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강요 (평택대 안명준교수)
기독교강요를 이해하기 위한 구조들
강요의 구조
구성의 원칙이 삼위일체적이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체계를 따른것이며,
루터의 소요리문답를 따른 형태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1.1)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해서 어떤 분이신가를 다룬다.
교리와 윤리의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경건신학
자신의 신학을 개인적이며 경건과 관련된 것으로 만든다.
강요에 나타난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플라톤적이다.
수평적보다는 수직적이다. 필립 홀트롭은 “플라톤은 직접 경험과 직관으로.
그리고 (어거스틴과 신플라톤주의) 하나님 안에 참여함으로써 지식을 얻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이 강요를 시작하는 방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에서 이미 플라톤적 관점을 엿 볼수 있다.“
칼빈의 사고는 항상 그러한 교리, 즉 하나님과 인간은 모두 영적실재이지만(1.12.3),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실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실재라는 교리로 귀결된다.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동질성을 중시한다(신적 존엄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강조). 플라톤의 사고영역 전체가 그의 목적에 유용하다(참여, 조명, 중재, 성령의 감동 등의 개념).(필립 홀트롭, 기독교강요핸드북, 25)
예를들면
finitum non capax infiniti.
특히 플라톤의 신개념은 칼빈의 신 개념 설명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볼수 있다.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nanae Religions)
인간을 강조). 여기서 강요라는 말은 법학의 용어로서 Gaius 가 법학강요(Institutiones)를 썼다. 후에 교부 Lactantius, Ambrosius는 신학논문의 제목에 이 말을 사용한다.
심지어 Bernard of Clairvaux도 사용, Cassianus의 경우 인스티투티오라는 제목이 신앙 생활의 규율과 구체적인 계율, 그리고 개인의 후년을 가르킨다. (필립, 28) 따라서 법학도였던 칼빈은 이 용어를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핵심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안내서이다.
Erasmus(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 1516), Bude 는 이상적 군주를 양육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인스티투티오의 개념은 그런 인물을 키워낼 교육과 훈련을 가리켰다.
이 사실에서 칼빈도 이 말의 사용을 통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발전하도록 돕는 교육과 훈련하는 암시가 있다고 본다(필, 29). 이것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칼빈이 당시 프란시스 왕에게 강요를 헌사한 점에서 나타난다. 루터(LC의 서문, 1529)나 멜랑히톤(Theologica institutio in Epistolam Pauli ad Romanus, 1519)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강요의 목적
칼빈은 “It has been my purpose in this labor to prepare and instruct candidates in sacred theology for the reading of the divine Word, in order that they may be able both to have easy access to it and to advance in it without stumbling. For I believe I have so embraced the sum of religion in all its parts. and have arranged it, it will not be difficult for him to determine what he ought especially to seek in Scripture, and to what end he ought to relate its contents. If, after this road has, as it were, been paved, I shall publish any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I shall always condense them, because I shall have no need to undertake long doctrinal discussions, and to digress into commonplaces. In this way the godly reader will be spared great annoyance and boredom, provided the approach Scripture armed with a knowledge of the present work, as a necessary tool. (Inst. Geneva, 1559)
결국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돕는 훈련 지침서이다.
칼빈의 실천적 모습을 본다.
기독교강요의 사상적 배경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여러 사상들에 대한 연구
기독교강요의 사상적배경
첫째, Sola Scriptura 다른 어떤 개혁가 보다도 구약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해석에도 나타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관에 있어서 쯔빙글리에 영향을 받은 것.
둘째,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초기 교회 공의회들 그리고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들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스티우스(Themistius), 키케로 뿐만 아니라 존 크리소스톰, 오리겐(Origen), 어거스틴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초기에 칼빈은 그리이스 교부들 중에서 크리소스톰을 특히 선호한 것처럼 보이며, 점차 어거스틴의 영향이 증대하였다. 특히, 교리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에게서 인용하였다. 신의 도성(De Clementia에서 이미 영향받음), 자유의지와 성례전, 은혜론과 예정론에 영향을 받음,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고 칼빈은 1559년 판에 말한다. 구속의 주요한 요점들을 간략하고 분명하게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스콜라 신학자들의 영향 롬바르트, 아퀴나스, 던스 스코투스, 오캄, Nomina post res (유명론-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서, 보편은 "물 뒤에 있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 universalia의 실재성 부정하고 개체강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중세의 일부 사상에 보다 밀접해 있다.(어떤 신학자는 그 근거를 로마법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한다.)
