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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 영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구룡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조개를 잡고 볼락회에 소주 한잔 마시다 죽은 듯 자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마음한테 미안해졌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여행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며 나는 도시락을 싸고 남편은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항에 닿을 즈음이면 파도가 지쳐있을 거라는 희망은 출발할 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파도는 천년 묵은 한을 토해 해안반도 둘레길을 덮쳤다. 긴 목덜미를 자랑하듯 제철소 수십만 개의 불빛만 바다에 녹아 있었다. 다시 찾아간 곳은 어촌의 그만그만한 포구였다. 사는 일이 눅진하여 역마살이 낄 때 드나들던 곳이다. 길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졌다. 식당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걸었다. 유월 밤바다는 괴괴하다.
마지막으로 양포와 구룡포 사이에 있는 바다낚시 공원으로 차를 돌렸다. 역시나 마찬가지다. 으르렁거린 파도는 겁도 없이 바다를 삼키고 내뱉으며 산산조각을 낸다. 어쩌란 말이냐.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엔 억울함마저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무슨 통쾌한 일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포항에 사시는 형님 내외를 불렀다. 통쾌하고 가슴 뛰는 일이래야, 고작 태풍의 눈에서 놀아보자는 정도였다. 이윽고 우린 해안가에 텐트를 쳤다. 조개잡이야 멀찍이 달아났지만 모처럼 한 지붕 아래에서 저녁을 먹고 등을 맞대며 넷이 누우니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밤은 익을 대로 익어가건만 태풍은 잦아들 기미가 없다. 형님은 어느새 적응되었는지 얕은 코까지 골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나도 설핏 잠이 들 찰나 아주버님과 남편이 나누는 대화가 나분나분 들린다.
“오늘 같은 날 농어낚시가 제격인데 말이죠. 채비라도 있으면 시도해 볼 텐데.”
나는 혼미한 잠결이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날씨에 농어가 왜 잡기 좋아요?”
“농어는 바다가 고요한 날에는 잡기 힘들지. 경계심이 워낙 많아 입질을 안 하니까. 아주 영리한 놈이야. 하지만 파도의 높이가 걷잡을 수 없거나 바닥이 뒤집히고 태풍이 몰아치면 스스로 경계를 풀어버리는 거야.”
어째 농어의 영리함보다 안쓰러움이 먼저 든다. 평소에 얼마나 긴장 상태로 살았을까. 나름대로는 다른 어종에 비해 똑똑한척하며 우월감마저 들었으리라. 하물며 녀석인들 풀어지고 싶지 않았을까. 혹 날씨를 핑계 삼아 일부러 경계를 풀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무튼, 그것이 농어, 그 녀석의 본능이든 자의에 의한 방식이든 꾼들의 입질에 걸린들 어떤가. 오늘따라 녀석이 부럽다 못해 나도 잠깐 농어가 되고 싶은 저녁이다.
나는 한 달 전 ‘경계성암’이라는 진단을 확정받았다. 수술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득해졌다. 인간과 신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무당이 잠시 다녀간 듯했다. 돼지머리 앞에서 춤추던 단골무당의 희번덕이는 칼날이 악령을 삼킨 채 언제 내게 꽂힐지 두려웠다. 지리산의 성모천왕 앞에 빌고 싶었다. 진한 선팅을 한 자동차에 갇힌 기분이었다. 빛과 그늘 사이에 오래 앉아 있었다. 터지기 직전까지 불어놓은 풍선 신세였다. 가시가 두려워 장미꽃밭에 갈 수도 없었다. 도살장에서 잡아들인 붉은 살점들이 정육점 냉동고에서 급냉으로 얼어가듯 경직되어 갔다.
나는 경계에 선 여자였다. 한 끗 차이로 간당간당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누가 보면 사람구실 하기를 포기한 줄 알았을 게다. 먹고 자고 노는 일상성마저 시시해졌다. 혹 대문밖에 기다리던 암세포가 문을 여는 동시에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날밤을 새웠다. 어차피 한번 태어난 인생인데 심오할 필요가 뭐 있어. 한방의 쾌락으로 살면 되지 라는 마음과 어차피 한번 태어난 인생인데 제대로 살다 가야지 라는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싸움질해댔다. 한 달이 백 년처럼 흘러갔다.
