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정 연혁영주시 휴천동2209 철탄산 에 자리 잡은 영주는 신라, 고구려,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변천사 를 거듭해오면서 불교문화를 꽃 피웠고 또한 유교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수많은 무인을 배출한 고장으로, 이런 자랑스런 고장에 전통의 궁도장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지방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오늘의 이 궁도장을 건립하게 됐다.
지난 1930년대 지방 인사 한복흥 장석주 박명덕, 석귀봉, 김주선 등 5인이 뜻을 같이해 관덕정이란 정명으로 영주교 및 로천사장에 궁도장을 세우고 습사했으며 사원들도 증원 됐다.
1936년 7월경 영주초등학교 뒷편 옛 신사자라로 사장을 옮겨 약 4년간 습사 하던 중 뜻하지 않던 6.25동란으로 휴정 했다가 수복 후 1953년 봄, 원당천에 임시 궁도장 을 세우고 습사해 왔다.
1955년 1월경 위 장소에서 습사 할 수 없어 다시 영주교 밑으로 옮겨 습사 하던 중 1962년 5월 18일 영주 대 수해로 다시 중단 됐던 것을 수해복구사업으로 영주 공설운동장이 신설돼 당시 영주군청의 협조로 공설운동장 강변 쪽 부지에 새로운 궁도장을 마련해 습사했다.
그러나 당시 정건물이 없기에 궁시 장비를 보관, 관리 할 수 있는 궁방이 없었던 바 1970년도 전국궁도대회에서 우승한데 이어 경북도내 궁도 정대항전에서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되어 이 기회에 정 건립의 필요성을 통감한 끝에 정 건립 창건기성회가 발족됐다.
발기인 으로는
영주군체육회장(군수) 김정식
영주군경찰서장 송진수
영주군번영회장 정현석
영주군상공회의소장 김두식
영주군궁도회장 양익호
위 인사가 추진한 결과 금교성, 양익호, 김운학, 김두식, 남봉석등 5인의 희생적인 헌신과 본정 강창세 사우의 적극적인 섭외로 당시 국회의원 김창근씨의 도움을 받아 1971년 4월 7일 구성산 기슭 서천강변에 고희를 맞는 동료오우가 목적의 목조와 가 건물을 세우고 영광의 충무정 현판식을 거행 할 수 있는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23년간이란 애환이 담긴 세월 속에 수많은 후배들을 양성 . 배출하고 습사해 오다가 1994년 5월 본고장 영주에서 처음 개최하는 제32회 경상북도도민체육대회에서 본정의 협소로 궁도대회를 치룰 수 없음을 절실히 실감하고, 1993년 김지순 영주시장과 영주시의회 전동호, 우영구 의장의 도움으로 본 충무정의 전 회원이 혼신적인 혼을 쏟아 지금의 영주시 휴천동 1109번지에 부지를 매입 정지하여 철골 콘크리트 와가 회의실 34평, 사대 55평을 신축, 경북도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궁도장을 충혼탑 옆 아늑한 위치에 영원히 보존 할 수 있는 정을 건립, 1994년 5월 10일 준공과 동시 이전해 후손들의 궁도 발전 을 육성 할 수 있는 터전이 됐다.
본정의 관혁을 홍띠로 한 유래로는 조선 말엽에 무과에 급제한 인사로써 헌종때(1848년) 손종책, 당시 직책은 수문장이고 철종때는 선전관 훈련원 첨정 좌별장, 고종때는 무과시관 역임한 향사출신이었으며 또 손상규 선생께서도 고종때 부령까지 지낸 장군으로 활약한 유명한 장군이 배출된 곳이기에 장군을 드높이기 기리기 위해 궁도장의 관혁을 홍띠로 하였음을 이 또한 자부할만한 선조의 유래라 할 수 있겠다.
역대임원으로는 제1대~제2대 사두 : 한복흥, 부사두 : 박명덕 ~ 제33대 사두 : 고영기, 부사두 : 최갑석, 부사두 금상순 에 이르기 까지 총16명의 사두 와 부사두 총무가 있었다.
각종대회수상 내력으로는 1972년10월16일 제11회 신라문화제, 제4회 전국남녀궁도대회를 경주 호림정에서 3위 1999년10월3일 제13회 소백문화제, 제1회 경북북부지구친선궁도대회를 영주 충무정 에서 우승하는 등으로 전국체전에서 총 5회에 걸쳐 우승과 준우승의 수상경력과 1972년2월19일 제7회경북친선궁도대회(여자개인)를 예천 무학정에서 우승, 1995년6월2일 제2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궁도대회 를 대회장에서 차상을 하는 등으로 충무정은 또, 전국체전에서 총5회의 대회에서 3회의 우승과 1회의 준우승 그리고 3위를 한 것과 함께 개인전에서는 총44회의 대회에서 31회의 우승과 8회의 준우승, 1회의 차상, 4회의 3위 입상 등으로 하위권보다 우승을 많이 한 정으로도 잘 알려지고 있다.
집궁연대별 사원 내역으로는 또, 1935年 한복흥 김주선, 박명덕, 장석주, 황재인등을 시작으로 2002년 권원춘, 이지희, 박창영, 주순호, 박경숙, 이정순, 강선일, 이남희, 강복순 등으로 총67년에 걸쳐 291명의 사원들이 배출돼 弓道의 고장으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궁도란?
활과 화살이 언제 어디서 발명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원시인들과 직립원인들이 활과 화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고고학자들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G. 챠일드의 저서 “문명의 기원”에는 인류가 투창이나 활을 사용한 것 은 구석기시대의 말엽, 즉 1-3만 년 전일 것이라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약10 만 년 전 부터 활을 사용해 왔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활과 화살의 발명은 분명히 인류의 역사에 있어 문화적 향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불의 발견이나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활과 화살의 발명에 의해서 맘모스, 사슴, 소, 물고기에 이르기 까지 동물을 잡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그렇게 되면서 인류의 만물 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더우기 활은 수렵뿐만 아니고 고대 인류의 전투 무기로서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한 수많은 외침에 의해 전쟁을 치러 야 했으며 국민의 심신단련 및 호국정신의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활의 사용과 발달을 꾀 하 여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까지 전래된 것은 오직 각궁 뿐이다.
궁도는 조상의 슬기와 얼을 만끽할 수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스포츠이며, 남 녀 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다른 운동과는 달리 신 체적 핸디캡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며, 과격하지도 않아 남녀노소 누구 나 즐길 수 있는 것과 함께 혼자서도 즐겁게 수련할 수 있는 스포츠이다.
궁도는 개인스포츠 로 분류되며, 자기와 과녁과의 관계에서 행해지고 성공과 실패의 원칙에 의 해서 흥미 가 지속되기 때문에 단독으로나 단체로 똑같이 즐길 수 있어 건강에 알맞은 스포츠로, 항상 올바른 자세와 균형을 요구하고 있어 척추를 신장하고 가슴을 튼튼히 하며 언제나 옳고 바른 자세를 갖는 태도나 습관을 기른다.
따라서 정신수양으로서의 궁도는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무심의 경지에서 활 을 쏠 때 비로소 관혁 에 적중되므로 정신일도가 경기의 주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정승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