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증의 언어로부터 탈경계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배옥주 시집 리을리을 의 세계
유지현
언제가 다시 한번 존재할 자로서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도 삶을 뚫고 나아가며,
이처럼 자신에게로 돌아올 의지를 가진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프란츠 카프카 「너와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배옥주의 시는 통증에서 배태된다. 혼란한 세상에서 통증 없이 삶을 영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통증은 유기체인 인간이 살아있음을 환기하는 가혹한 전율이다.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통증은 우리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통증은 일상에 균열을 내고 질서를 교란한다. 일상에 파문을 만드는 통증이 위기의 징표라면 이 징표로부터 배옥주의 시는 생성되고 독자성을 형성해 간다. 통증은 살아있음을 섬뜩한 방법으로 일깨운다는 점에서 삶의 순간을 낯설게 만드는 파문의 체험이다. 이 예민한 순간을 포착하는 배옥주의 시는 통증에 말을 걸거나 질문하며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여기서 유발된 낯설고 전복적인 언어는 배옥주 시의 방어기제인 동시에 무기인 셈이다.
흰모래띠에 포진한 대상들은
누각과 공중을 분간할 수 없는 사구沙丘의 생채기
경계가 사라진 문턱을 넘어 낙타를 끌고 간다
-중략-
밤이었다가 더 깊은 밤이었다가
소소초가 거부하는 사구 위를
구르고 또 구르는 회전초
모래알이 내장 깊숙이 파고든다
끝나지 않는 사막에서 발진하는 달빛
이젠 방바닥에 무엇을 그려야 하나
-「대상포진」 부분
시 「대상포진」은 질병인 대상포진과 대상(隊商)의 동음이의어를 통한 중층적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대상포진의 발진과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의 행렬이 중첩되는 이미지 구성을 통해 화자는 통증을 견디는 일이 사막을 오가는 거칠고 고단한 행보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구르고 또 구르는 회전초”의 삶은 통증으로 인해 생의 윤기를 잃고 뒤척이는 화자의 정황과 다르지 않다. “누각과 공중을 분간할 수 없는” “생채기”로 할퀴고 가는 공간에서 대상의 행렬처럼 이어지는 생의 고통을 응시하는 일은 고달프다.
고통스러운 “밤”에서 “더 깊은 밤”으로 통증이 심화되는 순간 시의 화자는 “무엇을 그려야 하나”를 묻는다. 그 물음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상황과 구분되는 것이다. 화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을 통해 통증의 사막을 벗어나는 방법을 궁리한다. “모래알이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나아갈 길을 묻는 능동적인 화자의 질문은 통증이 삶을 변화시키는 역설적인 동력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발진하는 달빛”처럼 통증과 빛은 함께 온다는 것을 아는 화자는 통증 가운데서 자신이 가야 할 목표를 찾는다. 그리하여 생의 빛나는 순간은 고통과 더불어 찾아온다는 힘겨운 체득을 놓치지 않는다. 대상 행렬처럼 이어지는 통증의 시간을 무력한 견딤이 아닌 창조의 시간으로 삼는 시의 사유는 통증에 대한 함의를 바꾸어낸다. 통증에 내포된 부정적 의미를 갱신한 화자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그려야 하나”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생채기”같은 그림이 허무하게 지워질지라도 “끝나지 않는 사막”을 채워가는 것처럼.
배옥주의 시는 “청진기로 맥을 살피”듯 통증을 들여다보며 “지워진 혈자리”(「연명」) 대신 더 낯설고 깊은 언어의 혈자리를 찾아 나서기에 주저함이 없다. “몇 가닥 남은 시름”(「연명」)을 삶에 대한 각성으로 돌아보며 “새어 나”오는 “통증”(「잠혈」)을 눌러가며 써 내린 시를 보여준다. “날이 새면 깨질 한밤의 알고리즘”(「피부 그림증」)같은 아픔을 “탁본해 둔 물음들”(「무릇」)로 새겨두며 소진해가는 “캄캄한 물의 내력”(「연명」)을 찾듯, 시의식의 근원을 파고든다. 신체적 혹은 정신적 통증에 매몰되지 않고 고통의 회오리 안에서 통증을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하며,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순간에 지극히 예외적이고 낯선 언어들로 맞선다. 이러한 낯설고 전복적인 언어의 힘은 “녹슬고 깨져” 연약해진 몸을 향해 “투둘투둘 딱지 앉은 물음”을 “밤새 두드”(「질문들」)렸던 집요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식물인간의 시간이 토막 나고 있다
호흡기를 제거하는 데 서명한다
앞서가는 자음이 게으른 모음을 건너뛰듯
동의 없이도 길이가 달라지는 숨
「인간의 시간」 부분
죽음을 앞둔 비극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자음”과 “모음”은 어울리지 못한 채 “앞서가”거나 “건너뛰”며 뒤틀리는 중이다. 화자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미 알고 있는 침묵”(「인간의 시간」)을 뒤엎고 새로운 언어의 명명을 찾아 나선다. “이미 알던” 언어가 아닌 다른 이름찾기를 통해 통증으로 뒤덮인 죽음은 종말이나 단절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품기 시작한다.