낚시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도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새벽 2시. 좀체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바다는 여전히 길길이 날뛴다. 해안가 난간에 등을 보인 낯선 사내가 혼자 바다를 바라본다. 이윽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꽤 긴 시간을 보낸 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찍었을까. 나는 한잠이라도 자야겠다 싶어 텐트 속으로 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형님은 아직 곤한 잠에 빠졌다. 이미 남편과 아주버님은 갯바위로 조황을 보러 떠났다. 아침이 뿌옇게 밝아오면서 지난밤의 바다도 서슬 푸른 장난을 멈춘 듯하다.
선득한 기운이 돈다. 셔츠를 껴입고 작은 카페가 있는 계단을 올랐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말굽 모양의 구룡포 항구가 저만치 보인다. 해송림을 지나 하정리 정자까지 가볼 참이다. 드문드문 쭉정이만 남은 보리밭에서 접시꽃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한다. 꽃잎을 한 장 씩 떼어 보릿대에 붙였다. 어린 시절 삽작길을 붉게 물들이던 꽃이었다. 이른 아침 감포에서 들어오는 자동차들이 창문을 내리고 힐끔힐끔 내다본다. 계면쩍은 나는 왔던 길을 돌아 자갈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해풍에 몸 말리는 갯메꽃 군락지에서 또 한참을 앉았다. 간밤의 요동친 태풍 탓인지 더러는 상처 입은 꽃잎들이 아리다. 여남은 척의 큰 배가 해무를 흐트러뜨리며 먼바다로 나아간다. 사는 일이 참 거룩하겠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든다. 왜 들었을까.
며칠 전 잔광이 내려앉은 오후 블라디보스톡에서 선배가 보내준 문자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병명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요. 경계성암이라서 다행이고 고맙다고 생각해야지. 더 아프고 더 절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요.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잘 챙기고 다니라는 신호일 거에요.’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일축성 문장에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거로 봐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길을 나서니 생각이 유연해진 걸까.
아무튼, 나는 지금 갈림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프지 않을 이유도, 건강할 이유도 된다. 여름에 겨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모종을 뿌리면서 잎을 생각하고 꽃과 열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극성스럽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생각을 확 바꿔버릴 수 있는 단세포적인 내가 믿기지 않아 어금니에 쥐가 날 지경이다. 언제쯤이면 솔직한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다만 나도 이 시점에서 한번쯤은 무너지고 싶었을 뿐이다. 농어 그 녀석처럼 날씨를 핑계 삼든 따뜻한 사람이 던진 입질을 핑계 삼든 덥석 물어 질펀하게 풀어지고 싶다. 더러는.
[작품평]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 윤 영>
다양한 창작 기교를 혼용한 미감 창출
서태수
<1>
문인은 언어디자이너다. 수필은 종합문학이며 수필가는 언어의 융합디자이너다. 그 작법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무한한 기능성技能性을 포용하고 있는 형식적 특징으로 집약된다. 수필의 무형식이란 형식의 제약이 없다는 의미로 모든 문학양식의 고유한 미학적 특질이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혼용 가능하다. 그리하여 시, 시조, 소설, 희곡, 평론의 고유한 미학이 수필 작법에 동원될 수도 있다.
형식은 미감 있는 주제 전달을 위한 기획적 장치다. 수필 형식의 특징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독창적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내용을 형식에 어떻게 유기적으로 직조하느냐에 따라 작품성의 평가가 달라진다. 문학에서 내용 전달은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이 ‘어떻게’를 위해서 문인은 언어디자인을 고뇌하고 퇴고를 반복한다. 이 점이 창작이다.
창작은 몰톤(R.G.Moulton)이 말한 ‘존재의 총계에 부가’라는 관점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윤영의 작품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는 소설적 긴밀구성과 희곡적 현장감, 비유적 이미지로 시적 형상화까지 구현하고 있다. 다양한 화소話素motif를 동원하면서도 글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추었다. 아울러 지혜로운 지성적 교감을 주장이 아니라 느낌으로 견인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지닌 미적 감동을 <1.제재의 참신한 재해석, 2.구성적 미감, 3.언어 조탁, 4.서정적 감성, 5.지성적 교감>의 영역으로 세분하여 각 요소의 특징들을 톺아보고자 한다.
