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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정한 다니엘(단 1:8-21)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뜻을 정하고 세웁니다. 이처럼 뜻을 정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뜻이란 생각을 마음에 정하는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뜻을 정하고 살아야 진정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고 그저 평범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리뭉실한 계획을 세우는 이도 있고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올해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어떤 분은 운동을 좀 해야겠다고 뜻을 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처럼 연초에 세운 뜻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만큼 의지가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뜻을 세우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다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치 못하기에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머슴이 주인집 딸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능성이 없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결혼 승낙은 고사하고 주인의 호된 야단과 함께 그 머슴은 주인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의 딸도 부모 몰래 집을 나와 그 머슴과 함께 먼 곳으로 도망을 가서 함께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파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아내는 부잣집 딸이라 배운 것이 많았지만 남편은 배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부부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았고, 부인의 마음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남편에게 권면하기를,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깊은 산속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목이 말랐습니다. 물을 찾아 계곡으로 내려간 이 사람은, 바위에 고여 있는 물을 발견했습니다. 물을 마신 후, 이 바위에 웬 물이 고여 있을까 생각하며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높은 곳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인 것임을 알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움푹 파이도록 했고, 거기에 물이 고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긴 세월을 두고 끊임없이 떨어졌을 때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냈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각오를 하도록 했습니다. “아니다. 나도 이제부터 공부하자. 무식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아내가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면서 집으로 달려온 그는 아내에게 배우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나이가 40세였습니다. 훗날 이 사람은 훌륭한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키바라는 랍비입니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어른의 말을 알아들을 때쯤이면 이 아키바에 대한 이야기를 꼭 들려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마음, 새 각오 즉 뜻을 정하고 살아간 삶의 결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사람의 결심이 때로는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그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결심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뜻을 정하고 살아간 다니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약 600여 년 전에 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특히 다니엘은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신앙적인 뜻을 세웠습니다. 뿐 만 아니라 이들은 굳은 의지로 그 뜻을 실현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위대한 신앙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들이 세운 뜻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성도들이 세워야 할 신앙적인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앙적인 뜻을 세우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굳은 의지로 실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세운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1.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단1:8-21). 성결한 삶을 살기로
다니엘은 유대나라가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1차 침공 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재주가 있었고 학문을 많이 닦은 총명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은 바벨론에서도 인정을 받아, 바벨론나라의 국가 관리자 후보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이것은 3년 과정의 학교로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쳐 장차 나라의 일꾼으로 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 기숙사의 음식은 왕의 음식으로 바벨론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함께 있는 동료 학생들은 모두 그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엉뚱하게도 날마다 공급하는 그 음식을 먹지 않고 채소만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왜냐하면 왕의 음식은 다른 신에게 먼저 바쳐졌던 것이었고 성경에서 먹도록 허락되지 아니한 고기로 만든 음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결심을 환관장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않고 대신 채소만 먹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음식들은 다른 신에게 바쳐졌던 것이며, 성경에서 먹도록 허락되지 아니한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궁에서는 이들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일반 서민이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벨론 왕궁의 음식에는 먼저 우상에게 바친 것도 있고 율법이 금한 부정한 짐승의 고기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왕궁에서 주는 음식을 먹는다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우상의 제물로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의 음식을 먹지 아니함으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환관장과 감독을 설득시키는 등 다각도로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부정한 음식으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집을 피웁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니까 육신의 욕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한 창세기의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고 감옥에 들어간 요셉과 함께 하십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요셉의 거룩함입니다. 요셉은 어디에 있으나 어떤 환경에 처하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습니다. 믿지않는 주인 보디발도, 감옥에 있는 간수장도 다 보았습니다.