네째, 인문주의자들과 개혁가들에게 영향. 칼빈이 영향받은 인문주의자들로는 발라(Valla), 에라스무스(Erasmus), 부데(Bude)등이 있으며, 이들은 칼빈의 해석학에 많은 영향을 주엇다.
Cf. Myung Jun Ahn, "The Influences on Calvn's Hermeneutical Development of His Method," Hervormde Teologiese Studes, 55, 1999.
그들과 칼빈의 차이점
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받음 루터- 1536판 강요는 루터 소요리문답에서 영향을 받음, 기독교교리를 일치, 차이점은 공재설, 성경의 정경성, 예정, 교회, 기독론
멜랑톤- 기독론, 반대- 자유의지와 예정교리는 반대
부처- 1538-41사이 영향을 스트라스부그에서 실제적, 윤리적 관점에 대한 0
영향을 받음, 구원과 예정, 하나님의 나라개념, 경건의 강조,
칼빈이 기독교와 강요와 후기 개혁신학의 특징의 차이점을 비교
삼위일체 loci method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하나님의 주권강조 윤리과 경건강조 딱딱한 교리적 신학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원론 현실 역사의 실재성강조 . . . . . . . .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내용들
강요의 구조를 이해를 위하여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 중에 하나로서 강요는 1536년 6 장으로 시작되었으나 1559년에는 80 장으로 개정되고 증보되었다. 최종판의 영어 판은 1561년 번역되었다. 칼빈을 이해하려면 강요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강요는 그의 문학적 성격을 비롯한, 그의 신학의 심오한 깊이와 논리 그리고 명료하고 간결한 형태로 작성되었다. 이런 명료성과 간결성은 그의 로마서 강해(1640)를 시작으로 그의 성경을 다룬 모든 작품에서 그의 신학적 해석학의 근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1)
초판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구성되었다고 본다. 이런 구성에 대하여 웬델과 스파이제커, 멕닐은 강요가 루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초판은 요리문답서의 틀을 취하였다.
율법, 믿음. 기도에 관한 처음 3 장들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1529)과 대요리 문답에 근거하였으며, 4 장 성례와 5 장 거짓 성례는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에서 본 뜻 것이며, 6 장은 인간의 자유에 관한 루터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본다.(Jeremiah J. Smith, CE)
칼빈의 강요에 대한 이해는 최종판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신학적 구조에 대한 칼빈의 만족은 그의 최종판에서 나타난다.
Ioannes Calvinus Lectori
"nunquam tamen mihi satisfeci, donec in hunc ordinem qui nume proponitur digestum fuit."(yet I never satisfied myself, till it was arranged in the order in which it is now published) 한국어 번역에 있어서 “설명된“ 이란 말은 출판된 으로 고쳐야 한다.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1536년 판의 내용들
초판은 1536년 3월에 바젤(Basel)의 출판업자 토마스 플래터(Thomas Platter)와 발사스 라시우스(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 되었다.
저자는 칼빈 자신의 이름 그대로 하지 않았으며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
(Martia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중세 말시의 문답식 문헌의 관례에 따라서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십계명(1장), 사도신경(2장), 주기도문(3장), 성례(4장)의 순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여기에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논박을 추가하고(4장 끝부분), 소위 다섯 가지 하는 “거짓 성례”를 부정했다(5장). 마지막 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1. 1장: 율법에 관하여.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 3.4.5.10계명은 적용하거나 실례를 들어서 더 충분히 논의하고, 나머지 계명들은 간략하게 의역하고 있다. 결론부 에서는 율법의 효과와 칭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2. 2장: 믿음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는 주로 빠졌는데, 믿음의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논문, 사도신경의 해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에 관한 부분으로 짜여졌다.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재세례파와 반(反)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강한 대비가 장 전체에 걸쳐 있다.
3. 3장: 기도에 관하여. 이 장은 마틴 부쳐(Martin Bucer)의 <복음서 주석, 1530>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의 대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수다한 인간 중재자 사이의 대조이다. 전반적으로 카톨릭 예배의 허구와 복음주의 예배의 순수성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대조 점들이 다루어졌다.