얼마 안 남았어요
등과 바닥 사이
패인 잠이 붙어버렸어요
엄마는 자는잠에 가고 싶다 했어요
손바닥이 들어가지 않을 때
깊이를 헤아리는 윈드벨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져요
「자는잠」 부분
「자는잠」은 죽음을 둘러싼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명명이 표출된 시이다. 시는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자는잠”이라는 명명을 통해 견디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한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자는잠”으로 명명될 때 죽음은 휴식인 ‘잠’과 등가의 것이 된다. “자는잠”이라는 명명에는 죽음을 둘러싼 통증과 그로 인한 일상의 파열을 벗어나 존재의 존엄을 유지한 채 종말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명명은 죽음과 통증으로 인한 균열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인식의 기록이다. “자는잠”이라는 명명에는 죽음이 일상적 ‘잠’과 다르지 않으며 삶에 내재된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하려는 전환적 관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명명의 작업은 죽음을 공포나 재앙으로 인식하기보다 삶의 너른 과정에 편입시켜 자아의 고유한 특질 아래 두고자 하는 사유의 소산이다.
병상에 누운 몽당연필
무딘 심을 꽉 쥔 채
그늘을 눌러 그리고 있다
중략 -
안간힘을 다한 흑연 끝에
침이 묻어 있다
여생을 여음이라 고쳐 읽는다
「수목진단서」 부분
시 「수목진단서」는 수명을 다해가는 나무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조명한다. 죽음을 앞둔 안타까움은 나무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 오랜 생애를 걸쳐 수목이 “안간힘”을 다해 눌러 그린 “그늘”을 화자는 깊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무에서 “몽당연필”로 이어지는 비유에는 나무가 생애 동안 이룬 것을 헤아리려는 통찰이 배어있다.
“안간힘을 다한” 수목의 “여생”을 “여음”으로 명명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생명체가 지닌 의미를 여운처럼 오래 간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음”이라는 명명을 통해 나무의 죽음은 노래 혹은 음률로 변화할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순간을 새롭게 명명함으로써 나무의 죽음은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열게 된다. 죽음을 전환적으로 인식하려는 명명의 과정은 대상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두어야 가능한 것이다. 동등한 생명체로서 나무를 바라보는 공감과 연민에 근거한 시의식의 드러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만 고르라고 했다 딱 하나 초콜릿은 골랐고 청사과맛 풍선껌은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상점 아저씨는 내 왼손을 놓쳤지만 엄마는 검정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풍선껌을 움켜쥐고 돌아오는 내내 저리던 주머니 속 왼손바닥엔 어눌한 청사과향 배어 있었다
훔친 풍선껌을 불면 온 몸이 부풀었다 구겨 신은 신발에 넘어질 때마다 무릎 상처는 겹무늬로 단단해졌다 아픈 언니 머리핀을 몰래 친구 생일선물로 주고 삼총사에 낄 수 있었던 그날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언니 부풀기도 전에 입술을 덮치던 풍선껌처럼 망가진 오르골 그 위의 발레리나
일기장에 눈물방울이 터지곤 했다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부터 풍선껌을 불던 나는 언니와 나의 방에서 언제 떠오를지 몰랐다
「버블버블」 전문
