긴 마찬가지 일테니, 그것들이 무의미하기도 마찬가지 일 게 아닌가. 나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비실비실하지 않았다. 경희는 품위도 우정도 잃지 않을 한도 내에서 절도 있게 나를 반가워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영미가 약간 입을 비죽대며 “뭐 일본과 기술 제휴한 전자 회사 사장이라나 봐.” 했다. 곧이어 희숙이 “글쎄 그 사람이 얘 세 번째 남편이래지 뭐니.” 하고 딧붙였다.
경희는 정숙한 여자가 못 들을 망측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곱게 붉히더니 “계집애두.” 하며 손을 입에 대고 웃었다. 덧니가 부끄러워 비롯된, 그녀의 손으로 입 가리고 웃는 버릇은 이제 덧니의 매력까지를 계산하고 있어 세련된 포즈일 뿐이다. 뱅어처럼 가늘고 거의 골격을 느낄 수 없는 유연한 손가락에 커트가 정교한 에메랄드의 침착하고 심오한 녹색이 그녀의 귀부인다운 품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아름다운 포즈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노련한 연기자처럼 미적 효과를 충분히 계산한 아름다운 포즈일 뿐이었다.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퇴화하고 겉껍질만이 포즈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경희는 내 남편이 한다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자기가 요새 나가는 일본어 학원에 같이 다니지 않겠느냐고 했다.
“너희 남편이 일본 사람과 교제하려면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걸. 요샌 남편이 출세하려면 뒤에서 여자가 뒷받침을 잘 해줘야 해. 그러니 두말 말고 일본말 좀 배워둬라. 내가 배우는 거야 그냥 교양 삼아 배우는 거지만 말야.”
“너야 어디 일본말만 배웠니. 각 나라 말 다 조금씩 배워봤잖아.”
희숙이가 비굴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야 해외 여행 할 때마다 그때그때 그 나라 인사말 정도 배워갖고 간 거지 뭐.”
나는 집에 와서 남편에게 비교적 소상히 그날의 얘기를 했다. 만나본 동창 중 경희 같은 소위 고위층의 부인이 있다는 소리에 남편은 점괘를 맞힌 박수무당처럼 징그럽게 좋아했다.
“거 보라구 내가 뭐랬나. 당신 친구 중에라고 고관의 부인 없으란 법 있겠느냐고 내가 안 그랬어. 잘됐어. 잘됐어. 뭐? 일본어 학원? 다녀야지, 암 다녀야구말구. 그런 여자하고 같이 다닐 기횔 놓치면 안 되지. 그게 다 처세술이라구. 교제술이란 게 다 그렇구 그런 거지 별건가.”
그러고 나선 개화기의 우국지사처럼 자못 엄숙하고 침통해지면서
“아는 것이 힘이라구. 배워야 산다구. 배워서 남 주나.”
하고 악을 썼다. 경희의 권유에서라기보다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곧 일어 학원엘 나가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만약 또 이혼을 하게 되면, 일본어로 자립의 밑천을 삼아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요샌 관광 안내원이 괜찮은 직업이라 하지 않나.
일어 학원에서 경희를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중급반이요 나는 초급반인 탓도 있었고, 그녀는 별로 열심스러운 학생이 못 되어서 결석이 잦았다. 간혹 만나더라도 암만해도 강사를 집으로 초빙해야 할까 보다느니, 아무한테도 제가 아무개 부인이란 발설을 말라느니, 이를테면 자기 신분에 신경을 쓰는 소리나 해서 거리감만 점점 느끼게 했다.
내 일본말은 늘지 않았다. 일제 때 배운 거라 대강은 알아들으니 쉬 익힐 법도 한데 강사인 일녀의 발음에 따라 ‘오하요’ 니 ‘사요나라’ 니 소리가 도무지 돼 나오지를 않았다.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에는 일어 학원 말고도 학원이 무수히 많았다. 서울 아이들은 보통 학교를 두 군데 이상이나 다니나 보다. 영수 학관, 대입 학원, 고입 학원, 고시 학원, 예비 고사반, 연합 고사반, 모의 고사반, 종합반, 정통 영어반, 공통 수학반, 서울대반, 연고대반, 이대반……. 이 무수한 학원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몰려 들어가고 쏟아져 나오고 했다. 자식을 길러본 경험이 없는 나는 이들이 은근히 탐나기도 했지만 이들의 반항적인 몸짓과 곧 허물어질 듯한 피곤을 이해할 수 없어 겁도 났다.
어느 날 어디로 가는 길인지 일본인 관광객이 한 떼, 여자 안내원의 뒤를 따라 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 촌구석에서 왔는지 야박스럽고, 경망스럽고, 교활하고, 게다가 촌티까지 더덕더덕 나는 일본인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안내원 여자는 너무 멋쟁이라 개 발에 편자처럼 민망해 보였다. 그녀는 멋쟁이일 뿐 아니라 경제제일주의의 나라의 외화 획득의 역군답게 다부지고 발랄하고 긍지에 차 보였다. 마침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관광객과 아무렇게나 뒤섞였다.
그러자 이 안내원 여자는 관광객들 사이를 바느질하듯 누비며 소곤소곤 속삭 였다.
“아노―미나사마, 고찌라 아따리까라 스리니 고주이 나사이마세.” (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 × 학원, ○○ 학관,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라는 깃발을 필러덩 펼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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