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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과 벧엘 제단 / 열왕기상 13:1-34
지난 시간에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문제로 인해서, 백성들이 자신을 죽이고 다시 남쪽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고, 산당을 만들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워서, 북쪽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한 일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만나는 제사를, 자신의 왕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을 한 것인데, 이러한 여로보암의 악함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된 제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곧 제사 의식이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관계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제사 의식만 행하도록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어디서 제사하든 제사 의식만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산당과 제사장을 세워서, 제사하도록 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을 위해 제사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지금도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예배라는 의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또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단지 예배 의식에 자기 열심과 성의를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예배 의식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확인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은 자에 불과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감사와 기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로, 내 속에 넘치는 것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곧 나 자신임을 자각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식에 참여한 것으로, 믿는 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굴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강한 능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겨우 예배의식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성도 됨을 확인하는 수준이라면, 결국 자신의 유리함을 위해 양보와, 타협과, 포기와, 굴복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종교의 수준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종교에 열심이었습니다. 1절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이 말처럼, 자신이 만든 제단에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께 분향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성의를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목사가 교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종교에 대해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2-3절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가 경고한 것은, 장차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는 왕이 등장할 것인데, 그 왕이 여로보암이 세운 산당 제사장을,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만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여로보암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여로보암은 경고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하지만,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버리는 재앙을 받게 될 뿐입니다.
이처럼 여로보암에게 나타나, 경고를 하는 선지자를 보고 있노라면, 성경에 등장하는 참된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이익을 두고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에게 나타난 선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지자가 만약 자신을 생각했다면, 본문과 같은 그러한 경고를 서슴없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말이 분명 여로보암을 분노하게 할 것임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어떤 해가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고를 했다는 것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이 분노할 것을 두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을 원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까? 만약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한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여로보암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작자가 등장을 해서, 자신이 세운 산당과 제사장을 부인하고 있으니,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하나, 결국 자신이 손이 말라버리게 된 것입니다. 손이 말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며 잡으라고 지시했을 때 편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로보암은 자신의 손을 다시 거둘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지게 되자 6절에서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고 청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구하자, 다시 손이 전과 같이 회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본 여로보암은 7절에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고 청하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이러한 청을 한 것은, 자신의 손이 회복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와 같은 선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뭔가 뛰어난 능력이 있는 자로 여기고, 그를 잘 대해줌으로써 자기편에 붙들어놓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제사를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으로 삼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로보암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 속이 하나님으로 다스림 받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청함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8-9절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의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과연 이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일단 장차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포기합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청한 것은 분명한 호의입니다. 한마디로 스카우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적절히 연봉을 정하여, 여로보암 밑에서 편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집 절반을 준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낳겠다고 단호한 말로 거절을 해버립니다. 이러한 거절이 또 다시 여로보암을 분노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계산하지 않을 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처럼 단호한 거절을 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 이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산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고, 어떤 불이익이 올 수 있는가?’ 계산을 함으로써 신앙이 사라지고, 타협과 양보와 굴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고 갈보리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죄인된 나를 용서하시고,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렀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바라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천국 간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내게 어떤 이익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까?
11절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이 말씀을 보면 벧엘에 거하고 있던,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등장하여, 여로보암 왕에게 선포했던 말씀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어느 길로 갔는가를 묻고, 나귀를 타고 그를 뒤쫓아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늙은 선지자는,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15절)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상식은, 이미 여로보암의 초대를 거절한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초대에 응하겠는가라는 답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말했던 것처럼, 늙은 선지자의 초대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16-17절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하지만 인간의 실체는, 다음의 문제로 인해서 발각되게 됩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이 말 한마디에,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버리고, 늙은 선지자와 함께 돌아가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로보암의 청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은 선지자의 거짓된 말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가라는 의아심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로 접근을 합니다. 자신도 선지자라는 사실을 내세워서, 자신이 하는 말도 하나님과 연관이 있음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물론 11절에서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자신을 선지자라고 한 것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선지자는 착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 것처럼, 한번 선지자면 계속 선지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어떤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할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선포하는 자가 선지자인 만큼,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자로 살아갈 때 선지자인 것이지,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떠났다면, 그것은 선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은 선지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서 떠난 만큼, 선지자로 불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지자라고 일컫는 것은, 과거에 선지자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선지자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곧 선지자를 말씀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자신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말도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버리는, 실패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늙은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말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는, 천사가 이르기를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전혀 다른 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를 따라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받은 말씀과 전혀 다르다면, 상대방의 말을 거짓된 것으로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버린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보다, 늙은 선지자의 말을 더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가운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 거리를 여행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은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천사에게 받은 말이라며 전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사람을 편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받은 말씀을 고집하면 여전히 힘든 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버리고, 늙은 선지자가 받은 말을 따르면, 편안함이라는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편안함이 있는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실패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사람을 좋게 하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에는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좋게 해주는 말씀을 기대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도 목사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좋게 하는 내용의 말을 전한다면, 과연 그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질까요? 