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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썹목사
부르는게 값이야 (눅 23:42-43)
누가복음 시리즈54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사형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눅 23:1-2)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해보니 사형 시킬 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형은커녕 그 어떤 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종교지도자들이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 혹은 종교적인 문제로 예수를 처치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수작에 쉽게 넘어갈 빌라도가 아니었다.
이건 빌라도가 정의로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한번 이용당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눅 23:14-15)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하긴 그렇게 쉽게 물러 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여기서 그냥 놓치겠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어떻게든 사형 판결을 받아내려고 했다.
(눅 23: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눅 23:18,21)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이렇게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막무가내로 나오니까 빌라도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안면도 없는 예수 하나 살리겠다고 관할 구역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눅 23:23-25)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십자가 판결을 받은 죄수는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 처형 장소까지 가야했다. 십자가는 상당히 크고 무거운 데다가 처형 장소까지 거리도 제법 멀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다. 사실상 이때부터 십자가 형벌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이미 모진 매질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십자기를 끌고 갈 만한 힘이 없었다.
(요 19:1)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마 27:27-30)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막 15:20) 희롱을 다 한 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겠는가?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자꾸만 픽픽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인들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아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했다.
(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당연히 예수님이 측은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게 답답해서 그랬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관심도 없었고, 십자가 처형을 받은 이유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하루 업무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나마 관심거리를 찾으라고 한다면 최근 급부상한 유명 인사를 처형한다는 것-그래서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 하다는 것, 딱 그 정도였다. 그 외에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아무튼 구레네 시몬은 로마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어느새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꺼이꺼이 통곡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눅 23:26-27)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이렇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채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처형장소-골고다(해골이라 불리는 곳)로 이동하셨다.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날 골고다에서는 예수님 외에 두 사람이 더 십자가에 달렸다. 둘 다 강도였는데, 예수님이 가운데에 있었고 한 사람은 왼쪽에, 또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에 매달렸다.
(마 27: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로 구원자라면 우리나 여기서 좀 구원해 봐라”고 비아냥 거렸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꾸짖으면서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강도짓하고 처벌 받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이 분을 모욕하느냐, 이 분은 십자가에 달릴 만한 분이 아니다. 아무 죄가 없으시다”고 변호했다.
(눅 23:40-41)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곧 이어서 예수님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으시고 처형 장소-골고다 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장면 속에는 예수님 외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저마다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군인
(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로마 군인들은 상관(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갔다. 다른 죄수들에게도 그랬는지 아니면 유독 예수님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상당히 거칠게 대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부터 시작해서 달리고 난 후에도 온갖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채찍을 휘두르고 침을 뱉었다.
(눅 23:36-37)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이처럼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다.
2. 구레네 사람 시몬
(막 15:21-23)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시몬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날 예수님을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시몬은 아들과 함께 그저 우연찮게 근처를 지나가다가 속된 말로 재수 없게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아마 십자가를 대신 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있어봤자 기껏해야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서부터는 로마 군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3. 일반 백성들
(눅 23:27) 백성과...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당시 십자가 처형은 큰 구경거리 중에 하나였다. 마치 우리가 막장 드라마를 볼때 “어유, 저게 뭐야? 진짜 어이없네” 하면서도 계속 보듯이 당시 사람들 역시 끔찍한 십자가를 구경거리로 삼았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이 있을 때 마다 제법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들었다. 하물며 당대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겠는가?
이 중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별다른 감정 없이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예수님과 크게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오늘은 저 양반이 십자가에 못 박히나 보다”하면서 따라갔을 뿐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구경꾼들이었다.
4. 슬피 우는 여자들
(눅 23:27)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여간한 감정이입 없이는 힘든 일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이 되려면 그 사람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 친밀함’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 간에 무관심이나 미움, 멸시와는 거리가 멀다.
무슨 말이냐면 이 여자들은 적어도 예수님께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존중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 온 것이다. 그리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던 것이다.
5. 강도 두 사람
(눅 23:32-3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앞서 말했듯이 두 강도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은 괜히 예수님께 분풀이를 했다. 자기가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이 마치 예수님 탓이라도 되는 냥 예수님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지만 또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사실상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했다.
(눅 23:41-42)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혼자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현장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종교 지도자도 있었고, 로마 군인도 있었고, 일반 백성도 있었고, 죄수도 있었다. 예수님을 좋아하던 사람도 있었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었고, 구경거리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사람,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올려 드린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게 누군가? 바로 강도다. 로마 군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을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 슬피 울던 여인들 조차도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올려드리지는 않았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강도만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했고, 천국을 약속 받았다.
