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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예상대로 사흘째 점심 때 등반을 완전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우리 추측이 정확해서라기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혹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으면서도 정상에서 내려와 자축할 때에는 누구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의 실력보다도 은연중에 그런 운을 더욱 믿기 때문에—물론 자신만만했던 우리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게—그 험한 산들로 내딛을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실력’이란 것은 결국 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쯤 되지 않을까.
소통과 공감, 알파인스타일로 가능한가
따라서 하행 캐러밴에 묵묵히 걸어 내려오는 우리들 머릿속을 채운 것들은 등정에 성공했다는, 우리의 실력을 입증했다는 기쁨 따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더 공감할 수 있는 등반이기를 바랐는데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건 아닐까 반성돼요.”
김영미는 소규모 알파인스타일 등반에서는 극지법 등반보다 더욱 깊은 팀워크를 요하고 그래서 더욱 잘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원들 사이에 더욱 긴밀한 연결과 더 깊은 이해가 오가는 이상적인 등반 말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언제나 바랐다. 우리 모두 그걸 바랐다. 보통 사람들이 소통과 이해를 꿈꾸듯이 서로 가능한 깊은 곳까지 나눌 수 있는 등반은, 사실 여태껏 나와 함께 산을 올랐던 모든 이들이 꿈꿨던 근본적인 소망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알파인스타일’은 기대에 찼으나 어쩔 수 없는 상처에 지쳐 간 등반가들이 고안한 이상향과도 같았다. ‘극지법’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매장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면서.
알파인스타일이란 국제산악연맹에서 다음 여섯 가지 요소로 정의했다. ①등반인원은 6명 이내 ②등반로프는 팀당 1~2동 ③고정로프를 사용하지 말고 다른 팀의 고정로프도 이용하지 않을 것 ④사전 정찰등반을 하지 않을 것 ⑤고소포터 등 지원을 받지 않을 것 ⑥산소기구를 휴대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엄격하게 보면 우린 이들 중 두 가지를 어겼다. 빙하지대에 세 구간 도합 20여 m의 로프를 설치했다. 게다가 벽 밑 설원까지 두 차례 사전 정찰등반이 있었다.
나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등반에 고정로프와 정찰등반은 필수였다. 이들 없이 암푸1봉을 등반하려는 이가 있다면 등반성보다는 오히려 덜 준비된 채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국제산악연맹이나 프랑스 황금피켈상 모두 알파인스타일을 극지법 등반보다 ‘더 나은’, ‘새로운’ 등반방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연 이 제한을 모두 지키면 ‘알파인스타일’이 되는 건가? 왜 서양인들은 이런 규칙들 따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을까?
‘히말라야를 알프스식으로 오른다’는 것은 20세기 초중반 성행했던 영국이나 독일식 극지법 등반에 대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무언가 중요한 등반의 가치가 훼손된다고 여겼던 유럽 정통파 산악인들의 구호와 같은 것이었다. 즉, 대원 각각 힘과 정신력으로만 정상에 서겠다는 생각이었다. 대규모로 역할을 분담하면 할수록 이들은 산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대등한 관계가 성립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우리 셋의 힘으로 이 산을 한 번에 오른다고 해서 우리가 산과 서로에 대한 관계가 대등한 것으로 될 것인가? 혹은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팀워크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초등’ 또한 유행하는 타이틀
아무도 오르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산들이 이곳 에베레스트와 마칼루 사이에 여럿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 준 것은 김창호 형이었다. ‘히말라야 카라코룸 연구소’를 운영하는 그는 웬만한 산악인들도 알지 못하는 다양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안치영 대장은 그로부터 정보를 받아 이번 등반을 준비했다. 8월에는 홀로 정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K2코리아(대표 정영훈)는 원정경비를 전액 지원했다.
하지만 왠지 식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에베레스트나 아마다블람, 임자체 같은 인기 있는 산들이 마치 관광상품인양 마냥 팔리고 있는 것처럼 암푸1봉을 등반하는 과정도 그저 ‘미등봉’이라는 딱지가 붙은, 네팔 정부와 대행사들이 합작으로 내놓은 좀 희귀한 관광상품을 구입하는 것 같았다.
