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1-8 때에 야곱이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이 양식을 구하려고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낸 사실과(1-4) 또 그 아들들이 요셉을 만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8).
1. 본문 1-2절은
"(1)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입니다.
1) 모세는 본 장에서 야곱이 그의 전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계기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비밀과 예상 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자기 경륜을 시행하시는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 그 자체는 심연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가 사건 결말을 그 시작에 비추어 비교할 경우에 경탄할 만한 작용이 우리 눈앞에 환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 작용 방법은 우리가 그것을 관찰할 수 없기에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오만불손입니다.
행운이 모든 사건의 시녀인 것으로 상상하거나 가깝고 자연적인 원인에 집착하면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우리 눈앞에 휘장으로 펼쳐 놓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탁월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예를 우리는 다른데서 찾을 수 없는 만큼 그것을 조심스레 상고하는 가운데 외관상으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해야겠습니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 특별한 묘안이 없을 경우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쳐다보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무도 당면한 궁핍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려 하지 않는 자기 아들들에게 덧씌워진 무능력을 꾸중하고 있습니다.
2. 본문 3-5절은
"(3) 요셉의 형 십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 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입니다.
모세는 또한 그들이 자기 아버지 명령에 따라 그것도 베냐민을 동반치 않고 애굽에 내려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그들이 부모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막내 동생에 대해 질투심을 품지 않고 그냥 자기 처자식들을 남겨둔 채 주저 없이 긴 여행을 출발한 것입니다.
모세는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큰 인파 속에 끼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셉이 누리고 있는 명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건입니다.
요셉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 모든 애굽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면서 이웃 민족들에게까지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요셉 천하는 곧 하나님의 천하입니다.
3. 본문 6절은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입니다.
모세는 요셉이 누리는 명예를 그의 신실성 및 근면성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지상에서는 최상에 속하는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고용된 일군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 근면성을 다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본보기로 우리는 명예가 뛰어난 사람은 더욱 더 자기 일에 집착하는 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 명예와 안락을 같이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는 자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곡식이 요셉에 의해서 판매되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손수 자기 손으로 식량을 되거나 거기에 대한 돈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이 곡식 매매는 그 나라 방방곡곡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창고만 하더라도 혼자서만 다 처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창고가 총독 요셉의 권한 아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4. 본문 7-8절은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니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 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입니다.
여기서는 무슨 목적으로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위협과 공포로 괴롭혔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것이 자기가 어렸을 때에 그들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이라면 그는 복수심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나 복수욕에 집착해서 그런 의지에 강요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가지 정당한 이유에 이끌려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① 그는 자기 동생 베냐민을 다시 찾고 싶어했습니다.
② 그와 동시에 마치 그들을 고문하는 형식을 취하는 척하면서 그들 심중과 그들이 회개했는가 안 했는가를 떠본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 생활이 자기와 헤어진 이후로 어떠했는가를 확인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만약에 그가 처음부터 자기 신분을 밝혔더라면 그들은 자기들 부친이 안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범한 극악한 범죄를 위장하려고 또 새로운 범죄를 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베냐민에 대해서 잔인하고 배신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철저하게 키질해서 요셉이 자기 부친의 상태에 대해서 충분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상황에 따라서 자기 조치를 취하며 그들을 용서해 주기 전에 그들의 극악한 범죄에 대해서 곰곰이 뉘우치게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후에 가서 그는 인정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이것은 그의 화가 풀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고 모세가 다른 곳에서 덧붙이고 있듯이, 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내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는 이야기요,
그들에 대해서 처음부터 동일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취하게 한 것은 특별한 충동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지금까지 당한 무수한 재앙에 대한 장본인들을 자기 눈앞에 놓고도 화를 내거나 안색 하나 바꾸기는 커녕 도리어 마치 앞으로 취할 행동을 곰곰이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말과 태도에 있어서 계속 침착성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 은총의 빛 아래 섬광과 같은 자기 의지를 놓아두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거짓말을 해가며 시치미를 뗀 것은 비밀을 받아 마땅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만을 기뻐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사기와 거짓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에게 무슨 특별한 조치를 취하셔서 그가 일반적인 행동 법칙에서 어긋나되 잘못은 없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릅니다.
신실한 자들이 취한 신앙적인 행동 가운데는 합법적으로 선례가 될 수 없는 그러한 것도 들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거룩한 조상들의 행동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규정하는 법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명령에 입각해서 신실성을 개발해야 됩니다.
요셉이 사실과 다른 무엇을 위장했다는 점이 결코 우리에게 동일한 행동을 시도하도록 하는 변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권에 의해서 허용된 자유는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개인이 사사로운 본을 받아 제 멋대로 하나님의 법칙을 뒤엎으며 그 결과 거기에 금지된 행동을 방자하게 행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의 오만에 대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너무 초조하게 요셉을 변명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적인 약점에 이끌려 이런 일을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서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위장 그 자체로서는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는 그것이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하에서 요셉의 전인적인 의지가 새롭게 되고 관리되어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