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욕심으로 논배미를 저 꼴로 만들다니!
솔향 남상선/수필가
지난 9월 중순에는 지인과 함께 신탄진 금강 유역 둘렛길을 걸었다. 주변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의 황금물결이 너무 아름다워 자신도 모르게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피사리하는 농부가 어려웠던지 논둑에서 쉬고 있었다. 망중한(忙中閑)의 모습이 어쩌면 신선과도 같아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말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대풍이군요. 그 동안 노고의 땀방울이 황금벼 이삭을 만들어 다행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더니, 바로 이런 맛으로 농사짓는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다행인지 요행수인지 금년은 태풍이 좀 도와줘서 한시름 덜었습니다.“
농사꾼이라기보다는 정이 묻어나는 이웃집 아저씨는 뭔가를 주고 싶어 찾는 게 있는 거 같았다. 눈치 낌새로 보아서는 아마도 시장기가 들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에 부인의 정성으로 추측되는 김밥 몇 덩이와 밀개떡 두 쪽을 내놓는 거였다.
농촌 인심이 배어 있는 농부가 주는 김밥 두 덩이와 밀개떡 한 조각으로 정을 나눴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얘기하다 보니 그분은 바로 인근 마을 이장이었다. 주변 논배미의 벼는 모두 멀쩡한데 몇 다랑이의 벼만 엎쳐서 부축을 호소하고 있었다. 허리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비바람 등살에 허덕여서 그런지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허리 아픈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붙임성에 말주변까지 있어 보이는 신선 같이 보이는 아저씨였다. 맞장구를 쳐 주는 내 말에 흥이 났는지 그는 세상사는 이야기며 묻지도 않은 말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거였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마냥 즐기며 쉬지 않고 입을 열고 있었다.
“저, 아래 다랑이 엎친 볏논 보이시죠! 그 논 임자는 나이도 얼마 들지 않은 젊은이인데 욕심이 많아 논배미를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놨지요. 욕심으로 거름을 많이 퍼주면 벼가 잘 자라는 줄 알고 한두 번만 챙기면 될 비료를 여러 번 퍼붓다시피 해서 저 꼴로 만들어 놨지 뭡니까!“
“그렇군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 거름 주는 데는 탐욕이 작용해선 안 되지요. 벼를 속성으로 잘 키워 보겠다고 비료를 포대로 쏟아준 꼴이 됐군요.”
“저 위 논배미 벼 엎친 것도 보이시죠! 그 논은 주인이 건망증으로 저렇게 만들었죠. 아, 글쎄 건망증이 심한 고희가 다 된 어르신이 아침에 비료를 주고 저녁나절에는 아침 비료 준 게 생각이 안 나 또 비료 주는 일을 반복하는 바람에 저 꼴로 만들어 놨어요.”
“아니, 듣고 보니 엎친 벼의 두 논배미는 논 임자의 욕심이나 건망증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 놨군요. 그래서 모든 개체는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랍니다.”
농사짓는 농부의 욕심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플라톤의 행복론이 떠올랐다. 조금 부족한 듯이 살라는 플라톤의 말씀이 교훈이 되어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플라톤은‘행복론’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약간 부족한 외모,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밖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라 했다.
정리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은 조금은‘부족함’에서 누릴 수 있는 거라 말한 것이다.
몽데뉴의 명언에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려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했다.
또 노자는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고 했다.
‘어허. 욕심으로 논배미를 저 꼴로 만들다니!’
나도 과욕으로 일을 그르쳐 본 적은 없는가?
조금은 부족함으로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노자의 명언을 새기며 살 것인가?
첫댓글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외모, 명예, 체력, 말솜씨가 행복의 비결이군요. 탐욕을 버리고 여유롭게 사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손해 본듯하게 사는게 좋은거라는 말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