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
태종 정사(太宗定社) 무인년(1398) 가을
신의왕후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정종은 둘째이고 태종은 다섯째이다. 신덕왕후는 방번ㆍ방석과 공주 하나를 낳았는데, 공주는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을 내전에 불러서 세자 세울 것을 의논하니, 극렴 등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먼저 공 있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신덕왕후가 몰래 듣고 통곡했는데,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배극렴 등이 드디어 의논을 끝내고 나왔다.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서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 등이 물러가서 의논하기를, “강씨(康氏 신덕왕후)는 필시 자기 아들을 세우고자 할 텐데, 방번은 광패(狂悖)하니, 막내아들 방석이 조금 낫다.” 하고, 드디어 방석을 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다.
정도전과 남은(南誾)이 방석에게 붙어서 다른 왕자를 꺼리고 제거하고자 모의하여 은밀히 아뢰기를, “중국에서 모든 왕자를 왕으로 봉하는 예(例)에 의하여 모든 왕자를 각 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태조가 대답을 하지 않고, 태종에게 이르기를, “외간의 의논을 너희들이 몰라서는 안되는 것이니 마땅히 너의 형들에게 일러서 경계하고 조심하게 해라.” 하였다. 점쟁이인 안식(安植)이 말하기를, “세자의 배다른 형들 가운데 왕이 될 사주를 타고난 이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하니, 정도전이 말하기를, “곧 그들을 제거할 것이니, 어찌 근심하리요.” 하였는데, 의안군 화(義安君和)가 알고 몰래 태종에게 고하였다.
무인년(1398) 가을에 태조가 병이 들었는데, 정도전이 태조의 요양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하자고 핑계하여 모든 왕자를 불러 이 기회에 난을 일으켜서 자기 당이 안에서 어떻게 처치하고자 하였다. 전(前) 참찬(參贊) 이무(李茂) 또한 정도전의 당인데, 모의한 것을 다 태종에게 몰래 누설하였다. 그때에 태종이 모든 형들과 더불어 항상 근정전(勤政殿) 문 밖에서 잤었는데, 원경왕후(元敬王后 태종의 비)가 아우 민무질(閔無疾)과 모의하여 종 김소근(金小斤)을 보내어 후(后 원경왕후)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고하니, 태종이 곧 집으로 돌아왔다.
태종이 후와 민무질과 더불어 한참동안 가만히 이야기하였는데, 후가 울면서 태종의 옷깃을 잡고 궐내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가지 않겠는가. 또 모든 형들이 다 궐내에 있으니,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분연히 나갔다. 후가 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말하기를, “조심하고 조심하소서.” 하고, 곧 동생 대장군 민무구(閔無咎)와 장군 민무질과 함께 모의하여 병기와 말을 몰래 준비하여 태종을 응원할 계책을 세워놓고 기다렸다.
태종이 대궐에 이르니, 한 내시가 안에서 나와 말하기를, “전하께서 병세가 중하여 다른 곳으로 피우(避寓) 하고자 하오니, 모든 왕자는 다 들어오시오.” 하였다. 그 전에는 궁문에 모두 등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이 밤엔 등불이 없어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태종이 거짓으로 뒷간에 가서 생각하고 있을 때, 익안군 방의(益安君 芳毅)와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과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이 뒤따라 와서 불러 말하기를, “정안군 정안군(靖安君), 장차 어이할꼬.”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왜 소리를 높이는가.” 하고, 또 손으로 소매를 치면서 말하기를, “계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는 방의ㆍ방간ㆍ백경과 함께 달아나 영추문(迎秋門)으로 나왔다. 태종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말을 광화문 밖에 세워 놓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고, 사람을 보내서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을 불렀다. 조준은 한창 점쟁이에게 길흉을 점치고 있었던 참이라 계속 재촉하므로 겨우 일어나서 오는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왔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서 예빈시(禮賓寺) 앞 돌다리에서 가로막고 다만 몇 사람만 데리고 오게 하였다. 태종이 조준을 보고 말하기를, “공들은 이씨의 사직을 근심하지 않느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조신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조준과 사형 등이 정청에 들어가 앉으려고 하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만약 궁중에서 출병을 하여 우리 군사들이 조금 물러간다면, 저들은 궁중에서 나온 군사들 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노상에 말을 세우고 있는데, 정승이 정청에 들어가 앉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앉게 하고는, 백관을 불러 모았다.
