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慶州) 교동(校洞)
최부자집(崔富者宅)






~ 경주 교동 최부자댁을 찾으면서~
오랜 세월 변함없이 부(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비결(泌結)은
인간(人間)의 본질(本質), 욕망(慾望)을 절재하고
겸손과 나눔을 실천하며
올곧은 참부자의 맥(脈)을 이어온
그들의 살맛나는 세상을 들어다보자.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잣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 ·고방 ·안채 ·사당 ·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1971년 5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2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 솟을대문~
솟을대문 형식을 취하였으나 화려하지 않으며
수수하고 평범한 최부자집 대문 일반적인
솟을대문보다 낮게 지였다고 한다.



~ 큰 사랑채~
지난 2006년 복원한 큰사랑채는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 강공(公).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백산 안희재 선생등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머물렀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우리나라 6.25동란시절에
여군간호장교 7인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나는데로 경주 교동 최부자집
집안 샅샅히 사진 촬영과
스켓치를 해오라는 하명까지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 명경대(明暻臺) ~
밤에는 돌판위에 나무들을 올려놓고
불을 피워 마당 뜰안을 밝혔다고한다.



<재산 환원(還元)과 사회기여>
최부자의 마지막 후손인 문파 최 준 선생은
8.15 광복후 앞으로 나라을 이끌어 나갈
젊은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시어
조상들이 일구워 놓은 대부분의 재산을
1947년 대구대학 설립 및 1950년 계림학숙 설립때
두차례에 걸처 재산을 기증하였다.
지금 경북 경산시에 위치하는
영남대학교가 그 후신이다.
이와 같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국가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목적에
최부자 가문의 300년 부(富)를 희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참부자"의 표본이 되고 있다.
1933년 경주역사기록을
집대성한 "동경통지(東京通志)"를
정인보, 최남선 선생 편집 자문으로 간행하였으며,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긴
"계원필경(桂苑筆耕)"을 발간하여 배부하였다.






계단옆 원형 토관이보인다.
처음엔 집안에서 물이 흘러나오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관리하는 여사님의 설명에는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오는 굴뚝이라는 것이다.


~작은 사랑채터~
손님이 많아서 작은 사랑채까지 활용하였다.
현재는 불에 탄 작은 사랑채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다.

~문간채~
일반적으로 하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행랑채라고도 하는데
최부자집은 독특하게 마굿간으로 사용하였다.






~곳 간~
최부자집에서 눈여겨 볼 창고이다.
현존하는 목재 곳간중 가장 크고 오래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한옥으로 부(富)를
짐작할 수 있는 건물이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안채~
"ㅁ"자 형태로 지어진 안채는 정남향이며
집안의 안주인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이다.




~<최부자의 수신제가(修身齊家) 육연(六然)>~
~첫번째~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세속을 초월하는 경지)
~두번째~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누구에게나 평등한 마음가짐)
~세번째~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잡념을 자제)
~네번째~
유사강연(有事敢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임전무퇴를 의미)
~다섯번째~
득의담연(得意淡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경거망동을 삼가란 의미)
~여섯번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의 의미)




~<육훈(六訓)>~
~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집 주변 100리(里)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삼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 ~ ★ ~ ★ ~ ★ ~ ★ ~ ★
이상과같이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그 부(富)가
자손대대로 지속되기를 원한다.
최부자는 이 육훈(六訓)을 통하여
집안을 다스렸기에 가능했다.

부불삼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富)워 권력(權力)은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 어렵다.
그러나 최부자 가문은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300년이상 부자로서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최부자의 가훈(家訓)
최부자 300년 역사를 유지 가능하게 한
육훈(六訓)은
현대기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첫번째 ~
농사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꿔 부농(富農)의 기초가 된 혁신
~ 두번째 ~
일만석 이상 수확 때는 소작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윈.윈(Win~Win) 노사관리.
~ 세번째 ~
이웃에게 베품으로써
윤리경영 및 사회공헌을 통한 좋은
기업 이미지 관리.
~ 네번째 ~
과객을 후하게 대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및 새로운 기술 습득을 위한
지식정보관리.
~ 다섯번째 ~
근면절약 솔선수범의 생활화로
지속적인 성장이
육훈(六訓)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이란
의미의 정신이 프랑스에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최부자 정신은
도덕적 실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산의 사회 환원으로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증가시키고 있다.









마을 안쪽 넓은 골목길 안쪽에
경주최씨 종가댁과 소종가의
대문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종가댁은 현재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지금 집을 지키는 이는
종손이 아닌 관리인이며,
옆집인 소종가는 교동법주라는
전통주를 대(代)이어 생산하고 있다












붉은 태양은 서산(西山)에
뉘엇뉘엇 저물어 가는데
길거리에서 길손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물어 볼 것도 없이
굳이 오고가는 세상살이를
들추지 않아도 좋으리라
~ 시 곡(枾 谷).~

2 0 1 4. 1 0. 2 1. 시 곡(枾 谷).

첫댓글 고즈넉하고 기품있는 경주에 최진사댁 옛날을 생각하며 구경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유명한 최부자집이라네요
감사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