4. 4장: 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세 단락은 1559년 판의 성례장의 순서(4. 14-18)와 대개 일치한다. 먼저 성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결론부로서 두 가지 주(主)의 성례의 집행을 짤막하게 논의한다.
성례 전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견해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례를 믿음의 증서에 찍힌 “봉인들”이라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박약한 이해력을 고려하셔서 조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하나의 성례전으로서 영적으로 말하면 육체적 결혼에 대하여 the exegetical principle of accommodation을 사용한다.
세례에 관해서는 재세례파와 도나투스파적인 주장 및 카톨릭의 견해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상징이며 표식”이라고 하는 쯔빙글리식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성찬에 관한 논의에서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성찬에 대해 그 때까지 있었던 무수한 논점들을 섭렵하여 나름대로 소화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는, 미해결의 문제들을 오랫동안 토론해 온 것처럼 곧바로 논쟁에 들어간다.
셋째로, 칼빈은 다양한 분파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더 충분한 신학적 논쟁을 앞질러간다.
성찬에 대한 기존의 두 이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례의 존엄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면 미신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성례의 가치와 유익을 냉랭하고 시시하게 다루면 성례를 경멸하게 된다.
칼빈이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야기 시킨 주 원인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의문을 품은 데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가?”라고 의문했어야 했다. 그는 미사숭배를 거부하며,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나 카톨릭식의 고행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쯔빙글리의 합리적인 축소론(the rationalistic reductionosm)에는 반대하지만, 실제적 현현과는 달리 영화롭게된 몸의 축약이라는 의견에는 찬성한다. 칼빈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무한한 심연을 기이하게 연결한 이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를 “마치” 육체적 현현인 것 “처럼” 받아들인다. 성례는 단순히 믿음과는 별개인 표적도 아니며, 성례 자체가 믿음의 역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성례는 협력한다.
이러한 논거는 칼빈 당대나 이전의 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근저에는 신학과 기독론상의 상이점이 내포되어 있다. 칼빈은 신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신학적 견해나 예배의 관례를 거부하는 강한 목회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올바른 성례의 집행에 관해 논의한다. 성례 신학과 관례상의 정오(正誤)를 갈기는 시금석은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5 장 6 장은 변증적이다.
5. 5장: 다섯 거짓 성례에 관하여.
(Sacramenta non esse quinque reliqua quae pro sacramentis hactenus vulgo habita sunt declaratur, tum qualia sint ostenditur) (It is demonstrated that the five remaining ones, until now commonly considered sacraments, are not sacraments: Then it is shown of what sort they are)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도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물론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론과 의식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시헹 중인 각 “성사”의 전거를 조사한 후, 그것의 실제 내력과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준다. 견진례와 종부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논의하고,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는 길게 다룬다. 이 장과 6장의 중간부인 교회의 권능 편에서 칼빈은 중세 교회체계의 토대를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논파한다.
6. 6장: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 권능, 그리고 정치적 조직(세속정부)
제6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는 복음에 입각하여 형성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이것은 1634년의 벽보비난사건 의대답이 되었다.
개정판들의 구성과 특징
웬델의 칼빈과 배틀즈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 분석, 파커의 칼빈 신학 입문을 중심으로,
제 2판 (1539년 말, 스트라스부르그)
형식도 요리문답에서 벗어나 칼빈의 판단에 따른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전개.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1 장은 하나님의 지식, 2장은 인간의 지식, 3장은 율법, 4장은 믿음(사도신경), 5장은 회개, 6장은 믿음에 대한 의인(義認), 7장은 구약과 신약, 8장은 예정, 9장은 기도, 10장은 성례, 11장은 세례, 12장은 주의 만찬, 13장은 기독인의 자유, 14장은 교회의 권위(Ecclesiastical Power), 15장은 시민의 정부, 16장은 5가지의 거짓된 성례, 17장은 기독인의 삶)
그 특징들은 재 세례파, 카롤리와 논쟁의 결과와 세르베투스의 저서에 대한 문제로 삼위일체론 상세히 보완한다.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얻은 결론들을 많이 수록해 놓고 있다.
