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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묵상글 들 ( 연중 2주 토요일-오해의 발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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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주 토요일-오해의 발생
오늘 복음과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복음은 주님께서 오해받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미쳤다는 오해를 주님을 잡아가려고 온 친지들로부터 받고,
이어지는 복음에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는 오해를
진상을 파악하려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로부터 받습니다.
잡아가려고 왔건 진상을 파악하려고 왔건 그들이 오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친지들도 예수님께 오고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께 오고 사람들도
예수님께 몰려오지만 그 이유가 다른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하는 데
비해 친지들과 율법 학자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오해란 다 자기 기준으로 또는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기에 오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기준으로 또는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해하는 게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자기 기준이 강하고 자기 중심인 사람은 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해가 아니라 판단을 주로 하지요.
이런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와 같은 사람입니다.
MBTI 성격 유형에서 저는 INFJ이기에 저는 매우 판단적이고,
이것을 떠나 제가 저의 일생을 봐도 이해적이기보다는 판단적입니다.
저의 성격을 검사해준 교수님 말씀이 저는 N과 F 곧 직관력과 감성이
제일 강하고 그래서 NF가 주기능을 하지만 내향성도 강하고,
판단도 강하다고 하시며 그러기에 제가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대체로 맞지만 5% 정도의 실수는 있을 수 있으며 그러기에 너무
제 판단을 너무 믿다가 큰 실수를 할 수 있음을 꼭 조심하라 하셨지요.
그런데 제 경험상 잘못된 판단과 오해의 더 큰 요인은 성격보다도
인격적인 것 곧 교만이고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자기 비움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우리말의 이해에 해당하는 Understand라는 말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어의 이해는 Under/밑에 Stand/서다 곧 밑에 서는 것이잖아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늘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데 비해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늘 다른 사람 밑에 있기에
자기 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입장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친척들은 어떤 것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은 교만하기에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친척들도 교만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일까요?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오해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주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미쳤다는 표현은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아는 상식에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사건건 당시의 법과 제도와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정신 나간 자의 짓이 아닐까 하고 걱정과 염려의 눈으로 본 것일 겁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데 자기 가문의 예수가 너무 튀니
이러다가 큰 사단이 나겠다는 생각에 예수를 붑잡아 가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염려도 오해 발생의 한 요인입니다.
그런데 사실 상당수의 염려는 기우杞憂이지요.
기우란 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염려의 오해는 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나의 기준과 중심성이 강하여
생사람 잡는 일만은 없도록 자기 근신을 잘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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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으며,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가짜 뉴스’인 소문에만 집중하여 편협하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나서는 태도를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8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가짜 뉴스는 거짓되고 매혹적인 주장을 앞세워 유쾌하고 위험한 유혹으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불안, 멸시, 분노, 좌절과 같은 즉각적 감정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직해 보이는 가짜 뉴스로 조작된 허위 정보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식별력과 판단력으로 진리를 가려내려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가짜는 참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가짜가 주는 열망은 불신을 낳고, 고립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믿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우리는 진리를 체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이 옳다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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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연중 2 토)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붙잡으며 반박한 것(마르 8,32)도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을 제지하기 위해서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자기 손에 붙잡고 조정하며 흔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는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시토회의 앙드레 루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도승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예수님을 붙잡으려 찾아다니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주님께 붙들린 사람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분이요,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배신할 때나 무관심할 때나,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힌 자로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려 살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조정에 승복하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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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0-21: 예수님 친척들의 몰이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가족들이다. 그것 때문에 어떤 때는 아무런 부담 없이 농담하고, 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족들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한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이것을 본 군중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적들을 비하하며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등 비방을 하였다(22절).
여기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21절). 아마도 예수께서 고향, 친척, 직업을 모두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셨을 것이다. 사실 그 형제들과(요한 7,5) 고향 사람들은(마르 6,1-6)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친척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경탄하기보다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한 사람이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서로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한 중상이나 비방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점,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다. 이 가족 안에서는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일이 없는 가족이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웃의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보다는 어렵고 곤란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을,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진정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힘들더라도 옳고 그른 진실과 허위를 가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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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우리를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도
우리자신들이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것이다.
세상에
빨간색만
있다면
그야말로
돌아버릴 것이다.
삶의 묘미는
다양함이다.
다양함을
미쳤다고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나친 과장과
지나친 왜곡은
언제나
우리 삶을
아프게 한다.