비록 요셉이 노예였고 죄수였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적당하게 타협하고 육신이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특히 성결교회 교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거룩을 결심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속에 살지만 내가 비록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살지만 나는 하늘에 속한 하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 역시도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고자 하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인데 사랑과 은혜를 입지 못하면 그 삶은 곧 불행한 삶이 되고 맙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16). 따라서 우리가 우리 몸을 더럽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음식으로 몸을 더럽힐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의식법은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늘 우리 몸을 더럽힐 가능성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더러운 언어생활로, 바르지 못한 행동으로 세상과 타협함으로 우리 몸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정결하게 보존하기로 굳게 뜻을 세우고 우리 몸을 더럽히는 것들을 멀리함으로써 우리 몸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16]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18]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19]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다니엘을 남달리 사랑하셨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왕의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건강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10배나 뛰어난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의 수석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훗날 간신들의 음모로 굶주린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을 때 사자의 입을 막고 다니엘의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선지자가 되게 하셨고, 그를 통해 다니엘서라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새해 새롭게 결심하십시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리라. 무엇보다 세상속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구별하여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온전히 드려질 때 성령충만함으로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온전히 쓰임받을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로 뜻을 정했습니다(단3:1-30). 믿음의 삶을 살기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저 북한의 김일성 3대 부자처럼 자기가 신의 현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두라 평지에 높이가 약 30m, 너비가 약 3m 정도되는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신상의 낙성식을 거행하는 날 모든 관원을 불러 모으고 그 금신상 앞에서 경배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엄명하기를 (단 3: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금신상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제왕은 신의 현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상에 절하는 것은 그 백성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관원으로서 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느부갓네살에 대하여 역심을 품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느부갓네살은 그와 같은 엄명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모인 관원들은 모두가 금신상 앞에서 절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단 세 사람만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상 숭배를 아주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친구들은 어떠한 환란이 와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로 뜻을 세우고 느부갓네살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금신앙에게 절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들은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목숨을 버릴지언정 금신앙에게는 절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참소를 당하여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지만 이들은 (단 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며 금신앙에게 절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 때 느부갓네살 왕이 대노하여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이들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 일로 저들과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벨론 전체에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도들도 이들과 같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로 뜻을 세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고백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가 신앙을 지키기에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곳입니다. 수많은 유혹이 있고 핍박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입니다. 그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로 뜻을 세우고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께 생명을 다해 신뢰하고 따를 때 이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 49세의 나이로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숨져간 주기철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네 번이나 투옥되어 7년간의 옥중생활을 보내면서 수많은 고문과 채칙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사그러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압박이 가해질수록 그러한 신앙은 더욱 불 타올랐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최후 투옥 얼마전 유언 설교 가운데 몇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피부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여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족히 비교하지 못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70년 80년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천년 만년 영원 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 영화의 몸이 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이 있을 따름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을 지키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지고 나아가셔서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도를 쉬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단6:1-28). 기도의 삶을 살기로
다니엘 6장에 보면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에게 망하고 메대 왕 다리오가 메대 바사의 과도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이 때 다니엘이 세 명의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의 명성이 높아지고 왕과 백성들의 신임이 두터워지는 것을 본 간신들은 꾀를 부려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한 가지 제안을 왕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30일간 누구든지 왕에게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뜻을 세우고 실천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다니엘에게는 큰 위기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기도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하루 세 번 기도하기로 세운 뜻은 너무도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으면 사자굴에 던져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사람은 기도를 등한히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살아있는 성도는 장애물이 생기고 고민거리가 생겨도 기도를 버리지 않고 한층 더 뜨겁게 기도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쓰는 성도에게는 기적이 따릅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사가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그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기도의 사람에게는 주님의 기적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했을 때 베드로가 갇혀 있는 옥중에 천사가 나타났고 쇠사슬이 벗겨지고 철문이 열렸습니다(행 12:5-12).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생명줄입니다. 기도없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기도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새해 품은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정시기도-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기도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든지, 정오에 하든지, 아니면 저녁에 시간을 정해놓고 하든지 기도의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2)무시기도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길을 걸어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기도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주에도 이런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인 것처럼 오늘 기도도 이렇게 쉬지않고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3)합심기도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두 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의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목장을 통해서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리를 만들어 함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루의 첫시간을 드리는 새벽기도회, 한 주간의 중간에 모여서 드리는 수요기도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드리는 금요기도회, 여러분이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제대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기도회를 소중히 여기고 기도하는 성도들, 기도하는 집사님들, 기도하는 권사님들, 기도하는 장로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기로 뜻을 정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해를 기도하는 한해로 삼기로 뜻을 세우고 어떠한 방해와 난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굳은 믿음과 의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은 아마도 각각 삶의 형편과 정황에 따라 그 목표를 세우셨을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계획하는 바, 원하고 목표하는 바가 다 선하고 의로운 것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이를 굳은 의지와 구체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이에 더하여 여러분들은 성도란 사실을 잊지 말며 성도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계획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룬 다니엘과 같이 자신의 정결과 믿음을 지키는 일에 생명으로 걸고 힘써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는 작년보다 더 구체적으로 천국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여러분 모두가 쓰임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영육간에 크게 성공하는 양문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