이중예정론도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과의 논쟁과 부처(Bucer)의 영향을 통해 2판에 추가된 것이다. 배틀즈에 따르면(15) 어거스틴에 대한 자료가 상당량 보강된다. 이를 통해, 초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칼빈의 기독교적 인류학과 교회론에 대한 연구가 어거스틴에게서 상당히 힘입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2판에서는 교부 존 크리소스톰의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처의 Metaphrases(1536)의 영향이 나타난다.
1542년 7월 1일 파리 의회는 라틴어판과 프랑스판 강요가 이단으로 발매 금지령.
제 3판 (1543년, 제네바)
역시 라틴어로 출판되었으며, 1545년에 불어로 번역되었다. 제2판보다 4장이 증보되어 총 21장이 되었다. 증보된 장들의 내용은 맹세, 인간의 전승(전통과 유전), 교회의 권한, 교회 조직에 관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 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그 훈련에 대한 칼빈 신앙의 성장을 보여준다.
제 4판 (1550년, 제네바)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1년 후 불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장(章)의 수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종전과는 달리 각 장들이 몇 단락으로 세분되어 독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 판은 여러 판을 거듭하며 출판되었는데,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그리고 성자 숭배, 형상 숭배에 관한 것을 논박하고, 인간 양심을 해설한 것이 증보 되었다.
최종판 (1559년, 제네바)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1559년 제네바의 로베르 에띠엔(Robert Etienne) 출판사를 통해 나왔으며, 다른 해에 불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전체4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제1권은 신론으로 모두 18장이며, 제2권은 기독론으로 총 17장이고, 제3권은 성령론으로 25장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제4권은 교회론인데 20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으 보면 총 80장이다.
필립 홀트롭, 30.
기존 판들은 제 1권 1, 2 장을 개별 주제(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에 할애하지만, 1559년 판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동질성에 초점으 fen고,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섭리와 예정은 따로 때어 다룬다.
제 2권에서는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관련한다(7장). 인간의 참된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감사의 심정으로 율법 준수 강조(6, 7장)
성령에 관한 논의가 확대되었다.
기도는(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19)와 예정 교리(21-24) 자리 잡았다.
위로와 확신를 주시는 성령의 적극적 사역을 다룬 후에 예정교리를 다룬다. 이것은 개혁주의 정통신학 또는 스콜라 신학이 예정을 다루는 위치와 아주 다르다.
De cognitone de creatoris
Dei notitiam et nostri res esse coniunctas, et quomodo inter se cohaerenat.
(The knowledge of God and that of ourselves are connected. How they are interrelated?)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
1. 하나님과 계시에 대한 지식 칼빈은 기독교 강요 도입부에서 "참되고 확실한 지혜로 일컬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우리들의 지식의 전체는 두 가지 부분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인간에 대한 지식이 그것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분은 전적으로 타자(otherness)라는 신학을 전제로하고 있다. 피조물과 하나님, 신성과 인성의 분명한 구분이 칼빈의 모든 신학적 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며, 그 논쟁들의 핵심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실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주권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한 곳에 멀리 떨어져 있고, 감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Hilary of Poitiers)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깨닫는 특권은 하나님께 위임하라.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분은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알고 있는 자 뿐이기 때문이다.
..." 즉 칼빈은 인간의 이해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다고 본다. "단순히 하나님이란 분이 계시다는 식으로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른가를 인식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즉 그 방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신앙도 없고, 경건도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깨달아 진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경외와 숭배의 마음과 모든 善에 대해서 가르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의 관심은 철학으로부터 추론된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들과 맺은 관계에 대한 지식이며, 루터도 역시 가르친바 있듯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혜택에 대해 감사드리게 하는 그런 지식인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성경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교리에 대해 극소량도 맛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주신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칼빈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신비는 오직 그것을 주신 사람들만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수없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여야만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최종목적이 무엇인가를 '기독교 강요'의 서문 '왕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하나님께 대해 선한 감격에 의해서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참된 경건 가운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이라고 쓰고 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성장시키고 경외의 길로 나아가는데 있다고 본다.
