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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제행이라는 말은…「법화경」의 '제법', 「금강경」의 '범소유상',「화엄경」의 '일체'와 같은 말이다.
일체 모든 것들은 항상 하지 않아 늘 변하는 생멸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리면
이 세상의 법인 생멸(生滅)법을 초월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 것이란 말이다. 이 말도 똑같은 말이다. "제행무상", 즉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생멸법이고 이 세상은 그대로 생멸법이기 때문에 생멸이라는 집착을 놓으면 그대로 고요하다, 열반을 얻는다는 말이다.
『금강경』에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는데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말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없고(無我) 그렇기 때문에 일체는 공(空)으로 허망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온통 괴로움이라고 부처님께서 삼법인(三法印)의 교설로써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이렇게 무상하여 허망하지만 상(相)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무상한 생멸법을 바로 관하여 생멸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릴 수 있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고요한 열반에 이를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조금 어려웠나?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사유해 본다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기법과 삼법인, 중도와 공사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진다면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이렇게『화엄경』·『법화경』·『열반경』의 사구게가 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하고, 방편을 달리하고 관점을 달리하여 근기가 서로 다른 이들에게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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