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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3/22.주일설교}
*주님께 대한 최고의 악과 선/마 26: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젠 완전한 봄날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꽃소식도 있고요. 한낮에는 더웁기까지 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의 날을 허락하시어 이렇게 모이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최고의 악은 선한 사람, 무죄한 사람을 궤계와 음모로 죽이는 일을 치고의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최고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은 "주님께 대한 최고의 악과 선"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 자 합니다. 큰 은혜를 사모하시고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실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 보내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내는 최고의 선을 나타내셨습니다.
과거 월남 전쟁 때 우리 국군 한 장교가 부인과 자녀 셋을 두고 전사했습니다. 얼마후에 부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아이들은 고아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이모가 있었는데 시집갈 나이가 찾는 데도 불구하고 시집가는 것을 포기하고, 언니의 세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됐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요, 참 선이 아니겠습니까?
과거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하시고 돌아가실 때 그의 부인께서 우리나라의 아주 가난한 가정에 심장병으로 사경으로 기울어진 두 어린이를 미국으로 데려다가 입원시켜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역시 참 사랑에 의한 참 선이 아니겠습니까?
최고 사랑의 표현이 최고의 선이요, 최고의 미움의 표현이 최고의 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 대한 최고의 악과 최고의 선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예언.
1-2절, 먼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에 놓고 유월절 양과 같이 십자가에 고난 당할 것을 네번째로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한편,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2. 최고의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3-5).
유월절 명절을 이틀 앞둔 수요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 앞문 즉, 중간 뜰에서 아무 죄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궤계와 음모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악한 사람들입니까?
죄가 있으면 마땅히 법으로 처리함이 옳거늘, 무죄하신 예수를 단지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자기들의 부패상을 책망한다고, 그리고 메시야됨을 말한다고 증오하고 시기하여 음모와 술수로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악한 인간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이요, 성문학의 교훈을 잘 알고, 선지자의 예언서도 잘 아는 사람들로서, "궤계와 음모로 악을 도모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마음이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 복을 받는 줄"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는 것과는 달리, 실제적으로는 선하신 예수를 거짓된 계략으로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저들은 최고로 악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이런 인간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죄한 사람, 선한 사람을 시기와 질투로서 음모하여 넘어뜨리는 사람,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 자기와 라이벌이 되는 사람이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면 궤계로 넘어뜨리려는 사람들이 정치계나 경제계나 교육계나 그 지방 종교계까지, 기타 사회 각 분야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궤계와 음모로 남을 잡으려는 못된 생각을 추호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음흉한 생각의 죄값은 반드시 자기와 자기 자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을 향한 최고 선을 행한 여자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6-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셔서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기사는 네 복음서 다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9막 14:3-9, 눅 7:37-39, 요 1-8).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마태, 마가, 욕한복음에 있는 기사는 같은 사건이며, 누가복음에 있는 기사만은 다른 것 같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어떻게 주님께 최고로 선한 일을 했을까요?
1) 이 여자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2:3 에 보면, 나사로라 하기도 하고, 본문에는 문둥이 시몬이라고도 하는 분의 여동생입니다. 봉사 잘 하는 마르다의 동생이기도 한 마리아임이 확실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제일 사모하는 여자이며, 아울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믿음이 독실한 분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며 믿음이 독실한 사람은 자연히 주를 위해 선한 을을 안 할래야 안할수 없게 되는 줄 압니다.
2) 이 여자는 예수님께 가장 선한 일을 했습니다.
10절, 마가복음 14:6,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께 몽땅 부어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2:3에 그 향유를 나드 한 근이라고 했는데, 나드는 인도산의 식물 이름인데 그 뿌리에서 나는 향유로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약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 일년 수입이 되는 돈에 해당하며, 500명을 한번에 대접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이 귀한 향유를 마련하느라고 오랜 세월 벌어서 전력을 다하여 저축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4:8에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에게 가장 귀한 보배로운 향유, 가장 가치있는 향유를 그것도 옥합을 깨드렸습니다(막 14:3). 유대 풍속에 가장 귀하게 사용한 그릇은 깨뜨린다고 합니다. 옥합도 귀하지만 가장 귀한 분에게 일회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옥합을 깨드려 향유를 예수님 머리와 발에 몽땅 부었습니다. 그것도 정성이 부족한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요 12:3).
이는 물질과 마음과 몸과온 정성을 드려 헌신, 봉사, 희생한, 최고로 선을 행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최고로 헌신적인 선을 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①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희생적 봉사가 있을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렬했기 때문에 주님께 가장 고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드려서 충성과 봉사의 선을 표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열렬할 때 주를 위한 주의 일에 모든 것을, 그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아끼없이 바쳐 희행, 봉사, 충성을 하게 되는 줄 압니다.
오늘,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 대한 최고 선을 행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의 보답 때문에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그렇게 한줄 압니다. 본문에 문둥이 시몬이란 말을 보면 아마도 오빠되는 시몬은 문둥병자였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함께 살아가는줄 믿습니다.
그 한분 밖에 없는 오빠를 문둥병에서 고쳐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도 감사하여 헌신적 최고 선을 나타낸 줄 믿습니다.