정상과 이상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좀 부족해도
괜찮다.
저마다
남모를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고통을
헤아려주지는
못할망정
판단과 낙인으로
소중한 인격을
무너뜨린다.
무례한 통제와
도를 넘는
간섭과 무리한
요구를 이제는
멈추자.
우리자신밖에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저마다의
보폭과
저마다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자신과
이웃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 된다.
가치있는
존재로
바뀌는
그 시작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건강한 삶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미치지 않으셨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우리들
삶의 관계이다.
판단이 아니라
사랑속에서
성장하는
우리들 삶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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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새벽을 열며.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빠다킹 신부님.
책을 읽다가 인격장애의 종류가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집성, 분열성, 분열형 인격장애는 A군이고, B군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말합니다. A군이 외톨이형(자기만의 성을 쌓기 때문)이라 하면, B군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기에 자존감이 낮고 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마지막으로 C군 인격장애도 있는데, 강박성, 회피성, 의존성 인격장애로 불안해서 집착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이라고 합니다.
인격장애의 종류가 하나씩 살펴보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저 역시 약간씩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저에게도 약간의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관대합니다. 자신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따라서 자신의 문제를 알아가면서 좀 더 조심해서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완벽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하고 피하기보다는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앎은 ‘나’라는 틀에서 바라보는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에는 잘못된 판단으로 더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희망 가득한 말씀, 깜짝 놀랄만한 표징들로 인해 사람들은 늘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표징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예수님 망신 주기에 더 큰 노력을 쏟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문을 흘렸습니다.
이 소문을 예수님의 친척들이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아서 더는 미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소문만 듣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친척이라면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까이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단지 남의 말만 듣고 “미쳤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이 역시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알고 배우고 고쳐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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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도해 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매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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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단호함.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합니다. 양심이나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꽤 있지요. 공감 능력이 없고, 공감할 의지도 없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참 많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네가 맞다.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라고 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성향의 사람과 잘 지낼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엮이는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직장 상사를 비롯해서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원칙과 단호함.
스스로 원칙을 세워 단호하게 끊을 수 있을 때,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병적인 이 사람을 고치겠다고 해서는 더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나의 원칙과 단호함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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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메시아 백성의 정체성 ⓺ : 바오로의 정체성
바오로의 정체성, 바리사이 유다인에서 사도 선교사로!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간구하는 일치 주간을 맞이하여 사도 바오로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은 모두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바오로는 서간들을 많이 남겼고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에 수록될 만큼 신앙적으로 뛰어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본시 그는 자기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갈라 1,14).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라고 자랑했던 그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라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필리 3,5-6).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처럼 군중이 예수님 일행에게
몰려드는 상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사이들은 그분이 율법을 경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며 지키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다인이라 하더라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과는 한데 어울리기를 거부했을 정도로
자신들을 내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리사이란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라며
세상 사람들의 여론이 경멸조로 불렀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 자신들은 스스로 ‘하시딤’, 즉 경건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시딤은 기원전 2세기 경에 유다교를 없애버리려 했던 그리스계 셀레우코스 왕조에 저항하여
조상들의 관습을 지키며 마카베오 형제들을 따라서 독립 전쟁까지 치렀던 애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레위기가 규정한 정결 예법을 엄격하게 지키며 순수 유다인으로서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늘 독서에서도 나오는 표현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히브 9,11) 하는
고백을 하게 되기까지는, 다마스쿠스 사건과 그 후 14년에 걸친 장고(長考)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갈라 2,1).
그 결과 그는 천둥소리 속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부르고 계심을 깨닫고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주셨습니다”(갈라 1,15-16).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까지 동족이 거쳐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추려서 가는 곳마다 선포하였습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 13,23.27-28.30).
부활신앙에 입각한 역사해석입니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회개하지 않는 동포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로마 9,3)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은 바오로가 본시 지니고 있었던 정체성, 즉 유다인으로서의 애국적인 정서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바오로는 로마 시민이라는 의식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열두 사도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고향 타르수스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매우 중요한 국제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자라면서 당시 로마 제국에서 자유민들에게 행해지던 국제적인 교양과목들,
즉 논리학이나 수사학, 기하학을 배웠으며, 체력 단련도 꾸준히 했었을 것이고,
당시의 국제언어였던 그리스어와 생활언어였던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리스어의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그의 편지들에는 논리적인 증명들이 많이 등장하고,
집이나 몸 등 입체적인 상상력에서 나온 비유들도 여럿 나옵니다.