「버블버블」은 어린 시절의 일탈과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깊은 내상(內傷)을 다루면서 독특한 ‘말하기’의 방식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어린 시절의 일탈을 되새기며 그에 대한 자책의 심경을 색다른 방식으로 구사한다. 과오를 반성하는 대신 독특하게도 ‘풍선껌 불기’를 멈추지 않는데, 이는 ‘잘못 말하기’의 전략이라 지칭할 수 있다. ‘말하기의 정점’은 ‘시적인 말하기’라고 본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말하기의 본질은 잘못 말하기’이며 ‘잘못 말하기란 성공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말하기는 말하기로서의 실존 자체 안에서 잘못 말하기’인 것이다. ‘훔친 풍선껌’과 “언니의 머리핀” 그리고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부터’ 불던 ‘풍선껌’에 이르기까지, 일탈과 ‘풍선껌 불기’라는 구성은 독특하다. 이런 관점에서 ‘풍선껌’을 둘러싼 시어의 구성은 일탈과 상실의 고통에 대응하기 위하여 채택한 ‘잘못 말하기’의 언술 방식에 해당한다. ‘잘못 말하기’ 전략을 통해 우회적이고 심층적인 내면의 정서를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잘못 말하기’가 효과적인 것은 단순하고 표층적인 후회와 반성의 언술 대신 “청사과맛 풍선껌”과 “눈물방울”의 이미지 전개를 통해 복합적인 내면의 정서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과거의 비행과 언니의 죽음을 둘러싼 후회, 욕망, 그리움, 허무의 감정이 감추어진 채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이 불온한 버블은 곧 터져버린다는 점에서 허무한 소멸을 떠올리게 한다. 부푸는 욕망의 허상을 암시하는 풍선껌과 대척점에 놓인 것이 “눈물방울”이다. “눈물방울”은 언니와 나 사이의 엇갈린 비극을 함축한다. “버블버블”은 “풍선껌”과 “눈물방울”이라는 두 개의 축을 이우르는 단어인 동시에 감춤과 드러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정서적 균형을 내재한 시어이다. 풍선껌 혹은 버블이 부풀어 오를수록 화자의 심경은 더욱 외롭고 고통스러워진다. 부풀어 오를수록 비극은 더욱 커져 가는 것이다. 마치 ‘잘못 말하기’를 그치지 않은 채 돌고 있는, 아름답지만 고장난 “오르골 그 위의 발레리나”처럼 말이다.
새똥이 아마빛 오리온을 그리지 페인트를 헤집는 이끼들은 그늘진 모서리 사이로 클라이밍을 해 엎어진 슬리퍼 한짝 그 위에 포개진 빛살 한손
빨랫줄을 타고 다니던 쥐가 물탱크로 뛰어들지 물바닥을 저으며 수중발레를 하려나 봐 잠수한 별빛이 입술을 내밀기도 하지 거미줄 정글짐 사이로 그림자들은 저공비행을 해
사각의 난간 사이로 낮게 더 낮게
새벽에 그친 비는 날개를 접은 오붓한 고요 깨진 장독에 고인 물이 들쭉날쭉한 눈썹을 밀어버리나 봐 불판과 마주 앉아 낮달은 편마늘을 뒤집지 평상 밑에서 냄새를 훔쳐보는 고양이에게도 몇점 겨드랑이에서 뭉게깃털 한 움큼 뽑아 날려도 좋을
누구도 따돌리지 않는,
나의 친근한 바깥
「옥상도감」 전문
지상에서 버려진 것들이 천상의 해, 달, 별과 어우러지는 낯선 공간이 여기 있다. 하늘을 향해 열린 옥상에서 “새똥”, “슬리퍼 한 짝”, “깨진 장독” 등은 위축됨이 없이 저마다 분주하다. “빛살 한 손”이 슬리퍼에 포개지고 편마늘을 뒤집는 “낮달”과 새똥이 그린 “오리온자리”, “잠수한 별빛”은 서로 어우러져 조화롭다. 옥상은 지상에서 쓸모를 잃은 것들과 천상의 해와 달, 별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특별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특별한 이 공간에서 버려진 존재들은 세밀한 관찰의 시선을 빌어 저마다의 개별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옥상”은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제각기 쓸모를 지니며 내밀한 동시에 폐쇄되지 않고 외부로 열린 의미심장한 공간이다. 쓸모없는 존재들이 모여 구성한 “친근한 바깥”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구석진 유토피아의 발견이라는 점에 있다. 무질서가 질서를 형성하는 ‘옥상’은 미셀 푸코의 명명을 빌리자면,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이다. 열린 공간인 동시에 내밀함을 간직하는 이중성이 “옥상”을 규정한다. 이질적인 존재들이 융화되어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적 상상력이 구현된 옥상은 현실 공간인 동시에 현실 공간의 범주를 벗어난 탈경계의 공간이다. 쓸모없는 쓸모로 가득한 공간은 “불판과 마주 앉아 낮달은 편마늘을 뒤집”는 소박한 여유를 부여한다. 비상의 날갯짓을 연상케 하는 “겨드랑이에서 뭉게깃털 한 움큼 뽑아 날려”보는 자유로운 상상의 움직임은 일상인 동시에 일상을 벗어난 ‘옥상’에서 가능하다. “누구도 따돌리지 않는, 나의 친근한 바깥”이라는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는 이채로운 동시에 소중하다. 사물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이질적인 존재가 융합되는 옥상이 탈경계의 공간으로서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해 가는 곳임은 자명하다.