암푸1봉은 네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표기한 미등봉 리스트의 100여 개 산들 중 하나로, 2002년에 등반할 수 있게끔 개방됐다. 네팔 현지대행사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준비해 준다. 복잡한 행정절차뿐만 아니라 가이드, 포터, 이들의 보험, 베이스캠프 운영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식량 등 사실상 모든 것들이다. ‘멤버’라 불리는 우리들이 하는 것이라곤 말 그대로 등반뿐이다.
따라서 초등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 온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나의 입장에선 산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산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예전에 시도한 루트가 있었다면 그게 어느 방향인지 등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알파인스타일 초등’이라는 유행하는 멋진 말로 등반을 장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관광상품이 아닌 진정한 초등이란 대체 오늘날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그런 건 원래 없었고 아예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지구상에 진정 ‘미지’란 애초에 없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조금일지는 몰라도 우린 ‘미지’의 구역에 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산 사진을 놓고 또 산 앞에 와서 여러 차례 토론하며 루트를 신중히 골랐다. 장비와 식량도 꼼꼼하게 선택했다. 날씨도 신중히 관찰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으나, 분명 위험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위험—혹은 위험의 공포—에 대처하는 방법은 세 명 모두 각기 달랐다. 안치영 대장은 라마(승려)도 없는 푸자(제사)를 지내고는 말한다.
“푸자를 한 것과 안 하는 건 확실히 틀려. 기분이 달라.”
김영미는 몇 번이나 “형들 잘 부탁드려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등반을 앞두고는 그는 아침 일찍 주변 호숫가를 산책하거나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안정을 가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번의 정찰을 끝낸 뒤 등반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아침마다 암푸1봉이 잘 보이는 앞 언덕에 올라 평정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오르기로 한 루트는 암푸1봉 남서벽 좌측 쿨와르를 통해 서릉에 올라선 뒤, 능선을 전진해 남릉과 만나고 이어 정상능선을 통해 등정하는 것이다. 하산은 같은 루트로 계획했다. 하단부 베르크슈룬트(벽과 빙하가 만나 갈라진 틈, 5,720m) 앞에는 축구장 서너 개만 한 설원이 있고 아래로는 그리 크지 않은 빙하가 흐른다. 빙하발치(5,480m)까지는 모레인 지대로 베이스캠프(5,350m)에서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설원까지의 정찰 결과 약 500m의 빙하지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크레바스와 빙탑이 있긴 했지만 세 시간이면 끝낼 수 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 즉 몬순은 10월이 넘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열흘간의 상행 캐러밴에 이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뒤로도 밤마다 눈은 계속 내렸다. 고소적응 차 높이에 비해 꽤 쉽다고 알려진 메라피크(6,461m)를 등반했던 우리는 두 차례의 정찰까지 더하면서 육체적으로는 등반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느꼈다.
낙빙에 부상 입은 안치영 대장
10월 8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12일째 등반에 나섰다. 일기예보에는 처음으로 눈이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나 유독 바람은 강하게 분다고 했다. 출발 전 밤에는 거센 바람이 텐트를 후려치는 소리에 다들 잠을 못 이뤘다. 어쨌든 눈은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텐트를 나섰다.
빙하발치에서 난데없이 복병을 만났다. 등반장비를 데포해 놨던 얼음굴이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 넘게 파낸 끝에 장비를 모두 꺼내긴 했지만 김영미의 크램폰이 꽤 휘어져 있었고 내 헬멧은 완전히 찌그려져 못 쓰게 되었다. 크램폰은 그럭저럭 돌로 두드려 발톱이 아래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나는 재킷들의 모자를 되는 대로 뒤집어썼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 마음은 거기서 그만 내려가고 싶었던 것 같다.