강인한 체력 덕분에 그 먼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많은 공동체들을 세울 수 있었던데다,
디아스포라의 동족들에게 설교할 경우는 물론,
체포되어 로마 관헌들을 대할 때에도 매우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기도 했습니다.
또 로마에 가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그곳 시민들을 만나며 선교했는데,
이는 당시 라틴어로 가능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 당시 알려진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이렇게 선교의 발판을 놓았기 때문에,
베드로까지 로마에 와서 함께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를 이끌던 사도는 수제자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노선에 충실하다가 순교한 스테파노가 처형당하던 형장에 나타나지도 않고(사도 8,1)
성전에 올라가 기도만 바치고 있던(사도 3,1; 5,12; 6,4) 베드로의 소심할 정도로 신중한 노선만 따랐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지금처럼 온 세계에 퍼지지 못하고 유다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유다교의 한 신흥종파로 전락했을 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열혈 바리사이 유다인이었던 바오로를 국제적 안목과 예언자적 지성을 갖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서 그리스도교를 보편적으로 만드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를 극적으로 체험한 바오로가 사도라는 자의식을 통해서 선교사로까지 나서게 된 것은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깨달은 신앙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부활 신앙과 메시아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의 정체성이 유다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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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흔들림 없는 삶>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근심 걱정만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 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 -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받으시고 모함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래도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어떤 이가 흔들 때 드러납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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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토요일
20년 전의 일입니다. 수녀님들과 대림특강의 강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거리가 멀었고, 신자의 수가 적었습니다. 누구를 강사로 모실지 고민하고 있을 때입니다. 수녀님이 제안을 하나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실까요?’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작은 성당에 오실 수 있을까? 오신다고 하면 어떻게 대접을 할까? 혹시 모르니 편지를 보내자고 결론을 냈습니다. 수녀님이 정성어린 편지를 추기경님께 보냈습니다. 6월에 보냈는데 9월이 되어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못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강사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월에 연락이 왔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로마에 다녀오셨는데 편지를 보셨고, 대림특강을 해 주시기로 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많이 모일지, 준비는 차질 없이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추기경님의 방문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장단의 콩으로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임진강의 꽃게로 탕을 만들었습니다. 면장님도 오고, 군인들도 올 수 있도록 부대에 연락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도 해 주시고, 미사까지 봉헌해 주셨습니다. 미사 후에 사진도 찍어 주시고, 식사도 함께 하셨습니다.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온전히 하루를 내어 주셨습니다. 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에 특별히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해마다 성탄절이면 작은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비록 작고 허름한 곳이지만 추기경님께서 방문하시고 미사를 봉헌하시면서 결코 작고 허름한 곳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피정 중에 추기경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 어디일까요? 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입니다.”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제사는 다시 번제물이 필요하지만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더 이상 번제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방문이 저와 성당에는 큰 기쁨이요, 영광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만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고난이 찾아오면 다른 곳을 찾으려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눈에는 하늘을 나는 나비가 위험에 보일 겁니다. 날개의 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의 눈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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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中心의 삶
-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오늘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주시는 특별 선물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오늘 하루 어떻게 사시나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루를 보람있게 마치고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하루중 몇%를 살까요?