찬성 유만수(柳曼殊)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오자, 태종이 그에게 갑옷을 주며 자기 뒤에 세우니, 이무(李茂)가 말하기를, “만수는 방석의 당입니다.” 하였다. 만수가 말에서 내려 태종의 말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여쭙겠습니다.” 하였는데, 김소근(金小斤)이 칼로 그 부자를 찔러 죽였다.
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을 정탐하니, 그때 이직(李稷)과 함께 남은(南誾)의 첩의 집에 모여서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반종(伴從)들은 다 졸고 있었다. 이숙번으로 하여금 일부러 활을 쏘아 기왓장 위에 떨어지게 하고는 불을 놓아 집을 태우니, 도전이 이웃집 봉상시 판사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 왔다.” 하였다.
군사가 들어가 수색해서, 도전이 칼을 짚고 기어서 나오는 것을 잡아 태종 앞으로 나오니, 도전이 우러러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 주시면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왕씨를 저버리고 또 이씨를 저버리고자 하느냐.” 하며, 즉시 목을 베어 죽였다. 그의 아들 정유(鄭游)와 정영(鄭泳)도 피살되었다. 남은은 남몰래 미륵원(彌勒院) 포막(圃幕)에 숨었는데 뒤쫓는 병사들에게 죽었고, 이직은 거짓으로 하인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서 불 끄는 시늉을 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궁중에서는 불나는 것을 바라보고 크게 소동이 나서 포(砲)를 쏘니, 방석(芳碩)의 당이 출군하고자 하였다. 군사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고 성에 올라가서 정찰하게 하였는데,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철기(鐵騎)가 가득 뻗쳐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감히 출동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이 도운 것이다.” 하였다.
태종이 궁중에 입직한 여러 군사에게 말을 전하여 나오라고 하니, 서로 거느리고 담을 넘어 나와서 근정전(勤政殿) 이남은 텅 비었다. 새벽에 태조가 처소를 청량전(淸涼殿)으로 옮기니, 조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죄를 아뢰고, 또 세자를 폐하고 새로 책봉하고자 청하였다. 태조가 방석에게 이르기를, “너한테는 편하게 되었구나.” 하였다. 방석이 절하고 나갈 때 현빈(賢嬪 방석의 부인)이 옷을 붙들고 우는데, 방석이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또 방번을 쫓아낼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세자도 이미 그만두었으니, 네가 나간들 무슨 해가 있겠느냐.” 하였다.
흥안군(興安君) 이제가 곁에 있다가 오히려 칼을 빼어 두리번거리자, 공주가 이제에게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만약 정안군 집으로 간다면 살 것이다.” 하였다. 방번이 서쪽 문으로 나갔는데, 태종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더니, 도당(都堂)에서 뒤쫓아 가 중도에서 죽였다. 《동각잡기》
○ 과거에 산기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이 방석에게 붙어서 상소하여 모든 왕자들의 병권(兵權)을 파하기를 청하여 골육을 이간하였다. 이때에 태종에게 잡혀 군전(軍前)에 나오게 되자 중량이 말하기를, “내가 요새 와서는 왕자에게 마음을 돌렸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저 입도 역시 고기다.” 하고, 베어 죽였다. 《동각잡기》 ○ 중량은 밀양(密陽) 사람인데, 고려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승지(密直承旨)에 이르렀고, 그당시 명망이 있었다. 왕집(王緝)과 더불어 동갑계를 맺었다.