베르크슈룬트를 넘어 첫 피치 아이스바일을 꽂은 건 오전 9시30분. 벽에는 끊이지 않는 바람 탓인지 스노샤워가 계속됐다. 수많은 설벽 주름 중에 눈이 덜 쏟아지는 통로를 골라 붙었다. 선등은 나다.
우리가 택한 남서벽 좌측 쿨와르 루트는 크게 네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초반 7피치까지의 설벽, 쿨와르에 진입한 뒤 7피치 빙·설벽, 능선에 올라선 뒤 서릉 3피치, 이어 남릉과 합쳐진 뒤의 완만한 정상능선. 루트 명은 ‘윈디쿨와르’(Windy Couloir, ‘바람골’)로 지었고, 난이도는 WI4 AI5 ED2 XI, 등반거리는 1,800m(빙하구간 500m 포함)다.
이를 오르기 위해 7mm 굵기, 50m 길이의 케블라 로프 두 동을 트윈로프 방식(두 줄을 한 줄처럼 여기며 한 번에 확보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선등자는 후등자 두 명을 동시에 확보해 올리면서 시간을 절약했다. 각각 아이스바일을 한 쌍씩 들었고, 확보장비로는 스노바 10개, 아이스스크루 6개, 하켄 6개, 캠 4개를 준비했다.
초반은 50도 완경사 설벽. 하지만 이내 경사가 급해졌다. 벽을 타고 아래에서 불어대는 바람은 견딜 수 있었으나 경사가 급한 위쪽에 매달린 고드름들이 위협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4피치를 등반하던 중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 거대한 고드름이 우리를 향해 쏟아진다.
“낙빙!”
“억!”
얼음은 후등 중이던 김영미 대원과 안치영 대장에게로 곧바로 떨어졌다. 한참동안 수그리고 있던 두 대원은 가까스로 등반을 마쳤다. 특히 안 대장이 옆구리에 심한 타격을 입은 듯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등반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쿨와르로 진입한 직후인 8피치는 청빙에 경사가 급했다.
“비박할 만한 데가 안 나오는데.”
안 대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사위는 이미 붉은 색으로 맴돌고 있었다. 필시 오후 5시는 넘었을 것 같다. 시계 보기가 꺼려진다. 시간은 우리를 위해 응당 멈춰 기다려 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바람 따위 시간은 숱하게 무시해 왔고 이번에도 그럴게 틀림없다.
“혹시 저 쿨와르 위 좌우측으로 자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 그럼 한 번 올라보자.”
밤 9시에 도착한 비박지, ‘악어입’
9피치도 빙벽 쿨와르가 계속된다. 어느 곳 하나 평평한 곳이 없다. 아래에서 보면 불거져 나온 바위 엉덩이가 보여 그 위를 기대하지만 올라보면 가파른 설벽일 뿐이다. 후등자 둘은 랜턴을 켜고 올라온다.
“현명한 선택이 필요할 것 같아요.”
조금 먼저 올라온 김영미가 말한다.
“그래, 현명한 선택….”
이윽고 안 대장도 올라섰다.
“형, 어떻게 할까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더 올라가 능선에 서 보든지, 여기서 얼음을 깎고 비박하든지, 아니면 내려가든지.”
영미가 말한 ‘현명한 선택’은 무얼 뜻했을까?
“더 가 보자. 능선까지 두 피치면 될 것 같아.”
나는 갑자기 피로와 추위가 느껴졌고, 정신력도 약해져 있는 듯했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또다시 유혹하듯 솟았다.
“예, 그러죠. 하지만 저는 좀 쉬어야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영미야, 네가 한 번 해 볼래?”
“예, 해볼게요.”
영미와 배낭을 바꿔 멨다. 후등자는 무거운 배낭을 메지만 쉴 수 있었다. 갈증과 함께 갑자기 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영미는 힘차게 올라섰다. 두 피치 얼음을 더 올랐을 때, 뒤따라 올라선 안치영 대장과 함께 마침내 좌측 약 30m 지점에서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로 트래버스해서 모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되어서였다. 설사면 중간에 일부러 파 놓은 듯 형성된 동굴은 딱 세 명이 앉기 좋은 크기였다. ‘악어입’(천장의 고드름이 마치 이빨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이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우리에겐 따뜻한 포근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텐트를 찌그러뜨려 설치하는 데 성공했고 모두 기어들어가 기대치 못한 편한 잠을 자게 됐다.