<2>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의 참신성은 제재의 재해석에서 비롯한다. 특히 ‘자아의 세계화’ 양식인 수필은 체험의 재해석을 통해 신변잡기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에서 구현된 제재는 복층구조다. 표면적 제재는 ‘구룡포 여행’이지만 작품의 내면적 동인動因motive는 ‘경계성암’ 진단이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심화 확장시키기 위해 대표적 화소話素motif인 구룡포 여행을 전면에 깔고는 요소요소마다 경계성암의 내면적 변주를 위한 보조 화소를 유도한다. 그것이 바다의 풍랑과 농어다. 격랑하는 작가의 심리가 경계심 많은 농어의 ‘격랑 속 풀어짐’으로 중첩된다. 단편적으로 삽입되는 화소인 ‘심야의 바닷가 사내, 쭉정이만 남은 보리밭, 해풍에 상처 입은 갯메꽃잎’에게도 다양한 의미망이 전이된다.
이 작품은 제재의 복층구조 속에서도 구성의 긴밀성을 통해 강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구성이란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다. 구룡포 여행의 낚시 계획은 농어를 유인하기 위한 필연적 절차이며 기실 이 농어의 특징이 경계성암 진단을 받은 작가의 ‘무너짐’에 대한 복선伏線에 해당되어 작품의 마무리에서 ‘질펀하게 무너지’는 자아와의 병치적竝置的 대응으로 발전된다. 당연히 절정 부분에서는 위로의 반전을 거친다. 치밀한 단편소설적 구성이다. 그리고 중간쯤의 대화체 문장 삽입은 생생한 현장감과 동시에 긴장한 독자들이 시각적, 심리적으로도 여유를 누리게 하는 희곡적 효과를 겸비하고 있다.
만약 이 작품 구성에서 화소를 ‘경계성암 진단의 소용돌이 - 소용돌이를 회피하기 위한 구룡포행’으로 전개했다면 이는 서사적 개인사의 추보식 전개가 된다. 그러면 ‘설화체 구성‘으로 문학미감은 반감했을 것이다. 짐짓 뭔가 특별한 경험의 단순 여행으로 출발하면서도 ‘간절한 염원’과 ‘이판사판’의 긴박감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매력 있는 구성이다.
후반으로 가면 아침이 뿌옇게 밝아오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사는 일이 거룩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선배의 문자 위로의 미끼를 덥석 문다. 그러면서도 무너짐에 대한 미련을 슬쩍 남겨 두는 치밀한 구성이다.
언어조탁은 문인의 언어구사 능력이다. 주제와 상응하는 문장의 강약, 장단 등과 어휘, 어조 등이 섬세하게 구현되는 바 이는 현장성의 생동감도 동시에 유발한다. 이 작품의 언어구사는 전반적으로 간결체의 보편적 진술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날씨 상황이 긴박한 장면의 언술은 매우 급박해진다.
마지막으로 양포와 구룡포 사이에 있는 바다낚시공원으로 차를 돌렸다. 역시나 마찬가지다. 으르렁거린 파도는 겁도 없이 바다를 삼키고 내뱉으며 산산조각을 낸다. 오기가 생겼다. 무슨 통쾌한 일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포항에 사시는 형님 내외를 불렀다.
이상에서처럼 문장의 장단은 긴장과 이완을 가져다준다. 전반적으로 평서형 종결어미를 사용하면서도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평소에 얼마나 긴장 상태로 살았을까.’ ‘꾼들의 입질에 걸린들 어떤가.’ 등등 설의법적 어미활용도 작가의 심리적 갈등으로 야기되는 사색의 깊이를 독자에게 전이시키는 어조이다. 사용된 어구들도 잘 선별되었다. 경계성암에서 유추한 ‘나는 경계에 선 여자’와 ‘진한 선팅을 한 자동차’, ‘빛과 그늘 사이’는 유사 상황을 은유로 치환한 고급 비유다. 동시에 ‘터지기 직전까지 불어 놓은 풍선’, ‘가시가 두려워 장미꽃밭에 갈 수 없었다.’ 등 숱한 어구들이 적확的確한 언어구사들로 독자 시선에 각인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심리적 격랑의 원인 요소로 작동하는 ‘경계’라는 어휘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런데 한자를 부기하지 않았다. 의도적이다. 경계境界로, 때로는 경계警戒로 언어유희적 요소도 스며 있다. 마지막 문장 ‘농어 그 녀석처럼 날씨를 핑계 삼든 따뜻한 사람이 던지는 입질을 핑계 삼든 덥석 물어 질펀하게 풀어지고 싶다.’가 주는 강한 의미망도 매우 기획적 언술이다. 첫째는 서두의 낚시에 호응하는 의미상의 수미쌍관이고, 다음은 농어와 병치되는 ‘무너짐’의 공유이며, 사람이 던진 미끼인 ‘따뜻한 입질’과의 조응이다. 그리고 ‘더러는.’이라는 마무리의 도치법 사용에서 ‘더러는’이 지니는 의미는 한 여인으로서 일상의 일탈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언술법이다.