모든 성경 연구의 목적이 그리스도께로 집결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전체의 핵심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와 지혜의 빛이며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죄 많은 인간들로부터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계시하셨고, 성경은 바로 그 계시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려고 의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역시 그의 살아있는 말씀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최후까지 알려지고 깨달아지는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선포하여 세상 끝까지 알려지도록 하셨으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다른 근거에 의지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온전히 증거 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권위와 영감을 갖는다. 물론 외형적으로 성경 그 자체는 다른 역사적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글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발견하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는 성령의 중재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시키기 위하여 성경의 기록들을 이용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역사 하여 이 말씀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역사 하신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란 성경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모든 성도의 영혼에 심어주는 성령의 증거임을 규정하였다. "만일 그 말씀이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해서 인을 치지 않은 다면 사람의 마음속에 신뢰감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선지자들이 하늘로부터 전해진 계명을 신실하게 제시한 것들을 우리 마음이 이해하도록 열어주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우리가 그들의 기록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도 역시 성령이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영감의 실체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경의 권위를 세워주는 최상의 기준이다.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성경 속에 담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계시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음을 증거할 수 있고, 또한 오로지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역사 하신다.
따라서 로마교회에서 주장한 교회의 권위와 전통에 입각한 외적권위를 거부하였고 신령주의자들의 성경외적 계시도 거부하였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모든 성경은 똑같은 수준이며 모두 다 영감을 받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발라(Valla)나 에라스무스(Erasmus)의 역사적 비평이나 카스텔요(Sebastian Castellio)의 아가서에 대한 영감에 대한 회의는 범죄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신구약 성경이 모두 동등하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속에 담긴 뜻과 다른 어떤 것도 구약 성경속에서 말씀하신 적도 없고, 의도하신 적도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모두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겼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구약성경에 대한 세밀한 그의 연구와 노력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 속의 말씀은 그 무엇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며, 성경 그 자체는 주께서 신실한 성도에게 성령의 조명을 분배하시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칼빈이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데 필요한 수단은 오직 성경에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으며 신성으로 지향하려는 자연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장소, 모든 사물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고 계시므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구실로 삼아 변명할 수 없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은밀한 영감으로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진 믿음의 씨앗'에 의해서 스스로 나타내시고, 또 간접적으로는 창조의 모든 역사 속에서 나타내신다.
칼빈은 자연계시를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자연속에, 특히 인간의 본성 속에서 계시하시고 둘째는 만물의 자연적인 발전과정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셋째는 인류의 역사속에 예시하신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자연계시에 대해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되지 못하며 어리석은 미신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은 우선적으로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유일한 선물이며, 그것이 올바로 깨달아지는 유일한 방법인 믿음에 의해서,
즉 성령으로 인하여 조명을 주심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본성에 의해서 만은 결코 믿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중보자 없이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중보자는 우리가 오직 성령의 영감아래서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2. 삼위일체 칼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1539년 카롤리에 의해서 제기된 논쟁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와 거룩한 삼위의 구별성을 지지하기 위해 더 많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는 믿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하여 성령의 신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1559년 칼빈은 독생자의 신성이야말로 신앙의 필수적인 기초라는 이론을 전개시키면서 왜 자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가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으며 4세기의 공의회에서 승인된 삼위일체론을 부정한 세르베투스에 대한 제네바 재판의 일반적인 이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세 인격의 신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독교 신학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근본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하나이며 이러한 본질이 육신 속에서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심성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은 성자와 성령에 전체적으로 공통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어야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한분 하나님으로 통일된다고 본다면 우리는 똑같다는 점 때문에 성자와 성부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칼빈은 새로운 제안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하였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용어들은 우리에게 참된 구별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다른 명칭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분리(division)가 아니라 구별(distinction)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직시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덧붙인 구절은 성자가 성부와는 다른 속성을 갖지 않는 한, 하나님 안에서의 말씀이 될 수 없으며 또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면 성부와 더불어 그의 영광을 갖지 못할것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령의 구별은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신다고 할 때 나타난다. <그 성령의 구별됨은>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여러 구절 속에서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을 때, 성자와는 다른 이름으로 일컬어질 때 구별된다."