“서둘러,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김영미 말로는 내가 밤새 끙끙거렸다고 한다. 반면 그는 여전히 힘이 넘쳐 보인다. 2인분 알파미를 셋이서 반도 못 먹는다.
오전 8시 30분 출발. 선등은 계속 영미다. 두 피치를 더 오르니 능선이 코앞이다. 하지만 능선으로 나가서는 14피치 람프(ramp : 능선으로 올라서는 통로)는 거의 수직으로 솟은 침니다. 안치영 대장이 선등의 바통을 이었다.
능선에 올라서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대했던 콜(col)은 텐트를 칠 만한 안부는커녕 급한 나이프리지였다. 반대편 북쪽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암푸랍차빙하까지 곧장 2,000m를 떨어진다. 하얀 입김을 내뿜는 로체와 샤르체 남벽이 시야에 훤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경치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등반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서릉 또한 만만치 않게 험상궂어 보였다.
“늦어도 오후 3시에는 돌아서자.”
어젯밤의 호된 등반으로 우리는 하산도 걱정됐다.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스노바를 넉넉하게 챙겨왔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이곳 분설의 능선에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속도가 중요했다. 등반은 러닝빌레이 방식(선등자와 후등자 사이에 확보물을 설치하고 동시 등반)으로 바꿔 진행됐다.
“능선에 올라섰는데 왜 편하게 가지 않고 가장자리에 매달려서 가는지 몰랐어요. 구름이 이렇게 퍼지면서 바람이 세게 부는데도.”
베이스캠프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베이스캠프 매니저 안지은의 말이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몬순이 끝나고 북쪽 티베트 방면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연찮게 두 세력이 맞부딪히는 시기에 등반을 나선 듯, 아닌 게 아니라 바람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불어댔다. 눈 속에 고개를 파묻은 우리는 도무지 아무것도 의지할 게 없었다.
능선을 세 피치 이어가자 결국 완만해지며 폭이 넓어진 정상능선이 시작됐다. 이제 맨 뒤에서 오르는 영미에게 키 큰 남자 둘의 급하게 디딘 널찍한 스텝은 무용지물이다. 그도 지쳤다.
“서둘러,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나는 매몰차게 로프를 당겨댔다. 정상능선은 계속됐다.
정상에 올라선 시각은 정각 오후 3시. 바람에 눈이 빳빳이 다져진 언덕에 올라섰다. 바로 앞엔 바룬체(7,129m)로 이어지는 촐라리(6,934m)와 칼리히말(6,985m)의 연봉과 능선이 이어졌다.
암푸1봉 초등!? 등정의 기쁨, 즉 그 좁은 언덕 위에서 셋이 나눈 기쁨의 정체는, 아니 적어도 내가 기뻤던 이유는 무엇보다 하산할 시간이 아주 늦은 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만 30여 분간 머무른 정상에서 우리의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게 했던 것은 방금 오른 그 공포스런 리지였다.
“한 명이 확보를 받은 채로 클라이밍 다운하고, 이어 두 명이 아래에서 확보를 받으며 클라이밍 다운하는거야. 어때?”
“두 명이 먼저 내려가고 한 명이 마지막에 내려오는 건 어때요? 마지막 한 명만 고생하면 되잖아요.”