체험의 직접적 구현 양식인 수필도 ‘언어예술’이라는 문학의 절대적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예술성은 정보전달이 아니라 미적 장치를 통한 감성 공유가 목적이다. 앞의 세 번째 항목에서 밝힌 언어조탁은 수준 높은 문학미학의 창출 기교이며 이를 통해 독자의 서정적 공감을 확보하는 것이다. 서정적 감성은 미적 표현의 자질로서 수필이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방법론으로는 미문美文, 비유적 형상화, 해학과 익살 등 다양할 것이며 리듬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간단히 말한다면 ‘시적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술양식인 수필은 자아의 세계화이고, 시는 정반대인 서정양식으로 세계의 자아화이다. 즉 수필에서 시적 변주를 야기하기 위해서는 작법상의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인식의 비유적 형상화’이다.
작품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에서 동해의 풍랑과 경계암 진단의 심리적 소용돌이는 병치은유로 치환되어 이 작품의 전편을 관류하는 이미지다. 심리적 격랑, 즉 동해 풍랑 속으로 농어를 병치한다. 길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짐은 영리한 농어의 풀어짐을 유인하기 위한 복선이다. 실루엣인 듯 얼핏 스케치한 심야의 해안가 낯선 사내는 무너짐의 조연으로 유인한 것 같다. 이 무너짐의 현장으로 시댁식구를 불러들이는 의뭉스러움에 묘한 미소를 머금는다. 치밀하다. 농어의 영리함은 곧 작가 영리함의 대유다.
밝아오는 아침에서 비롯된 반전적 심리는 유년기의 행복한 회상으로 이어지고 간밤 풍랑에 상처는 입었지만 해풍에 몸을 말리는 갯메꽃잎에 자아를 투영한다. 이러한 비유적 형상화도 결국은 제재의 변주를 이룩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체험의 문학인 수필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지성적 교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적 정보가 수필의 목적은 아니다. 서정적 감응의 진폭 범위 이내에서 작가의 철학관, 인생관 등이 용해되어야 한다. 어떤 문학도 사상이 정서를 압도하면 안 된다. ‘시는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等價物’이라는 엘리어트의 시적 정의가 수필에서도 적용되었을 때 그 내용도 폭과 깊이의 확장성으로 독자가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같은 산문이라도 수필이 철학, 역사, 사상 등과 현격하게 차별되는 요소이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지적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곳은 없다. 그러나 인생사에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의 심리 현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혜와, 소박한 소망 등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 느끼도록 만든 것은 작가의 메시지가 주장으로 응집되지 않고 작품 전편에 서정적으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3>
문학작품은 각 양식마다 형식상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이 형식의 차이에 의해서 문학 양식의 변별성이 생긴다. 시의 운율, 시조의 정형률, 소설과 희곡의 구성법, 수필의 무형식 등이다. 형식미는 미감 있는 주제 전달을 위한 최선의 창출 장치다. 이 형식의 범주 내에서 작가들은 매작품마다 미적 창조의 극대화를 위한 특별한 세부장치를 운용한다. 이 과정에서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직조되느냐에 따라 작품성의 평가가 달라진다. 문학의 형식은 그릇[容器]이 아니라 작품 형성의 원리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제재의 미학적 변주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기법 속에서는 체험의 변형을 통한 가공의 진실성도 가미될 수 있다.
윤영의 수필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는 다른 양식이 지닌 특징적 미학을 수필 작법에 다양하게 동원하였다. 제재, 구성, 언어, 서정, 지성적 교감이 유기적으로 잘 직조되었다. 소설이 지닌 긴밀한 구성법과 희곡의 현장감, 섬세하고 명징한 언어 조탁으로써 비유를 통한 시적 이미지 창출에 이르기까지 통합적 기교를 구현함으로써 문학미감의 멋과 맛을 한층 고양시킨 작품이다.
<서태수>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석사)
《시조문학》천료 (‘91), 《문학도시》 수필 등단 (‘05) <한국교육신문> 수필 당선 (’06),
수필집 『조선낫에 벼린 수필』외, 낙동강 연작시조집 『강이 쓰는 시』 외, 평론집『작가 속마음 엿보기』, 논문 <전통 수필 창작론 연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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