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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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4292년 그러니까 서기로는1959년 병영면사무소 모습이다.그 때 면사무소에 다니는 사람을 면서기라고 했었다. 지금은 컴퓨터로 순식간에 발급하지만 손으로 양면괘지에다 묵지대고 직접 써서 호적등본 발급 했었다.이건물은 70년대 말 현 건물이 서기까지 사용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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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5.30
남농 허건 화백이 초등학교3년까지 다니던 병영초교와 살던집을 찾았다.
남농화백과 당시 김시모교장, 아래 사진은 병영교회옆살던집-지금은 철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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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대청소기간을 맞아 각마을리장,청년회장,부녀회장의연석회의를 열었다.앉아있는 나무책걸상, 앞 칠판을 보니 학교교실을 빌려서 하고 있는 듯 싶다.벽은 흑벽이고 한쪽 걸상하나를 벽에 붙여놓은게 재미있다. 50년대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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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7.9 군수와 재무과장의 인사이동으로 석별을 아쉬워하며 사진 한 장-당시의 풍습이였다.뒷 건물이 당시 강진군 청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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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증산-한톨의 쌀이라도 더 생산키 위해 유일한 방법은 퇴비였다. 퇴비 만드는걸 장려하기위에 예초대회를 벌렸다. 많이 베어 가지고 지고 오는 사람에게 저울에 달아 삽등 농기구를 상품으로 주었다. 60년대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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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병영파출소 전신인 병영지서의 1959년 모습- 돌담이 인상 깊다. 6.25때 방위를 위해 높은 돌담을 쌓아 사용 했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이돌들을 병영성에서 옮겨와 쌓았다고 전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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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흥센타 부근 한골목 입구에 있었던 병영우체국, 편지 부칠려면 이곳에 와서 우표를 사서 부치고, 전보치 고, 전화를 할려면 또 이곳에 와서 신청하여 기다리다가 접속되면 몇마디 말하던 그 때 우체국 당시 우체국은 면내 비중있는 기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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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당시 병영국민학교 모습 지금 아름드리의 히말리야시타나무가 인상 깊다.아래 사진은 지금 강당 앞 에있던 후관건물 그때는 추울 때 화목난로 사용하고 책가방이 아니라 보자기를 등에다 걸쳐 메고 달리노라면 필통에서 도시락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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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교 된 병영동국민학교모습.이 건물들은 뜯겨지고 새로 스라브 건물이 들어섰으나 학생수 감소로 마침내 분교로,폐교에이르고 말았다.
모교가 없어지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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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초등학교 제48회 6-2반 졸업사진, 학생수가 지금의 한 학년 정도로 많아 보인다. 형편이어려워 당시는 이렇게 앨범 대신 사진 한장으로 대신 했었다.선생님들중 낯 익은 선생님들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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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초등학교 운동장 건너 남쪽에 있었던 교실 이 건물은 몇 년전 화재로 없어젔다. 이 건물을 제주도 건물이라고 부리우기도했으며 당시 유치원이었다. 이 사진은 유치원 놀이장-물놀이장 공사 중 찍은걸로 보인다.이 교실 반대쪽에는 정구장이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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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초등학교 본관 모습 구령대에서 교내 웅변대회인양 어느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선생님들이 심사를 보고 있다. 옛 구령대 모습이며 당시 교실 목조건물 모습이 정다웁고 지금도 있는 희말라야시다 나무가 울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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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빠짐 없이 논이며 밭에 보리를 심었다. 당시 농촌인구가 지금처럼 적은편은 아니였으나 기계화가 되지 않아 보리 베고탈곡을 마쳐야 모내기를 할 수 있기 떼문에 농번기휴가가 있었고 휴가 전 초등학교 3학년부터 도시락 싸 가지고 며칠을 동원되어 보리베기에 나서야 했다. 당시 서로 베어 달라고 했었고 서툰솜씨로 베어야만 했던 당시 너무 힘들었다. 베고 삯을받아 학교 도서를 사는 등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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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교 된 병영동교 졸업생들의 동창회 모습 당시 이 건물이 있던 장소는 도룡리 공동묘지 옆에 있었으며 벌거벗은 매봉산의 모습이 보인다.여자들의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너무 정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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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가 가던 날 마당에 치알치고 동백나무 꼽고 꽃 메 달고식장 꾸며 예식 올리고 동네 잔치하던 날 이 사진은 식을 마치고 무엇인가 선물을 서로 교환하고 있는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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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극장의 너무나 신나던 극장 단체관람 하던 날, 당시 병영극장은 당시 유일한 이 고장의 휴식 문화 공간 이었으며 옴천, 작천, 성전에서까지 걸어서 구경을 왔었다.당시 젊은이들은 구경하고 영화이야기 나누느것이 유일한 즐거운 시간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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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병영초등학교 후 별관 건물 모습 빨간 벽돌건물이 정겹다. 