결국 마지막 한 명의 총대는 안치영 대장이 멨다. 가파른 리지를 거꾸로 내려서기란 고역이었고 느리게 진행됐다. 하지만 잘 만들어 놓은 스텝 덕인지 람프 꼭대기까지 무사히 내려섰다. 쿨와르 구간은 확보물을 사용한 하강이다. 스노바, 아이스스크루, 하켄 등을 차례로 사용해 무사히 셋 모두 악어입 텐트로 돌아왔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이튿날 하강은 순조로웠다. 빙하지대를 올라 설원까지 마중 나온 가이드 템바와, 그리고 모두 내려와 함께 포옹한다. 우리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베이스캠프 안지은의 말이다. 산에 오르지 않았으니 그런 말—우리에겐 금기처럼 여겨지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지. 그건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등반 전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했고, 또 내려와서는 그처럼 속이 후련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공감과 이해는 대화를 통해야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금기로 여겨지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 자만 속에 은밀히 감춰둔 신앙들을 드러내 서로의 앞에 놓을 때 우리는 아마도 더욱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
암푸1봉
2002년 개방…2011년 일본팀 6,000m까지 등반 밝혀
암푸1봉은 네팔 북동부, 사가르마타국립공원과 마칼루-바룬 국립공원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암푸랍차고개(5,845m)와 바룬체(7,152m) 사이에 솟아 있다. 해발고도는 6,840m(Schneider map)와 6,740m(HMG-Finn map) 두 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02년 네팔 정부가 개방한 산이다.
‘암푸’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 대해 최근 3차례 등반 시도가 있었다. 2008년 봄, 5명의 독일팀이 추쿵에서 남쪽에 솟은 6,238m 높이 산을 올랐다. 추쿵 빙하 동쪽에 솟은 이 산은 세 개의 연이어 솟은 산 중 중앙에 있어 이 산을 ‘암푸 중앙봉’(Amphu Middle)이라 불렀다. 이들은 네팔 정부로부터 암푸1봉 등반허가를 받고 올랐다고 밝혔는데, 네팔 정부의 기록을 확인해 본 바 허가를 내 준 적은 없었다.
같은 해 가을, 스페인에서 요르디 토사스라는 등반가가 로체 남벽을 단독으로 오르기 위해 추쿵에 머무르던 중, 고소적응 차 ‘암푸 중앙봉’과 그 남쪽으로 솟은 6146m봉을 각각 오르고 후자는 ‘암푸 남봉’(Amphu South)이라 불렀다.
2012년 가을 일본 히로시마 등산협회 창립 70주년 기념 원정대(대장 미노루 나고시)가 암푸1봉 등반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대원 4명은 북벽으로 등반을 시도, 해발 6,000m까지 두 번의 비박을 통해 접근했지만 눈사태 위험으로 등반을 포기했다. 두 명의 대원이 손발에 심한 동상을 입기도 했다. 이들은 추쿵빙하를 통해 접근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암푸1봉의 북쪽으로는 암푸랍차빙하와 임자빙하가 각각 발원하고, 추쿵빙하는 서쪽으로 꽤 거리가 떨어진 옴비가이찬(6,340m) 북동쪽 방면에서 발원하는 빙하다. 즉 일본팀이 등반한 봉이 암푸1봉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에 우리 원정대는 등반기와 함께 “‘암푸’라는 이름이 붙은 산 중에 가장 높은 주봉이 암푸1봉인데, 여기에 상당히 멀리 떨어진 산들에 대해 ‘암푸 중앙봉’, ‘남봉’, ‘동봉’ 또는 ‘암푸 산군’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는 견해를 국제산악계 언론에 발표했다.
원정개요
원정대명 | 2013 AOK 코리아 암푸1 원정대
원정기간 | 2013년 9월 16일~10월 29일(44일)
대원 | 안치영(대장·36·봔트클럽), 오영훈(대원·35·서울대농생대산악회), 김영미(대원·33·강릉대 산악부 OB), 안지은(베이스캠프 매니저·33)
대상지 | 암푸1(6,840m)
루트 | 남서벽~서릉, ‘윈디쿨와르’(Windy Couloir), WI4 AI5 ED2 XI, 등반거리 1,800m(빙하구간 500m 포함)
결과 | 알파인스타일 초등(10월 8~10일 등반, 9일 오후 3시 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