마찬가지 한생애를 보람있게 마치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과연 평생 몇%의 삶을 살고 갈까요? 아마 하루를, 한평생을 보람있게 홀가분하게 마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를, 평생을 살고 나도 남는 것은 늘 아쉬움 뿐일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루하루 오늘의 중요성입니다. 하루하루 오늘의 삶에, 얼마전 강조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방황이요 표류요 서서히 무질서한 삶으로 안팎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늘 날마다 새롭게 확인해야 할 것은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14년째 파킨스병을 앓으면서도 건재한 68세 서울대 명예교수의 고백입니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지요.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힘은 의학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에서 나옵니다.” 좋은 말씀이지만 이런 삶의 엘리트들, 사유의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올바른 사유와 더불어 올바른 믿음, 희망, 사랑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좋은 글은 늘 읽어도 새롭고 영감과 감동, 힘을 줍니다.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새롭게 확인케 합니다. 언젠가 들었을 세 편의 글을 다시 나눕니다. 제일 먼저 나눌 시는 구상 선생의 널리 회자되고 있는 ‘오늘’ 이란 시입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짜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어지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22년전 씌어진 제 자작시는 16년전 2004년, 로마에서 ‘베네딕도회—시토회-트라피스트회 세계 양성장 모임 교육’시 제가 한글로 읽고 함께 참석했던 대구 분도회 수녀님이 영역英譯하여 읽었던 시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신이 꽃은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세 번째 인용되는 시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오늘 복음은 단 두절, 참 짧아서 좋습니다.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 중심의 삶-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금언입니다. 미쳐야 어느 경지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 삶의 방향, 삶의 의미를 잃어 세상의 무엇에 중독되어 미치면 괴물이 될 수 있고, 폐인이 될 수 있으며 주변에서 무수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술맛, 밥맛, 일맛 등 자칫하면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중독, 알콜중독, 성중독, 도박중독, 인터넷 중독, TV중독, 휴대폰 중독 정말 끝없는 중독이요 세상에 참 많은 것이 중독환자일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움과 불안의 사람들이요 미치기 쉬운 사람들이요 무엇엔가 미쳐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말마디가 미치기 쉬운 인간의 경향을 말해 줍니다. 이데오르기나 잘못된 신념에 중독된 광신, 광분, 광란, 광기, 광증 등, 지식유무에 상관없이 광신狂信에는 약이, 답이 없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허무하고 덧없는 광야 인생 살아낼 수 없어 제대로 미쳐 성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어 잘못 미쳐, 삶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자들도 속출하는 현실입니다. 그야말로 영적전투 치열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중심의 삶을 시스템화한, 기도와 공부와 일이 균형잡힌 수도원 일과표의 평생 영적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 영적 안전망이 되어 주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일과표의 영적 안정망이 없으면 삶은 무질서해져 곧장 깊이없는 무기력, 무의미, 무감각, 무의욕이란 ‘삶의 늪’에 빠져들어 갖가지 중독으로 괴물이, 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정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가르치고 먹이시고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섬김의 활동에 여념이 없으신 예수님은 사랑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들, 성인들, 우리 수도자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친 사람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친 것이지요. 세상 곳곳에도 제대로 미친 무명의 성인들 참 많을 것입니다. 이런 제대로 미친 주님의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주님 중심의 재대로 미친 삶보다 영육으로 건강한 삶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간혹 묻기도 합니다. 언제나 화두같이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물음입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저는 지체없이 “찬미의 맛, 주님의 맛”으로 살아간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주님 맛 아니면 무슨 맛으로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는 시편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 맛이 영원하며 늘 새롭고 무궁무진합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대로 우리가 매일 새계약의 제사인 미사를 통해 모시는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일치가, 평생 우정이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친히 새계약의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시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중심의 제대로 미친 경천애인의 삶을,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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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참된 성소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마르 3,20)
열두 사도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십니다. 군중도 뒤를 따르고 소문을 들은 이들도 모여듭니다. 이제는 유형의 성전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고 지성소가 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는 제자들과 군중만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으러 온 친척들까지 모여듭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에 놀라 달려왔을 겁니다. 이 대목 바로 뒤에 베엘제불 논쟁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마귀 두목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속단해 퍼뜨린 듯하지요.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친척인 예수님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앞섰겠지요. 혹 가문에 수치가 될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예수님을 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의도와 지향을 관상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메시아와 함께 출세와 영광을 바라는 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고, 군중은 치유건 구마건 위로건 무언가 얻어내고자 왔습니다. 친척들도 인간적인 걱정이 앞섰던 것이고요.이 모든 동태를 살피러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마르 3,22)의 의도야 너무 뻔한 것이겠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찬미와 영광을 바치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형의 성전 안에 존재하는 성소, 지성소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히브 9,11)
인간 대사제는 지파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에 접근할 지위가 주어집니다. 그는 율법이 정한 짐승의 피를 뿌려 사람들을 정화하지요.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온 인류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만든 성소가 아니라, 모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성소의 원형,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공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짓고 집회와 친교의 장소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도와 지향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 각자의 바람을 아뢰고 청원을 올립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부터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수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랑까지 주님이 계신 곳에 모여드는 이들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당시 종교제도 밖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께 올리신 제사가 온 인류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장소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문 밖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 언덕이었지요.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재앙적 감염병 사태가 "진리와 영 안에서 예배하는"(요한 4,23참조) 때를 앞당겨 준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전에 갈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고, 우리가 머무르는 공간이 주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지성소임을 절절히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지성소 안에 들어가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 품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이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 그분께 아룁시다. 우리 지향의 시작이 무엇이었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차츰 정화되고 성화되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영혼이 되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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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3,21)
드디어 어제(1.22) 점심무렵 '새로운 복음화의 땅'인 고성 배둔공소에 도착했습니다.
