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향반 ㆍ토반으로 불린 사족(士族)들은 16세기 이래로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향인을 만들어 사족 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고 향회를 만들어 향촌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농민들에게 유교적인 향약을 강요하였다.
POINT 2 포구나 장시를 거점으로 상행위를 한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 선상과, 선상들의 물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업을 하는 객주와 여각이 있었다.
POINT 3 독점적 어용상인인 공인들은 서울의 시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할 수 있었다.
POINT 4 18세기 후반 이래로,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고 일정량의 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공동납(共同納)의 형태로 촌락에 부과됨으로써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다.
POINT 5 북인계열은 대체로 영남학파 중에서도 조식의 학통을 이어 받았으며, 특히 절의를 중시하여 정인홍,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을 많이 배출하였고 왜란중 주전론을 펼쳤다.
POINT 6 갑오 ㆍ을미개혁 과정에서 1차는 군국기무처 대신들이, 2차는 심국간섭 이후 친러 경향인 박영효 내각이, 3차는 을미사변이후 일본세력이 각각 주도하였다.
POINT 7 정약용은 마가회통에서 종두법을 소개하였고, 이러한 과학적인 의학의 전통이 계승되어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체질의학으로서 주목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을 확립하였다.
POINT 8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상태로 들어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되었고, 이것을 기회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POINT 9 아관파천 1년만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이 개혁의 시정방향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복고적인 것이었다.
POINT 10 장시를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며, 이들은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POINT 11 대원군의 개혁정치 사상은 농업중심의 개혁사상, 즉 경세치용학파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POINT 12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하여 프랑스 선교사의 알선으로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려 하였다.
POINT 13 을미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을미의병이 해산된 이후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여 반봉건 ㆍ반침략운동을 계속하였다.
POINT 14 실학자 이익은 체계적으로 사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데 이바지 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의식을 계승한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종래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자적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POINT 15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막대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였고, 당백전을 남발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POINT 16 미륵신앙은 일찍부터 왕조말기의 변란세력에 의해 변혁사상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조선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POINT 17 조선후기 지주들은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영하였으며, 이에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은 도시로 나아가서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곤하였다.
POINT 18 조선후기 농법의 개량 중, 씨뿌리기 방법의 개선은 논농사와 밭농사에서 모두 진행되었으며, 논농사에서는 이앙법이 밭농사에서는 견종법이 시행되었다.
POINT 19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은, 성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황의 학설에도 호의를 보이는 반면, 이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이기도 하여 성리학의 이해에 탄력성을 보여주었고, 윤후의 학설을 두둔하였는가 하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POINT 20 실학자들의 현실중시 사상은 그림에도 반영되어, 그 결과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발달하였다.
POINT 21 양명학은 주로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재야의 소론계열학자와 불우한 종친출신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다.
POINT 22 도일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은 친중, 결일, 연미의 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책의 유포는 미국과의 수교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한편 영남 만인소와 같은 유생의 반발을 야기했다.
POINT 23 이모작으로 생산된 보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대상이 되지 않았다.
POINT 24 조선후기에 인기 있는 상품 작물로는 담배 , 인삼, 생감, 면화, 채소, 약초 등이 있었다.
POINT 25 타조법에서는 전세와 종자, 농기구를 소작농민이 부담하였으며, 지주의 간섭이 심하였다. 포조법은 수확량의 3분의1정도의 정액지대였고 정액이므로 지주의 간섭이 적었으며 특별한 경우에 인정되는 소작인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POINT 26 조선후기 사회계층의 구조 변동은 ‘계층간의 이동’과 ‘내부에서의 이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POINT 27 부유한 평민들은 공명첩을 매입하거나 납속책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양반으로 신분상승 할 수 있었다.
POINT 28 홍경래와 최제우와 전봉준은 모두 몰락 양반 출신이었다.
POINT 29 1894년 갑오개혁 때 고종의 교육입국조서로서 많은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897년 광무개혁 때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근대적 공장과 회사들이 대거 설립되었고, 실업교육 강화와 유학생 파견도 시행하였다.
POINT 30 강화도조약에 이어서 부속조약과 통상장정이 마련되어서 일본화폐 유통, 일본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이 허용되었다.
POINT 31 의병전쟁 초기에는 봉건적 지배질서의 유지를 고집하는 양반 유생층의 지도노선으로 의병 내부의 결속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POINT 3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에는 친청경향의 정권이, 삼국간섭과 아관파천 이후에는 친러내각이 수립되었다.