비록 들어오던 말과는 다르지만, ‘저 사람도 목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의해서, 내 마음에 드는 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할 때, 목사인 것입니다. 곧 말씀을 떠나서 자신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인가 목사가 아닌가는,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인가로 살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이러한 살핌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히 해 버립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반석으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단지 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속에 굳건한 반석으로 세워져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만한, 보배로운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말씀 때문이라면 그 어떤 두려움과 위험의 길도 마다하지 않을 만한,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십자가의 은혜요 피의 공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쉬지 않고 증거되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멸망의 자리에서 발견한, 십자가의 은혜와 피의 공로야 말로,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귀한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외치는 것도, 바로 십자가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것만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되어 있지만, 짐작해 보자면 여로보암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겠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보내는 것보다는, 대접을 하고 보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으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은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우리도 역시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를 엄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붙이시고 하나님의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어긴 자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말씀을 어긴다고 해서, 사자에게 죽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욱 가볍게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붙였다는 것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어긴 자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훼방하는 말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계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목사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경계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그 속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은 이론도 지식도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를 붙드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말씀이며, 우리의 가슴에 살아 역사함으로써,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성도의 실패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20절 “그들이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된 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선지자에게 임할 수가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논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을 받은 자가 정직하고 의로운 자라야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착각인 것입니다. 어떤 착각인가하면, 말씀의 권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에 의해서 높여진다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아주 대단한 착각이고,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오류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말씀의 권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달렸다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말씀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는, 누구도 말씀을 맡길만한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그가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도구로 삼아, 말씀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21-22절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 경고대로,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나 물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는, 아무 일 없이 멀쩡합니다. 이것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도무지 우리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 역시도, 세상에 속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 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를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곧 말씀을 어기고, 떡을 먹고 물을 마신 죄를 묻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늙은 선지자도 죽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결국 역시 문제는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선과 악을 바라보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세상은 모든 것을 육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육신에 이로운 것은 선한 것이고, 이롭지 못한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좋지 않은 것으로, 불행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 노쇠해져 죽었다면, 정상적인 죽음으로 여기지만, 일찍 죽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지 않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 죽고, 늙은 선지자는 멀쩡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늙은 선지자는 심판을 받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24절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지 않고 나귀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자가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 위한 것일까요? 선지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지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말씀의 권위가 어떠한가를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곧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업신여기고 있는 늙은 선지자와, 북쪽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보고, 늙은 선지자는 자신이 곧 말씀을 업신여긴 자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6절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늙은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말씀을 어기더니 꼴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말씀을 어긴 자의 그 끝이 어떠함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말씀을 업신여긴 자로서, 사자에게 죽은 하나님의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9-31절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곧 자신도 말씀을 업신여긴 자로서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운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32절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늙은 선지자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말씀의 권위를 목격을 하고, 말씀의 신실함을 알게 된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에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33-34절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여로보암은 레위 족속 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 보다는, 말씀을 어기더라도, 자신의 나라와 왕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로보암에게,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가를,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 있고 신실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가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다만 제사장을 세워서, 자신의 나라만 유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서 선지자를 죽이신 것이,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결국 이 내용들은, 우리의 끝이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어기며 살아가는 너희의 끝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현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항상 말씀을 업신여기며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간, 우리의 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자가 나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어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애통함과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곧 여로보암처럼 말씀을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굳게 세우시는 분임을,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된 늙은 선지자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사자에게 죽은 선지자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속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애통함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가볍게 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어기고 벗어나 살아가면서도, 애통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어기는, 인간의 끝과 세상의 끝을 보여주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께 나오기를 소망하기보다는, 세상 속에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말씀을 어기면서도 애통함이 없는 것, 성경은 이것이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니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죄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음 받고, 자유함을 누리며, 주님이 주신 자유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겉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시하지 않는지 속사람을 살펴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자랑할만한 신앙의 흔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순간에 미혹에 빠져 불순종한 것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우리 주위에는 늙은 선지자와 같이 우리들을 하나님이 말씀인 것처럼 미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므로, 언제나 주위를 잘 살펴 그것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인도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을 했듯이, 인간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스스로 섰다고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인도하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속 깊이 믿고, 또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