○ 과거에 하륜(河崙)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갈 때, 태종이 그 당시 정안군으로 있으면서 그의 집에 가서 전송을 하였는데, 여러 손들이 자리에 가득찼었다. 태종이 앞에 나가서 술잔을 돌리는데, 하륜이 취한 체하고는 술상을 엎질러서 태종의 옷을 더럽혔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나니, 하륜이 좌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시니, 내가 가서 사죄해야겠다.” 하고 뒤따라 갔다. 태종의 하인들이 태종에게 아뢰어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니 하륜도 역시 말에서 내리고, 태종이 중문을 거쳐서 안문으로 들어가니 하륜도 따라 들어 갔다.
태종이 비로소 무슨 까닭이 있다 의심하여 돌아보며 묻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하륜이 아뢰기를, “왕자의 일이 위태합니다. 상을 엎지른 것은 장차 경복(傾覆)될 환란이 있겠기에 미리 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침실로 끌고 들어가서 계책을 물으니, 하륜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므로 오래 머무를 수 없으나,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무덤)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대사(大事)를 맡길 수 있습니다. 신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기다릴 것이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소서.” 하고, 하륜이 갔다.
태종이 숙번을 불러 그 사유를 말하니, 숙번이 말하기를, “이런 일은 손바닥을 뒤엎는 것보다 쉬운 일인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하인들과 이장할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탈취하여 갑옷을 입히고 병기를 가지고 나가서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은 남문 밖에 장막을 쳐서 그 가운데 앉았고, 또 한 장막을 그 아래에 쳤는데, 사람들은 누구의 자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륜이 올라와서 그 가운데에 앉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오래지 않아 정승이 될 줄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하륜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
○ 과거에 하륜이 예천 군사(醴泉郡事)가 되어서 그 고을 기생을 모두 관계하여 음탕함이 한이 없었는데, 전최(殿最)하는 날도사(都事)가 장차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니, 감사(監司) 김주(金湊)가 말리기를, “하륜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굽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만 덮어 주라.” 하여, 드디어 상등(上等)에다 두었었다. 이때에 와서 김주가 정사의 난에 방석의 편에 가담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김주의 부인이 하륜의 말 앞에 끓어 앉아 말하기를, “저는 김주의 처입니다.” 하니, 하륜이 힘을 써서 구해주어 난을 면하였다.
최항(崔恒)이 과거에 응시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대지가 뜨거워서 일월이 이글거리니, 들리는 우레 다만 하늘 한 쪽뿐이구나.[大地窮炎蕩二精 尺天雷鼓但轟轟]” 하였으니, 이것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의 변란에 온 나라 신민이 모두 하륜의 피해를 입었으며, 태조가 비록 개국한 공이 있으나 먼 지방으로 옮겨가 한갓 울분을 더하기만 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큰 우레 소리가 울리나 다만 조그마한 한 쪽 하늘에서 소리나는 것과 같아 누가 경계하고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
○ 무안군 방번이 죽으니, 나이 18세였다. 태조가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여러 번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명복을 빌었다. 〈무안군묘비(撫安君墓碑)〉
태종 병술년(1406)에 고(故) 세자(世子) 방석의 시호를 소도(昭悼)라 하고, 무안군의 시호를 공순(恭順) 뒤에 문종(文宗)의 시호를 피하여 장혜(章惠)라 고쳤다. 이라 하였다.
○ 세종 19년에 하교하기를, “공순공 방번과 소도공 방석은 모두 왕자로서 불행히도 후사가 없으니,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를 공순공의 후사로 삼고,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소도공의 후사로 삼아서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라.” 하였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경순공주는 흥안군 이제에게 시집갔는데, 방석의 난에 이제가 또한 죽었으므로, 태조가 친히 공주의 머리를 깎아주고 눈물을 흘렸다. 《해동악부(海東樂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