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대통령으로 부터 독립유공 문화훈장을 받고 서울특별시장으로 부터 받은 금열쇠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 꽃 벽걸이
金秀映/재미 수필가/목사
토론토에 있는 스코필드박사 기념장학회에서 온타리오에 있는 겔프대학교 수의과대학 스코필드 박사 기념회관 건립과 스코필드박사 흉상제막식이 11월 17일 거행된다고 초청을 받고 감회에 젖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2년전에 토론토에 계신 기념장학회 전 회장님이시던 김동수 선생님이 LA까지 찾아 오셔서 제가 갖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님에대한 자료(독립유공 문화훈장과 가족과 찍은 스코필드 박사님 사진과. 저에게 보내온 여러장의 친필 편지등)사진 찍어 가셨다. 앞으로 세워질 기념회관에 비치하신다고 말씀 하셨다. 지금으로 부터 반세기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을 회상하니 스코필드박사님이 나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그분을 잊을수가 없다.
작년 4월 10일 금요일 동생 김영교시인과 함께 서울대학교 캠퍼스안에 있는 호암 교수회관을 찾아가 현 국무총리인 정운찬 전
서울대학교 총장님을 뵙고 제 7회 스코필드박사 추모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여 스코필드박사님을 또한번 추모하게 되었다.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유일하게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스코필드박사님의 묘역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나는 이 추모식에서 스코필드박사님을 기리는 시를 써서 낭송하는 영광을 얻었다. 영시로 번역해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님께
드렸다.
전 정운찬 국무총리는 중학교 다닐때부터 스코필드박사님을 알게된후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계속 할수가 있게되어 그분을 잊을수 없는 은인으로 생각하고 2녀전 ‘호랑이 스코필드 동우회’를 조직하시고 스코필드박사 홍보 및 기념사업을 열심히 펴 나가시고 계신다.
필자가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스코필드 박사님은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 외국인 교수 회관에 상주하고 계셨
고 동생 김영교 시인 과 함께 늘박사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박사님은 어릴때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한쪽 다리가 불편해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 분 교훈 가운
데 잊혀 지지않는 말씀은 성경 요한복음 12:24 절 말씀인데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박사님 자신은 한국을 위해 한알의 썩은 밀
알이 되고 싶어 한국에1916년 선교사로 와서 세브란스 의대와 서울대 수의대에서 병리학과 세균학을 가르치셨고 필자가 만날 당
시는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강의를 맡고 계셨다.
고아원에 가실 때마다 따라가서 통역을 도와 드렸고 밤늦게 까지 장학금 기금 모금을 위해 세계 각국 지인들에게 편지 쓰시는
것 도와 드리면서 매우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되어 나중에는 Uncle 이 되시겠다고 하시면서 편지 쓰실때 마다, 책을 선물로 주실
때 마다 ‘Uncle Frank,석호필’이라고 꼭 싸인해 주셨다. 저에겐 ‘Gwen’이란 영어 이름을 지어 주셨고 동생에게는 'Dora’란 영어
이름을 지어 주셨다.
한번은 필자의 집에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주 귀한 선물을 주셔서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알프스 산 산정에서 자란 고산식물 인 ‘에델바이스’ 를 꽃 모양 그대로 말려서 액자안에 넣어 벽걸이로 만든것을 주시면서 “하나
밖에 없는 아주 귀한것을 주니 이꽃을 볼때마다 자기를 기억하고 기도 해달라” 고 하시면서 주셨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선물은 대
한민국 독립훈장 문화장(윤보선 대통령이 수여)을 들고 찍은 자신의사진이 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때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하여 3.1 운동에 민족대표 34인으로 참여, 일인주간의 영자신문에 익명으로 일
본정책을 비난하는 글 기고, 제암리사건 현장 답사후 기록, 3.1 운동 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 일본 동경 극동지구선
교사 전체회의에서 3.1 운동을 알림, 유관순 열사 등 3.1 운동 관련 형복무자 방문및 격려등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
의 위대한 애국자이시다.