영산본당에서 마지막 10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과 가볍게 작별인사 하고, 곧바로 배둔공소로 왔습니다.
점심무렵 공소에 도착해, 신자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성당에서 기도하고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거주하시는 은퇴 신부님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땅, 고성 배둔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어제 은퇴 신부님 찾아뵙고 난 후에 비닷가 쪽으로 쭉 둘러보았는데, 걷기에 참 좋은 바닷가길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월요일에는 산에 가고, 다른 날은 바닷가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공소도 아름답게 꾸며야 하고, 해야 할 일들, 나의 땀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아보여 좋았습니다.
부족하지만 기쁘고 성실하게 예수님의 사목을 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곳 배둔공소를 많이 사랑해 주세요. ㅎㅎ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였을까???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모습, 기존의 모습, 그리고 사람들이 꿈꾸어 왔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너를 위해서 죽는 '그리스도의 피'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움'에 놀라고, 그 '새로운 사랑'에 놀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너를 위해 죽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이들이 볼 때, 우리의 모습이 미친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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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마르코 3,20-21)
<훌륭한 리더는 비전과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오늘도 역시 리더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교회의 리더셨던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그분의 제자들도 너무 바빠서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이렇게 자신도 미치고 자신의 조력꾼들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동기 부여자’여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는 그 동기 부여의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리더가 먼저 성령을 받고 미쳐야 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팀원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악령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 성령에 사로잡힌 리더를 구분하기 어려울까요?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는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의 욕심과 육체적인 욕심, 그리고 권력과 명예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1997)은 잘 나가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변호사는 승리에 취해있습니다. 지금은 한 성추행범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자가 성추행범인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엄청난 설득력으로 재판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리고는 가장 큰 법률사무소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 사장은 그를 엄청나게 좋아해 줍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신에게 관심을 잃어가는 남편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회사 사장은 사탄이었고 자신이 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사탄의 말에 응하는 척하다가 자유의지를 발동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쏴서 자살합니다. 그때 번쩍 다시 눈이 떠집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의 바로 그 재판장입니다. 그가 성추행범을 변호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깨달았던 주인공은 변호를 포기하고 재판에서 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세상 누가 봐도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소유욕, 육욕, 권력욕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악령에 들렸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런 욕구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악령에 이미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령으로 인도받는 이들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미치고 죽게 만듭니다. 아이돌 지망생들을 경연시키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정신적으로 무장이 안 된 그들을 비(정지훈) 씨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가르쳐준 지 며칠이나 됐니? 내가 늘 좋은 얘기만 하니깐 좋아 보여? 아니야. 너희들은 그냥 씻고 잘 준비가 돼 있니? 집에 일찍 가고 싶어? 그럼 연예인을 하지 마. 가수를 하지 마. 무대에 백 번, 천 번 섰던 나도 잠이 안 와서 오늘 들어가서 혼자 또 연습한다니까? 내가 나를 만족하지 말라니까? 거울로 봐봐. 나를 만족하지 마! 예뻐야지. 멋이 있어야지. 그래야 대중들이 본다니깐 너희를. ”
정지훈 씨는 진통제 살 돈이 없어 고통 받으며 죽어간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을 듯이 연습해서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꾸지람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슈퍼 주니어 출신 예성이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하는 말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습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내내 했어요? 노래 연습도? 근데 1년 이상 해야 할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원래 퍼포먼스에서 춤을 좋아했던 친구들이죠? 근데 가수가 되고 싶은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노래는 할 줄 알아야 해요. 무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연습실에서 누가 본다고 했을 때 절대 장난치면 안 돼요. 가사지를 들고 와서도 안 되고. 내 파트가 나오면 자신감이 없어도 자신 있게 불러야 하고, 틀려도 실실 웃으면 안 되고. 민폐라고요.