그는 삼위일체의 세 인격의 속성들을 정의할 때 성 어거스틴을 매우 철저히 따르면서 다시 한 번 전통에 호소하였다. "성부에 대하여, 그 분은 모든 행위의 처음이며 모든 사물의 원천이며 근본이다. 성자에 대하여, 그 분은 모든 사물이 배치되는 질서와 지혜와 지각의 원천이다. 성령에 대하여 그분은 모든 행위의 효력과 가치의 힘이다. 비록 독창성은 결여되었지만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가 칼빈 신학의 기본적인 핵심이 되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3. 창조 우리가 성경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만물의 창조주로서 나타나신다. 칼빈에 의하면, 확실히 이 교리는 구속의 교리와 주의 깊게 구별되어야만 하는 교리로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지식에 속한 창조와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과 화해하신 성부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지식으로부터 구별되어진다.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어졌다. 보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우주와 인간이 완전한 삼위일체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행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無로부터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에게 각각의 존재성을 부여하신 존재 그 자체로서의 영원성을 스스로 계시하셨다.
칼빈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에게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셨는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창조하실 수 있으셨지만 6일 동안의 창조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인간에게 유익하고 이로울 모든 것을 먼저 예비하셨다."
칼빈은 '예정론'에서 "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속에서 영광되게 하시려는 것이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최종적으로 추구해야할 직접적인 목적 그 자체로서 직접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하고 볼 수 있는 세상은 인간의 창조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나 천사, 악마가 사는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의 영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사자로 보내신다. 성경속에 나타난 천사의 칭호는 그들의 사역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하여 임명된 수호천사라는 고전적 관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항상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고 보호하도록 준비되어 있으며, 우리의 길을 곧게 하고, 모든 악한 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위해 모든 것을 돌본다." 그러나 그는 천사의 외적인 모습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완전하지 못하며, 우리와 같이 한 원천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과 같다"고 본다.
칼빈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지혜를 가진 영'이라고 보았으며 그들의 존재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인용한다. 그밖에도 천사와 악마, 인간의 영혼은 창조된 영적 존재로 분류되었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에 의해 감각적이고 영적인 세계 양쪽 모두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축소판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몸과 영혼 두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혼'이란 용어에 대해 내가 의미하는 바는 비록 창조되었지만 고결한 부분으로 불멸의 영이라는 뜻으로 본다"
그것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 그것은 불멸하며, 둘째, 그것은 창조되었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인간의 두 구성부분에서 고결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영혼불멸성에 관한 주제는 1559년 일련의 심리학적 논쟁들과 성경의 본문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이에 덧붙여서, 칼빈은 영혼은 그 자체의 본질을 갖고 있으며, '호흡'이나 혹은 '육신'에 불어넣어진 어떤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善과 惡에 대한 의식이 영혼이 불멸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면, 아니 인간의 꿈들도 역시 인간의 불멸성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고 보았다. "수면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에 대한 생각들과 염려를 인간들에게 제공할 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 즉 예감을 가져다준다."
칼빈은 '인간의 영혼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 플라톤의 철학을 지지하며 영혼의 불멸성만이 하나님의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 불멸성은 '영혼자체로서 스스로 불멸'이라는 피기우스(Pighius)의 이론에 반대하고 불멸은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지지한다.
따라서 영혼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영혼이란 단지 창조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불멸성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나 영혼으로부터 거두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원이 박탈된 영혼은 육체와 같이 소멸하여서 결국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창조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인간은 창조의 핵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땅위에 살도록 하고, 육신의 사망이후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미래의 생명도 주셨고, 인간에게 특별한 은사를 내리셨는데, 그 중에서 칼빈이 특히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 아담이 창조될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의로운 마음을 향유하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스스로의 감각이나 모든 내면적 사상을 잘 조절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완전한 순결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보좌가 정신과 마음 또는 영혼과 그 능력에 자리잡고 있지만, 심지어 마음뿐만 아니라 육체 그 자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지 않는 부분이란 없는 것이다."고 쓰고 있다.
4. 하나님의 섭리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자신의 논제를 1559년 최종판에 가서야 충분히 피력하고 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단 한 번의 역사로 모든 창조를 완성시킨 일시적인 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충분한 일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힘은 첫 번째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지급도 우주의 영원한 상태 속에서 온 누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도 그것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창조물에 관심을 베푸시고 철저히 중재하시며 자연법칙에 대한 맹목적인 행위나 하물며 우연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공통된 견해를 발견하게 되며 부처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1539년 이후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창조와 결부시키고 있는데 "...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의 움직임을 운행하시며, 작은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을 보살피시고 유지시키고 먹여주신다." 섭리의 개념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활동을 포함한다.
