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녘에 서서
소흔 이한배
가을 추수가 끝난 들녘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얼마 전만 해도 들판 가득 노랗게 영글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두 베어내 텅 빈 들녘. 가을은 언제나 채움으로 와서 비움으로 간다. 그 빈자리에 사료로 쓰기 위해 하얀 비닐로 묶어 놓은 짚가리들만 뒹굴고 있다. 이렇게 텅 빈 가을들녘에 서면 숙연해지면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느끼곤 한다.
가을은 잘 영글었든 쭉정이든 상관없다. 또 벌레 먹은 이파리든 여름내 싱그러웠던 이파리든 마지막 열정으로 불태운 뒤에 미련 없이 모두 비워낸다. 다시 시작될 새로운 채움은 과거 미련에 연연하면 안 되기 때문이리라. 새로운 김치를 담으려면 김칫독에 먼저 담았던 김치의 냄새까지 완전히 제거해야 하듯이….
농부들은 들녘을 채우기 위해 봄부터 얼마나 애썼는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할 만큼 부지런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농사일. 봄에 씨 뿌려 싹틔우고 여름내 뙤약볕에 서서 가물 때는 가문대로 비가 많이 오면 오는 대로 노심초사 한 날들이 얼마이던가? 들녘은 그런 것들을 감내해 무던히 지켜낸 대견함으로 가득하다. 그들에게 훈장을 주듯 모두 내어 주고 다시 채우기 위해 겨우내 고요해진다.
포장해 놓은 하얀 짚가리는 그동안 애쓴 농부들의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는 듯하여 아름다움을 더한다. 봄내 여름내 채운 들녘. 그리고 이제 모두 비워낸 들녘. 이것이 바로 참 채움이요 참 비움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땀 한번 흘려 보지 못한 자의 가을 들녘은 그냥 허허벌판이겠지만, 땀흘려 제대로 채운 자의 가을 들녘은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겠는가! 비어 있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이리라.
가을들녘에 서면 나의 들녘엔 무엇으로 채우고 비웠는가? 나의 가을을 생각게 된다. 옳고 그름, 곱고 미움, 이기고 짐, 욕심, 번뇌…. 어느덧 나의 가을도 다 끝나가는데 아직도 비워내지 못하고 오락가락 헤매고 있다. 유행가 가사처럼 가을 들녘에 서면 왜 작아지기만 하는 걸까? 가을 들녘은 미련 없이 모두 비워내는데 나는 차마 다 비워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는 그 미련마저 던져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스멀스멀 꿈틀대기 일쑤니 이를 어찌하랴.
젊었을 때 스님들한테 들은 말이 있다. 마음 비우라는 거다. 처음엔 내 속에 무엇을 채우고 얼마나 채웠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비울 수 있겠는가? 마음을 비운다는 게 기능은 한 건가? 반감도 있었다. 또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라는데 그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 그게 곧 삶이 아니던가? 그걸 내려놓으면 어쩌라는 건가? 처음에는 계속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열반하신 법주사 회주 혜정 스님의 법문을 듣고 무릎을 쳤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비우는 것이 아니고 ‘만유(萬有)를 짜내고 정제(精製)한 뒤에 공(空). 세상의 모든 것을 내 걸로 만든 다음에 비워내는 것이 진짜 비움이다.’라는 말씀이었다. 가을 들녘처럼 알찬 영글음으로 가득 채운 다음에 비워냄이란 걸 그때 알았다. 하지만 내 속에 무엇을 채웠고 얼마나 채웠는지 알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채워도 채워도 덜 찬 거 같고 어떤 때는 다차면 비워지겠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종일 채우고 비우며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나의 삶도 그럴 거로 생각했다.
이순의 나이가 되니 굳이 비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해야 하는 것, 좋아해야 하는 것, 바람을 가져야 하는 것들을 위해 살아왔다. 이젠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바라는 걸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겨야지, 꼭 가져야지, 왜 저러지 하는 마음들이 하나둘씩 점점 사라지는 거다. 그것도 저절로 사라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왜 그랬지? 화 안 내고 욕심부리지 않고 시기심(猜忌心)을 가라앉히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점점 텅 빈 들녘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한다. 이게 비워낸다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비움의 공간은 나를 고요하게 자유롭게 하였다.
그때부터 고요해진 들녘이 아름다워 보이고 하늘이 맑고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가을 들녘에서 바라본 파란 하늘. 문득 ‘들녘처럼, 하늘처럼’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구름도 멋지고 드높은 하늘을 보면서 새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천리를 날아간다는 붕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