여기 데뷔하는 사람 몇 명이에요? 거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처음 회사(SM)에 들어갔을 때 80명 가까운 연습생이 있었어요. 불안했죠, 내가 언제 잘릴지 몰랐으니까. 우리가 데뷔할 때 12명이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 모든 걸 다 버리고, 웃고 떠들 수가 없었어요. 난 아슬아슬했으니까. 진짜 간절한 사람이 데뷔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제가 봤을 때 여러분들은 그리 간절해 보이지 않아요. ‘나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쉬운 바닥이 아니에요. 좋은 기회가 왔잖아요? 정말 목숨을 걸어요. 진짜 모든 걸 걸었을 때 합격할 수 있어요, 진짜로.”
성령은 나를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이들도 죽입니다. 이것이 악령에 사로잡힌 리더와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151경기’(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교 미국 풋볼팀은 지는 법이 없습니다. 11년 151경기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끌던 코치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년 동안 코치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에 팀은 첫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경기도 집니다. 모든 승리의 근저에는 ‘밥’이라고 하는 리더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복귀한 코치 밥은 그들을 버스에 태워 군인 재활 시설에 데리고 갑니다. 당장 잘린 손이 있다면, 당장 잘린 발이 있다면 전우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죽어라 재활하는 군인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이 없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연승행진은 이어집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무언가에 한 팀이 되어 매진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리더는 자신과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노력하는 데서 참 기쁨이 옴을 가르칩니다. 게으르게 만드는 리더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밥 먹을 시간도 없게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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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1846년 돈보스코(1815~1888)가 32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 시절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400여명 가까이 되었지만, 오라토리오는 계속 떠돌고 있었습니다. 묘지에서 방앗간으로, 작은 헛간에서 풀밭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유능한 돈보스코가 본당이나 병원 등 안정된 사목을 뒤로 하고, 갈곳 없는 아이들 수백명과 토리노 뒷골목을 전전하며 깔깔거리는 모습을 본 토리노 교구 동료 사제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1846년 연초에 개최된 토리노 교구 사제 모임 때 몇몇 사제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혹시 돈보스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은 아닐까?
교구에서는 돈보스코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돈보스코와 절친했던 빈첸조 폰자티 신부와 나시 신부를 진상 조사 위원으로 선정해 파견했습니다. 교구는 정확한 진단과 정밀검사를 통한 치료 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토리노 시당국의 눈초리도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안그래도 비상시국인데, 수백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경찰국장이 돈보스코를 호출해 호통을 쳤습니다.
“대체 이 부랑아들이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들을 자기 집에 내버려 두시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돈보스코가 물러서지 않자 경찰국장은 바로 그날부터 경찰관들을 파견하여 오라토리오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후에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이 된 미켈레 루아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사 복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는 제게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 어디 가니?”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가요.” “너 아직 모르고 있었니? 돈보스코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렸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주임 신부님의 말씀은 가시처럼 제 마음 속으로 깊고 아프게 파고 들었으며, 형언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밀려왔습니다. 저는 오라토리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돈보스코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미쳤긴 미쳤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에 미친 것입니다. 그분은 미칠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가 앓고 계시다는 병은 바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병이었습니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돈보스코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니,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교차되어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예수님 역시 돈보스코와 똑같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 기간을 지극히 제한적이지, 당신 손길이 필요한 백성들은 끝도없이 구름처럼 몰려오지, 아무리 외쳐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지...