POINT 33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의병 운동에 가담하였고, 의병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는 관군이 의병에 합세한 사례도 있었다.
POINT 34 조선시대 중인들은 그 역량이 뛰어날 경우에는 요직을 오를 수 있도록 법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고, 이것이 잘 시행되지 않자 19세기 중엽에는 대규모 소청운동을 전개하였다.
POINT 35 조선전기 이후의 시전상인과 보부상, 대동법 실시 이후의 공인은 모두 관허상인이었다.
POINT 36 서얼들은 왜란이후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자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상소운동을 펼쳐 중요한 직책에 나아가고자 하였고, 정조 때에는 이덕무, 박제기 등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되기도 하였다.
POINT 37 1905년 을미의병 때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의병을 모아 영해에 입성하여 관군의 무기를 탈취한 뒤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POINT 38 독립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민 ㆍ관 동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성립될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보수파가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추구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명령을 내리게 되고,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등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말았으며, 의회는 설립되지 못하였다.
POINT 39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의병활동 홍보, 국채보상운동 지원 등 적극적으로 애국심 고취에 힘썼다.
POINT 40 조선전기의 향촌 방어를 위한 예비군이 잡색군이고, 조선후기의 지방군은 속오군이며, 천민들이 이러한 군대에 편성된 것은 그 자체가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올려주는 것이었으며, 이들이 군사적 공덕을 쌓아 평민이나 양반(무반)으로 신분상승하는 사례가 많았다. 잡색군에는 일반농민이 편입되지 않은 예비군이었으나 속오군은 일반농민이 편입되는 정규 지방군 이었다.
POINT 41 양반 관료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직전법이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폐지되고 토지소유는 양반 지주 중심으로 편중되어 갔다.
POINT 42 도입시기의 천주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양문물의 하나로 이해되었으며, 정부도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처음에는 방관하였다.
POINT 43 조선후기 장시의 주요 상품작물로는 쌀, 담배, 인삼, 생강등이었으나, 가장 많이 거래된 물품은 쌀이었다.
POINT 44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이후, 조선후기의 광산경영은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로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인 협주와 채굴노동자, 제련노동자 등을 고용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생산체제는 선대제와 유사한 상업자본주의 단계의 생산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POINT 45 정약용은 전론(田論)에서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인 여전제를 구상하였으나, 실현 가능성이 어려움을 알고 말년에는 중국 주(周)나라의 토지지제도인 토지 공유제 기반의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POINT 46 조선후기에는 경영형 부농과 관권의 결탁으로 향리 세력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POINT 47 개항이후의 통리기무아문, 갑오개혁때의 군국기무처는 모두 합의제 기관이었으며, 통리기무아문은 개량적 개화론자(사대당)중심의 개항사무의 총괄기구였으며, 군국기무처는 일본의 영향하에 있었던 초정부적인 비상개혁기구였다.
POINT 48 왜란중에 설치된 훈련도감은 전문적 전투병인 삼수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병제 ㆍ상비군제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임기응변식으로 설치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사실상 서인세력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POINT 49 개항이후부터 일본상인의 활동이 청국상인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했으나, 임오군란 이후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치열한 경쟁 체제를 형성하였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상인이 조선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POINT 50 동학의 자치기관은 집강소이고, 서간도(남만주)삼원보에 설치한 신민회의 자치 기관은 경학사이다.
POINT 51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개간회사인 농광회사를 세웠다.
POINT 52 신민회는 서간도 삼원보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경학사라는 자치기관을 두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운용하였다.
POINT 53 제 2차 영 ㆍ일 동맹은 영국의 인도에서의 식민지배권과 일본의 한국에서의 식민지배권을 존중한 내용이다.
POINT 54 산미증산계획은 1933년 일본의 농업공황으로 중단되었다가 중일전쟁 이후 계속되었다.
POINT 55 토지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은 경작권과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기한부 계약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POINT 56 조선에서 방곡령은, 흉년이 들면 지방관의 직권으로 실시할 수 있었으나, 일본을 “통상장정”의 ‘방곡령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개월 전에 사전연락 하기로 한 규정을 들어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POINT 57 독립협회의 기관지는 독립신문, 상해 임시 정부의 기관지도 독립신문, 천도교의 기관지는 만세보였다.
POINT 58 신민회, 대한광복회, 대종교는 모두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POINT 59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중광단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발견되어 북로군정서군이 조직되었으며, 북로군정서군이 승리한 전투가 청산리대첩이다.