지금 대학생들 1980년대까지 학교 다닌이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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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이 있을 당시부터 있었다 전해오는 병영초등학교 교장관사앞에있었던 연못모습 1970년대까지 학교다닌 이들은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교장 관사주위의 많은 단감나무들 감이 열려 익어갈 때 까지 너무나 하나 먹고 싶던 그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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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위에연못을 이렇게단장했었다.일년에한두 번 연못을 퍼내고 소제를하고 고기를잡고했었다.이연못도 90년대중엽에 메워 없어지고 스라브 교실이 이어 들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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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변해 버린 병영세류교 모습 상여가 지나고 있다. 일제때 이 다리를 쌓던사람들이 지금 홍교의 다리에와서 쌓은 방법을 보고 배워가며 이 다리를 쌓았다고 전해 왔었다. 80년대 초 소도읍 가꾸기 하면서 다리확장을 위에 이다리는 안으로 뭍이고 다리폭이 넓어 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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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학교 운동회 날, 바로 이 날은 온 면내의 잔치날이었다.빙둘레 구경자리의 앞에 자리를 잡으려면 일찍 나서야 했다. 앞의 걸스카우트의 복장을 보니 이 사진은 70년대초 사진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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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베기-정말 하기싫은일이었다. 날은 덥지,보리 가스락은 살에닿으면 꺼럽지, 그러나 결석이 무서워 빠짐 없이 나와 보리베기에 며칠-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손가락을 베었다 해도 헝겁으로 동여감고 작업해야했다.장소는 멀리 수인산이 보인걸보니 지로리인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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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집은 없어젔다.정말 초가3칸집이다.이 집에서 할머니혼자 상당히 오랫동안 사셨다.
-도룡리 마을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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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집은 없어지고 25평 최신 스라브 양옥집으로 바뀌어젔다. 70년전까지는 거의 전부가 이런 초가집 이었다. 가을추수를 하고나면 양지 바른곳에 앉아 집을 해이으기 위해 집집마다 마람(이엉)엮는 것이 큰 일 이였다.
-도룡마을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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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초등학교 옛 건물 모습 이건물이었을 때는 학생수가 1000여명에이르렀다. 60년 대 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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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오면 잡아주는닭 지금은 여러 가지이유로 거의 키우지 않지만 70년대까지만해도 집집마다 키우지 않는 집이 없었다.여기서 나온 계란은 큰 소득원이었다.계란을 팔아 색우(석유-호롱불용)도 사야하고 빨래하는데 필요한 양잿물(비누대신)도 사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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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화장실 이라는걸 아는사람이 얼마나 될까,독아지하나 묻어 놓고 분뇨도 모아 거름으로 사용했다. 당시 똥도 큰 자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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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사용된 병영초등학교 자전거 보관소 -지금은 통학버스로 등하교하고 있지만- 이 자전거는 좀 형편이 괞챤은 집 아이들만이 타고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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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중학교 2회 졸업사진-b반 앨범이 아닌 이런 사진한 장으로 대신 했었다.뒷 초가건물이 교실이 아니나 싶어진다.(미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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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이니까 35년전 당시 병영동교에서 여선생님한분이 국악에 기능이있어서 방학기간을이용해 국악교실을 열었다.지금으로 말하면 문화강좌라 할까,마치며 이사진 한 장 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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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산에 나무가 흔해 빠졌지만 식목일이면 도시락싸가지고 나무심으로 가야했다.아카시아며,리기다소나무,오리나무등--
이렇게 정성스레 심은덕분에 산에나무가많다면 지금아이들은믿을런지-
산에 왜 나무가 없었냐고? 당시 나무는 밥해 먹는데, 난방에 필요한 유일한 연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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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때 여학생들의무용,어머니들이입던 한복을 줄여입고 음악에마춰-- 너무 재미 있었고 제일 많은 박수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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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교된 도룡분교 전신인 병영동국민학교 12회 졸업사진 주로 1948년생이이니까 나이는 계산 해 보아야 겠다.특이한 것은 여학생 복장 대부분이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다. 선생님들중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남학생중 지난 정권(d.j) 특별검사로 지정된 변호사로 진출한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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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안경은 장님이어서 쓰고 있는게 아니다. 최고로 멋을 부리고 있는 모습 인 것이다. 50년대 모습이다. 한복 입고 썬그라스끼고 있는 여자모습이 너무 우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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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힘있는기관의 직원들이 야유회를나왔다.마이크까지가지고 나온걸보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직원의 머리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투피스를입은거며 한껏 멋을 낸 모습인 것 같다. 60년대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