산의 문을 열고 흘러갑니다
열려도 닫혀 있고
닫혀도 열려 있는 의뭉스러움
오름을 내려온 조랑말의 저녁도
한 호흡씩 들어가고
한 호흡씩 나가야 합니다
방목은 풀어놓는 게 아니라 드나드는 것
흙바람도 자모음을 섞으며
모로 누웠다 모로 일어납니다
바람은 쉽게 겹쳐지지 않습니다
새끼 곁을 떠나지 않는
어미의 선한 꼬리질이
한 계절로 들어갔다 한 계절로 나갑니다
구름이 능선의 고삐를 당겼다 풀어줍니다
산 한 마리, 산복도로에 이끌려 갑니다
갈기를 눕힌 순결한 산맥이
리을리을 흘러갑니다
리을리을
평지로 흘러갑니다
「리을리을」 전문
규범과 경계를 넘어서는 사유의 전개를 시 「리을리을」은 “의뭉”스럽고 유려한 언어로 보여준다. 「리을리을」에서는 유연한 움직임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열려도 닫혀 있고” “닫혀도 열려있는” 공간으로부터 “조랑말의 저녁” 시간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시간은 자유로우며 구애됨이 없다. 산이라는 육중한 공간도 “산 한 마리”가 되며 “산맥”은 “갈기를 눕힌 순결한” 상태로 변화한다.
닫힘과 열림, 눕고 일어남, 당김과 풀어짐이 상호 대립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호흡”이다. 호흡은 탄생의 순간에서 비롯되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 원초적인 생명현상이다. 또한 호흡은 우리 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외부 공기와 만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 호흡씩” 들어가고 나오는 자연스러운 호흡 현상은 부자연스러움이나 강제적 힘이 없이 신체와 외부의 경계를 허문다. 거듭되는 “한 호흡” “한 호흡”을 통해 신체의 안과 밖은 분리되지 않지 않으며 호흡이 지닌 힘은 신체의 동력으로 충전된다. 신체 내부 깊숙한 곳에서 발원하는 호흡이 자연 전체의 생명현상으로 확산되어 유연한 운동성을 얻는다. 산맥조차 흘러가게 만드는 자유자재의 유연함은 노자의 도덕경 78장의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갈기를 세움으로써 세상과 맞서기보다 “갈기를 눕”히고 “리을리을” 흘러가며 확장되는 과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굳센 것도 흐르게 하는 “리을리을”은 부스러지고 깨지기 쉬운 삶에서 발견한 언어이다. 흘러감과 열림, 드나듦이 실천적 리듬을 얻는 “리을리을”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힘을 내재한다. 호흡과 일체화된 유연한 리듬의 언어가 확장적 동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을리을”이 지닌 탈경계의 리듬은 세상의 강고한 경계를 넘어 균열과 결핍을 견디는 저력이 되어줄 것이다.
시는 통증의 언어이다. 타성에 젖은 일상을 아프게 일으켜 세워 균열과 결여에 대응하는 언어를 단련하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감추고 두려워했던 연약한 내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배옥주의 시는 섬세한 감각을 기반으로 삼아, 일상적 생의 조건이 낯설게 날을 세우는 순간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이를 성찰의 언어로 이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세상의 통증과 결핍을 두드리는 시의 언어로서 새로운 명명의 방식과 말하기의 전략을 보여준다. 탈경계의 자유로운 사유의 전개는 상상력의 유연함에서 기원한 것이다. 배옥주의 시에는 자아를 둘러싼 삶의 조건과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범상치 않은 사유의 여정이 담겨있다. 종결되지 않는 상상력의 심원한 탐색이 어디에 이를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유지현 약력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