POINT 60 대한제국시기에 이용구등의 친일파가 일진회를 조직하고 동학조직을 흡수하려 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동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민족종교로 발전시켰다.
POINT 61 임시정부의 조직 중 교통국은 통신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연통제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행정조직이었다.
POINT 62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은 개항초기에 외국 상품 판매로 많은 이득을 획득 할 수 있었으나, 외국상인의 내륙상업이 허용됨에 따라 이들 상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자본축적에 성공한 일부 상인들은 상회사를 조직하여 일본상인에 대항하였다.
POINT 63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의 군사적 목적으로 러 ㆍ일 전쟁 중에 부설되었다.
POINT 64 상해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3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민주공화제 정치제제를 처음으로 주장한 단체는 1907년 결성된 신민회였다.
POINT 65 임시정부가 직할군단의 편성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하자, 대부분의 독립군은 중구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POINT 66 1917년 11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한 소련은 코민테른을 결성하여 반제국주의 민족운동과 연계를 꾀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침투시키려 하였다.
POINT 67 신간회와 근우회는 일제의 교묘한 탄압, 내부의 이념대립, 그리고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사회주의 계열의 책동에 의해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POINT 68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17c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개항이후에는 서양 과학기술의 우월성이 안정됨에 따라 우리의 정신문화는 지키되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이 제창되었다.
POINT 69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교육제도가 마련되었고, 이어서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되었으며 교육입국의 정신에 따라 정부는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설립하였다. 광무개혁 때는 상공업 진흥책에 의해 많은 실업계학교가 설립되었다.
POINT 70 갑신정변의 14개조의 정강에서는 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은 주장하였으나, 노비문서소각등 전반적인 신분 철폐 주장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POINT 71 일제는 총독부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두어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3 ㆍ1운동때까지 한차례의 정식회의도 소집되지 않았다. 원래 중추원이라는 기관은 송나라의 제도였으며 이를 도입한 고려에서는 왕명출납기구로 운용하였고 독립협회는 서양식 의회로서 중추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POINT 72 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공항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였다.
POINT 73 1929년에 경제 공항이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경제 기반이 약했던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서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하였고, 이들의 침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POINT 74 3 ㆍ1운동 이후에 일제가 실시한 이른바 문화통치는 실제로는 소수의 친일분자를 키워 우리민족을 이간 ㆍ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의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POINT 75 을사조약체결이후 고종황제는 자신의 조약체결을 거부하였으며 서명날인을 하지 않았음을 들어 국내외에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POINT 76 일제는 민족기업의 성장억제를 위해 1910년에 회사령을 공포하였으나, 1920년에는 노동력과 자원착취를 위한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투자시장으로 한국을 이용하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였다.
POINT 77 토지조사사업(1912-1918)으로 일제에 의해 탈취된 토지는 전 국토의 40%에 달했으며 조선 총독부는 이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회사나 개인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POINT 78 세도 정치 기간에는 잉여 생산물이 거의 수탈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농촌 경제의 피폐와 함께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도 둔화되었다.
POINT 79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연해주의 대한민국의회를 흡수하여 성립된 통합정부였다.
POINT 80 광주학생항일 운동은 민족유일당으로 결성된 신간회의 지원을 받았다.
POINT 81 태평양전쟁이후 임시정부는 대일 ㆍ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미얀마 ㆍ인도전선에까지 한국광복군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POINT 82 1914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 ㆍ부통령으로하는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 지역의 무장항일운동의 터전이 마련되었고, 장차 1919년 3ㆍ1운동 후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POINT 83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은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통합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로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서는 임시정부 직할하에 육군주만 참의부가 결성되었으며, 자유시 참변에서 돌아온 독립군을 주축으로한 신민부도 결성되었다.
POINT 84 상하이에서 훙카우 공원에서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정부가 중국영토내에서 우리민족의 무장독립활동을 승인하게 되었고, 훗날 1940년에 한국광복군도 탄생할 수 있었다.
POINT 85 1931년 만주사변이후에 만주의 무장독립운동단체와 중국군은 한 ㆍ중 연합전선을 편성하여 쌍성보 전투, 영릉가 전투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POINT 86 3 ㆍ1운동이후. 무장 항일 투쟁의 본거지는 만주와 연해주가 그 중심이 되었으나 국내에서도 독립군부대가 결성되어 일본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POINT 87 민족유일당 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이념을 초월하여 단일화된 민족운동을 추진하려는 것이었으며, 이 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1927년에 신간회와 그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28년 이후에는 만주의 독립군도 좌우통합운동을 전개하여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POINT 88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은 청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널리 파급되면서 사회경제운동을 위한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POINT 89 물산 장려운동은 일본상품을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1921년 평양에서 조만식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물산장려회를 발족시킨 계기로 시작되었다.