(눅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도가 어떤 사람인가? 범죄자이다. 그것도 흉악범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고 구원 받았다. 자, 흉악범이 구원 받았다. 그 어떤 전조나 자숙의 기간도 없이 그냥 하루아침에 구원 받았다. 개과천선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는데, 그저 “나를 기억해 달라”는 몇 마디 말로 구원 받았다. 어떤가? 솔직히 좀 거북하지 않은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만약 그날 누군가 꼭 한 사람은 구원 받아야 한다면 이왕이면 예수님을 위해 슬피 울던 여인 중 하나가 구원 받는게 이치에 맞는 일이지,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구원해 주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 구원 받아야 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구조다.
우리는 다분히 계산적이다. 여기서 계산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기적이고, 약삭빠르다는 뜻이 아니다. 당위성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누군가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좋은 것을 얻는 꼴을 못 본다. 그건 너무나도 부당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공짜로 좋은 것을 얻으면-그게 아무리 사소하고 시시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장 계산기를 꺼내 들고서 수정 값을 제시하며 항변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은 유치한 비유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5살 터울의 남매가 있었다. 누나는 10살이고 동생은 5살이다. 하루는 남매가 같이 장난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10개 중에서 8-9개는 누나가 정리했고, 동생은 기껏해야 한 두 개 정도 거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누나가 정리 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엄마가 동생이 정리하니까 “잘한다, 착하다”를 연발하면서 온갖 칭찬 세례를 쏟아 붓고, 귀가 따갑도록 물개 박수를 치고, 거기다가 간식까지 얹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나는 밀려드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한테 따졌다. “내가 장난감 정리 훨씬 더 많이 했는데 왜 동생만 칭찬해? 왜 동생한테만 간식 줘? 나 이제부터 장난감 정리 안 해!!”
누나는 차별 당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행동이 너무나도 부당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은가? 칭찬을 하려면 둘 다 똑같이 하는게 마땅하고, 안하려면 그냥 아예 안 하는게 차라리 낫지, 누구한테는 하고, 누구한테는 안하고 이건 아니다. 그리고 굳이 차등을 두려면 장난감을 하나라도 더 정리한 누나를 칭찬해야지 동생한테 하면 안 된다. 그게 공정하고 합당한 일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계산적으로 접근했을 때만 맞는 말이다. 누나는 아직 어리고 또 엄마만큼 동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계산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래서 동생을 칭찬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저 불공평하고 부당한-다르게 표현하면 계산에 맞지 않는 행동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은혜와 사랑”이 개입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계속 이어서 비유를 들어 보겠다. 하루는 아빠와 아들이 방청소를 하고 있었다. 사실상 아빠가 혼자 거의 다 한 거고 아들은 기껏해야 옆에서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한테는 한마디도 안하다가 아들한테는 “잘한다, 잘 한다”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번쩍 들어서 안아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뭐라고 했을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 어쩜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거 너무 불공평 한거 아니야?”고 따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옆에서 같이 아들을 얼싸 안고 칭찬하고 간식을 떠먹여 주었다. 왜냐하면 아빠에게 아들은 계산기를 들이밀고 꼼꼼하게 따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따뜻하게 꼭 안아줘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비유를 통해서 뭘 알 수 있는가? 사랑이 없을 때, 은혜가 메마를 때 계산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강도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걸 다 떠나서 결국 그 강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은혜를 베풀 마음이 없어서이다.
이제 왜 예수님이 아무 공로도 없고, 자격도 안 되고 앞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강도를 구원해 주셨는지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부당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공명정대하고 합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강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다. 그러니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강도를 구원하시는 것은 전혀 잘못 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강도는 예수님께서 정해두신 구원 원칙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행동을 했다.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강도는 그 말씀대로 했다. 그리고 구원 받았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눅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우리는 은혜를 잘 모른다. 베풀 줄만 모르는게 아니라, 받는 것조차도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극히 계산적이기 때문이다. 내 계산 값에 어느 정도 일치하면 받아들이지만, 계산 값에서 어긋나게 되면 비록 그것이 은혜라 할지라도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는 은혜를 잘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계산적인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의 계산 값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는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게 계산이 되는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그날 바로 구원해주셨다. 이게 계산이 되는가? 실컷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 천국을 약속하셨다. 이게 계산이 되는가?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값은 얼마인지 도저히 계산이 안 된다. 어쩌면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부르는게 값”이라는 말이 있다. 판매 가격이 일정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너무 비싸다”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 내 몸 값을 물을 땐 난 부르는게 값이야” 무슨 뜻인가? “내 몸값 엄청 비싸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값을 매길 수 있을까? 측정 불가다. 그야 말로 부르는게 값이다.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은 계산이 안 된다. 애초에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살 수 있는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비싸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공짜로 베풀어 주신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호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수님의 큰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계산할 수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 거하고, 다른 사람들-특히 여러분의 강도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는 청소년부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https://ssub2.tistory.com/1823 [썹목사 함께 자라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