우리도 사실은 죄의 문둥병에 걸려서 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한없는 은혜를 감사 감격하여 주님께 헌신적 충성과 봉사를 하면서 살아감이 마땅할 줄 압니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선한 봉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부모와 형제의 은혜 및 모든 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봉사를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③마리아 자신은 잘 알지 못하고 행한 선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메시야 사역을 성쉬하려는 유일한 기회에 그 예수님의 고귀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뜻에서 향유를 부어드린 결과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귀한 선입니까?
그런 까닭에 선이란 것은 행하기만 하면 주님의 큰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에 선을 행합시다. 선을 행해 손해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웃도 형제도 좋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결과르르 가져 옵니다. 이와 같은 좋은 일을 했는데 비난을 샀습니다.
4. 이들중 마리아의 선행에 대하여 분히 여기며 허비한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남이 선을 행하는 것을 왜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으로 비판한 자는 가롯 유다입니다(요 12:4). "저는 이 향유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본심도 아니며, 온전히 바른 뜻의 생각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그런데 본문 8절에서,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한 것을 보면 몇몇 제자들까지 가롯유다와 동감을 가졌습니다. 여기에서 몇가지 뜻을 찾고자 합니다.
1) 한 사람의 악이 많은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선에 대한 감동을 받는 데는 둔하고 악의 충동과 선동을 받는 데는 예민하여 물이 잘 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악의 충동을 강하게 하면 착한 사람들도 그런가 하고 넘어 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충동에도 넘어가지 않는 슬기로운 판단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동료도 아닌 선생이 대접을 받는 것도 시기하고 질투한 제자를 볼 때 인간들의 부패 심리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3) 어떤 빈약한 명분에 내세워서 남의 큰 선을 비판하는 것은 옳치 않은 행동이라고 보여집니다(9절).
자기들이 가진 것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가난한 자를 도와 줄 것이지 왜 마리아의 주를 위한 선행을 가난한 자에게 결부시켜 비판을 합니까?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뜻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주님께 선을 행했는데, 자기들은 마리아의 생각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분내어 비판한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요, 순전히 시기와 질투의 죄에 불과한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에는 자기는 좋은 생각도 못내면서 남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일하면 비판하는 자가 많고, 자기는 안하면서 주를 위해 선한 일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자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보다 최선으로 봉사, 충성을 안하면 면류관의 상급이 보다 잘 하는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갑니다(계 3:10).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남의 선한 일하는 것을 절대로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면류관의 상급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일하는 것을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막아서도 안 됩니다. 오직 우리 자신이 점점 마리아처럼 최고의 선을 주님을 위해 행할 것뿐이며 면류관의 상급을 뺏기지 않도록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4) 저들은 사실 마리아의 뜻도 모르고, 주님의 장례를 위한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무지와 오해 때문에 선을 비판하고 공연한 분을 가졌습니다. 언제나 오해가 문제입니다. 자기 일방적 생각, 남이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말을 충동을 받아 오해를 가지고 분내고 비판하는 과오를 범하는 자들도 적지 않게 많습니다. 우리는 자기 일방적, 주관적 생각이나 편벽된 지식이나 어떤 사람의 불건전한 일방적 말을 듣고 오해하거나 판단을 그릇하여 공연히 선한일을 비판하거나 불평분자고 전락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5) 가롯 유다는 물욕의 저의가 있어서 마리아를 비판했습니다.
향유를 팔아 300데나리온이란 돈이 회계를 맡은 자기에게 맡겨지면 그 돈을 슬슬 훔쳐 쓰면서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생색도 내려는 마음에서 비판했습니다(요 12:6).
물욕이 있는자, 예수 사랑없는 자는 결코 선한 일을 못합니다. 예수 사랑의 마음이 있는 자, 물질을 종으로 부릴줄 아는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주를 위해 쓰거나 선한 일에 쓰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니고 가장 가치있는 선행인줄 알고 예수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물질을 종으로 부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 가롯 유다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파렴치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자기 선생을 앉혀 놓고, 선생에게 기름을 붓고(당시 주빈에게는 기름을 붓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있는 사람에게 분과 불평을 터뜨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선생에게 무안을 주는 파렴치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는 이렇게 스승도 무시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예나 오늘이나 많습니다. 신앙인은 파렴치한 행동을 결코 안 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례와 파렴치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떠났기 때문에, 이러한 파렴치한 일을 한 것입니다. 배신자의 행동이었습니다.
선을 행한 여자를 오히려 괴롭게 했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선을 행치 않는 자가 선을 행하는 자를 오히려 괴롭히는 수가 많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일을 안 하는 자는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불충한 자는 충성된 자를 괴롭히고, 믿음없는 자는 잘 믿는 자를 괴롭히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자, 일 잘하는 자는 실망하기 쉽습니다. 비판을 받겠거니, 욕을 먹겠거니, 각오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수님은 내게 좋은 일 행한 이 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고,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하였고, 이 여자의 행한 일은 온천하에 전하여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예수님은 언제나 선을 행한 자의 편에 서십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도와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변호해 주십니다.
②가난한 자는 세상에 어느 시대나 항상 있으므로 누구나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③주를 위한 선한 일은 온 세상에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받게 하는 교육적인 뜻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주님께 최고의 선을 행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선을 행하고 악하게 살지말며, 서로 도우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서로 사랑하고 어려운 자들을 돌보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날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후 2015년 3월 22일의 주일말씀
박종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