즉 이 땅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처하시기 위해 키를 잡고 있는 배의 선장과 같다고 본다.
1545년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Against the Libertines)이란 논문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세가지 측면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각기 주신 상황과 특성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탄과 악인까지 그의 도구 가운데 포함시켜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의 종을 도우시거나 악인을 응징하는 것, 즉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시고 혹은 父性的인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의와 심판을 실현시키는 "특별한 섭리'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믿는자들을 다스리시고 살아계시고, 그들 속에서 통치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령의 내적 증거로부터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재창조의 수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감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자연의 질서와 특별한 섭리, 그리고 성령의 내적 작용의 지배 아래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의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교회도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보살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섭리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섭리 안에서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성도들의 가슴속에서 비취어질 때, 그것은 성도를 억압하는 공포와 고난으로부터 구원하고, 모든 의심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칼빈에 있어서 자신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2 가지의 순서
1.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칼빈의 작품 1539-1554 강요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와 “인간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라는 제목으로 부쳤으나, 1559판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둘이 어떻게 서로 줄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De cognitone de creatoris
Dei notitiam et nostri res esse coniunctas, et quomodo inter se cohaerenat.
(The knowledge of God and that of ourselves are connected. How they are interrelated?)
1559년 판에서 참된 지혜는 Dei cognitione et nostri. 말함으로서 하나님이 맨 앞에 나오지만, 1539-41 판에서는 cognitione Dei et nostri로 말한다.
두 관계에 대한 순서에서
먼저 1의 경우는 칼빈이 알렉산더 클레맨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Soliloquies 1, 2, 7,에서
Clement of Alexandria, The Instructor, 3,1
Chap. 1.- On the True Beauty
"It is then, as appears, the greatest of all lessons to know one's self. For if one know himself. he will know God; and knowing God, he will be made like God, not by wearing gold or long robes, but by well-doing, and by requiring as few things as possible."
어거스틴의 작품 Soliloquies 1, 2, 7,에서 에서는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그것 뿐인가?“-”그 외에는 없다.“ 그리고 2,1,1에서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알게 하시며 또한 당신도 알게 하옵소서“(LCC, VI. 26, 41).
7. A. Behold I have prayed to God. R. What then wouldst thou know? A. All these things which I have prayed for. R. Sum them up in brief. A. God and the soul, that is what I desire to know. R. Nothing more? A. Nothing whatever. R. Therefore begin to inquire. But first explain how, if God should be set forth to thee, thou wouldst be able to say, It is enough. A. I know not how He is to be so set forth to me as that I shall say, It is enough: for I believe not that I know anything in such wise as I desire to know God. R. What then are we to do? Dost thou not judge that first thou oughtest to know, what it is to know God sufficiently, so that arriving at that point, thou mayst seek no farther? A. So I judge, indeed: but how that is to be brought about, I see not. For what have I ever understood like to God, so that I could say, As I understand this, so would I fain understand God? R. Not having yet made acquaintance with God, whence hast thou come to know that thou knowest nothing like to God? A. Because if I knew anything like God, I should doubtless love it: but now I love nothing else than God and the soul, neither of which I know. R. Do you then not love your friends? A. Loving them, how can I otherwise than love the soul? R. Do you then love gnats and bugs similarly? A. The animating soul I said I loved, not animals. R. Men are then either not your friends, or you do not love them. For every man is an animal, and you say that you do not love animals. A. Men are my friends, and I love them, not in that they are animals, but in that they are men, that is, in that they are animated by rational souls, which I love even in highwaymen. For I may with good right in any man love reason, even though I rightly hate him, who uses ill that which I love. Therefore I love my friends the more, the more worthily they use their rational soul, or certainly the more earnestly they desire to use it worthily.
Book II.
