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향(三寶鄕)의 고장 기행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보성은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맑은 공기가 함께 어울러진 고장이다. 파란 하늘은 긴 리아스식 해안과 어울리고, 파란 바다는 대단위 녹차 밭과 측백나무로 인해 더욱 빛이난다. 지형 또한 인근의 어느 고장보다도 높은 탓에 청량한 공기가 항상 머무는데 그것은 정신을 더욱 맑게 해준다.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던 전남문인협회 문학기행에 참여했다. 연3일로 이어지는 장흥과 강진의 답사에는 개인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마지막 날인 사흘째 보성기행에 합류했다.
보성은 바로 내가 태어난 고장. 거기다가 사랑하는 후배 김용국회장이 행사를 이끄는데, 그중 한곳이라도 참가하지 않으면 나중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올 코스는 둘러보지 못하고 몇 군데 얼굴을 내민 것으로 체면을 닦았다.
그렇기는 했어도 내 고향인데 마음이 가 닿지 않는 곳이 있을까. 첫 방문지 충절사는 여전히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모신 최대성장군은 임진왜란 때 군두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 했다. 그래서 지명이 군두(軍頭)가 되었다.
추억의 거리 득량역전은 내 소년시절의 아련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비좁은 역사(驛舍)며 인근의 거리는 5,60년대의 간판과 생활용품을 진열해 두고 있어서 방문자를 감격하게 만들었다. 옛날식 다방인 행운다방에 들러서는 잠시나마 쌍화차를 시켜놓고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다음 방문지는 쇠실 부락. 백범선생의 은거지지로 유명한 곳이다. 기념비 앞에 서니 가슴이 우선 서늘하다. 선생은 이곳에서 20대 초반에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45일간을 머물었다고 하는데 마침 방문한 날은 집주인이 집을 지키고 있어서 내부도 둘러볼 수 있었다.
흔히 보성을 일러 차(茶)와 예(藝)와 의(義)의 고장이라고 한다. 보성 차가 유명한 것은 노령산맥이 들보처럼 떠받치고 있는 가운데 제암산과 봉화산, 제석산과 오봉산이 우뚝 솟아서 연평균기온 13.5도를 유지하고 강수량이 1,400미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녹차생산의 최적화를 이룬 것이다. 보성 녹차는 전국 생산량의 65%를 차지한다. 품질이 뛰어나 벌교 꼬막과 함께 2대 지역특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다음은 예(藝)의 고장으로 대표되는 판소리. 보성은 일찍이 소리의 고장으로 명성이 날렸다. 박유전 선생이 창안한 애절한 계면조 가락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중에 이 소리는 보성소리로 완성이 되었다. 박유전 선생은 강산마을에 거주하면서 소리를 연마해 마침내 대원군으로부터 “네가 조선 제일이다!”라는 칭찬을 받고 국창(國唱)이 되었다.
이후 제자인 정권진선생, 정응민선생이 소리를 이어 받았다. 소리의 갈래는 통상 섬진강을 중심으로 남원, 구례 쪽과 보성쪽으로 나뉘어 동편제와 서편제로 구분된다. 통성이 굵은 것은 동편제. 이에 비해 서편제는 섬세하고 애절한 소리가 특징이다. 이런 고장에서 문인, 화가, 음악가들이 고향 정기를 받아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다음은 의향(義鄕)으로서의 면모이다. 일찍이 보성에서는 결기 있는 선비들이 많이 출현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서재필박사와 나철선생이 구국을 위해 떨쳐 일어나고, 담살이 의병장으로 유명한 안규홍을 비롯해 임창모 선생, 그 외의 의병활동도 눈부시다.
보성은 예로부터 불의에 맞서는 저항정신이 투철했다. 과다한 세금징수와 행정에 불공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거세게 저항했으며, 향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담근 술을 두고서 일제가 단속에 나서자 유림에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거세게 들고 일어나 폐정(弊政)을 시정했다.
이러한 의로움은 예로부터 전통이 되어 정유재란 시에는 이순신장군이 보성에서 사실상 명량대첩을 이끄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백의종군 길에 두 번째 삼도통제사 직첩을 제수받은 장군은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칼바위 굴에 피신해 있던 장정들을 모아 전력을 크게 보강했다.
그 와중에 장군은 보성에서 어명을 받는다. 지리멸렬한 수군으로는 적을 막아내기 어려우니 권율장군 휘하로 들어가 싸우라는 것이었다. 이때 장군은 열선루에서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러고는 군영구미로 나아가서 해남 울돌목으로 향하였다. 절치부심하며 보성고을에 머문 지 8박 9일 만이었었다.
구국의 성지인 보성은 백범 김구선생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일본 중위 스치다를 때려죽이고 나서 구속이 되었는데, 탈옥을 하고서 바로 이곳 득량 쇠실 부락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전을 생각하고 믿을만한 곳을 택했음은 물론이다.
보성은 이밖에도 유서 깊은 고옥과 명승지, 유적지와 관광지가 많다. 일림산 단풍과 칼바위의 위용, 공룡 화석지는 꼭 가 봐야 할 곳이며 서재필 박사 기념관, 홍암 나철선생 기념관. 태백산맥 문학관도 빼놓을 수 없다.
이날 명가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매운탕의 풍미도 그만이었다. 아는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니 더욱 맛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보성에서 낭만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회천에서 조성으로 이어지는 리아시스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한다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생각한다. 득량 수문에서부터 고흥대서로 이어지는 방조제 둑에는 장미 수만본이 심어져서 꽃이 필때는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모처럼 찾은 고향 방문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눈도장 찍을 것들이 눈길의 발자국처럼 박혀서 오래 남을 듯하다. (2020)
첫댓글 삼보의 고장 보성
보성소리는 늘 선생님의 긍지이군요
녹차밭이야 누구라도 익히 알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출전 경로이며 김구 선생의 자취가 간직돠어있는 자랑스러운 고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요. 보성녹차야 너무나 유명하여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다 알지만, 의향으로서의 보성과 예향으로서의 보성은 모르는 분들이 많지요.
보성은 서편제의 고장이면서 보성소리의 고장이지요.
유명한 명창들이 많이 배출되고 많은 후학들이 뒤를 잇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는 것으로 압니다.
아마도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첩은 거둔것은 보성의 물적 인적 자원이 뒷바침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군량미는 조양창에 보관중인 것을 쓰고 병력은 8박9일을 머무르면서 충원했지요.
다시 보성에 가 보고 싶어요.
보성은 가볼만 곳이 많습니다. 언제 차분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보성하면 어디선가 춘향가 한대목이 들리는듯 귀기울여 지네요. 김구선생님께서 45일간 기거 하셨던곳은 진심으로 숙연해지더이다. 득량역도 옛정취의 문화를 간직한 거리도 인상깊었습니다.
불과 몇곳만 다녀왔지만 곳곳에 가볼만한 곳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월 사진 촬영 다니는
우리동네 코스라 더욱
가슴이 벅찹니다
고향을 사랑하시는 송선생님께서 댓들 달아주시니 방이 한층 빛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