POINT 90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내세웠다.
POINT 91 1922년 12월 연희 전문학교 학생 50여명이 조선물산을 장려하여 자급자족 정신을 기를 것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가 자작회이다.
POINT 92 레닌이 세계 적화의 한 수단으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은 지원하겠다고 하자. 일부 민족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연결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POINT 93 1920년대 초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 청년단체들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고, 이와 같은 청년운동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 조선 청년 총동맹이었다.
POINT 94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1930년대부터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나타내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후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POINT 95 1937년 중일전쟁이후에는 일제의 민족말살통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맹타파운동 ㆍ소작쟁의 ㆍ노동쟁의 ㆍ만주의 독립운동 등이 모두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POINT 96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여, 종래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 형태의 농민운동을 조직적인 농민 전쟁의 형태로 전화시켰다.
POINT 97 을미사변으로 친일내각이 형성된 이후 단발령을 비롯한 급진적인 을미개혁이 진행되었고, 유생들의 주도로 을미의병이 궐기하였다.
POINT 98 한국광복군은 1940년 중국 내륙의 중심지인 충칭에서 창설되었으며, 신흥무관학교출신 독립군이 주축을 이루었고, 태평양 전쟁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국내 정진 작전도 계획하였다.
POINT 99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는 실제로는 소수의 친일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고 초급학문과 기술교육만을 허용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POINT 100 1940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대륙에 산재하여 독립운동을 참여하던 수많은 청년을 모아 마침내 1940년에 중국 양쯔강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POINT 101 백정들은 1922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하고 갑오개혁 때 법제적으로 인정된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였다.
POINT 102 19C 후반부터 발달한 제국주의에 의해 제 1차 세계대전이, 1929년 경제공황 이후에 발달한 전체주의에 의해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POINT 103 일진회, 청구학회, 총독부산하의 조선사편수회 등은 모두 친일적 행각을 한 단체이다.
POINT 104 테리우찌 총독을 암살하여 모의했다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활동이 드러났으며, 많은 신민회 인사들이 탄압을 받다 신민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POINT 105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한 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는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아 조직되었고, 의병의 잔존세력도 규합하였다.
POINT 106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후 국외에 건설된 대표적 독립운동 기지로, 남만주의 삼원보, 밀산부의 한흥동,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등이 있다.
POINT 107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이 전개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는 종교계 대표들이 앞장서서 3.1운동을 일으켰다. 3ㆍ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5ㆍ4운동이 일어났다.
POINT 108 19세기 후반에 제국주의 서구열강은 원료 공급자와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의 잉여자본을 해외에 투자하기 위해 아시아,아프리카 등 후진지역을 식민지화하려 하였다. 일제도 1894년 청ㆍ일 전쟁이후 조선에 적극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추진하여 차관제공ㆍ철도부설등을 시행하였다.
POINT 109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대종교는 교단을 만주로 이동하여 중광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POINT 110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창하고 민족종교로 발전시켰으며, 1919년 블라디보스톡에 성립한 임시정부인 대한민국의회의 대통령직을 맡기도 하였다.
POINT 111 독립협회는 이권수호 운동을 전개하여 러시아의 저탄소 설치를 위한 절영도 조차를 좌절시키고 한러은행도 폐쇄시켰다.
POINT 112 박은식은 양명학의 입장에서 유교 구신론을 주장하였다. 한용운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불교 유신론을 주장하였다.
POINT 113 김원봉의 의열단은 주로 국내에 김구의 한인 애국단은 주로 국외에서 활동하였다.
POINT 114 안악사건, 105인 사건,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개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이며, “경향”등의 잡지를 통한 민중계몽과 만주에서 항일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운동을 한 것은 천주교인들의 활동이다.
POINT 115 일제는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탄압하고 경성제대를 설립하였고, 야학운동을 탄압하고 “1민1교주의”를 시행하였으니, 여전히 문맹률의 높은 수준이었으며, 이러한 상황 때문에 문맹타파와 농촌계몽을 위해 1929년부터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1931년부터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이 진행되었으니,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