당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침식마저 잊고 사목에 헌신했습니다. 하루를 백년, 천년처럼 그렇게 강도높게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감사하고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잔뜩 꼬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 복음 3장 21절)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께서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셨고, 순간순간 지니고 계셨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활활 불타오르게 하셨다는 표시가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솟아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일을 향한 강한 열정이 샘솟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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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3일 토요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_김상태 사도요한 신부 집전
https://youtu.be/bRUvJde3ohQ (33:46)
•2021. 1. 23.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 (도미니코 수도회) 집전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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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3.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1월 23일 토요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 (마르3,20-21) 제1독서<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성소로.>(히브9,2-3.11-14)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 시편 47(46),2-3.6-7.8-9(◎ 6)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복음<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3,20-21) 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9,2-3.11-14)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2~3.11~12)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암시이며 약속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요 성취이며 실현이다. 탈출기 26장에 나오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는 '계약 궤'를 모시는 '성막' 혹은 '만남의 천막'에 대한 계시는 바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성막의 울타리의 문은 동쪽에 있는데, 그것을 열고 들어가면 (번)제단 (탈출27,1~8; 38,1~7)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여러 가지 제사 (화목의 친교제사, 속죄제사 등등)에 바쳐지는 동물을 살라 바쳐지는 곳으로,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갈바리아를 예표한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탈출30,17~21; 38,8)이 있는데,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 봉사할 레위 족속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인데, 수족(手足)을 정화하지 않고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죽게 된다. 말하자면, 번제단과 물두멍은 가톨릭 교회의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은총을 얻어입는 세례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제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면, 휘장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진다. 성소는 지성소를 모신 휘장을 앞에 두고, 왼쪽에는 등잔대(탈출25,31~40; 37,17~24), 오른쪽에는 제사상(탈출25,23~30; 37,10~16)이 있으며, 휘장 앞에는 분향제단 (탈출30,1~10; 37,25~28)이 놓여 있다. 왼쪽에 금으로 된 일곱 촛대로 만들어진 등잔대는 시편119장 105절의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라는 말씀대로 영혼의 양식이며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상징하는 신,구약의 '말씀'을 의미한다. 성막을 비추는 등불은 올리브 기름에 의해 유지되므로, 이스라엘의 주요 농산물인 올리브 나무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계를 어느 정도 책임져 주므로, 그들의 생사대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계명의 실천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생명도 계속 축복받음을 상징한다. 오른쪽에 있는 제사상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수대로 광야 생활에서 아침에 해뜨기 전에 수거한 만나로 만든 빵을 제일 먼저 만들어 하느님께 봉헌하여 제사상 위에 6개씩 두 줄로 올려 놓으면 일주일에 한번 씩 갈아 놓는데, 이것은 신약의 '성체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지성소가 모셔진 휘장 앞의 분향 제단(탈출30,1~10; 37,25~28)은 제사상보다 높은 데, 대사제가 바치는 '기도'가 피어오르는 '향'으로 상징된다. 바로 이것은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치는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바쳐지는 기도를 의미하는데, 성막 밖의 번제단과 물두멍이 가리켜 주듯이 대죄의 사함을 온전히 받아 은총의 지위에서 바쳐지는 기도와 예배만이 무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올려짐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휘장에 대해서는 탈출기 26장 31~37절(탈출36,35~38)에 나온다. 1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을 벗기 위해서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레위기 16장 1~34절에 나온다. 대사제는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휘장 안으로 들어가 황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속죄판 동쪽 위로,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속죄판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위16,14). 그리고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앞과 위에 뿌린다(레위16,15~16).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상징하는 율법이 계약의 궤 안에 들어 있는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십계명이 들어 있는 계약의 궤의 두껑(증언판 혹은 증거판) 위에 또 하나의 두껑인 속죄판을 씌웠는데,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번제단에서 잡은 황소와 숫염소의 피가 바로 그 속죄판 위에 떨어져 율법으로 말미암아 지은 죄를 씻어 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속죄판과 그 속죄판 위에 뿌려지는 피는 신약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죄판 위로 양 옆에 만들어진 케루빔(한글 새 성경에는 커룹) 천사들이 그 피가 뿌려지는 속죄판을 바라보며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속죄판 위의 케루빔 천사들 사이에서 당신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시며, 모세와 대사제와 대화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이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자리를 '셰키나'(shekinah)라고 한다. 바로 이 '셰키나'로 부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만남의 천막(성막)의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는 곳이 서쪽인데, 여기 '계약의 궤'위의 '셰키나'로 부터 나오는 구름기둥(불기둥)을 보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영에 함께 머물고 계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알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만남의 천막(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천막을 치고 초막(장막) 생활을 하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만남의 천막과 자신들의 천막들을 거두어 구름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계약의 궤'를 모시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요르단강(죽음을 상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천국을 상징)을 향해 행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상의 순례 생활을 상징하는 광야의 초막 생활은 무조건 제멋대로 사는 생활이 아니라, 구름 기둥(불기둥)의 안내로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Go & Stop)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순종 생활이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 독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운명하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무죄하신 예수님의 단 한번의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옥좌가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참고로, 번제단의 짐승이 태워지는 속불판과 만나가 놓여진 제사상과 계약의 궤의 속죄판의 높이가 같다는 것은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희생과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약의 궤'(The Ark of Covenant)에는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십계명이 세겨진 돌판',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 그리고 '사제직과 성사 은총'을 상징하는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는 세 가지 방법인 '말씀'과 '성체성사', '사제직과 성사은총'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의 궤'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신약의 '감실'을 의미하고 있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3,20~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의 원형 '크라테오'(krateo)는 '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곧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과 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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