1. A. Long enough has our work been intermitted, and impatient is Love, nor have tears a measure, unless to Love is given what is loved: wherefore, let us enter upon the Second Book. R. Let us enter upon it. A. Let us believe that God will be present. R. Let us believe indeed, if even this is in our power. A. Our power He Himself is. R. Therefore pray most briefly and perfectly, as much as thou canst. A. God, always the same, let me know myself, let me know Thee. I have prayed. R. Thou who wilt know thyself, knowest thou that thou art? A. I know. R. Whence knowest thou? A. I know not. R. Feelest thou thyself to be simple, or manifold? A. I know not. R. Knowest thou thyself tO be moved? A. I know not. R. Knowest thou thyself to think? A. I know. R. Therefore it is true that thou thinkest. A. True. R. Knowest thou thyself to be immortal? A. I know not. R.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기독교교 강요의 전체 주제이다-파커, 25. 칼빈신학입문.
1536년 강요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 시작하고 그리고 인간을 아는 지식으로 넘어간다. 1539-41 판 강요는 1559판도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1559년 판은 순서를 뒤집었고, 양자의 상호 연관에 강조를 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먼저 논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하는 것보다 정당한 순서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래서 제 2 자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그런데 왜 칼빈은 1559년 판 처음을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시작했을까? 이 문제는 칼빈이 저술한 글의 순서를 따라 이해하면 이해가 된다. 먼저 칼빈이 자신을 알비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클레맨트나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흘러 나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인간이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불행에 있는 것을 의식하여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고 논리를 말한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1:1,2)” 칼빈은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하지만 인간은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때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알며 자신의 부패한 인간의 모습을 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빈의 논리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 인간은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먼저 논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하는 것보다 정당한 순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제 2 장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Duplex cognitio Domini
1559년 판에서 이중적 지식에 관한 논리는 기독교 강요에 흐르는 중요한 그의 신학전개 방법론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발저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나냈다. r다음올 그리스도의 인격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적 지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전자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를 적당한 곳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강요 1, 2.1)
칼빈의 자연계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연계시는 인정했으나 부족함을 지적함, 자연신학은 인정치 않음. 중생한 사람은 자연신학이 가능함.
칼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지각과 종교의 씨를 심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칼빈의 자연계시론이다.
CO 2, 36. Inst. 1, 3. 1. Dei notitiam hominum mentibus naturaliter esse inditam. (The knowledge of God has been naturally implanted in the mind of men,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간의 마음안에 자연적으로 심겨져 있다.)
계속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으로 인간의 마음에(정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자연계시(일반계시)을 유전자의 코드 처럼 심었다고 주장한다.
"Quemdam inesse humanae menti, et quidem naturali instinctu, divinitatis sensum( There is within the human mind, and indeed by natural instinct, an awareness of divinity,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안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자연적인 본능으로 이 신지식을(자연계시) 갖고 있다.
sui numinis intelligentiam universis Deus ipse indidit(God himself has implanted in all men a certain understanding of his divine majesty.
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위엄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주셨다고 한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신들의 창조자임을 알게된다.
unum omnes intelligant Deum esse, et suum esse opificem (men one and all perceive that there is a God and that he is their Maker)
칼빈은 여기에서 더나가서 세계종교의 근원에 대하여 논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종교의 씨를 주었기 때문에 세계가 존재한 날부터 종교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religionis semen retinent , to retain some seed of religion).
따라서 종교성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고 심지어 그것을 부인한다고 해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in eo tacita quaedam confessio est, inscriptum omnium cordibus divinitatis sensum (there lies in this a tacit confession of a sense of deity inscribed in the hearts of all,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진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무언의 고백이 이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자연계시)는 죄로 인하여 오염되었기 때문에 특별계시인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Inst 1, 4. 1, 시편 14:1, 53:1 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자연의 빛을 꺼 버 렸다.(suffocata naturae luce, by extinguishing the light of nature) 악인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칼빈의 전통에 서 있는 WCF 1장 1절은 자연의 빛(the light of nature)은 비록 하나님의 선과 지혜, 권능을 나타남을 말하지만 성경의 필요성을 말한다.
Although the light of nature. . . . do so far manifest the goodness, wisdom and power of God, (Latin Confessio Fidei, Quanquam naturae lumen...... manifestant)
as to leave men inexcusable; yet they are not sufficient to give that knowledge of God, and of his will, wich is necessary unto salvation. . . . which maketh the Holy Scripture to be most necessary.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