에델바이스 꽃은 생화가 아닌데도 생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말려져서 얼마나 예쁜지 벽에 걸어두고 내 일생의 멘토가 되어 주
신 스코필드박사님을 늘 추모하면서 그분을 기리고 살았다. 그 예쁜 벽걸이를 미국에 온후 이사를 몇번 하는동안 그만 분실하고 말았다. 잃어 버려 매우 아쉽지만 그 분이 남긴 교훈은 내가슴속에 영원히 샛별처럼 빛날 것이다.
에델바이스란 고귀한 흰 빛이란 뜻이며 알프스의 영원한 꽃으로 유명하다. 비바람 몰아치고 차거운 눈 보라속에서도 강하게 살
아남아 눈같이 하얀 꽃을 피우는 작고 약하게 보이지만 강한꽃… 별처럼 생긴 벨벳같은 하얀 꽃은 순수의 상징으로 묘사 된다.
에델바이스를 더욱 좋아하게 된 이유가 또하나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스트리아의 트랩 해군 퇴역 대
령이 수녀와 로맨스에 빠지면서 자녀들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에델바이스’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너무나 감명이 깊었다. 오스트리
아가 나치에 합병되어 더 이상 발붙일수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조국을 떠나기에 앞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조국이 에델바이스 처럼
혹독한 시련을 잘 견뎌 줄것 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러 관람객들의 심금을 더 울려 주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꽃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끝으로 에델바이스에 얽힌 전설을 알아 보았다
“ 눈으로 뒤덮인 스위스의 알프스 산에 ‘ 에델바이스’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얼음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읍니다. 원래 ‘ 에델바
이스’ 는 천사였는데 변덕스러운 신이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어 산 꼭때기로 내려 보낸 것이었지요.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등산가가 그녀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매혹 되었답니다. 산을 내려온 등산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했고 이를 전해 들은 젊은이들은 ‘ 에델바이스’를 보려고 앞을 다투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 에델바이스’ 를 보지도 幣起?등산 도중에 목숨을 잃어 갔죠. 이 사실을 안 ‘ 에델바이스’ 는 몹시 슬퍼, 신에게 자신을 멀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 했읍니다.
그러자 신은 한줄기 빛을 보내 ‘에델바이스’ 를 다시 천사로 만들어 하늘로 올라오게 했죠. 그녀가 가 버린뒤 그 집에는 새하얀
꽃이 피었는데….사람들은 그 꽃을 ‘ 에델바이스’ 라고 불렀답니다.”
박사님께서 한국을 사랑한 위대한 애국심과 교훈은 우리들 가슴을 뜨겁게 해주고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횃불처럼 활활 타오
르리라.
1. Aria
Ich habe genug
스코필드 박사 추모 기념회에 참석하여 찍은 사진들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 호암회관앞에서
호암회관안에 있는 로고샵앞에서
호암회관 현관 바로 안에서
호암회관 마로니에 룸(강연장)바로 앞에서 동생과 함께
제가 시를 낭송하고 있는 모습
제가 시를 낭송하고 있음 - 오른쪽에 정운찬 교수님
식이 다 끝난 다음 전 정운찬 서울대 총장님과 악수를 나누다
카나다 온타리오에서 오신 스코필드박사 후원회 회장 김만홍 목사님과 악수하다
M
Richard Rodgers (1902 - 1979)
The Sound of Music: Edelweiss
Vienna Boys' Choir
첫댓글 스코필드 박사 기념관은 10월 7일 개관식이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11월 17일 있을 예정이던 흉상제막식에 들 비용을 모두 장학회에 쓰기로 뜻을 모았다고 합니다. 평생 검소하게 살으셨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결정하신 사항이라 나는 비록 참석을 못해도 그 뜻을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